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투사와 사모님
설희주가 막 차에서 내려 사무실 계단을 오르려고 할 때였다.
"고사장은 즉각 단체 교섭장에 나오라!"
옆 건물에서 머리에 띠를 두른 공원 수십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주먹을 높이 들고 구호를 외쳤다.
"나오라, 나오라!"
한 사람의 선창에 따라 수십명이 구호를 외쳤다.
"이게 뭐예요?"
설희주가 박기사를 보고 물었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괜히 저러는 거죠, 뭐."
박기사는 설희주를 빨리 사무실 안으로 데리고 가려고 애를썼다.
"지금 파업 중이에요?"
그러나 설희주는 발걸음을 옮길 생각은 않고 물었다.
"단체 교섭 중인데, 잘 안 돼서 중지했걸랑요."
박기사가 마지못해 설명했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노조 집행위원들이 빨리 단체 교섭 진행하자고
농성 투쟁, 아니 농성인가 뭔가 한다고 작업장에 죽치고 앉았다가."
"며칠 되었어요?"
"나흘짼가? 회사 간부들이 본 척도 안 하니까 떨쳐나왔군요."
설희주는 건성으로하는 것 같은 박기사의 설명을 들으며 사태를 짐작했다.
"저기 사장 사모님이다."
"왕년의 노동 투사 설희주!"
그때였다. 갑자기 일행 중 두 명이 소리를 지르며 설희주 를가리켰다.
"설희주!"
여러 사람이 구호처럼 외쳤다.설희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에 당한 일이었다.
"사모님, 우리 호소를 좀 들어주십시오.
저희들은 사모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나이 좀 들어 보이는 남자가 손짓으로 일행을 조용히 하게 한 뒤 설희주 앞으로
와서 공손하게 말했다.
"댁은 누구세요?"
"난 명왕성 기계 노조위원장 정준홉니다.
쟁의부장한데서 사모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쟁의부장?"
"오민수씨 말입니다."
설희주는 순간 아쩔함을 느꼈다. 그제야 집행위원들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까닭을 알았다.
설희주는 그들을 눈여겨보았다.
머리에 두른 흰 띠에는 '투쟁'이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모두가 수염이 꺼칠하게 자랐지만 눈동자는 불타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말겠다는의지가 보였다. 서너 명의 여자들도 표정은 같았다.
모두 서른명쯤 되어 보였다. 설희주의 가슴이 뛰었다.
몇년 전만 해도 저들과 같은 목적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앞장 서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구실로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설희주의 가슴에선 질책 같은 파도가 일었다.
지금이야말로 저들과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내가 사장님께 얘기하갰어요. 안 되면 회장님에게도 호소하겠어요."
"모두 조용히 앉아."
정준호가 손짓을 하자 모두 앉았다. 그 앞에 설희주가 서있었다.
멀리서 보면 여선생님이 운동장에 한 반 아이들을 앉히고 훈시를 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우리들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최저의 인간 대접을 받자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봐요."
정준호가 호주머니에서 유인물 같은 것을 꺼내 보며 말했다.
"첫째, 임금 인상입니다.
우리들의 최저 임금은 노총이 밝힌 도시 근로자 최저 임금에도 미달합니다.
그러면서 회사는 작년에 3백억원이 넘는 흑자를 냈습니다.
금년에는최저 13프로는 올려 주어야 합니다. 둘째, 휴일 수당의 지급입니다.
법정 휴일 수당까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통상 임금의 5프로는 지급해야 합니다.
셋째, 인사 문제입니다.
회사는 툭 하면 노조 간부를 지방으로 발령을 냅니다. 그뿐 아닙니다.
품질 관리하는 사원을 도금부로 발령내 아무 일도 못하게 하고 끝내는 실적 나쁘다고
정계위에 회부해 내쫓고 맙니다.
그래서 노조 간부를 징계 또는 이동할 때는 노조의 동의를 얻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사위원회에는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하고,
징계위원회에는 노동자들도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회사측과 노조측이 동수로 징계 위원을 두면 해결됩니다.
넷째는 회사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 회사에는 여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비서실에 있는 양경숙이 여사장이라고 합니다.
사장은 자기 할 일을 왜 철부지 여비서에게 다 맡기는지 모르겠어요.
온갖 유언비어가 다 떠돕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또 승진 인사의 편파성올 없애야 합니다.
노조보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물산에 있던 홍길수 란 사람을 무엇 때문에 벼락
출세를 시켜 우리 회사의 기획실장으로 데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서도 유언비어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회사측 교섭 대표로
내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답니까?."
"무엇보다도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자면 화사측 대표가 협상 테이블에 나와야 합니다.
오늘까지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쟁의 발생 신고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희주는 그들의 요구가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임금인상 요구도 크게 무리하지 않은 것 같았다.
