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구차제정과 팔혜탈 - 중생의 마음 따라 세계는 연기하고
지난 시간에는 부처님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한 선정이 구차제정이었음을 얘기했습니다. 오늘은 구차제정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구차제정은 연기업이라는 진리를 발견하는 단계적인 성찰입니다. 이제 그 내용과 구조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 속에 중생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중생들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마음에서 세계가 연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중생들이 사는 세계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구차제정이라는 선정을 통해 중생들의 세계는 중생들의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중생들의 세계인 욕계. 색계. 무색계, 즉 삼계는 구차제정을 통해 드러난 중생 세계의 모습인 것입니다. 삼계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욕계에도 인간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가 있고 색계에도 네 가지 세계가 있으며, 무색계에도 네 가지 세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욕계와 네가지 색계, 그리고 네가지 무색계를 구중생거(九衆生居), 즉 ‘중생들이 사는 아홉 가지 거주처’라고 부릅니다. ‘구중생거’에 대해서는 장아함 <십상경(十上經)>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아홉 가지 깨달아야 할 법인가?
구중생거를 말한다.
어떤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若干種身)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생각(若干種想)을 하면서 살아간다.
천상의 중생과 인간이 그렇다.
이것이 첫째 중생거(衆生居)이다.
어떤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을 가지고 한 가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범광음천(梵光音天)이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그렇다.
이것이 둘째 중생거이다. 어떤 중생들은 동일한 몸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광음천(光音天)이 그렇다. 이것이 셋째 중생거이다.
어떤 중생들은 동일한 몸(一身)을 가지고
동일한 생각(一想)을 하면서 살아간다.
변정천(遍正天)이 그렇다. 이것이 넷째 중생거이다.
어떤 중생들은 생각도 없고,
느끼고 지각함이 없다. (無想 無所覺知), 무상천(無想天)이 그렇다.
이것이 다섯째 중생거이다.
어떤 중생들은 공처(空處)에 머물고 있다.
이것이 여섯째 중생거이다.
어떤 중생은 식처(識處)에 머물고 있다.
이것이 일곱째 중생거이다.
어떤 중생은 불용처(不用處, 無所有處)에 머물고 있다.
이것이 여덟째 중생거이다.
어떤 중생은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 非有想非無想處)에 머물고 있다.
이것이 아홉째 중생거이다.
이 경에서는 이렇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으로 아홉가지 중생의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구중생거는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중생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의 내용만으로는 구중생거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십이연기를 설명하는 중아함 <대인경(大因經)>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이것을 구중생거라고 하지 않고, 칠식주(七識住)와 이처(二處)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아난아, 칠식주와 이처가 있다.
어떤 것이 칠식주(七識住)인가? 육체(色)를 가진 중생들이
서로 다른 몸(若干身)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생각(若干想)을 하나니,
예를 들면 인간과 욕계의 천상중생(人及欲天)이 그렇다.
이것을 제일식주(第一識住)라고 부른다.
육체를 가진 중생들이 서로 다른 몸(若干身)을 가지고 같은 생각을 하나니,
예를 들면 처음 태어난 범천(梵天)이 그렇다.
이것을 제이식주(第二識住)라고 부른다.
육체를 가진 중생들이 서로 동일한 몸(一身)을 가지고
서로 다른 생각(若干想)을 하나니,
예를 들면 황욱천(晃昱天)이 그렇다.
이것을 제삼식주(第三識住)라고 부른다.
육체를 가진 중생들이 동일한 몸(一身)을 가지고 같은 생각(一想)을 하나니,
예를 들면 변청천(遍淨天)이 그렇다. 이것을 제사식주(第四識住)라고 부른다.
일체의 색상을 초월하여(度一切色想) 대상에 대한 생각이 소멸한,
서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무량공처(無量空處)에
도달한 무색(無色) 중생이 있다.
이 중생은 공처(空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의 중생을 말한다.
이것을 제오식주(第五識住)라고 부른다.
일체의 무량공처상(無量空處想)을 초월한
무량식처(無量識處)에 도달한 무색(無色) 중생이 있다.
이 중생은 식처(識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의 중생을 말한다.
이것을 제육식주(第六識住)라고 부른다.
일체의 무량식처상(無量識處想)을 초월한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도달한 무색(無色) 중생이 있다.
이 중생은 무소유처( 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의 중생을 말한다.
이것을 제칠식주(第七識住)라고 부른다.
아난아, 어떤 것을 이처(二處)가 있다고 하는가?
육체를 가진 중생이 생각도 없고(無想) 지각도 없나니(無覺),
무상천(無想天)의 중생을 말한다. 이것을 제일처(第一處)라고 부른다.
일체의 무소유처상(無所有處想)을 초월한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도달한 무색(無色) 중생이 있다.
