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면 용화리龍化里 유래
문암리에서 일월산으로 올라 가는 길목에서 마지막 마을이다. 옛적부터 골짜기가 깊으며 북쪽과 서쪽에서 흘러 내려 오는 물이 합하여 내를 이루며 산의 모양이 아름답다. 대티 마을 서쪽 골짜기에는 칡이 온산을 뒤덮어 밭과 같이 칡이 많이 자생한다. 봄이 되면 고사리와 참나물이 유명하여 산삼ㆍ송이ㆍ복령ㆍ더덕으로 마을의 소득을 올려 준다.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볼래 영양군 북초면의 지역으로서 용화사(龍化寺) 절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용화곡(龍化谷) 또는 용화동 혹은 줄여서 용화(龍化)라고도 이른다.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큰거리ㆍ절구골ㆍ항골ㆍ대티를 합하고 용화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들게 했다.
[마을의 특징]
마을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먼저 용화사(龍化寺) 절에 대한 전설이 있고, 명암(鳴岩)과 일월광산(日月鑛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용화리 3층 석탑과 선녀탕(仙女湯)을 들 수 있다.옛날 이 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모두가 뜻을 이루어서 하늘로 올라 갔다 하여 이 곳에 용화사 절을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곳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의 이름을 용화라고 하게 되었다. 용화사는 그 뒤 없어졌으나 절터와 탑만 남아있다. 명암(鳴岩)의 사연을 알아보자.명암은 울바위라고도 하는데 호박소 위에 있다. 십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굴이 있으며 정월대보름이면 이 바위가 운다고 한다. 아울러 일월광산(日月鑛山)에 대하여 살펴 보자면 대티 서북쪽에 있는 광산으로서 아연이며 구리와 납ㆍ철 등을 캤다고 한다. 일제 때에 광산을 열었는데 지금은 폐광산이 되었다.용화리 삼층 석탑은 일월산 남쪽 광산촌이라고 불리우는 용화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탑을 쌓은 시기는 탑의 짜임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경상북도 문화재 제 8호(1972)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3.5 미터이며 기단(基壇)의 폭은 2.12미터가 된다.일자봉(日字峯)에서 동북쪽으로 선녀들이 내려 와서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이 있는데, 여기가 반변천의 원류(源流)가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선녀탕 밖에서 쉬고 있노라면 폭포에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산새 소리며 매미들의 소리와 함께 어울려 마치 듣는 이가 신선이 된 느낌을 받게 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주막거리
일제 시대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이 곳에 주막을 차려 수비면 신암리의 비상광(碑霜鑛)에서 채굴한 비림을 싣고 옮기는 말 달구지가 하루 3,40 대가 이 곳을 지나면서 주막에서 쉬어 갔기 때문에 주막거리라고 하였다(조영석(64) 제보).
*벌매골(伐梅谷)ㆍ매곡(梅谷)ㆍ반매곡(盤梅谷)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 매화가 떨어져서 반 위에 있는 모양을 한 한 묘지가 있다고 알려져 이른바, 그 매화낙지(梅化落地)를 찾기 위해 김씨(金氏) 일가가 머물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지고 벌매골 또는 매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홍영락(62) 제보). 의미 부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가 있겠으나 마을 이름들의 얼개로 볼때 매-미-물-의 걸림을 고려하면 이 또한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매곡(梅谷)의 '매'는 물을 뜻하는 것으로서 매곡-물곡이란 걸림을 떠 올릴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삼국사기』에서 수원(水原)-매홀(買忽)의 대응에서 물이 '매'임을 알 수 있다.
*절구골
용화사에서 사용하던 호박이 마을 입구 하천에 떠 내려 와 있는 것을 보고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제일 먼저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절구 이름을 본따서 절구골이라고 불러오고 있다(홍영락(62) 제보).
*항골ㆍ함골(函谷)
옛날부터 산의 골짜기가 깊어 호랑이가 많아 이웃 마을에 내려 와 집짐승을 잡아 먹기 때문에 불안하였다. 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경주 배씨(慶州裵氏)가 큰 함정을 파 두고 머물면서 호랑이가 잡히기를 기다렷다. 함정을 여러 곳에 많이 파 놓아서 함골이라 불렀다고 한다(한동희(58) 제보).
*큰거리(大溪)
북쪽과 서쪽의 깊은 산에서 흘러 내려 오는 개울물이 합하여 큰 내를 이루며, 주변의 산세도 아름다웠다. 큰 시내 옆에는 농사를 지으며 살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한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처음으로 이 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이 곳을 큰 거리라고 불렀다 한다(김승규(55) 제보).한자로 보아서 큰거리의 '거리'는 시내를 뜻하는 '걸'에서 비롯한 말로 보인다. 냇물이 있어야 농사를 잘 할 수 있으니 물이 삶의 원천이 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대티(大峙)ㆍ웃대티ㆍ아랫대티
지금으로부터 액 300여년 전 윗대티는 충주 지씨(忠州池氏), 아랫대티는 고성 이씨(固城李氏)가 처음으로 개척하였는데, 윗대티와 아랫대티 사이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대나무로 죽제품을 많이 생산하였다고 전해 온다(김승규(55) 제보). 물론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대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한자를 보나 땅 이름의 상관성으로 보아 대티는 큰고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고개를 뜻하는 티(峙)는 구개음으로 되어 티-치로 소리가 바뀐 것으로 볼 수 잇다. 여기 고개 티(峙)는 한국에서 만들어 쓰던 한국 한자음이다.
#추가의견: 대티(大峴) # 대티(大峙)를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 때 일본식 한자 표기로 죽현(竹峴)이라 하여 대나무를 연상시킨다는 이야기도 있다.
