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3.3]
특집 의암성사 순도 100주기(3)
의암성사와 광화문
희암 성주현_상주선도사, 관의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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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프랑스와 조약으로 서학 공인
1880년대 이후 동학의 교세는
충청도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에서도 크게 일어났다.
교세가 성장함에 따라
동학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1886년 6월 조선과 프랑스는
이른바 조불통상수호조약의 체결로
그동안 동학과 같이 탄압을 받아왔던 서학은
포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1861년 이래 선교활동을 하던
프랑스 선교사의 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삼아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병인양요로 인해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 등
문화재들이 프랑스에 약탈당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과의 통상이 단절되었지만
1874년 대원군의 하야한 이후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럼에도 서학에 대한 포교는
여전히 공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도 조선과 조약을 맺기 위해 서둘렀다.
그렇지만 프랑스와의 수교는
곧바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는 프랑스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서학 즉
천주교 신교의 자유를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조선과 프랑스는 1866년 6월 4일
마침내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조불수호통상조약은
전문 13조와 부속통장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앞서 여러 나라와 맺은 조약과 마찬가지로
불평등조약이었다.
프랑스는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중국의 권력자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동원하였지만
조선 정부는 이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프랑스는
“조선에 있는 프랑스의 관인, 인민 등은
모두 조선 사람을 고용하여
서기, 통역 및 인부 등으로 삼아서
직분 내의 모든 사업과 작업을 돕게 할 수 있다”라는
제9조의 조문을 통해
선교의 자유가 있음을 적극 해석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사실상 서학의 선교가 인정되었다.
이처럼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서학은 교회를 세우고
신앙과 선교가 비교적 자유로워졌지만,
동학은 여전히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도
신교의 자유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1892년
공주와 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두 차례 교조신원운동에서 신교의 자유는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1893년 1월 광화문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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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정부를 상대로 교조신원운동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은
삼례 교조신원운동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1892년 12월 동학 탄압을 풀어달라 즉
신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글을 정부에 올렸다.
그렇지만 정부는 가타부타 없이 반려하였다.
동학 지도부는 직접 서울로 올라가
실력행사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청원군 송산리 손천민의 집에 봉소도소를 설치하였다.
손천민은 1893년 1월 중순
서둘러 청원할 소장을 마무리하였다.
1월 20일경 해월신사는
각포 접주들은 교인을 동원하여 정부를 상대로
대신사의 신원을 부르짖기 위한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경통을 각접으로 발송하였다.
그리고 ‘디데이’를 2월 10일로 정하였다.
이는 세자가 태어난 2월 8일을 기념하기 위해
경축 별시라는
과거시험을 치루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과거시험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서울로 진입할 수 있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 유생들이 속속 상경하였다.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할 동학교인들도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 차림으로 서울로 향하였다.
신원운동을 이끌어갈 선발대는
2월 1일 서울 남소동 최창한의 집에
도소 즉 지휘소를 설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선발대에는 서병학도 포함되었다.
동학 지도부는 신원운동에 앞서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다.
앞서 공주와 삼례에서 전개하였던 바와 같이
많은 교인들을 동원하지 않기로 하고
대표를 선정하여 광화문에서 하기로 하였다.
이는 많은 교인들이 모이게 되면
불상사가 일어나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표로 선정된 이들은
소두에 박광호, 제소에 손천민, 서소에 남홍원,
봉소에 박석규 임규호 손병희 김낙봉 권병덕
박원필 김석도 등이었다.
권병덕의 『이조전란사』에는
대표가 9명이라고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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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성사, 봉소로 교조신원운동에 참여
의암성사를 비롯하여 대표들은 2월 10일 저녁
도소에서 봉고식을 올리고 결연하게 의지를 다졌다.
다음날 2월 11일 대표들은
광화문으로 나아가 상소문을 제출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권병덕은
“대표 각기 손에는 염주를 들고 주문을 외우니
관람하는 사람이 사방으로 모여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격식을 갖추고 조용히 앉아
신원하는 모습을 본 관원들은 제지하지 않았고,
외국인도 구경하였다.
대표들은 추운 겨울이었지만
흔들림 없이 하루 종일 앉아서 시위하였다.
이와 같은 시위는 사흘 동안 이어졌다.
