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의 이미지는 석유와 전쟁의 양대 이미지로만 생생하게 각인되어 온바, 중동의 획일적 사고관을 다채롭게 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시점에 있다. |
美國의 이라크 사태 개입에 가일층 상시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中東! 한시도 월드뉴스의 헤드라인을 벗어난 적이 없다.
특히 아랍국과 이스라엘간 세기의 반목과 갈등은 미국과 아랍국간 대리전 양상으로 비화된바, 회교와 기독교 대립 구도라는 종교전 양상으로까지 치닫으면서 증오와 테러의 불길을 거세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막대한 석유자원의 보고이면서 고대문명의 중핵을 이루었던 중동의 인식은 이렇듯 전쟁과 테러의 이미지로만 먹칠된 상태이다.
이스라엘 현대사를 심층 조망한 ‘격동의 이스라엘 50년’ 著者이기도 한 소정현 기자는 중립적 시각 하에 중동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제반 전 분야를 세밀 투시할 것이다.독자 제현들의 적극적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편집자 주>
▲ 동서교역 중핵인 육로 실크로드의 해결사로서 빼놓을 수 없는 대상(隊商) 행렬! | |
사통오달 地政學的 요건․이점 구비
‘실크로드’ 중개무역 천부적 주역들
‘실크로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가교역 최전선
이슬람 상인 개척주역 ‘포교’역할에도 숨은 일꾼
이슬람 상인들 연원은 지중해의 ‘고대 페니키아’
한국존재 세계에 첫 알려 신라와 고려까지 교류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인 아라비아 반도는 독특한 地政學 地理學 여건과 특성상 일찍부터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육로(陸路) 교역은 대상(隊商)을 통한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의 중국에까지, 강로(江路)는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에, 그리고 해로(海路)는 홍해와 걸프 만을 위시 인도와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고대와 중세에 걸쳐 동서교역의 종횡무진 대활약을 아끼지 않은 이슬람 상인! 이들의 정의는 과연 어떻게 내려야 과녁을 벗어나지 않을까? 중동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인도와 인도네시아까지 널리 뻗어갔던 상인들이라는 것에 분명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즉, 이슬람 제국내의 최대 영토가 기준이 아니고 이슬람교 전파에 따른 이슬람 상인들의 역할론을 적극 주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
▽ 고대 페니키아로 거슬러 올라가
이슬람 상인들의 기원과 유래는 지중해 동쪽 연안의 페니키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치적으로 통일된 적은 없었던 연맹체 성격의 페니키아는 우가리트(라스 샴라), 비블로스, 베리토스(베이루트), 시돈(사이다), 티루스(티레)의 항구도시가 주축이 되어 일찍부터 해상무역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그 지방에서 출토되던 염료가 있는 조개를 이용, 우수한 색상 있는 옷들을 만들어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한편, ‘에게 해(海) 지역에는 표음문자를 보급하게 된다. 이들 중 티레의 페니키아인(人)이 지금의 알제리와 튀니지 지역에 카르타고(Carthago,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만(灣) 북 연안에 건설한 도시 및 도시 국가)를 건설하여 북아프리카 전성기의 서막을 알리게 된다.
▲ 이슬람 상인들의 모태는 지중해 동쪽 연안의 페니키아. | |
로마 제국에 의해 카르타고가 망한 이후, 이슬람 상인들은 이란 고원의 파르티아와 그 이후에 들어선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 아르다시르 1세가 정복시기인 208∼224년에 세워 651년에 멸망한 페르시아의 왕조 )를 중점으로 하여 로마(이후 비잔틴 제국)와 전한(前漢)(이후 後漢)을 잇는 중개 무역을 중심으로 그 혁혁한 활약상을 만방에 전파하기 이르렀다.
바로 여기의 정점에 우리 지구촌 모두의 대명사격인 ‘실크로드(Silk Road)’가 우뚝 서있는바, 이를 일절 비껴나갈 수 없게 만든다. 덧붙이면, 원래 이 비단길은 본래 아랍 사람들이 교통로로 사용하던 구간에 중국 전한시대에 반초가 개척한 장안까지의 길이 더해지고, 이 길이 서쪽으로 유럽까지 확장되어온 대서사시라 할 수 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이어주는 교통망이자 동서양의 문화와 문물의 가교역할 수행에 있어 최전선에 포진한 ‘실크로드’는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붙인 이름으로서 종교, 문화, 언어, 자연, 지리적 조건이 무척 상이한 이질체간의 파노라마적 전무후무의 대교역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아시스를 잇는 교통로를 왕래하면서 물자의 장거리 수송과 중계 상업에 종사한 아랍의 카라반(caravane)! 일명 대상(隊商)으로 사막의 낙타 행렬을 생생히 각인시킨 이들의 존재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실크로드의 시발점은 이탈리아로부터 시작되어 소아시아지방, 서아시아, 이란고원과 중앙아시아를 지나 파미르고원, 타림분지를 거쳐 중국의 장안까지 연결되는 매우 장구한 소통로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의 국제정세를 심층 조망하기로 한다. 동쪽의 사산조(朝) 페르시아와 서쪽의 동로마 제국(비잔틴제국) 간의 장기적 대결로 말미암아 페르시아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경유해 지중해로 통하는 동서 통상로가 전격 차단된다. 이에 아라비아반도 서부의 홍해 연안지방이 주요한 대안 통로로 급부상하면서 절호의 찬스에서 이슬람 상인들은 중개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보게 된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재위 527∼565)때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이 비단의 근원이 되는 누에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또한 당시 중동지역에서는 무역권이나 대상로(隊商路) 확보 쟁탈전이 매우 치열했는데,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유년기라 할 수 있는 575년부터 590년 사이에 메카지방의 맹주들인 꾸라이쉬 부족과 하와진 부족 간에 발생한 네 차례의 유혈적 상권 쟁탈전은 그 일례다. 이후 마호메트 후손들은 이슬람 제국을 맹렬하게 팽창시켜 나갔는데, 동시에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 역시 매우 괄목하였다.
