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시대 열고, 다시 학문 널리 배운다
졸업앨범에는 학교만 있지 않다. ‘인천’도 있다. 졸업기념 사진촬영 때 학교 주변 동네의 풍광이 종종 카메라에 잡혔다. 교외(校外)에서 잡은 포즈나 학교 밖의 행사를 담은 사진은 더없이 귀한 인천의 과거이다. 지역 내 고교 앨범을 통해 수집된 사진을 통해 인천의 6, 70년대를 반추해 본다.
그 아홉 번째로 박문여자고등학교의 앨범을 들춰 보았다.
글 유동현 본지 편집장 사진재촬영 홍승훈 자유사진가
박문여고는 60년간의 송림동 시절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지난해 3월 송도국제도시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 학교는 이삿짐을 여러 번 쌌다. 박문여고의 역사는 격동기의 인천, 더 나아가 한국의 파란만장했던 시절의 단면을 보여준다.
학교는 1940년 5월 ‘인천소화고등여학교’로 개교했다. 소화(昭和)는 일본의 연호다. 학교 이름에서 보듯 일본인들은 개교 과정부터 부당하게 개입했다. 일제는 학교 설립 인가를 순순히 내주지 않았다. 이사장과 교장을 일본인으로 하고 일본인 학생을 절반 비율로 할 것을 강요했다.
마침내 학교는 1940년 5월 송림동의 송림심상소학교(현 송림초교) 교실 두 칸을 빌려 120명(조선인·일본인 여학생 각 60명)을 모아 입학식을 치렀다. 이 학교의 개교는 16만 인천부민의 염원을 이룬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인천부(현 인천시)에는 여학교로는 인천공립고등여학교(현 인천여고)가 유일했다. 많은 여학생이 서울로 힘겹게 기차통학을 하거나 아예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소화고녀의 개교는 배움에 목말랐던 지역 여학생들에게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그 해 12월 부평에 있는 땅(후에 경찰학교)을 불하받아 건물을 지었다. 시내에서 떨어진 부평에 부지를 마련한 것은 일제의 강요 때문이었다. 인천육군조병창(부평조병창)에 근무하는 일본인 자녀들을 배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완공 때까지 부평동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공부했다. 패망 직전 일제는 황국신민화와 국가총동원 정책에 열을 올리며 학생들을 노동 현장으로 내몰았다. 오전에 수업을 끝내고 인근의 군수공장 ‘조병창’에서 일을 시켰다. 운동장은 밭으로 만들어 학년별로 나눠 고구마를 재배하게 했다.
학교는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1944년 3월 1회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했다. 첫 졸업생을 배출한 기쁨도 잠시, 1945년 일본 육군은 느닷없이 학교가 군 야전병원으로 적합하다며 강제로 빼앗아 폐교 위기에 놓였다. 학교 관계자들은 일본 군 간부들과 협상 끝에 항동에 있는 조선식량영단(후에 인천경찰국, 현 하버파크호텔)을 임차해 폐교 위기를 넘겼다. 광복 후에는 부평 교정으로 돌아왔으나 미군이 학교 본관 대부분을 차지해 일부 공간에서만 수업을 해야 했다.
학교는 천주교 측에 학교 인수를 제안했고 1945년 9월 천주교 서울교구가 학교 재단을 인수했다. 학교 이름도 지금의 박문여자중고교로 바뀌었다. ‘박문(博文)’은 논어 ‘박학어문(博學於文)’에서 따온 말로 ‘학문을 널리 배워 도에 이른다’는 뜻이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에 임시 교사를 짓고 피란학교를 운영하며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다. 9·28 수복 후 답동성당 내로 잠시 이사했으며 이후 1956년 송림동에 교사를 새로 지으면서 개교 이후 이어진 수차례의 ‘유랑’을 끝냈다.
2015년 박문여고는 대한민국 미래 발전의 토대가 될 송도국제도시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송도시대를 맞아 100년 비상을 꿈꾸며 가톨릭적인 덕성을 지닌 글로벌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각 학교 게재 월호
1월호 인천여상
2월호 동산고
3월호 인성여고
4월호 인천기계공고
5월호 중앙여상
6월호 인천대건고
7월호 인천해양과학고
8월호 재능고
18금 영화 ‘결사구혼대’ (60년도 앨범)
일제강점기 공회당으로 사용했던 터에 1957년 3월 1일 시립 시민관을 개관했다. 인천시가 직접 극장으로 운영했는데 크기로는 인천 제일이었다. 60년대 말 극장이 폐관되었고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정도로 한동안 건물 관리가 되지 않았다. 68년 인천시는 경매를 통해 시민관을 인성학교에 넘겼다. 학교는 실내체육관으로 사용하다가 2001년 다목적관으로 신축했다. 시민관에 ‘결사구혼대(決死求婚隊)’ 영화 간판이 내걸렸다. 분명 이 영화는 ‘청소년 불가’였을 것이다. 학생들은 간판 앞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발음 주의’ 이십세기 약방 (60년도 앨범)
요즘은 약사 없이 약을 파는 ‘약방’을 거의 볼 수 없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약방이 있었다. 금곡동에 있던 이십세기 약방은 50년대 말 개업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이 일부러 그 앞에서 사진을 찍을 만큼 당시에는 보기 드문 현대식 건물이었다. 현재도 옛 간판이 그대로 달린 건물이 남아 있다. 이 상호를 지은 약방 주인은 21세기 독자들이 이십세기 약방의 흔적을 이렇게 보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멸공’ 거리행진 (60년도 앨범)
‘상기하자 6·25’ 매년 6월이 되면 학생들은 현수막을 들고 반공 행진을 했다. 배다리 쪽에서 경동사거리 쪽으로 행진하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아마도 반공궐기대회 집결지는 답동로터리(사거리)였을 것이다. 뒤편으로 1954년 개업한 인천 최초의 백화점 ‘항도백화점’이 보인다. 당시로서는 드문 3층짜리 건물에서 진기한 양품들을 팔았지만 개점 1년여 만에 구매력 부진 등으로 문을 닫았다. 이 거리는 6,70년대 인천 최대의 번화가였다. 사진재료상회, 백은사 금은방 등이 보인다.
