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27강
빳조따숫땅
Pajjotasuttaṃ
광채 경(S1:26)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하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까띠 로까스밍 빳조따 예히 로꼬 빠까사띠,
Kati lokasmiṃ pajjotā yehi loko pakāsati,
바가완땅 뿟투마감마
Bhagavantaṃ puṭṭhumāgamma
까탕 자네무 땅 마얀띠.
kathaṃ jānemu taṃ mayanti.
2.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빛이 있어
그것으로 세상은 빛이 납니까?
저희가 이것을 어떻게 알아야 할지
저희는 존자께 여쭈러 왔습니다.
바가와(Bhagavā)
세존
3. 짯따로 로께 빳조따 빤짜멧타 나 윗자띠,
Cattāro loke pajjotā pañcamettha na vijjati,
디와 따빠띠 아딧쪼 랏띠마바띠 짠디마.
Divā tapati ādicco rattimābhāti candimā.
아타 악기 디와랏띵 땃타 땃타 빠까사띠
Atha aggi divārattiṃ tattha tattha pakāsati,
삼붓도 따빠땅 셋토 에사 아바 아눗따라띠.
Sambuddho tapataṃ seṭṭho esā ābhā anuttarāti.
3. 세상에는 네 가지 빛이 있는데
다섯 번째 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낮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고
밤에는 달이 비춘다.
타오르는 불은 밤낮없이 두루 비추고
완전하게 깨달은 자는
빛나는 것 가운데 으뜸이라
이 광명은 위없이 밝은 것이다.
이상이 빛 경의 내용입니다.
상윳따 니까야를 잘 공부하시면 어려움이 있을 때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습니다.
빳조따(pajjota)는 빛, 광채, 광명, 등불이라는 뜻입니다. 까띠(Kati)는 얼마나, 입니다. 로까스밍(lokasmiṃ)은 세상에, 입니다. 빠까사띠(pakāsati)는 빛나다, 입니다. 빨리어로 질문을 할 때 ‘(어디로)갑니까?’, ’(얼마나)갑니까?’ 등으로 물어 보려면 앞에 ‘까띠(Kati)’를 씁니다.
천신이 부처님께 와서 질문 하나를 합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빛이 있어 그것으로 세상은 빛이 납니까?’ 이것을 물어보기 위해서 부처님 가까이 왔습니다. 천신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 같이 왔는데 대표로 물어보고 있습니다.
까탕(kathaṃ)은 어떻게, 입니다. 자네무(jānemu)는 알아야 합니까, 입니다. 마야(maya)는 저희는, 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것을 어떻게 알아야 할지 저희는 존자께 여쭈러 왔습니다.’입니다. 뿟투마감마(puṭṭhumāgamma)는 물어보기 위해서 왔다는 말입니다.
천신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천신들은 인간들을 천상에서 보고 있으니 어떻게 사는지 다 보고 있으면서 부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궁금한 점이 있어서 찾아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는 네 가지 빛이 있는데 다섯 번째 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짯따로(Cattāro)는 네 가지이고, 로께(loke)는 세상에는 입니다. 빳조따(pajjotā)는 빛이고, 빤짜멧타(pañcamettha)는 다섯 번째이고, 나 윗자띠(na vijjati)는 보이지 않는다, 입니다.
다음에 ‘낮에는 태양이 빛나고 있고 밤에는 달이 비춘다.’에서 디와(Divā)는 낮에는, 입니다. 따빠띠 아딧쪼(tapati ādicco)는 태양이 빛나고, 입니다. 랏띠마바띠 짠디마(rattimābhāti candimā)는 밤에는 달이 비춘다, 입니다.