▲ 육로 실크로드는 이탈리아로부터 시작되어 소아시아지방, 서아시아, 이란고원과 중앙아시아를 지나 파미르고원, 타림분지를 거쳐 중국의 장안까지 연결되는 매우 장구한 소통로이다. | |
▽ ‘포교와 교역’ 순풍 달다
실크로드는 상인들로부터 먼저 개척되어 사절단과 종교인들에 의해 발전되는 양상을 띤다. 7세기에 사산왕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를 멸망시키고 서로는 스페인,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세력을 형성한 사라센 제국의 상인들은 광대한 제국의 각종 산업발전을 무기삼아 제국영토 내의 상업전개와 함께 그 때까지 페르시아 인이 장악하고 있던 인도·중국 방면과의 동방무역(東方貿易)을 독점한다.
이슬람 상인들은 당나라(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해 통치)와의 탈라스 전투(the Battle at Talas, 751년)에서 승리 이후로 비단길을 장악하고 중개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게 된다. 또한 그들이 버는 수입은 역시 국가에 보태어져 이슬람 제국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동시에 인도, 인도네시아 쪽으로 이슬람교가 포교되기 시작하면서 그 지역에서의 이슬람 상인들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한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지방의 가장 대표적인 항구였던 말라카 지방 사람들이 이슬람교가 태반인 것을 보면 쉽사리 수긍이 간다.
▲ 해상 실크로드는 서쪽으로는 지중해에서 홍해를 거친 뒤 인도양을 경유하여 동남아를 거쳐 중국의 남동해안 심지어는 우리 신라(고려)에 이르렀던 바닷길을 통칭한다. | |
이들 이슬람 상인들은 아프리카에도 눈을 돌린다. 이들은 교육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톰북투(Tombouctou, 現 아프리카 말리에 위치하며 중세에 상당히 번성한 이슬람국가로서 '황금제국'이라는 별칭이 붙음), 그리고 당시에 상업으로 번성을 했던 악숨(Axum) 왕국(지금의 에티오피아)에까지 발품 파는 것에 동분서주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1498년에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많은 이슬람 상선이 입항해 있었다. 그 곳에서 단숨에 계절풍을 타고 최초로 인도양을 가로지를 수 있었던 것은 아랍인 뱃길 안내자 이븐 마지드(Ibn Majid)의 덕분이었다.
바로 앞서 약술한바, 집단 개종한 페르시아계 이슬람 상인의 큰 덕을 본 이슬람 제국은 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압바스 왕조(756∼1031)시대에 있어 특히 10-11세기 유럽의 상업부활을 계기로 지중해 상업권과의 무역까지 손을 뻗침으로써 16세기에 유럽 세력이 동양에 진출할 때까지 국제상업의 중심적 담당자로서 활약하였다.
특히 12세기부터는 유럽의 향료 수요증가 때문에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의 진출도 촉진되었으며, 이들 지역의 이슬람화가 거세게 촉진되었다. 유럽과의 무역에서 수출품의 대종인 향료는 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들여왔는데, 시리아·이집트의 이슬람 상인이 독점하였다. 또한 이슬람으로 개종한 인도 상인이 중개한 향료도 상당했다.
이러한 지중해 무역은 15세기 오스만 터키의 진출과, 16세기 초엽 포르투갈의 동인도 진출로 사양길에 들어섰다. 이에 중세시대 해상에서 무소불위 위력을 과시했던 무슬림 상인의 역사적 역할도 대폭 줄어들게 된다.
▲ 중세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시’가 편찬한 세계지도에서 신라를 소개 | |
▽ 해상교역로에 ‘큰 비중’
이들 이슬람 상인들의 핵심 무역루트로서 해상운송이 갈수록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코란의 "알라께서는 너희들에게 바다를 복종하게 하였고 그 명령에 따라 배가 항해하여 그대들이 이 은혜를 입도록 하셨다"(45:12)라는 계시에 따라 선호하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해상 실크로드의 시발과 종착역은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서쪽으로는 지중해에서 홍해를 거친 뒤 주로 아랍상인들에 의해 인도양을 경유하여 동남아를 거쳐 중국의 화난(華南)지역인 남동해안 심지어는 우리 신라(고려)에 이르렀던 바닷길을 통칭한다.
