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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儒)·불(佛)·선(仙) 통합 사상-최치원[ 崔致遠 2 ]
〈최치원초상〉, 1924년, 비단에 채색, 123×73㎝, 무성서원. (채용신)
최치원[ 崔致遠 ] (857~?)
통일신라시대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초상화이다. 복식은 중국 당나라 형식으로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붉은색 단령을 입고 있으며 가부좌를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손에 불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의자 아래 신발이 놓여 있는 모습은 불교의 승려 초상화 형식을 따른 것이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 등을 저술한 학자. 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또는 本彼部)출신.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 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율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이 때 공사간(公私間)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 』 1부(部) 5권이다. 그 뒤, 877년 겨울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일시 경제적 곤란을 받게 되었으나, 양양(襄陽) 이위(李藯)의 문객(門客)이 되었다. 곧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 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소계장(疏啓狀)·잡서(雜書)·시 등 1만여 수에 달하였으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중 특히 「격황소서(擊黃巢書)」「일명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885년 귀국할 때까지 17년동안 당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었다.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해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해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해 만든 해인사(海印寺)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해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적었다.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해 대리 작성한 각각의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경상북도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또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보낸 서한 중에는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가 송악(松岳)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한 반면,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 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해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해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정신계의 변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학문의 기본적 입장은 자신을 ‘부유(腐儒)’·‘유문말학(儒門末學)’ 등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아,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다. 『제왕연대력』에서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야비해 족히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꿨다.
그것은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金富軾)의 그것에 비해서 냉정한 면이 결여된 만큼 모방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제왕연대력』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해 삼국, 통일신라,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 등에서 나타난 발해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보아 발해사(渤海史)는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상태사시중장」에서는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인식한 한국고대사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져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역할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문학사(漢文學史)에 있어서의 업적이다. 그의 한문학은 중국문학의 차용(借用)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하였다.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동문선』과 『계원필경』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으며, 평이근아(平易近雅)하여 당시 만당시풍(晩唐詩風)과 구별되었다.
최치원은 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중에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禪宗)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을 찬술하였다. 그 중 특히, 「지증대사비문(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신라의 불교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 이해한 것은 말대사관(末代史觀)에 입각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불교 중에서 주목한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화엄종이었다.
화엄종관계의 글을 많이 남기고 있어서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 종에 이르고 있다. 특히,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는 해인사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화엄종관계의 글 중에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석순응전(釋順應傳)』·『석이정전(釋利貞傳)』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신라화엄종사(新羅華嚴宗史)의 주류를 의상(義湘)-신림(神琳)-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리고 화엄학 외에도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圓測)과 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화엄학과 함께 신라불교의 양대 조류를 이루었던 유식학(唯識學)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유교와 불교 외에 기타 사상으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도교(道敎)와 노장사상(老莊思想)·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다. 당나라에 있을 때 도교의 신자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도교에 관한 글을 남기고 있었던 것을 보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계원필경』 권15에 수록된 「재사(齋詞) 」에서 그의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귀국한 뒤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난 뒤에는 현실적인 불운을 노장적(老莊的)인 분위기 속에서 자족하려고 하는 면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도피적인 행동이 뒷날 도교의 인물로까지 잘못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찬술한 「대숭복사비문 」에 의하면, 예언적인 도참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인 복합화가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독점적인 지배체제와 그들의 고대적인 사유방식에 반발하던 6두품출신의 최치원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신라고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의 소극적이며 은둔적인 생활은 시대적인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에서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머물다간 아쉬움을 남겼다.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다음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다.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이 있었다.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과 『석이정전』·『석순응전』·『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산비명』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원문(願文)·찬(讚) 등 그 편린만이 전한다.
글씨도 잘 썼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그리고 전해오는 많은 설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집(愼獨齋全集)』에 실린 「최문헌전(崔文獻傳)」이 있다.
신라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879년 황소의 난 당시 이를 비난하는 <토황소격문>을 지으면서 문장가로 유명해졌다. 신라로 귀국한 후에는 문란한 정치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담은 시무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면서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 어지러운 현실을 비관하며 유랑하다가 가야산의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신라 말기의 문장가이자 학자. 그가 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어 화랑도(花郞道)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 쓰임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다.