다음에 ‘타오르는 불은 밤낮없이 두루 비추고 완전하게 깨달은 자는 빛나는 것 가운데 으뜸이라, 이 광명은 위없이 밝은 것이다.’에서 악기(Aggi)는 불이고, 땃타 땃타(tattha tattha)는 그것 그것입니다. 빠까사띠(pakāsati)는 빛나다, 입니다. 옛날에는 전기가 없어서 불이 있으면 빛이 납니다. 삼붓도(Sambuddho)는 깨달은 자이지만 여기서는 아라한이 아니고 부처님을 말합니다. 아바(Ābhā)는 부처님의 광명입니다. 이 빛이 빛 중에서 최고의 빛입니다. 셋토(seṭṭho)는 최고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최고다.’라고 할 때 부처님이 최고가 아니고 부처님의 빛이 최고입니다. 태양도 중요하지만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괴로움뿐인 윤회를 끝내는 것처럼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로께(loke)는 세상을 뜻하지만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三界)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은 내가 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아만을 가진 말처럼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오해입니다.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셔서 자아를 가진 분이 아니고 무아를 아시는 분입니다.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고 내가 아니라고 아시는 분이 오직 내가 최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존재의 성품을 알아서 생긴 빛이 윤회를 끝내게 하는 가장 위대한 빛입니다. 어둠은 무명이고 무지며 어리석음입니다. 하지만 빛은 광명이고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의 빛처럼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라는 것은 지혜를 가진 것이 최고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괴로움인데 이 괴로움은 오직 지혜의 빛으로 소멸될 수 있습니다.
아눗따라(Anuttara)는 위없는, 입니다. 그래서 모른 것이 없다는 뜻에서 존경스럽다는 말입니다. 아눗따라(Anuttara)는 최고의 사람이라는 셋토(seṭṭho)와 비슷하고 아눗따라(Anuttara)는 삼마삼붓다(Sammā sambuddha)라는 정등각과 연결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게송에 있는 ‘이 광명’이라는 에사 아바(esā ābhā)는 부처님의 광명(Buddh-ābhā)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혜(ṅāṇa)의 광명이건, 희열(pīti)의 광명이건, 청정한 믿음(pasāda)의 광명이건, 설법(dhamma-kathā)의 광명이건, 이 모든 광명은 부처님들이 출현(pātubhāva) 하심으로써 생겼기 때문입니다.
태양과 달은 항상 있을 수 있지만 부처님의 광명은 부처님이 출현했을 때만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학자가 최고인데 또 더 높은 학자가 나오면 그 사람은 두 번째 학자가 됩니다. 태양과 달빛보다 부처님의 광명이 빛이 나기 때문입니다.
사라숫땅
Sarāsuttaṁ
흐름 경(S1:27)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하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꾸또 사라 니왓딴띠 깟타 왓땅 나 왓따띠,
Kuto sarā nivattanti kattha vaṭṭaṃ na vattati,
깟타 나만짜 루빤짜 아세상 우빠룻자띠띠
Kattha nāmañca rūpañca asesaṃ uparujjhatīti.
2. 흐름은 어디에서 사라지고
회전은 어디에서 멈추며
정신과 물질 또한 어디에서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바가와(Bhagava)
세존
3. 얏타 아뽀 짜 빠타위 떼도 와요 나 가다띠,
Yattha āpo ca pathavī tejo vāyo na gādhati,
아또 사라 니왓딴띠 엣타 왓땅 나 왓따띠,
Ato sarā nivattanti ettha vaṭṭaṃ na vattati,
엣타 나만짜 루빤짜 아세상 우빠룻자띠띠.
Ettha nāmañca rūpañca asesaṃ uparujjhatīti.
3. 물과 땅, 불과 바람이 굳건하게 확립 못하면
거기에서 흐름은 사라지고
거기에서 회전이 멈추며
거기에서 정신과 물질 남김없이 소멸한다.
이상이 흐름 경의 내용입니다.
