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갈리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 갈라티아 교회의 탄생
안티오키아의 교회는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선교사로 파견한다(사도 13,1-4). 선교의 목적지는 키프로스였다(사도 13,5-12). 행선지를 소아시아로 겨냥하고 서북으로 방향을 돌린다.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수도 페르게를 지나 갈라티아 남부인 고원지대 깊숙이 도착하게 된다(사도 13,13).
두 사람은 고원 지대에서 강행군을 계속하다 바오로가 병이 들어 잠시 휴양을 하게 된다. 오히려 이것이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갈라 4,13).
두 사람의 최종 목적지였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 남부 갈라티아의 중요 도시이고 로마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곳에는 상당수의 유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곳의 회장 지도자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초청했다(사도 13,14-15). 바오로가 그곳에서 행한 설교는 복음의 요약이었다(사도 13,17-22).
바오로의 설교는 경건한 이방인들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이 일은 결국 유다인 지도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바오로가 전도를 목적으로 회당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사도 13,42-45).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지역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오로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갈라티아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된다(사도 13,46-52).
2. 갈라티아 교회의 위기
갈라티아 남부에는 네 개의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세워진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다 지도자들이 이 지역 교회의 신도들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다. 그들은 할례의 필요성과 모세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면서 이방인들은 우선 유다교로 완전히 개종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강변하였다.
할례 문제는 갈라티아 교회 건립 초기에 야기되었던 문제였다.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방인의 지위를 지지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었다(사도 15,13-29).
그러나 수년이 지난 후(기원후 56년) 다시 율법주의적 지도자들은 이러한 쟁점을 다시 일으켜서, 사도 바오로의 복음 해석을 비난하여,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쟁점에 대한 바오로의 격렬한 반론이 갈라티아서에 담겨 있다.
갈라티아서는 논쟁의 와중에서 에페소에서 집필했다.
3. 갈라티아서의 내용과 신학
- 갈라티아서를 읽게 되면 첫 줄부터 바오로의 분노에 찬 심정이 전투적인 어조로 담겨 있다.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로서의 자격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변증하고 있다(1,15-2,10 참조).
- 갈라티아서에서는 감사의 언급도 없이 유다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한 해명을 바로 수록할 정도로 사태가 다급함을 짐작케 한다.
- 바오로는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이 없음을 분명히 천명한다(1,8-9). 즉 바오로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1,12)”이므로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 갈라티아 교우들이 복음의 축복을 대신하여 인간 행위에 근거한 경건주의로 되돌아가는 경향을 울분에 차 비난하고 있다(3,1).
- 만일 갈라티아 교우들이 율법주의자들에게 굴복을 한다면,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것이 허사라고 준엄한 경고를 한다(5,2-12).
- 바오로의 주장은 율법과 인간 행위(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었다.
- 구원의 핵심은 할례를 받느냐, 안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새로운 창조(6,15)와 상관이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창조는 하느님께서 계획하고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업인 것이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율법주의자들의 경건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다(2,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