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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1
서울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무료함을 달랠 만한 것이 없나, 리모콘을 최신 영화 리스트들 사이로 이리 저리 돌려본다. 어릴 때야, 영화라는 딱지가 붙은 것이면 무조건 사족을 못 쓰고 봤었지만, 이제는 영화라고 모두 봐줄 만한 가치가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임상으로 깨달을 나이도 되었기에, 내 소중한 인생의 2시간 남짓한 시간을 투자할 만한 콘텐츠를 고르는 일에 상당히 까칠해져 있던 터였다. 말도 안 되는 할리웃 블락버스터 액션물 사이에 얼굴 쪼글쪼글한 시니어들이 떼거리로 출연하는 영화가 하나 숨어 있다. 일단 내용이나 확인하자 싶어 예고편 버튼을 눌렀다가 아주 강한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결국에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보게 된 영화가 있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The Best Exotic Marigold Hotel)이라는 영국의 코미디 드라마가 바로 그것이다.
한 마디로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유시화의 인도 여행 수필집,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또는 ‘지구별 여행자’의 영국 버전 같은 영화다. 우리들 상상의 한계점을 훌쩍 뛰어넘는 ‘인도’라는 대륙, 그리고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성자와 사기꾼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는 ‘인도인’들을 만나면서 7명 영국 노인네들의 고정된 내면은 부서지고 무너지고 다시 태어난다.
아무리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려 놓고 인식의 출발점을 ‘제로’에서 시작하려 애쓸지라도 감독이 이전에 어떤 영화들을 만들었었나, 배우들이 어떤 영화에 출연했었나 하는 이력은 영화를 선정하는 주요 이유가 된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무릎을 내려칠 정도로 깔깔대며 웃었던, 발칙한 상상력과 출중한 유모감각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Shakespeare in Love)’를 연출, 아카데미 연출상을 받았던 존 매든(John Madden) 감독의 작품이다. 20여 편의 드라마를 통해 섬세한 감성을 탁월하게 연출해냈던 매든 감독. 영국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그는 낯선 외국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 문을 열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영화는 2004년 출판된 드보라 모가치(Deborah Moggach)의 소설, ‘These Foolish Things’를 원작으로 올 파커(Ol Parker)가 각색했다. 주디 덴치, 탐 윌킨슨, 빌 나이, 매기 스미스, 셀리아 아임리, 로널드 픽업 등의 출연진들은 감칠 맛 나는 연기로 이제껏 수많은 영국 영화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은발의 노장 배우들. 원숙함이 절정에 이른 배우들을 보고 있으면 연기의 내공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세계적으로 히트했던 영국 드라마들을 통해 얼굴이 익숙해진 터라,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의 내밀한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친밀감이 느껴진다. 특히 국민배우 주디 덴치는 이제껏 출연했던 영화에서와는 달리,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새롭게 변신했다는 평이다. 여기에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스타덤에 오른 데브 파텔의 코믹 연기까지 더해지니 배우들의 조합은 기대 만땅이다.
영화는 7명의 영국 노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 인도로의 이주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각기 다른 사연과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에블린(주디 덴치)은 세상 떠난 남편이 남겨주고 간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갖고 있던 집을 팔고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남은 돈을 가지고 인도 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전직 대법원 판사인 그래이엄(탐 윌킨슨)은 동료의 퇴임식에서 연설을 하던 도중, 바로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미뤄왔던 그 순간임을 깨닫고 돌연 은퇴를 결정한다. 심장질환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삶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음을 인식한다. 덮어두고만 살았던 첫 사랑을 찾겠다는 마음 속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인도로 향한다.
결혼생활 39년째인 더글러스(빌 나이)와 진(페넬로프 윌턴)은 딸의 인터넷 회사 창업에 은퇴연금을 투자했었는데 자금회수가 늦어지자 마음이 조급하다. 수중의 돈으로는 영국에서 어떤 집도 장만할 형편이 안 된다는 현실에 직면한 이들 부부는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찾고자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을 찾아 든다.
가족 없이 다른 가족들에게 진정으로 헌신했으나 갑작스레 해고를 당한 전직 가정부, 뮤리엘(매기 스미스)은 6개월을 기다려야 겨우 수술 기회가 오는 영국 대신, 좀 더 빨리 저렴한 비용에 골반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인도로 향한다.
황혼의 여자 사냥꾼, 노먼(로랜드 픽컵)은 자신이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끊임 없이 하루 밤을 보낼 젊은 여성들만을 찾아 다니니 늘 퇴짜만 받고 다닐 수밖에. 그는 새로운 여성들과의 새로운 만남을 꿈꾸며 미지의 땅, 인도를 찾는다.
마지(셀리아 아임리)는 몇 차례의 불행한 결혼 끝에 스릴과 모험을 찾아 인도를 선택한다. 자신을 베이비시터처럼 취급하는 딸의 집을 나온 그녀는 새로운 남자를 사냥하기 위해 인도로 날아든다.
인도 자이푸르 지방에 위치한 아름다운 시니어들을 위한 호화 은퇴 리조트,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의 현란한 광고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장소처럼 보였다. 호텔의 아름다운 이미지에 매료된 이들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영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인도 자이푸르 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모여든다.