천신의 질문 첫 문장은 ‘흐름은 어디에서 사라집니까?’에서 흐름은 윤회를 말합니다. 다음에 ‘회전은 어디에서 멈춥니까?’에서 회전은 윤회를 말하지만 연기가 원인과 결과로 돌고 있는 연기의 회전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신과 물질을 어디에서 남김없이 소멸합니까?’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사는데 어떻게 몸과 마음이 소멸하는 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다음에 부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윤회의 흐름은 지수화풍 4대를 굳건하게 하지 않고 4대가 소멸할 때 흐름도 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연기의 회전은 4대의 흐름이 굳건하지 못해서 소멸할 때 거기에서 연기의 회전도 멈춘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두 가지의 결과로 정신과 물질도 남김없이 소멸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에는 몸의 지수화풍 4대를 알아차려서 이것들의 흐름을 약화시키면 윤회가 끝나고, 이것과 함께 회전하는 연기도 이것과 함께 멈추며, 결국 정신과 물질도 이런 결과를 통해서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소멸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남김없이 소멸한 아라한의 열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윤회가 끝나고 연기의 회전이 멈추는 과정에 몸의 4대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윤회하고 연기가 회전하는 12연기의 열두 가지 요소는 정신과 물질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 흐르는 과정이 바로 윤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몸의 4대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몸의 4대가 소멸할 때 정신과 물질이 함께 소멸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몸의 4대에 대한 토대가 소멸하는 과정에 마음에서 성숙되는 지혜를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질문을 한 천신의 수준에 맞추어서 하신 법문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경우에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물질 하나를 알기에도 벅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어느 경우에 상대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는 정신을 설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욕락을 말씀하실 때 다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욕망인 오욕락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수행자에게는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기관에 정신적 감각기관을 포함해서 여섯 가지 욕망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여기서 윤회가 끝나고 연기의 회전이 멈추는 직접적인 과정을 몸의 4대로 말씀하셨지만 이때 마음에서도 단계적 과정의 지혜가 성숙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의 16단계의 지혜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천신이 부처님께 3 가지를 질문합니다.
첫째, 흐름은 어디에서 사라집니까?
둘째, 회전은 어디에서 멈춥니까?
셋째, 정신과 물질은 어디에서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사라(Sarā)는 갈대, 화살, 움직임, 흐름, 호수를 뜻합니다. 상사라 사라(saṁsāra sarā)를 윤회의 흐름이라고 하는데 사라(sarā)는 이때의 흐름입니다. 물이 많은 곳, 호수, 바다를 사가라(sāgara)라고 합니다. 사가라(sāgara)도 흐름을 말합니다. 바다는 계속 파도치고 출렁거리고 흐르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다같이 계속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윤회의 바다에서 흘러가는데 어디에서 멈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왓따(vaṭṭa)는 회전, 순환, 윤회, 굴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왓따(vaṭṭa)는 돌림, 회전이라는 뜻으로 윤회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순환, 회전, 굴레가 연기가 회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가 회전하면서 윤회를 합니다. 천신은 이 윤회의 흐름은 어디에 이르러 어떤 원인으로 사라지고 자취를 감추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나마 루빠(nama rupa)는 정신과 물질인데 그 당시 인도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일반 사람들에게는 오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천신들에게 말할 때는 정신과 물질인 나마 루빠(nama rupa)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씹어서 먹고 신들은 씹어 먹지 않고 향으로 삽니다. 그래서 배설기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신들은 오래오래 망가지지 않는 몸을 가지고 삽니다. 먹으면 소화를 해야 하고 먹을 때 몸에 해로운 나쁜 것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먹어서 살지만 사실 먹는 것 때문에 병들어서 죽기도 합니다.
천신이 부처님을 만나러 온 것은 이들이 윤회를 알고 있고,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루빠(rupa)는 물질인 색(色)입니다. 나마(nama)는 정신인 수, 상, 행, 식입니다. 천신들은 물질인 색(色)에 대한 감각적 욕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색계. 무색계는 감각적 욕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신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오온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오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신들은 우리처럼 육체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다띠(gādhati)는 굳건히 하다, 기반을 갖다, 발판을 마련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음 일을 하도록 토대를 튼튼하게 마련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나 가다띠(Na gādhati)는 굳건하게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몸에 있는 지수화풍 4대 요소가 굳건해지면 윤회의 흐름을 멈추지 못합니다. 바로 이 힘이 윤회를 하도록 합니다. 4대 요소인 지수화풍이 굳건해지지 않으면 윤회의 흐름이 멈춥니다. 이는 다시 태어나서 몸을 만들지 않아서 받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몸의 요소인 4대가 기능을 하지 못하면 윤회하는 동력이 상실됩니다. 그러면 윤회의 흐름이 멈춥니다. 천신들이 질문하는 것은 윤회의 흐름을 멈추는 것은 4대를 굳건하게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비도 우리가 윤회를 말할 때 얘기하고 강과 바다도 윤회를 말할 때 씁니다.