신라 말 삼최(三崔)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문묘 18현. 문묘(성균관 대성전)
문선왕 공부자의 위패를 모신 성묘.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부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
공부자의 위패를 중앙 정위로 하여 4성과 공부자의 제자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동서로 위차봉안 되어 있으며. 대성전과 동무. 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 놓고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을 지낸다.
해동 18현
신라 : 최치원. 설총
고려 : 안향. 정몽주
조선 :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이언적.이황 .김인후.성혼.이이. 조헌. 송시열.송준길
김장생.김집.박세채
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承務郞侍御史)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阿飡)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지방에서 도적들이 발호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가야산의 해인사로 들어갔다고 하고, 민담에서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도 한다. 908년까지 생존해 있었음은 확실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귀국 직후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桂苑筆耕)》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경주 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생애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견일(肩逸)이며 금성(현, 경주시)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서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경문왕 8년(868년) 당시의 12세라는 나이로 역산해 보면 최치원의 탄생은 헌안왕 1년(857년)의 일이다. 최치원의 아버지는 최치원 자신이 찬한 《초월산 대숭복사비명》 병서에서 견일(肩逸)이왕경(王京)의 사량부, 《삼국유사》는 본피부로 기록하고 있는데, 《경상도지리지》·《동국여지승람》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삼국사기》를 따라 사량부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1834년에 발간된 《교인 계원필경》의 서문을 쓴 서유구는 최치원을 호남 옥구 사람이라고 기록하거나, 고군산 사람이라고 한 기록도 존재한다.
고군산에는 현재 최치원의 유적지로 여겨지는 곳이 남아 있으며,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무속고》에 따르면, 최치원의 신사가 고군산에 있었다고 한다.
입당 유학
최치원의 유학이 국비로 이루어진 것인지 사비로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나이 열두 살에 바다를 따라 배로 당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혔다" 라고 한 것이나, 《택리지》 전라도 영암군조에는 "최치원과 김가기(金可紀), 최승우(崔承祐)는 상선을 따라 당으로 들어가 당의 제과에 급제했다."고 한 기록은 최치원이 신라의 다른 숙위학생들과는 달리 사신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상선을 타고 당에 들어간 것으로 관비 유학생이 아닌 사비 유학생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으며 오늘날 이것은 한국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가 되어 있다. 국비유학생으로 보는 근거는 최치원 자신의 업적이나 당에 있을 때의 활동, 귀국 뒤의 국가적인 대우나,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이 최치원에게 말한 '10년'이라는 기간[5]과, 최치원 자신이 지은 「헌시계」(《계원필경집》권17)에서 "아무(최치원)와 같이 같은 자는 외방(外方)에서 건너온 데다 재예(才藝)도 하품(下品)에 속합니다. 그래서 유궁(儒宮)에서 덕행을 사모하며…" 라고 한 내용이나[6] 《성주사 낭혜화상비》에서 진성여왕이 최치원에게, "돌아보건대 문고(文考, 경문왕)께서 (최치원을) 국자로 뽑아 과거를 응시하게 하셨으며 강왕께서는 국사로서 예우하셨다" 라고 한 데서 생각할 때 국비 유학생임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경문왕 8년(868년) 당으로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에게 “10년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써라.”고 말했으며, 최치원 자신도 아버지의 말을 받들어 ‘다른 사람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한다는(人百己千)’ 심정으로 학문에 정진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경문왕 14년(874년), 최치원은 당나라의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한 뒤 2년 동안 별다른 직책 없이 동도(東都)를 유랑하며 시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시가 부 5수에 시 100수, 잡시부 30수로 모두 3편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 희종 건부 3년(876년)에[8] 이후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초투헌태위계」). 훗날 최치원은 자신이 현위 시절 지은 시와 부를 모아 《중산복궤집》을 지었으며 이는 《계원필경》과 함께 헌강왕에게 헌상되었다.
그러나 율수현위가 된 이듬해 겨울에 최치원은 율수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에 응시하고자 중난산(終南山)에 들어간다. 하지만 일정한 수입도 없이 생활이 궁핍해지고 학업마저 어려운 상태에서 당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등의 어려움이 닥쳤다. 생활이 궁핍해진 상태에서 최치원은 희종 광명 원년(880년)) 5월 절도사 고병(高騈)의 추천으로 그의 막하에 관역순관으로 들어가게 된다.
