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1대 1500만원… 특수층의 사치품…
기관장 방에만 틀어 직원들은 땀 뻘뻘
1970년 7월 26일 남산 중턱에 개관한 '어린이회관'이 뜻밖의 사태로 3일 만에 휴관에 들어갔다. 매일 3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 전시물 수십 점이 파손되는 바람에 정상 운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관객이 폭증한 건 첫 어린이 복지 시설에 쏠린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원인은 또 있었다. 당시 속속 보급되고 있던 첨단 시설인 에어컨을 회관에 잘 갖춘 게 문제였다. 삼복더위 속 서늘한 냉풍을 맛본 사람들이 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용 인원은 3000명인데 1만8000명이 실내에 북적댔다. 도시락까지 싸와 종일 죽치고 있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1978년 삼복더위 속 전국 최고기온을 기록하던 대구에서 에어컨을 설치한 택시가 처음 등장하자 조선일보는 4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다. 당시 자동차 에어컨이란 이만저만한 사치가 아니었다.(1978년 7월 18일 자)
반세기 전 첫 등장 때의 에어컨이란 주로 특별한 공공건물마다 설치된 '꿈의 시설'이었다. 가정용은 대당 가격이 오늘의 화폐 가치로 약 1500만원이나 됐다. 1971년 전국에서 전기를 쓰는 200만 가정에 설치된 에어컨은 1만7600대뿐이었다. 그야말로 상위 1%도 되지 않는 부유층의 사치품이었다. 자동차 에어컨은 호사 중의 호사였다. 1978년 여름 전국 최고기온을 기록하던 대구에서 '냉방완비' 표지판을 붙인 '에어콘 택시'가 최초로 등장하자 조선일보는 4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다.
1960~1970년대엔 공공건물 중에서도 '힘 있는' 곳부터 에어컨이 돌아갔다. 국립극장이 에어컨이 없어 연중 100일을 휴관하고, 김포공항도 에어컨을 안 틀어 외국 손님들 항의가 빗발쳤지만 정부 주요기관은 '빵빵하게' 틀어댔다.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엔 1969년 대형 에어컨이 설치됐다. 냉풍 출구 중 하나가 총리석 바로 위 천장에 큼지막하게 뚫려 있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1969년 7월 대정부질문 답변을 위해 국회에 매일 출석하던 정일권 총리는 고성능 에어컨의 직사풍을 온종일 머리 꼭대기에 맞다가 1주일 만에 끝내 감기가 들었다.
찬바람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 정 총리가 총리석을 떠나 이곳저곳 전전하는 바람에 질문을 하려던 야당의원이 한참 두리번거리며 총리를 찾는 진풍경도 빚어졌다.(조선일보 1969년 7월 10일 자)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엔 1971년 에어컨이 설치됐다. 얼마나 세게 틀었는지 직원들이 추워서 스웨터를 걸쳐 입었다. 1977년 여름 30도가 넘는 한증막 더위가 이어질 때도 정부종합청사는 공무원들의 집무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며 에어컨을 펑펑 틀어 실온을 20도로 낮춰 유지했다.
권위주의 시절엔 냉기의 분배도 비민주적이었다. 1977년 서울시교육청에서 에어컨이 돌아간 방은 교육감실과 부교육감실뿐이었다. 다른 방은 선풍기만 돌리게 했다. 오늘 같으면 직원들의 집단 반발이 일어나고도 남을 상황이지만 그땐 달랐다. 직원들은 '우리에게도 찬바람을 달라'고 외치는 대신 '교육감님 방에 결재받으러 가 있는 동안 땀 식히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올해 기록적 폭염 속에 가정집 에어컨 전기료 누진제가 도마에 올라 민심이 들끓었다. 에어컨 냉풍을 돈 많은 순으로 쏘이던 시절의 누진제와 '냉풍 대중화 시대' 사이의 불화가 근본적 문제다. 개선안을 긴급 논의하던 지난 11일의 새누리당 대표회의실 에어컨의 적정 온도가 18도로 맞춰져 있어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정치인들 의식도 에어컨을 마구 틀어 20도 이하로 냉방 하던 그 옛날 '높으신 분'들 수준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