몸에 있는 지수화풍은 몸이 가지고 있는 구성요소입니다. 이러한 구성요소가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활발해지면 윤회의 흐름에 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몸의 구성요소가 수행을 통해서 소멸하면 다시 태어나는 기반이 확립되지 않아서 윤회가 끝납니다. 그래서 굳건하다는 것은 윤회의 기반이 확고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굳건하지 못할 때는 윤회의 기반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음이 무엇인가? 바로 4대의 변화다.’라고 하셨습니다. 지대가 부드럽다가 단단해지면 죽습니다. 수대가 활발하다가 증발하거나 멈추면 죽습니다. 화대가 뜨겁다가 차가워지면 죽습니다. 풍대가 활발하게 움직여서 호흡을 하다가 멈추면 죽습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이 4대의 변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세상 우빠룻자띠(asesaṃ uparujjhatī)는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냥 ‘소멸합니까?’라고 물어본 것이 아니고 ‘남김없이 소멸합니까’ 라고 물어본 것이 중요합니다. 선정수행을 하면 일시적 소멸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탐진치를 남기고 소멸한 것입니다. 소멸은 세 가지가 있는데 순간적인 소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시적인 소멸이 있습니다. 다음에 완전한 소멸이 있습니다. 선정은 일시적인 소멸이지만 위빠사나 수행으로 통찰지를 얻으면 탐진치라는 번뇌가 완전하게 소멸해서 윤회의 흐름이 끊어집니다.
세사(sesa)는 ‘남아있는, 남겨진’의 뜻입니다. 아세사(asesa)는 세사(sesa) 앞에 아(a)가 붙어서 ‘남김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우빠루자띠(Uparujjhatī)는 사라진다는 뜻인데 소멸한다는 뜻의 니룬다띠(nirundhati)와 비슷합니다. 이것이 사라지는데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소멸을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화난 것은 화가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기 때문에 화가 나도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일어난 화는 순간적으로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성냄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또 화가 납니다. 이러한 순환이 순간적이 소멸이고 이러한 순간적 소멸은 순간적 윤회입니다. 윤회는 순간의 윤회가 있고 한생의 윤회가 있습니다. 순간의 윤회가 거듭되다가 나중에 한생의 윤회가 됩니다.
이처럼 매 순간 하는 순간적 윤회가 평생을 거듭하다가 마지막에 새로운 일생의 윤회를 시작합니다. 이때 마음에 남겨진 잠재의식이 다음 생을 결정하고 새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긴다는 것은 잠재의식을 남기는 것이고, 고정관념을 남기는 것이고, 탐진치를 남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범부는 이런 탐진치를 기억해서 계속해서 가지고 갑니다. 모두 완전하게 불태우지 못해서 이렇게 남겨진 것이 생명을 지속시킵니다.
4대 요소도 부처님이 처음 얘기한 것이 아니고 그때 당시 인도에서 있었던 이론입니다. 누구나 다음 생에 어디에서 태어나지 하는 궁금합니다. 힌두교에서는 윤회를 믿고 있었습니다. 천신들도 윤회를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만 사는 것이 아니고 과거 부처님 시대에서도 살았을 수 있고 힌두교 신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힌두교의 윤회는 자아가 윤회하고 불교의 윤회는 원인과 결과가 윤회합니다. 이것이 자아와 무아의 차이입니다.
무상게 스님들이 무상게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시면 발인할 때 많이 합니다.
아닛짜 와따 상카라(Aniccā vata saṅkhārā)는 모든 만들어진 것은 무상하다.
웃빠더 와야 담미노(Uppāda vaya dhamminō)는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웃빳지뜨와 니룻잔띠(Uuppajjitvā nirujjhanti)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법이다.
바로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다시 일어납니다. 남겨서 사라졌기 때문에 다시 일어납니다. 천신이 알고 싶은 것은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열반입니다.
4대를 굳게 확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몸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몸이 없으면 마음이 머물 곳이 없습니다. 몸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5온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5온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아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계정혜가 바로 이러한 과정으로 인도합니다. 알아차림으로 집중이 되면 지혜가 나서 열반에 이르면 몸과 마음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열반을 거듭하면 나중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에 이릅니다. 이때 몸과 마음이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천신들은 우리 일반 사람이나 욕계 천신이 아니고 색계 천신이라서 본인도 4대로 만들어진 것이 있기는 있습니다. 욕계 세계에서는 몸이 아주 중요합니다. 허리가 아프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아무리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법문을 하시다가 허리가 아파서 더 이상 법문을 못하겠다고 하시면서 사리불 존자에게 부탁하고 나가셨습니다. 몸의 역할이 마음에 영향을 크게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반복적적으로 가르치는 부처님의 교육법은 아주 중요합니다. 옛날 인도 전통에서는 게송으로 토론하는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도 토론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스님들 모셔 놓고 게송으로 토론합니다. 어떤 문제의 예를 들면, 코로나에 대한 토론을 합니다. 한국에서 판소리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쪽에서 질문하면 저쪽에서 답하는 형식입니다. 여기서는 천신이 질문하고 부처님이 답변하는 것입니다. 천신은 열반은 무엇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열반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모르니 사대가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그 사람의 생각대로 대답을 해 줍니다.