*용화(龍化)
옛날 신라 때 이 곳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는데 구룡 모두 하늘로 올라 가고 고구려 때 구룡이 하늘로 올라 간 이 곳에 용화사라는 절을 지었으니 땅 이름 또한 용화라고 불렀다. 용화사는 지금 없어졌으나 유적으로 탑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지호동(59) 제보).우리나라 여러 곳에 용과 걸림을 보이는 곳이 많이 있다. 이는 물을 다스린다고 믿었던 용신앙이 땅 이름에 베어 들었기 때문이라고 미루어 볼 수 있다.
*칡밭모기ㆍ갈전(葛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칡이 온 산을 뒤덮어 칡을 심어 놓은 밭과 같다고 하여 칡밭모기 또는 갈전이라 불러 오고 있다(지호동(59) 제보). 갈전이라 함은 칡밭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추가의견
천도교(동학) 2세 교주가된 최시형은 1864년 영양 일월면 용화리 벌매마을과 대티골마을 및 일월산속의 기우제펀지, 새평지 등에 피신했다. 최시형은 1871년 까지 7년간 용화동 벌매마을과 대티골마을에 정착해서 없어진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집필과 재현에 성공했다. 이런 원고를 1880년 강원도 인제군 진부령 산속에서 출간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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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끄티, 이까, 맨날천날, 호박, 호래이, 달부, 게락, 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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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말캉 마실소개 /148, 227) 일월면 용화리(龍化里)가 궁금니껴?
용화(龍化)는
문암서 일월산 가는 끄티에 있는 마실로
봉화군 재산면(갈산리)캉 이까 지니더.
옛날에 아홉마리 용이 살았는데
마카다 뜻을 이라가 승천을 했따 케가
용화(龍化)라 카게 된니더.
본대 북초면(조선시대 1895년) 땅이었꼬
1914년 행정구역을 바낄때
큰거리, 절구골, 벌매골, 항골, 대티골 등을
엄체 용화라 카고
일월면에 속하게 된니더.
(주막거리)
일제시대 일월산 광산이 운영될때 전주이씨
(全州李氏)가 차린 주막이 있었따꼬
주막거리라 카게 된니더.
여기 주막은 수비 신암의 비상광(碑霜鑛)서
채굴된 광석을 맨날천날 싣어 옮기는
말 구루마(달구지)가 하루 30대가 넘어었꼬
여기 주막서 슀다 갔니더.
(벌매골ㆍ매곡ㆍ반매곡)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여기 꼴짝에는
매화가 반석우에 띠낀(떨어진) 형국(盤梅).
즉. 매화낙지(梅化落地)인
명당이 있따 케가 김씨(金氏) 일가가
찾을라꼬. 오래 머물다, 마실이 맹글어 져가
벌매골(伐梅谷) 혹은 매곡(梅谷)이라
카게 된니더.
(쌔펀지)
벌매의 뿌리샘이 있는데시더.
일월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대체로 평평한 펀지로
바람이 디게 쌔개 부는 데라꼬 쌔펀지라
카니더.
1870년경 동학당이
집단으로 은거하면서 거주할때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이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캉 용당유사를 집필한곳이시더.
지금은 10여 개의 집터캉
150년 정도 수령의 살구낭기
말없이 여길 지키고 있으며,
당시 사용한 웅굴은 아직도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니더.
(절구골)
경주최씨(慶州崔氏)가 터를 잡을때.
용화사(龍化寺) 절에서 사용하던
호박(절구통)이 마실입구 그랑까지
떠 내려 온 것을 보고.
절구골이라 카게 된니더.
(항골ㆍ함골)
옛날부터 골짜기가 디게 깊어 호래이가
마실에 내려 와,
집짐승을 마구 잡아먹어.
호래이를 잡을라꼬
댁낄로 큰 함정을 맹글었따꼬
함골(函谷)이라꼬 카다가
마실 모양이 항아리 가꺼러 생겼따 케가
항골(姮谷)이라꼬 바까 부르게 된니더.
(큰거리)
전주이씨(全州李氏 )들이 마실을 맹글때
반변천 발원지인
대티골서 내려오는 그랑캉
금난사(錦蘭寺)쪼구서 내려오는 그랑이
엄체지는 데로
큰 개울이 있는 데라꼬 큰거리(大溪)라꼬
카게 된니더.
(대티ㆍ웃대티ㆍ아랫대티)
1700년경 윗대티는 충주지씨(忠州池氏),
아랫대티는 고성이씨(固城李氏)가
마실을 맹글어 집성촌이 형성되었니더.
윗대티캉 아랫대티 사이에 대낭기 무성해
죽제품을 맹글었따꼬 대티라꼬 켔따
카기도 했꼬.
마실이 일월산을 넘는 큰고개에 있따꼬
대티(大峙)라꼬 카기도 켔니더.
(용화)
일월산 자생화공원이 있는데시더.
신라시대때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
마카 하늘로 올라 가뿌자.
그자리에 용화사라는 절이 맹글어 졌니더.
그뒤 그 절이름을 따서
마실이름을 용화(龍化)라 카게 된니더.
용화사(龍化寺) 절은
지금 달부 없어졌찌만 탑(용화리 3층석탑)은
잘 남가져 있니더.
(칡밭모기ㆍ갈전)
서쪽 깊은 골짜게 있는 마실로
칠기(칡)가 온 산을 뒤덮을 만큼 게락 나가
칠기을 심가 놓은 밭 가꺼러 뷘다 케가꼬
칡밭모기라 카게 된니더.
갈전(葛田)은 칡밭모기를 한자로 쓴거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