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독이 없는 포식자지만 웬만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아주 평범한 후회
임성구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처럼 되지 않아
잠시 멈칫하고 더 큰 발로 건너야 할 때
비로소 소중한 너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작거나 못생긴 돌이 물살을 견디지 못해
홀연히 홀연히 떠내려가서 허전할 때
불안을 호소한 것은 네가 아닌 나란 것을
거룩한 꽃만 보고, 나 혼자 그 꽃만 보고
징검징검 네 굽은 등, 무수히 밟고 지날 땐
돌 하나 못 받쳐준 나를, 그래도 용서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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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품격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더구나 특별함, 평범함, 하찮음 같은 등급 분류까지는 “셈”의 영역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중에 ‘아주 평범함’은 가장 많이 발에 차이고 눈에 밟히고 입에 오르내리고 하는 우리가 겪는 현저히 대중적인 “수준”의 ‘후회’를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후회’는 오른쪽 길로 갈까? 왼쪽 길로 갈까? 하는 선택의 부작용일 수도 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한가운데 너무 오래 서 있을 때 생각이 구축拘縮 되는 후유증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일 것이다. 마음처럼 되는 일이 1이라면 그렇지 않은 일이 9쯤 되지 않을까? 너무 비관적 아니, 보수적인가? 그럼 이참에 진보적으로(?) 반반이라고 치자. 그런 확률 속에서 살다가 낭패를 당한 내가 ‘잠시 멈칫하고 더 큰 발로 건너야 할 때’ 살얼음판 같은 다른 선택지 앞에서 손을 잡아주는 이가 너였으면, 네가 또 다른 큰 선택을 할 때 어깨를 내줄 이가 나였으면 좋겠다. 그것이 후회를 감량할 수 있는 삶이 주는 선물이지 않을까?
‘작거나 못생긴 돌이’ 견뎌야 하는 ‘물살’ 앞에 “규모”와 “외모”는 자본주의라는 물질만능주의가 포식하는 사냥감이다. 더 나아가 ‘물살’을 확대 재생산하는 ‘물결’이라는 것이 세상을 지배한다. 산업혁명이 불러온 제1 물결에서부터 정보통신 혁명이 가져온 제5 물결, 인공지능 어쩌고 하는 제6 물결에 밀려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떠내려가는’ 심지어 ‘불안을 호소’하는 것은 도대체 너인가 나인가? ‘아주 평범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세상엔 나보다 작은 사람도 나보다 못생긴 사람도 많고 내 눈동자에 비치는 것이 ‘거룩한 꽃’인 순간에도 또 ‘나 혼자 그 꽃’을 볼 때마저 너는, 너는 말이다. 누구든 ‘무수히 밟고 지나’도록 했던 너는 징검다리였구나. 그런 너에게 ‘돌 하나 못 받쳐 준 나를’ 시인은 정조준한다. ‘아주 평범한 돌’도 못 되어준 나를 시인은 간파한다.
후회는 독이 없는 포식자지만 웬만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