더구나 양경숙의문제는 경영진의 도덕성에 관한 일이라,
노조가 떠들기 이전에 처리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여러분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나에게 이 회사 일에 관여할 권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회사 경영인의 아내라는 입장에서 여러분의 뜻이 관철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뜻을 이해하시면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싸우십시오."
설희주의 말끝이 조금 격앙되어 웅변조로 나왔다. 말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자, 우리 다 함께 합창합시다."
정준호의 선창에 따라 모두 일어서서 주먹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아 춤추는 조국,
노동자 해방 위해."
설희주는 노동조합가를 귓전으로 들으며 사무실로 올라갔다.
설희주가 사장실로 들어섰을 때 경숙은 보이지 않고
고봉식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녀을 쏘아보았다.
"잘하는군, 잘해. 누가 왕년의 투사 아니랄까봐.
아예 저놈들과 한패 되어 쳐들어오지 왜 혼자 왔어?
내가 여기서 창문으로 그대 설희주 투쟁 선동하는 모습을 다 보았단 말야."
"그럼 그들 요구 조건도 다 아셨겠군요."
설희주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설희주! 똑똑히 들어. 너는 명왕성가의 맏며느리야.
동시에 이 명왕성 자동차 사장의 여편네야. 네가 지금 어디에서 있는지는 잘 알겠지?"
고봉식 사장은 몇 마디 하지 않고 흥분해서 침을 튀겼다.
"잘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재벌가의 맏며느리 자격으로,
사장의 아내 자격으로 말씀드리겠어요. 저 노동자들 이야기 들어주어요.
돈 남기면서 왜 봉급 올려주지 않아요? 그리고 공정한 인사, 징계하시려면 노동자 참여시키세요.
그리고 양비서, 걔 딴 데로 전근시켜요. 공연한 오해 받으실 것 없어요."
"저 여자가 미쳤군. 봉급을 걔들 요구대로 13프로나 올려 주라고? 누구 망하는 꼴 보려고 그래?
봉급 13% 올리면 1년에 2백억원 이상 들어가."
"작년에 3백억원 흑자 냈잖아요? 그 돈 뭣에 쓰는 거예요?
결국 임금 착취했다는 얘기밖에 더 듣겠어요?"
"아이구 답답해. 저년이 완전히 미쳤군! 이 회사 재산이 얼만지 알아?
이 회사 재산이 1조원도 넘어. 1조원도 넘게 투자한 이유가 뭐야? 이 회사는 주식회사야.
영리를 추구하는 것이 제1의 목적으로 되어 있는 주식회사란 말이야.
1조원씩 투자해가지고 제놈들 먹여 살렸으면 됐지 은혜도 모르고 남는 돈 다 내놓으라고?
계산상으로야 3백억 남았지만 그중 악성 미수금 80억 빼고 법인세 백억 빼고 시설 투자
벡억 넣고, 남는 게 뭐 있어? 주주들 가질 돈은 제놈들 봉급의 몇백분의 1도 안 돼.
그런데 어떻게 하라구? 거기다가 휴일 수당 또 내라고? 아예 이 회사 집어 먹으라고 그래.
지들 보고 사장 전무 뽑아서 하라고 그래. 당신 정신 똑똑히 차려.
여기는 철없는 여학생들 가투하는 데가 아니야. 죽고 살기 하는 경영 전선이야.
내가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이 회사로 해서 먹고 사는 3만명이 밥줄 끊어지게 된단 말야."
설희주는 바보 멍청이로만 알았던 남편이 자기딴에는 조리 있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장 노릇도 오래 하면 언변이 느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 생각의 근본은 역시 부르조아적 발상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 거대한 재산이 마치 당신 재산인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처음부터 당신이 1조원 돈 가져다 이 회사 차렸어요?
은행돈 끌어다가 노동자 임금 덜 주고 일으킨 공 장 아니예요?
이제 노동자 위해 쓸 때란 말입니다."
"아이구 두야. 저런 걸 내가 왜 마누라라고 들여 놓았지.
저런 걸 내가 여자라고 침대에 눕혀놓고 씩씩거린걸 생각하 면 어이구, 두야!"
"좌우간 회사 살리려면 도망치지 말아요. 단체 교섭 테이 블에 나가요.
노동자 그 사람도 다 피가 있고 양심 있는 인간이에요.
나한테는 몹쓸 짓 해도 좋지만 노동자는 불쌍해요."
"썩 꺼지지 못해. 너하고 나하고는 근본이 달라. 나온 구멍부터 다르단 말야.
너 같은 년이 어떻게 잘못돼 이 집으로 들어와 이 지경이 되었나? 아이구, 두야!"
고봉식은 정말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고 밖으로 나갔다.