스릴 ‘만끽’ 놀이기구 (65년도 앨범)
개화기 응봉산(자유공원)에 존스톤 별장이 세워졌다. 6·25 전쟁 후 이 별장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어린이놀이터가 들어섰다. 간단한 놀이기구 몇 개와 시멘트로 만든 간이 골프장(퍼팅용 코스) 등을 갖췄다. 1982년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이 건립되면서 놀이터 시설은 사라진다. 이때 이곳에 있던 놀이기구는 수봉산 공원으로 그대로 옮겨 설치했다. 사진은 자유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탄 모습이다. 당시는 이 정도의 놀이기구에도 엄청난 스릴을 느꼈다.
제물포역에서 ‘찰칵’ (66년도 앨범)
옛 송림동 교정 시절, 경인선 통학생이 적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제물포역이었다. 1957년 역 개설 당시에는 이름이 숭의역이었으며 59년 제물포역으로 개명했다. 사진 속 철로는 복선이다. 1965년 경인선이 복선이 되었으니 그 이후에 찍은 사진이다. 비록 복선이었지만 기차 운행은 드물었기 때문에 겁 없이 철로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역 주변에 초가집이 많이 보인다. 증기기관차 앞에서 찍은 사진은 59년도 앨범에 있는 것이다.
‘요철요’로 변한 생활지도관 (64년도 앨범)
학교 뒷산 부처산 꼭대기에 한옥이 보인다. 학교가 들어서기 전 이미 있었는지 아니면 후에 건축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이 한옥을 63년부터 학생생활지도관(예절관)으로 활용했다. 앨범에 ‘우리 학교의 자랑’이라고 적혀 있을 만큼 외관이 아름다웠던 전통 한옥이었다. 90년대 초반 생활관이 폐쇄되고 건물은 해체돼 멀리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 복원되었다. 현재는 ‘요철요(凹凸凹)’라는 갤러리가 되어 남한산성의 명물 중 하나가 되었다.
나중에 꼭 들어갈고 말거야, 수정각 (66년도 앨범)
지금은 폐쇄된 송도유원지는 한때 수도권 최고의 위락시설이자 인천 각 학교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유원지 안에는 보트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커다란 인공 호수가 있었다. 호숫가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음식점, 수정각(水晶閣)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술도 팔고 가격이 비싸서 어른들만 이용했으며 학생들은 그저 그 앞에서 포즈만 취할 수 있을 뿐이었다.
1. 학교 안에 설치된 간이 ‘교내은행’. 저축 습관을 키우기 위해 학교마다 교내은행을 운영했다. 은행원 역할도 학생들이 담당했으며 개점 시간은 주로 점심시간이었다. 용돈에서 틈틈이 모은 ‘거금’은 졸업할 때 찾아갔다. (60년도)
2. 밀가루가 재료의 전부였을 가사 실습 시간. 가스레인지, 오븐 등을 갖춘 요즘과 달리 빈약한 주방기구로 조리 실습을 했다. 숯으로 불을 피운 화덕 앞에서 쭈그려 앉아 음식을 만들고 있는 모습은 이미 한 가정의 ‘어머니’ 그 자체다. (58년도)
3 .학생들이 개건너로 소풍을 갔다. 개건너는 지금의 서구 가좌동(서곶) 일대를 말한다. 개건너로 소풍을 갈 수 있었던 것은 1958년 인천교가 놓인 덕분이다. 인천교는 송림동과 가좌동 사이의 깊숙한 갯골을 잇는 다리다. (64년도)
4. 한때 뜨개질은 자식들의 옷 마련을 위해 주부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 기술은 수출역군으로 일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를 위해 학교에서는 기계 편물 교육을 하기도 했다. (63년도)
5. 교내 체육대회에서 빠지지 않는 인기 프로그램은 가장행렬이다. 빈약한 재료와 도구였지만 학생들은 세계 각국의 모든 옷을 척척 만들어 냈다. (65년도)
6, 6-1 교내 동아리 무용반원들. 지금의 편견으로는 발레리나가 될 수 없는 몸매이지만 그들은 아름다운 ‘백조’가 되어 각종 콩쿠르 대회에 참가해 무대를 누볐다. (66년도)
7 교내 ‘문학의 밤’에 초대된 김동리 선생과 문학소녀들. 당대 최고의 소설가와 함께하는 이 순간, 그들의 인생소설은 감격스럽게 시작되었으리라. (73년도)
박문의 딸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동인천에서 카퍼레이드하는 장면
금메달리스트 백옥자 선배를 환영하는 재학생들
박문여고는 전통적으로 육상에 강했다. 그 중심에 69년도에 졸업한 백옥자 선수가 있다. 1951년 십정동에서 6남매 중 외동딸로 출생한 백옥자는 덩치 값을 확실하게 했다. 박문여고 시절인 1968년부터 정식으로 포환을 던지기 시작해 그해 열린 경기도체육대회에 나가 14m02로 한국 신기록을 수립했다. 내친김에 같은 해 열린 전국체전에서 14m75으로 아시아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는 1970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건국 이후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 선수가 딴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4년 후 74년 테헤란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16m28,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했다. 그때부터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백옥자는 현재 대한육상경기연맹 여성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