이들은 런던 히드루 공항에서 인도의 가장 국제적인 공항인 뭄바이 또는 델리로 오는 비행기를 각자 알아서 탔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최종 목적지인 자이푸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상식을 뛰어넘는, 모든 일이 가능한 인도 땅이다. 그들은 자이푸르 행 비행기가 연착됐다는 소식을 대한다. 생면부지였던 이들은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 강한 연대의식을 느끼며 단체행동 모드에 들어간다. 급기야는 자이푸르 행 비행기가 취소된다. 전직 대법원 판사였던 그래이엄이 리더십을 발휘, 나머지 그룹을 이끌고 자이푸르 행 버스에 몸을 싣고 목적지로 향한다.
인도를 여행해봤다면, 아니 하다 못해 유시화의 책 한두 권을 읽어봤다면 인도의 버스란 것이 얼마나 우리들의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폐차 직전의 낡고 더러운 버스도 혀를 내두를 판인데, ‘내 맘대로 하시어요.’ 스타일의 곡예운전에, 탑승자들은 롤러코스터에라도 올라탄 듯, 계속해서 꽥꽥 비명을 질러댄다. 사고 바로 직전까지 갔던 아찔한 순간들이 거의 액션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추격전을 보는 것 같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인 버스 안에서부터 더글러스와 진 부부의 위태위태한 관계는 드러나기 시작한다. 배가 고팠던 더글러스가 어디서 났는지 ‘알로카파라타’라는 이름의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니 그의 까칠한 아내는 독기 가득한 말을 쏘아댄다. “출처가 불분명한 음식을 먹다니, 당신 정신 나갔어요?”
그렇게 고생고생 해가며 꿈에 그리던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에 도착한 일행.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안내책자와 인터넷 광고에서 보았던 화려한 리조트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브로슈어에서 보았던 것과는 완전 딴판인,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먼지투성이의 남루한 건물이었을 뿐이다.
예약손님들이 호텔로 입성하고 있는 것을 본 매니저 소니(데브 파텔)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젊고 활발하고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매니저는 쉬지 않고 호텔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손님들을 각자의 방으로 안내한다. 먼지가 소복이 쌓인 덮개 헝겊을 거둬 올리니 옹색한 가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방 안에는 새들이 활개를 치며 날아다닌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약간의 공주 병 증세가 있는 마지의 방에는, 문조차 없다.
“아니, 왜 방에 문이 없죠?”
“문은 달아드릴 거예요.”
“언제요?”
“손님, 작은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열린 공간을 즐기도록 하세요.”
“매니저님. 당신 방에는 문이 있나요?”
“그럼요.”
“잘 됐네요. 그럼 그 방을 제가 쓰도록 하죠.”
매니저 소니의 ‘작은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열린 공간을 즐기라는 조언이 어쩐지 귀에 익다. 유시화의 책에서 그렇게도 자주 등장하던, ‘불만에 주의를 집중하기 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의 열쇠’라는 가르침들이 소니의 대사를 만나 귓전에 공명되기 때문이다.
항상 입이 댓발 튀어나와 있는 불만투성이의 진은 당장 호텔 안내 데스크로 찾아가 항의의 목소리를 드높인다.
“이 호텔이 브로슈어에 나온 그 호텔이란 말씀이세요?”
“그럼요.”
“거짓말. 포토숍으로 만든 가짜 이미지잖아요? 전 당장 다른 호텔로 가겠어요.”
긍정의 화신인 우리들의 호텔 매니저 소니의 자신감 넘치는 응답을 들어보자.
“손님. 저희 호텔 건물은 수세기에 걸쳐 명백을 이어온 개성 넘치는 인도의 자랑거리입니다. 브로슈어의 사진은 저희 호텔의 미래 모습입니다. 기대하신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인도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결국에는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때가 아닌 것이다(Everything will be alright in the end, if it's not alright then it's not yet the end.)”
“안 되겠어요. 환불해주세요.”
“물론 해드리죠. … 3개월 후에라야 가능하지만요.”
아무리 매사에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는 진이라 할 지라도 소니의 계속 미소를 잃지 않는, 뻔뻔스러울 정도의 긍정적 응대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만다. 어쩌겠는가? 3개월 후, 환불이라도 받아 가려면 견디는 수밖에.
그래도 첫날이라고, 매니저 소니는 투숙객들의 목에 꽃 화환을 걸어주고 시타르 연주 라이브 연주까지 대동한 특별 만찬을 준비한다. 첫 저녁식사 메뉴는 영국식 오븐구이와 염소고기 커리. 하지만 영국인들의 입맛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인지라 매운 맛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장은 요동친다. 인도 전통의상을 입고 손님들을 환영하는 매니저 소니는 감동에 찬 환영사를 드라마틱하게 늘어놓는다.