파티고 뭐고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설희주는 그날 혼자 집으로 돌아오면서 착잡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처음부터 자기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고봉식과 결혼했던가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가난한 핍박이 지겨워 낙원을 찾아 도피한 것인가? 가투와 공장 현장에서의 싸움으로는
아무것도 이를 수 없으니, 가진 자 속에 뛰어들어 세상을 바꾸어 보자고 한 것은 풍요
속에 안주하기 위한 핑계는 아니었던가?
자기를 속이기 위한 논리가 아니었던가를 몇번이나 되뇌이며 따져 보았다.
재벌가의 맏며느리로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자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고 싶었다든지,
허영을 한껏 채우며 오만해지려는 여성의 본능이 투쟁이라는 핑계를 만든 것은 아니엇던가?
설희주는 몹시 괴로웠다. 그녀는 시아버지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아버님, 제 의견을 꼭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이에요."
설희주가 시집 온 이후 시아버지에게 이렇게 비굴할 정도로 사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하던 노동자 들의 절규가 귀에 쟁쟁했다.
"회사가 조금 덜 벌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그만 행복을 줄수 있어요."
고회장은 기가 막히다는 듯 담배만 뻑뻑 빨다가 입을 열었다.
"아가, 네가 학교 다닐 때 노동 운동인지 학생 운동인지 하는 철없는 짓을 했다는 것은
알지만 생각이 거기까지밖에 안 가는데는 크게 실망했다.
네 같은 식으로 집안을 운영하고 회사를 운영하고,
나아가 나라롤 운영하면 얼마 가지 않아 모두 거덜나고 말 거야."
고회장은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회전의자를 돌려 버렸다.
"명왕성 그룹의 오늘이 있기까지 수많은 불쌍한 노동자들 이 피땀을 흘렸어요.
이제 이만큼 되었으니까 과일을 조금 나눠가질 권리가 있는 것 아내요?
운영하는 데 좋은 아이디어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것 아네요?
공정한 인사 위해 한마디 할 권리가 있는 것 아네요?
그들이 회사를 내놓으라든지 들어먹자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러나 설희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회장이 벽력 같은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네가 지금 나를 훈계하는 거냐?"
"죄송해요, 아버님. 하지만."
"내 몇 가지만 가르쳐 줄께, 똑똑히 들어." 고회장이 벌떡 일어섰다.
"임금 13프로 올려 달라. 좋지. 임금은 그야말로 다다익선. 오를수록 좋지.
하지만 자기들만 몇푼 더 받는 걸로 끝나지않아.
우선 회사 재원이 거기까지 못 미칠 뿐 아니라 자동차 종업원들만 올릴 수는 없어.
다른 24개 계열회사 수만 명을 다 올려야 하는 연쇄 파동이 일어나.
다행히 명왕성 자동차는 작년에 이익을 좀 냈지만 전자, 기계 회사들은 모두 적자야.
근데 그 회사 노조는 가만 있대? 아니, 설사 회사가 재원이 있다고 쳐도 그렇지.
지금 정부에서는 인플레 잡느라고 한자리 숫자 한자리 숫자 타령을 하는데 우리만 불쑥 올려?
그래서 정부에 밉보이고 인풀레에 앞장서란 말야?
그렇게하면 물가가 26프로 올라 결국은 근로자들이 더 못 살게 되는 이치를 왜 몰라?
그렇다고 임금 안 올리자는 것은 아니야. 올려 준다고."
고회장은 설희주와 달리 노동자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종업원 혹은 근로자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뭐 인사위원회에 들어오겠다고? 징계위원을 회사와 동수로 하자고?
미친 놈들. 아예 사장을 노조서 투표로 뽑지 그래. 하긴 그렇게 한 회사도 있기 있더라만.
그것은 엄연한 경영권의 침해야.
법을 깨뜨리는 일일 뿐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자는 일이야.
자본주가 무엇 때문에 돈을 대는거야? 경영권, 인사권 가지자는 거야.
근데 제놈들이 인사권 휘두르겠다고? 그걸 원하면 지들 이 돈 거둬 회사 차리면될 것 아냐.
회사는 법에 보장된 해고권이 있어. 그런 식으로 하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는지나알아?
철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안에 들어가 살림이나 살아."
"그건 아버님의 일방적인."
"듣기 싫어 !"
고회장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고는 옆방으로 갔다.
설희주는 고회장이 욕심만 가득 찬 위인인 줄 알았는데 제법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진 자, 기득권자의 자기 보호 논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싸움이 참으로 어렵게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희주는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막막한 절망에 부딪혔을거예요.
최루탄 냄새 피해 재벌 옷자락에 뛰어들면 뭐가 풀릴 줄 알았겠지요.
천만에. 더 큰 절망이 있을 뿐이지요."
영혜의 제벗대로 하는 해석을 듣고 있던 오민수는 머리를 싸매고 말았다.
"희주를 욕하지 마. 넌 희주를 욕할 자격이 없어. 너희들 모두가 희주 죽기를 바랬지?"