고병의 막하 활동 및 토황소격문
광명 2년(881년) 황소가 군사를 일으킨 황소의 난이 발생하자, 고병은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에 임명되고, 고병의 천거로 최치원은 도통순관에 임명되어 병마도통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정하였다. 7월 8일에 그는 반란군의 지도자 황소를 꾸짖는 격문, 이른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최치원의 격문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의논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不惟天下之人 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 已議陰誅)"는 대목에서 황소가 놀라 그만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당 전역에 퍼졌으며, 최치원은 고병의 도통순관으로서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병은 희종 중화 2년(882년) 정월에 출병할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제도행영병마도통직에서 파해졌지만, 이후로도 최치원은 고병 개인의 종사관으로서 그럭저럭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계원필경》은 바로 이때 최치원이 지은 글과 여러 공문서를 모은 것이다.
신라 귀국
헌강왕 10년(884년) 음력 10월 신라 사신으로서 회남에 왔던 김인규와 고국 소식을 전해 온 사촌동생 서원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는데, 회남을 출발한 신라의 배는 풍랑으로 유산에서 바람이 멎기를 기다렸고, 곧 겨울이 되어 곡포에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헌강왕 11년(885년)에야 신라에 도착한다.
신라에서 그는 당에 보내는 국서를 작성하거나 왕실 사찰의 비문과 기, 찬, 발원문 등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문장을 지었다. 당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한 최치원은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가 되었으며, 《초월산대숭복사비》의 글을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자신이 당에서 저작한 《사금체시》 5수(1권), 《오언칠언 금체시》 100수(1권), 《잡시부》 30수(1권), 《중산복궤집》 1부(5권), 《계원필경집》 1부(20권) 등 28권의 문집을 추려 헌강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7월에 헌강왕이 사망하고 정강왕이 즉위하였다. 이후 최치원은 진골 귀족들에게 밀려 외직(外職)인 태산군(太山郡)의 태수(太守)로 나가게 된다. 정강왕 2년(887년) 11월에 지은 《왕비 김씨 위선고급망형추복 시곡원문》에서 자신을 부성태수라고 하고 있어, 이듬해에 태산군에서 다시 부성군으로 부임지가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정강왕 사후 진성여왕 원년(887년)과 4년(890년), 7년(893년)에 각각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등을 각각 지었다. 진성여왕 7년(893년) 납정절사로 임명되어 당나라로 파견되었던 병부시랑 김처회가 그만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하자, 조정은 다시 혜성군태수 김준을 고주사로 삼고 부성군태수로 있던 최치원을 하정사로서 당에 보냈지만, 당시 흉년이 들고 도처에 도적들이 들끓어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갈 수 없었다.
진성여왕 8년(894년)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 시무 10여 조를 올린 시기에 최치원은 천령군 (함양) 태수로 나가 있었는데,[10]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바 해인사의 승려 희랑에게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 것은 이 무렵의 일로 여겨진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최치원의 관직을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현존하는 문집에 남아 전하는 증희랑화상시 6수 중에는 이러한 문구가 보이지 않지만, 천령군 즉 함양에는 최치원이 태수로 재직하던 당시 올라가 노닐었다는 학사루가 있고, 최치원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는 함양 상림도 존재하고 있다.
만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리고 이어 아찬(阿飡)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산림과 각지를 유랑하다가 경주 남산, 강주(현, 영주시)의 빙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의 별서 등에서 은거하다가 마지막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의 작품으로는 난랑비서문이 있어 신라의 화랑도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으며, 계원필경과 동문선 등에 그의 시문이 일부 전하며, 금석총람에도 비문이 전한다.
사후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고 현종 14년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종사되었다. 경주의 서악서원, 태인 무성서원, 영평 고운영당, 함양 백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기타
일부 재야 사학자들은 천부경을 전하는데 최치원이 관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산 동백섬 일대의 경관에 반한 최치원은 자신의 호 '해운'을 따서 그 지역 지명을 해운대라고 붙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직접 새겼다는 '海雲臺' 석각도 동백섬 절벽 한 켠에 남아있다. 이러한 이유로 최치원의 동상과 시비가 동백섬 언덕에 생겼으며, 해운대구와 최치원이 벼슬을 하며 토황소격문을 지었던 양저우시구는 자매결연을 맺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