유능한 아랍 뱃길 안내인으로 15세기에 쓴 이븐 마지드(Ibn Majid)의 저술을 보면,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섬에서 출발하여 인도를 경유, 중국에 이르는 바닷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경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서북 인도의 신드에 도착하여 인도 서해안을 남하, 실론섬(지금의 스리랑카)의 남단을 우회, 미얀마의 마르타반만에 기항(寄港)하였다가 말레이반도의 서해안을 남하하여 남해무역(南海貿易)의 중심지인 말라카에 닿는다.
이어, 싱가포르에 들렀다가 말레이반도 동해안에 있는 파타니, 성클라를 거쳐 타이의 수도 아유타야에 이른다. 인도차이나의 캄보디아와 참파를 거쳐 중국의 광저우(廣州)·취안저우(泉州)에 닿는다.
▲ 유럽의 해상개척에는 아랍인 뱃길 안내자 ‘이븐 마지드’가 지대한 공로자 | | 약술한바, 특히 8세기 후반 압바스 왕조(Abbasid Dynasty)가 바그다드(Baghdad)를 수도로 정하면서부터 이슬람 상인들의 해상 활동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어 중국 남부의 항구를 빈번히 이용하였다.
송대(宋代) 이후 중국 선박의 대형화, 나침반의 발명과 항해의 이용 등 항해술의 발달로 중국 상인들이 비단, 도자기를 가지고 자바(Java), 수마트라(Sumatra)에서 인도에 걸쳐 폭넓게 문물 교류를 하면서 해양로는 동서 교류의 교통로로 새롭게 부각되기 이르렀다.
더욱이 당나라 현종(玄宗) 말기 비단길의 경영에 실패한 이후 육상의 교역로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면서 해상로는 더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육상의 교역로가 거듭 쇠락에 빠져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선박과 항해술의 발전에 따라 해상교역로가 개척되었고, 해상교통이 보다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럽 귀족들의 동양의 귀중품에 대한 애호에 따른 수요의 급증은 결국 희망봉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이는 동서 해양로가 세계교역의 수호신 역할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13세기의 페르시아 시인 ‘사디’의 著書에서는 페르시아에서 中國으로 황, 중국에서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으로 자기, 비잔틴에서 인도로 비단, 인도에서 시리아로 강철, 시리아에서 예멘으로 유리, 예멘에서 페르시아로 무늬옷감을 실어 나른다는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 ‘신라-고려’까지 교류하다
한국 외적 문명권에서 첫 우리나라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 다름 아닌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이다. 신라 하대인 9세기는 국제해상무역이 활발한 시대였다. 장보고를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이 동북아의 해상무역을 왕성하게 전개하였던 시점과도 일치한다.
이와 연관, 신라의 지리와 관련한 아랍 학자들의 기술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Al-Idrisi)가 편찬한 세계지도이다. 그가 지리학적 지식을 총망라 집대성한‘극지횡단 모험가의 산책'(1154년)이란 책이 있다. 여기에서 그는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 넣었다. 그는 아랍의 전통적 '7 기후대설'에 따라 지구를 7개 지역으로 나누고, 매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다시 10등분하여 각기 지도 한 장씩을 제작함으로써 총 70장의 지역세분도를 완성하였다. 그 제1지역도 제10 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를 명기하고 있다.
이에 앞서 847년(신라 문성왕 )에 출간된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에 신라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이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하면, 이들은 신라에서 비단(하리르), 검(피린드), 사향(미스크), 말안장(수루즈), 흑담비(삿무르)가죽, 오지그릇(가돠르), 계피(다루쉰) 등을 수입해 갔다. 그 통로는 주로 중세 아랍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남해의 바닷길로서, 여기에는 아랍 특유의 돛배가 이용되었다.
신라의 공식 역사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이슬람인 상당수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실제로 로마형 유리, 카펫, 세공예술, 공후(악기), 사자춤, 가면극 등 신라의 유물 속에서 이슬람 문물의 유입 흔적이 다수 발견된다. 특히 처용가는 이슬람인과 신라여인과의 남녀관계를 읊은 노래라는 추정에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다음으로, 935년에 신라를 점령하고 통일을 이룬 고려시대에는 아랍 상인들이 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에 있는 예성강 포구인 벽란도를 드나들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024년(고려 현종 15년)과 그 다음해에 열라자(悅羅慈), 하선(夏詵) 등 대식국(大食國, 아랍) 상인 100여 명이 현종에게 공물을 바친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알리나 하산으로 짐작되는 이름이다.
그 후 1040년(고려 정종 6년)에도 아랍상인인 보나합((保那盒) 일행이 수은, 용치(상아), 유향(乳香, frankincense)등을 정종에게 바쳐 후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실은 1154년(고려 예종 8년) 출간된 아랍의 저명한 지리학자 이드리시(Al-Idrisi)의 저서 '극지횡단 모험가의 산책'에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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