부처님의 답변을 보면 “몸은 지, 수, 화, 풍 4대로 구성되어 있다. 아라한도 땅의 요소와 물의 요소와 불의 요소와 바람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아라한은 4대를 굳건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대를 굳건하게 확립하지 않으면 거기서는 흐름은 자취를 감추고 회전은 멈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열반을 말합니다. 열반은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마핫다나숫땅
Mahaddhanasuttaṃ
큰 재산 경(S1: 28)
1. 에까만땅 티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하시.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앞에서 이 게송으로 여쭈었다.
2. 마핫다나 마하보가 랏타완또삐 캇띠야,
Mahaddhanā mahābhogā raṭṭhavantopi khattiyā,
아나만야비깃잔띠 까메수 아나랑까따.
Aññamaññābhigijjhanti kāmesu analaṅkatā.
떼수 웃숙까자떼수 바와소따누사리수,
Tesu ussukkajātesu bhavasotānusārisu,
께다 땅항 빠자힝수 께 로까스밍 아눗수까띠.
Kedha taṇhaṃ pajahiṃsu ke lokasmiṃ anussukāti.
2. 큰 재산 가졌고 큰 재물 가졌으며
왕국 가진 왕족들조차도
서로가 서로를 탐하니
감각적 욕망에 만족할 줄 모릅니다.
존재의 흐름 속에 휩쓸려 가는
탐욕스런 자 가운데에서
누가 탐욕을 버렸습니까?
탐욕스럽지 않은 자가 누구입니까?
바가와(Bhagava)
세존
3. 히뜨와 아가랑 빱바지따 히뜨와 뿟땅 빠숭 위양,
Hitvā agāraṃ pabbajitā hitvā puttaṃ pasuṃ viyaṃ,
히뜨와 라간짜 도산짜 아윗잔짜 위라지야,
Hitvā rāgañca dosañca avijjañca virājiya,
키나사와 아라한또 떼 로까스밍 아눗수까띠.
Khīṇāsavā arahanto te lokasmiṃ anussukāti.
3. 집과 함께 사랑스런 아들도 버리고
가축도 버린 뒤에 집 없이 출가하여
탐욕과 성냄을 버리고 무명까지 빛이 바랜
번뇌가 다한 아라한들이 있으니
그들이 세상에서 탐욕스럽지 않다.
이상이 큰 재산 경의 내용입니다.
천신이 2가지를 질문합니다.
첫째, 욕망을 버릴 수 있을까요?
둘째, 누가 이 세상에 탐욕스럽지 않은 자인가요?
천신들이 세상을 너무 많이 관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핫다나(mahaddana)는 큰 보석 같은 재산입니다. 옛날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래서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 많았습니다. 어떤 것을 가져다 줘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보석도 그때는 돈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돈을 주면 팔지만 옛날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마하보가(mahābhogā)는 가지고 있는 땅, 소, 말, 코끼리 등의 재산을 말합니다.
캇띠야(Khattiyā)는 귀족, 왕족, 전사, 전사계급인 크샤뜨리야를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이 왕족이며 무사계급 출신입니다. 이들 계급은 더 큰 나라를 갖는 것이 목적입니다. 돈도 있고 재물도 다 가지고 있는데 서로서로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내고 남의 것을 탐내면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욕망의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때의 감각적 욕망은 오온을 집착하는 마음이고 이러한 욕망은 아무리 얻어도 만족하지 못해서 끝이 없습니다. 욕망은 얻을수록 더 불타고 아무리 얻어도 만족할 줄 몰라 반드시 집착으로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집착으로 발전하고 이 집착이 업을 생성하여 미래의 태어남이라는 윤회가 계속됩니다. 이 시작은 느낌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집착으로 집착에서 업의 생성으로 업의 생성에서 미래의 태어남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연기의 회전이고 윤회입니다.