“전 아버지의 못다한 뜻을 이어, 노년층을 위한 최고의 호텔을 세우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수많은 장소 가운데 이 호텔을 선택해주셔서 제게도 얼마나 커다란 축복이라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에블린은 인도에서의 삶,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과 경험하는 사건들을 블로그로 업데이트 해, 가족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그리고 자이푸르. 이 친숙하지 않은 환경에 당황해 하는 정도는 각자 달랐다. 세상에 이토록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장소가 또 있을까? 익숙해지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에블린은 자이푸르에서의, 그리고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에서의 삶들을 그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가상공간에 서술해나간다.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라디오를 듣지 않고 자이푸르 해럴드로 세상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인도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며 그 문화는 파도처럼 강렬하게 다가온다. 처음엔 저항했지만 그것은 해결이 되지 못한다. 다가오는 도전을 감내하는 것을 넘어서 즐기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 나는 이미 그 속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헤엄쳐 나올 것이다.”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떠나온 에블린은 남편의 빚을 청산한 나머지 돈으로는 인도에서조차 정착이 어렵다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새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인도에서 직장을 구한다. 에블린이 찾은 일은 콜 센터의 마케팅 담당 스태프들로 하여금 영국인 고객들과 보다 나은 의사소통을 통해 결국 설득할 수 있도록 코치 하는 일이었다.
입사를 위한 인터뷰 때, 에블린은 경영진으로부터 차와 비스켓을 대접받는다. 그때 에벌린의 대사가 어찌나 영국적인지, 오래도록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빌더즈 티에 비스켓을 담가 흠뻑 적시세요. 완전히 젖기 바로 전에 꺼내 먹으면 비스켓과 차의 환상적인 조합을 맛볼 수 있죠. 티에 적신 비스켓은 심신을 편안하게 해줘요. … 이제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콜센터에는 호텔 매니저 소니의 여자친구인 수나이나도 일하고 있었다. 역할 플레이를 통해 직원들을 트레이닝 시키고 있는 에블린의 모습이 자글자글한 주름에도 불구하고 참 아름답게 보인다.
“로봇처럼 말하지 말고 대화를 해보세요. 그리고 전화선 뒤의 그 사람이 벌거벗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좀 두려움이 덜해지거든요.”
일하는 틈틈이 호텔 주변의 종교 사원과 관광명소들을 찾아 다니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살펴보던 에블린은 전직 대법원 판사 그래이엄과 마주친다. 그래이엄은 에벌린에게 자신이 태어나서부터 18세가 될 때까지 인도에서 살았으며 어린 시절의 남자친구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래이엄이 에블린에게 보여준 빛 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소년 시절의 그래이엄과 그의 친구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같은 마을에 살던 그 애와 나는 친구가 되었어요. 우리는 크리킷도 함께 하며 늘 함께 놀았죠. 그렇다가 그 애와 사랑에 빠졌어요. 그 애를 통해 난 내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 거죠. 둘이서 한 번은 호숫가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함께 자고 있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나는 한 번 야단을 맞은 것으로 끝났지만 그 애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죠. 그 애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해고당했고 더 이상 평판 때문에 그 마을에서 살 수가 없어 먼 곳으로 떠나야만 했죠. 맞서 싸울 수 있는 힘도 용기도 없던 나는 그냥 모든 것을 방관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 후 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그 친구를 남겨 두고 영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러고는 연락이 끊겼죠.”
그를 그냥 두고 떠났던 것이 그래이엄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닌 상처요, 한이 되었다. 대법원 판사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항상 마음 한 켠에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회환이 남아 있었던 그래이엄. 그래서 은퇴 후,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인도로 와서 첫사랑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을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화되어 있었고 친구도 더 이상 그 마을에 살고 있지 않았다.
“막상 와서 직면하고 보니 그가 나를 죽을 때까지 증오할까 봐, 두렵네요.”
더글러스와 에블린도 애썼지만 운명의 여신은 그래이엄과 그 친구의 재회를 도와주기 위해 작은 것에서부터 재배치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작동하지 않던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의 전화기가 갑자기 따르릉, 따르릉 울어댄다. 소니는 들뜬 목소리로 외친다.
“우리 호텔 전화기가 작동해요. 그래이엄 데시우드씨에게 전화 왔어요.”
그렇게 수소문을 해서 조우한 그래이엄의 첫사랑은 이미 다른 여인의 남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이 동성애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그의 아내는 그들의 재회를 인정해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재회한 두 연인은 따뜻한 포옹을 나누며 평생 마음 한 구석에 갖고 있었던 그리움을 해소한다.
“평생 사랑했던 남자를 만났죠. 그가 치욕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갇혀 산 것은 나였어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에서 머문 지 45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은 그래이엄이 첫사랑과 재회했던 날이다. 오후 녘, 그레이엄은 '베스트 엑조틱 매리골드 호텔' 정원에 놓여진 흔들의자에 누운 채로 평화롭게 생을 마감한다.
에블린이 블로그에 적은 일기의 한 구절이다. “노인들이 한 곳에 살면서 모두 아무 일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래이엄은 인도에서 죽기를 원했다. 우리들은 그가 옛 애인과 함께 갔던 호숫가에서 그를 화장했다. 성지는 아니지만 그 두 사람에게 그곳은 성지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우리들이 애도했던 것은 친구였을까, 아니면 우리들의 상실감이었을까?”
- 계속 -
2012/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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