2월 13일 오후
집으로 돌아가면 소원을 베풀어주겠다는 답신이 왔다.
혹시나 모를 불상사로 인해 교인들이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여 대표를 선정하였지만,
대신사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신원운동에
각지의 교인들도 서울로 속속 모여들었다.
일본의 한 신문 보도에 의하면
‘4천여 명’이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동대문 밖 낙타산에 3백여 명,
남대문 밖 이문동에도 수백 명이 모여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정부로부터 답신을 들은 동학 지도부는
목표였던 신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결론은 신원운동을 더 이상 전개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는 유생들의 압력과
신원운동에 참여한 일부의 강경한 대응도 작용하였다.
선발대로 상경한 서병학은
반외세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서울 외국인 거리와 일본 상려관에는
방문(榜文)을 내걸렸는데,
“성경책을 불태우면 살 길이 있다”는 서학의 배척과
“서둘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는
배일의식의 내용이었다.
이 방문은 서병학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반외세는
이미 공주와 삼례 교조신운동에서부터
주장하였던 것의 연장이었다.
『도쿄아사히신문』에는
“천여 명의 총대인 30여 명이
3월 20일(음 2월 12일)에 상소문을 받들고
왕궁 문전에 끓어 앉은 채
마치 죽으려는 듯이 머리를 당에 늘어뜨리고
배례하고 있었다. (중략) 동학의 결사대는
1천여 명이라 하며 (중략) 상소에는
외국 종교인과 상인들을 추방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라는 조항도 들어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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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배척과 배일의 반외세 운동도 전개
서학을 배척하는 방인 내걸리자
영국과 미국은 서둘러 대응하였다.
영국은 순양함 세븐호를 인천에 머물게 하였으며,
미국은 군함 베도레루호를 출동시켰다.
일본도 군함 야에야마(八重山)호를 인천항을 보냈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과 반외세 운동으로
정부는 서둘러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구두로
집으로 돌아가면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감언이설을 한 것이다.
의암성사 등 동학 지도부는
교인들을 체포하려는 수상한 기미를 사전에 탐지하고
모든 교인들은 2월 14일에 한강을 건너
서울을 빠져나갈 것을 권유하였다.
유생의 압력을 받은 정부는 동학교인들이 해산하자
소두 박광호 등을 체포하라고
법사와 각 지방관에 지시하였다.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은
당초의 목적인 교조신원과
신교의 자유를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조직적 동원력과 동학 지도부의 구성,
그리고 국내외 정세의
인식 등을 발전적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서세동점의 현실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다는 점은 이듬해
동학농민혁명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신사의 ‘보국인민’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민족의식을 형성하는데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이어 보은 장내리에서 전개된
척왜양창의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은
의암성사로서는 새로운 모험이었다.
그동안 주문 3만 독의
종교적 활동에만 매진하였던 의암성사는
동학 지도부의 일원으로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의암성사는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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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교조신원운동은 시위문화의 원조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으로,
‘임금의 큰 덕이
온 나라에 비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395년 건립되었으며 2층 누각으로
양쪽 끝에 한 쌍의 해치 조각상이 있다.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 문이 있다.
이를 홍예문(虹霓門)이라고 한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두 개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는 문이다.
이 중 왼쪽 문은 무신, 오른쪽은 문신이 드나들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조선 시대 왕궁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또한 임금이나 관료들이 출입하였던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광화문은 일반 백성이나 민중에게는
상당한 위압적인 장소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광화문 밖에는 임금이 환궁할 때
문무백관이 시립(侍立)하거나
유생들을 모아 선유(宣諭)하였하였으며,
무과 시험을 았다는 등의 기록이 종종 나온다.
이외에도 유생들이 임금이 승하하면 광화문 밖에서
곡림(哭臨)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대규모의 백성이나
민중이 시위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점에서
동학교단에서 전개한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은
기층민이라 할 수 있는
민중이 최초로 전개한 시위가 아닌가 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에
동학교인 4천여 명이 모였다는 기록을 볼 때,
오늘날 광화문 광장의 시위문화를 형성하는데
서장을 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평화적 시위라는 점에서
상징성도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광화문 광장은 시위문화의 상징이었다.
대표적인 시위는 2016년 전개된 촛불시위였다.
이 촛불시위도 동학교인들이 전개한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을 연원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