여기서 안냐만냐(Aññamaññā)는 서로서로이고, 아날랑까따(analaṅkatā)는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중요한 말은 ‘존재의 흐름 속에 휩쓸려 가는(Tesu ussukkajātesu, bhavasotānusārisu)’ 즉 윤회(vaṭṭa-sota)를 쫓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웃숙까(Ussukka)는 열심인, 열중하는, 노력하는, 이지만 탐욕스럽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더 갖기 위해 탐욕부리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로는 ‘성심을 다해(ussukkaṁ)’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아눗숙카(anussukā)는 탐욕스럽지 않는 자인데 이는 자유인이라는 뜻으로 아와와따(avāvaṭā)입니다. 인간이 탐욕을 가지고 있는 한 자유로울 수 없고 탐욕이 없을 때 비로소 자유인으로 삽니다. 바와소따누사리수(bhavasotānusārisu)에서 바와(bhava)는 생성, 윤회를 말하는데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에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소따(sota)는 흐름이고, 아누사리수(anusārisu)는 휩쓸려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흐름 속으로 휩쓸려 가는’입니다.
께다 땅항 빠자힝수(Kedha taṇhaṃ pajahiṃsu)는 ‘누가 욕망을 버릴 것이냐?’입니다. 모두가 있는 것을 더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안 가지려고 노력하느냐, 서로가 가지려고 노력하는데 누가 안 가지려고 노력하겠는가? 모두들 권력을 잡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이 안 가지려고 노력하는가?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다음은 담마빨라(Dharmapala) 스님 이야기입니다. 가라(gāra)는 산스크리어의 그루하(gruha)로 집을 말하는데 그냥 집이 아니고 아내와 아들이 들어가 사는 집입니다. 즉 결혼한 사람을 말합니다. 불교에 아나가리까(Anagārika)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혼을 하지 않고 8계를 받고 수행하면서 사는 불자들을 말합니다. 스리랑카에 담마빨라(Dharmapala)라는 아나가리까(Anagārika)가 있었습니다. 원래 이 분은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아버지는 영국의 높은 간부였고 어머니는 불자였는데 보름날마다 아들을 절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큰 스님을 만납니다. 그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영국식민지 시대에 있었던 파나두라(Panadura) 대논쟁(1873. 8. 26~28)을 한 훌륭한 스님입니다.
이 논쟁은 파나두라(Panadura)라는 스리랑카의 마을에서 불교도와 기독교인 사이에 교리 논쟁이 행해져 불교가 승리하면서 스리랑카에서 불교활동이 보장된 유명한 논쟁입니다. 담마빨라(Dharmapala)는 어느 날 아버지랑 인도를 갔는데 보드가야 대탑 안에 있는 마하보디 사원을 참배하기 위해 들어가려고 했는데 힌두교 사람들이 힌두교 성지라고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때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때 나이가 17살이었습니다. 그때 담마빨라(Dharmapala)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부처님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스리랑카에 돌아와서 나는 아나가리까(Anagārika)가 되겠다고 발원을 하고 부처님의 성지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웁니다. 그리고 보드가야의 대탑을 불교도가 관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운동을 하고, 또 재판도 합니다.
이때 인도의 8대 성지를 힌두교 관리에서 불교가 관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꿨습니다. 또한 보드가야에 스리랑카 절을 세우고 모든 성지마다 스리랑카 절을 하나씩 세웠습니다. 그 이후 성지마다 각 나라 절들이 하나씩 생겼습니다. 그는 불교 강사로 미국과 영국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불교 강의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늦게 62세에 출가했습니다. 한국에도 한 번 오셨습니다. 그때 조계사를 방문했습니다. 미국에 갔다가 일본 가는 길에 잠시 한국에 들렸습니다. 한국사에 이 이야기 나옵니다. 담마빨라 스님이 일본 사람들 앞에서 한국의 독립을 기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도 불교나라고 스리랑카도 불교 나라고 일본도 불교나라입니다. 일제 치하에 있는데 일본사람들 앞에서 한국의 독립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굉장한 용기입니다. 본인이 가지고 계시던 사리를 조계사에 기증했습니다. 조계사에 있는 사리탑이 1922년 담마빨라(Dharmapala) 스님이 가지고 오신 사리로 조성된 사리탑입니다.
