가보로 간직되는 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날이 시퍼런 칼을 좋지 않게 여겨 방안에 칼을 두는 일은 생각도 못했고,
칼이나 무기를 문화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일본 사람들은 황실의 3대 신기를
필두로, 보기에도 오싹한 일본도나 창이 당당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웬만한 일본집
에는 큰 방의 윗목에 가보로 여기는 칼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어떤가. 일본에서는 어린이들도 잘 알고 있는 칼 잡는 법마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이순신 장군은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영웅이다. 그런데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장군의 동상은 오른손에 칼집을 쥐고 있지만, 그가 활약한 곳에서 가까운
목포시의 동상에는 날 있는 부분을 아래로 해서 들고 있다. 이 모양은 싸울 의사가 없음
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밖의 초등학교에 있는 동상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칼을 갖지도, 보지도 못했으며, 칼을 다루는 법을 실제로 볼 기회가 없었기 떄문이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식은 칼로 맛을 내는 초밥이나 생선회인데, 아무리 좋은 생선
이라도 칼이 잘 들지 않고 만드는 사람의 칼질 솜씨가 좋지 못하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칼의 문화를 가진 일본 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충신장>이라는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들어 보자. 1701년에 막부의 신년 축하식에 천황의 칙사가 참석하게 되었다.
그 때, 아사노라는 지방의 소 영주가 막부를 대표해 칙사를 대접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경험이 없었으므로 노련한 영주인 기라로부터 여러 가지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런 경우에
관례대로 뇌물을 미리 바쳐야 하는데, 고지식한 아사노는 아무런 선물도 보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기라의 미움을 사서 무식한 촌놈이라는 모역적인 핀잔을 공석에서 받자, 화가
난 아사노는 막부 장군의 성안에서 칼을 보이면 안 된다는 금기를 무시하고 칼을 뽑아 기라
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을 저질렀다. 그 때문에 그는 그 날로 막부의 법에 따라 할복을(배를
가르는 일)강요당하고 영토를 몰수당했다.
이 일로 주인을 잃은 그의 신하 중에서 47명이 영주의 원수를 온갖 고생을 다하며
복수의 기회를 엿보았다. 주모자인 오이시는 복수 계획을 숨기려고 날마다 기생집을 드나
들었다. 그의 동지들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다음해 12월 14일에 눈이 많이 내리는 한밤중에 원수의 집을 습격해서 엄중한
호위망을 뚫고 기라를 참살하고 그 목을 베어 주군의 무덤 앞에 바친다.
그 당시 여론은 이 사건을 의거러 치켜세워 그들이 지나는 곳마다 주민들이 너도 나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막부의 고위 관리들도 그들의 목숨을 살리기를 바랐으나, 그들은
국법에 따라 모두 할복하였다. 47명중 한 사람인 오이시의 아들 요시오가 겨우 열여섯
살이었던 사실이 사람들의 눈시울을 더욱 뜨겁게 하였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무모한 칼부림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은
이야기를, 일본 사람들은 아사노의 경솔한 점을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모욕을 당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사나이답고 아름다운 행동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충신장의 습격이 있던 12월 14일을 기려 기념 행사를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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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가보로 간직되는 칼
장수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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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2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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