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종이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고?
아니, 지금도 종이가 많은데 무슨 종이를 찾겠다는 걸까?
아,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신지(新紙)’를 찾아 떠난다는 것이리라.
이렇게 ‘나는 무슨 종이를 찾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고속도로에 접어든 버스 안에서 한국제지 부대표 김광권 님이 ‘보왕삼매론’을 설(設)하시더니 한국제지 소개를 하신다.
“한국제지는 중국 장가항에 큰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이 공장에서는 대나무에서 추출한 원료로 특수지를 생산할 계획입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옛날 대나무로 책을 만들던 죽간이 새로운 종이 죽지(竹紙)로 부활하는구나!’
수행의 고통을 이겨내고 득도하라는 의미에서 나무에 패인 상처를 이겨내고 자란 대나무로 만든다는 ‘죽비’의 정신도 ‘죽지’에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
죽비와 죽간과 죽지를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황악산 직지사에 도착했다. 점심 자리에서는 맛난 더덕구이를 안주삼아 김광권 님이 권해주는 송화주(松花酒)를 마시니 취흥이 돋는다. 종이에서도 기분 좋은 솔향이 우러나면 좋겠다. 송지(松紙)로 책을 만들면 읽는 이의 머리가 맑아지고, 잔을 만들면 마시는 이의 기분도 좋아지리라.
‘기분 좋은 향기를 담은 향기지(香氣紙)를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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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를 오르니 단풍은 붉게 물들었고 하늘은 푸른데 홀로 우뚝 솟은 석탑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연등은 바람에 흔들린다. 김광권 님이 법당 벽면에 그려진 ‘십우도(十牛圖)’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 소를 찾아 떠나고, 소 꼬리를 보고, 마침내 소를 찾고,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그러나 소는 버려야 하고... 소를 찾는 과정이나 종이를 찾는 과정이나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디지털 세상이든 혼탁한 세상이든 그 어디에서도 꿋꿋하게 생존할 수 있는 생명력이 끈질긴 ‘신지(神紙)’가 한국제지에서 탄생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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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산공장에 도착하니 한국제지 직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자세를 보면 그 집안의 가풍을 짐작할 수 있듯이 종이를 만드는 한국제지 직원들의 순수하고 청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공장 안에 들어서니 드넓은 공간을 꽉 채운 습기와 소음이 묘한 흥분을 안겨다준다. 인쇄소의 인쇄 냄새와는 또 다른 냄새다. 종이를 만드는 이들이 더욱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종이도 만들면 좋겠다. 지치고 나른할 때 기운을 돋워주고, 어렵고 힘들 때 위로가 되어주며, 웬만한 피부병도 단번에 낫게 해버리는 그런 종이.
‘부적보다 신통하고 비타민보다 영양가 높은 활력지(活力紙)를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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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을 둘러본 다음에 찾은 까만 밤바다 옆의 횟집에서 옆자리에는 한국제지 생산1팀장 윤동호 님이, 앞자리에는 ‘에어 나이프’ 방식으로 만드는 ‘아르떼’를 개발한 직원이 앉아 서로 술잔을 권한다. 그 옆자리에 있던 출제모 산행총무 김종욱 님이 오직 본인의 아버지 앞에서만 만든다는 신기한 주조법 ‘형광소주’를 선보인다. 소주병 용기의 라벨 용지를 모두 떼어내고 흔드니 술병에서 초록색 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일순간 탄성이 터진다.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형광지(螢光紙)를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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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새벽, 토함산에 올라 일출을 기다렸으나 해는 구름에 가렸고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석굴암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한국제지가 조성한 광활한 숲도 가을바람에 출렁거렸다. 종이에서도 시원한 바람이 일렁인다면 좋겠다. 바람의 종류가 많으니 소녀풍이나 소남풍을 담은 저풍지(低風紙)는 약간 흐리게 만들고, 태풍이나 광풍을 담은 고풍지(高風紙)는 표면을 거칠게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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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을 내려오는 버스에서 한국제지 팀장 김철호 님에게 과도한 주문을 해본다. 종이공장 견학을 할 때 종이를 테마로 한 다양한 체험도 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벼루, 먹, 붓, 활자(도활자, 목활자) 만드는 걸 구경하는 것도 좋겠다, 다양한 형태의 종이를 개발하면 좋겠다, 새로 개발하는 종이에는 다양한 기능을 추가했으면 좋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도 엊저녁 마신 술이 덜 깬 탓이리라.
식당에 도착해서 얼큰한 해장국으로 술기운을 말끔하게 걷어내고 불국사로 향했다. 세계문화유산답게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았다. 모두들 빛 고운 단풍을 사진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천왕문에 들어서면서부터 불국사를 모두 돌아보고 나올 때까지 김광권 님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진다.
“사찰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종을 몇 번 치는지 아십니까?”
“저 다리는 천상으로 이어진 다리입니다….”
종이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친절한 마음을 담으면 좋겠다.
‘진정성을 담은 진지(眞紙)도 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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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직지사에 들러 점심을 먹는데 앞자리의 사진작가님이 막걸리를 권한다. 막걸리에 취해 이번 여행을 돌아보니 자연에서 빚은 술과 음식에 입이 호사하고,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물든 만산홍엽(萬山紅葉)에 눈이 호강하고, 맑은 공기에 코도 행복하고, 좋은 벗들이 건네는 귀한 말을 들으니 귀도 기쁘고, 한국제지의 원지(原紙)와 복사지[밀크]도 만지니 손도 즐거우니 오감만족 가을 여행이었다. 종이를 찾아 떠나는 풍성한 가을 여행을 준비하고 진행하신 한국제지와 출제모 운영진에게 감사드린다.
출판은 종이에 기록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종이에 기록을 하면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이 쌓이면 지혜가 된다. 종이에 가치 있는 정보를 기록하는 출판PD로서 자연 속에서 얻은 원료로 한국제지 직원들의 땀방울이 더해져 만들어지는 소중한 종이가 한 장이라도 허비되지 않도록 우리 문화의 가치를 올바르게 기록하는 일에 더욱 정진해야겠다.
김경도 : 글로벌사이버대학교 문화콘텐츠학부 겸임교수, 춘명 대표
첫댓글 밀크복사지 5박스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증샷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