담마빨라(Dharmapala) 스님은 마지막에 영양부족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인도 사람들이 스님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때리고 밟는 등 힘들게 매우 고통스럽게 학대 했습니다. 스님은 다시 태어나서 부처님 성지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합니다. 스리랑카 독립과 불교의 독립을 위해서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강의를 하려고 하와이에 가셨는데 그때 풍문을 많이 일으키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때리고 해고하는 행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나중에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의지하기도 했지만 늘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중 담마빨라(Dharmapala) 스님이 미국에 와서 강의를 하게 되어서 왕비가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 종교에서는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는가? 그래서 스님께서 자애명상을 가르쳐 줬습니다. 자애명상 6개월 후 왕비가 새롭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담마빨라(Dharmapala) 스님에게 내가 이 대가로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담마빨라(Dharmapala) 스님은 나는 인도 부처님 성지에다 사원을 하나씩 짓고 싶은데 도와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비가 많은 후원을 했고 지금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에 계신 부처님이 그때 모셔진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불상이 없었습니다. 왕비의 후원이 굉장히 컸습니다. 담마빨라(Dharmapala) 스님을 따라서 많은 재가자들이 아나가리까(Anagārika)가 된 것입니다. 10계를 받고 일반 삶을 살기는 힘드니까 8계를 받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가라(gāra)라고 할 때는 아내와 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 제2의 아소카라 다르마빨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래는 빨리(Pāli)어로 담마빨라(Dharmapala)입니다. 빨라(pala)는 호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담마빨라(Dharmapala)는 법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빨리(Pāli)어의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을 그대로 표현한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호한다.
셋째, 차례대로 가지런히 앉는다.
빨리(Pāli)어는 원래 인도의 마가다어인데 나중에 빨리(Pāli)라는 말을 붙이게 됩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정확한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빨리(Pāli)로 말을 합니다. 빨리(Pāli)라는 말에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경전 삼장을 빨리(Pāli)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스리랑카의 싱할라어로는 빨리(Pāli)를 벨라라고 합니다.
빱바지따(Pabbajitā)는 집을 떠난, 출가한, 출가자,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위양(viyaṃ)은 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희열인 삐띠(pīti)와 비슷합니다. 빠숭(pasuṃ)은 가축이고, 히뜨와(hitvā)는 버리고, 입니다. 옛날에는 가진 사람들이 출가를 많이 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출가할 때 33가지의 몸의 특징을 봅니다. 그리고 32개의 장애가 없어야 합니다. 후기에 출가의 조건이 많이 생겼습니다. 인도에서도 아무나 가서 출가 못했을 것입니다. 돈 빌린 사람, 군인 등은 출가를 못한다고 율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때는 출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음으로 어려웠고 외부조건들도 많았습니다. 부모님께 허락 받아야 하고 아내한테 허락 받아야 하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출가 조건으로 첫 번째는 장애가 없어야 하고 두 번째는 공부를 할 수 있는지를 봅니다.
히뜨와 라간짜 도산짜 아윗잔짜 위라지야(Hitvā rāgañca dosañca avijjañca virājiya)에서 라가(raga)는 탐욕인데 흔히 말하는 탐욕인 로바(lobha) 보다 강합니다. 라가(raga)는 애욕을 포함한 탐욕입니다. 다음에 도사(dosa)는 성냄입니다. 탐욕인 라가(raga)와 성냄인 도사(dosa)는 버리고 무명인 아위자(avijja)는 죽여야 합니다. 위라지(virāji)는 빛이 난다, 입니다. 출가해서 탐욕과 성냄을 버리고 무명을 죽이면 탐욕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리고 죽여야 빛이 납니다. 버린다는 것은 감각적 욕망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무명은 지혜를 계발해서 무명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소멸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소멸시킨다는 것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키나사와 아라한또 떼 로까스밍 아눗수까띠(Khīṇāsavā arahanto te lokasmiṃ anussukāti)에서 키나사와 아라한또(Khīṇāsavā arahanto)는 번뇌가 다란 아라한들을 말합니다. 번뇌를 삼독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탐진치라는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들만 이 세상에서 탐욕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