이 중생은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닌다.
비유상비무상처천의 중생을 말한다.
이것을 제이처(第二處)라고 부른다.
아난아, 만약 어떤 비구가 저 식주(識住)와
처(處)를 알고, 멸(滅) . 미(味) . 환(患)을 알고,
출요(出要)를 진실되게 안다면 이 비구가 저 식주와 처를 즐기고,
계착(計着)하여 저 식주와 처에 머물겠느냐?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칠식주 이처와 구중생거를 비교해 보면 첫째 중생거는 제일식주(第一識住)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중생들의 세계를 의미하고, 둘째 중생거는 제이식주(第二識住)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중생들의 세계를 의미하고, 셋째 중생거는 제삼식주(第三識住)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중생들의 세계를 의미하고 넷째 중생거는 제사식주(第四識住)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중생들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섯째 중생거는 제일처(第一處)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중생들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다시 삼계(三界)와 비교하면 제일식주의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중생의 세계는 욕계이고, 제이식주에서 제일처까지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중생의 세계는 색계이며, 제오식주에서 제이처까지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중생의 세계는 무색계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세계인 삼계는 중생들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것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구중생거와 칠식주 이처입니다. 그렇다면 칠식주와 이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함경에서 구체적으로 칠식주의와 이처의 내용을 설명하는 경전은 없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교리들을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는 있습니다.
오온이 증장하는 데는 식주(識住)가 있어야 한다는 식의 증장설(增長說)을 다시 검토해 봅시다. 식의 증장을 살펴보면서 소개한 바 있는 ‘잡아함 39경’에서는 네 가지 식주(識住)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비구여, 저 다섯 가지 종자는 자양분을 갖고 있는 식(取陰俱識)을 비유한 것이고 흙은 사식주(四識住)를 비유한 것이고, 물은 희탐(喜貪)을 비유한 것이다. 식은 네 가지에 머물면서 그것에 반연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식은 색 가운데 머물면서 색을 반연하여 그것을 즐기면서 살아가며 커 간다. 식은 수 . 상 . 행 가운데 머물면서 수 . 상 . 행을 반연하여 그것을 즐기면서 살아가며 커 간다.
이 경에서는 네 가지 식주(識住)를 오온의 색 . 수 . 상 . 행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칠식주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이 경에서는 사식주(四識住)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칠식주와는 그 수가 다름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사식주는 칠식주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식주는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촉을 통해 십팔계가 존재로 느껴짐으로써 성립된 육계와 촉에서 발생한 수 . 상 . 사입니다. 그러니까 육계의 지 . 수 . 화 . 풍은 사식주의 색(色)이고 촉에서 발생한 수 . 상 . 사는 사식주의 수 . 상 . 행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사식주에 머물면서 증장하는 것이 육계의 식입니다.
중생들의 세계인 삼계는 이 식이 사식주 가운데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는 안 . 이 . 비 . 설 . 신 . 의라고 하는 육내입처를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이라고 하는 육외입처를 외부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입외처에 대하여 끊임없이 욕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식이 촉에 의해 존재로 느껴진 외부의 대상, 즉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에 욕탐을 가지고 머물고 있는 것이 제일주처(第一住處)입니다. 다시말해 사식주의 색 가운데 외부의 존재로 느끼고 있는 그 대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욕구를 일으키며 식이 증장하고 있는 세계가 욕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식주 가운데 색에 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가 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계는 외부의 대상에 대한 욕망은 사라졌지만 육내입처를 자신의 몸으로 생각하는 점에서는 욕계와 다름이 없습니다. 색계에서는 자신의 내부에서 생기는 느낌 가운데 즐거운 것을 즐기고 좋아하는 중생들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색계는 사식주의 수에 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계에 네 종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식이 수에 머무는 상태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무색계는 색에 대한 생각을 초월하여 공간에 대한 생각, 의식에 대한 생각, 무에 대한 생각, 비유비무(非有非無)에 대한 생각에 식이 머물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무색계는 사식주의 상에 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색계에 네 종류가 있는 것도 색계와 마찬가지로 식이 머물고 있는 상(想)의 종류에 의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칠식주는 사식주와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식주 가운데 행(行)은 칠식주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식이 식주에 욕탐을 가지고 머물면서 증장하는 것이 행이기 때문입니다.
즉 삼계는 모두 행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사식주 가운데는 없는 육계의 공(空)은 공처상(空處想)이라는 칠식주의 제오식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칠식주이처가 십이입처와 촉입처, 그리고 촉을 통해 성립한 육계와 촉에서 발생한 수 . 상 . 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중생 세계의 근본이 십이입처라는 부처님의 입장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며, 구차제정의 사유가 십이입처와 촉입처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구차제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잘 담아갑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