강형사의 머리에는 설희주라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처음엔 허영에 들뜬 한 가난한 집 여자가 돈에 홀려 앞뒤 재보지 않고 재벌 아들을 유혹한
여자로 비쳤으나, 그녀에 대한 조사를 하면 할수록 그녀의 모습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강형사는 그녀에게 평소 가장 호의적이었던 유일한 고씨 네 식구인 고봉길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고봉길이 그렇다고 해서 혐의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강형사가 캐낸 것은 고봉길과 설희주가 이상한 의심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설희주가 딱 한번 낙태 수술을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고 봉길의 씨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 남편 고봉식으로부터
심한 추궁을 당했다는 것이다.
고봉길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다.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그런 적이 있긴 있었어요.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요. 나를 형수와 사통한 패륜아로 보지 마세요.
그건 형의 오해였어요. 아니,
오해라기보다 뻔히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형수를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그때 형은 어떻게 해서든지 형수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싶어 했으니까요."
"설희주씨는 왜 낙태를 했나요? 애기가 있어야 그 집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할 텐데요."
강형사가 담배를 권하며 말음 재촉했다.
"싹이 노오랗다고 본 거죠. 골빈 식구들 틈에서 골빈 2세나 만들어 줄 골빈 여자는 아니니까요.
난 정말 우연히 말려들었어요.
어느날 야간 업소 일을 끝내고 아침 10시쯤 집에 들어왔더니 형수가 거실 소파에
엎드려 울고 있더군요. 나는 무어라고 할 말이 없어 한참 지켜보고 서 있었지요.
형수는 내가 온 줄을 알고는 눈물을 닦고 옷매무새를 고치더군요.
그러더니갑자기 돈 10만원만 있으먼 빌려 달래요."
"아니, 설희주씨는 그만한 돈도 안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재벌의 맏며느리며 사장의 사모님이."
"만들려면 만들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꼭 필요한 돈은 크레디트 카드를 써서 형한테 자동 결재를 받았어요.
그리고 밍크코트 사건 이후 보석이나 패물은 절대로 팔거나 남을 주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현찰이 갑자기 필요할 경 우엔 빌릴 수밖에 없지요."
"알 만하군요. 그래서요?"
"그래서 마침 야간 업소에서 일당으로 받은 돈이 있어 주 었지요.
그랬더니 형수는 대강 옷을 걸쳐 입고 화장도 하지 않은채 외출을 하더군요.
나는 무심히 보고 있다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일을 저지르지 않나?
어디 가서 자살이라도 한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 뒤를 밟았지요.
그랬더니 뜻밖에 동네 앞에 있는 산부인과로 들어 가더군요.
나도 따라 들어갔더니 간호원과 실갱이를 하고 있었어요.
먼 발치서 보고 있었더니 낙태 수술올 요구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일이 성사되었는지 형수가 수술실로 들어 가더군요.
나는 거기서 몇 시간을 착잡한 심정으로 보냈어요.
형수는 핼쓱한 모습으로 나오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부축해서 나오던 간호원이 나를 보고 아저씨 되십니까? 아저씨가 동의하셨다면서요?
하고 물었어요. 나 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죠.
그리고 결혼식장의 신랑처럼 형수를 내가 인수받아 부축해서 집으로 왔어요. 우리는
집으로 오는 동안 한 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근데 이것이 소문이 난 거예요.
마침내 형 귀에 들어가고."
"주둥이 닥쳐 ! 더러운 여자." 고봉식은 펄펄 뛰었다.
그러나 정말 자기 아내가 부정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정말 동생과 무슨 일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 정도로 끝나지 않고 주먹으로 때려서 설희주를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나는 결백해요. 그건 당신 아기예요."
"그런 거짓말 누가 믿을 줄 알아? 그럼 왜 봉길이하고 같이 병원에 들락거려.
두 연놈이 만든 씨 아니면 왜 두 연놈이 함께 긁으러 다녀? 할 말 있어?"
"당신이 더 잘 알듯이 나는 이 집에서 현금 한푼도 만질수 없잖아요.
그래서 도련님한테 도움을 청했을 뿐이에요."
"둘러대려면 제대로 둘러대. 고봉식의 마누라가 돈 10만원 없어 빌려 썼다면 개도 웃는다 웃어.
너 나하고 언제 같이 잔적 있어? 최근 대여섯 달동안 한번도 널 건드린 적 없어.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 하고 싶어 봉길이 놈한데 벌려 줘?"
고봉식은 방에 있는 베개며 시계를 마구 집어던졌다.
"그래 몇번이나 벌려 줬니, 더러운 년!"
"당신은 술 취했을 때마다 나한데 짐승처럼 덤벼들었어요.
마치 밤거리에서 돈 주고 산 여자처럼 애정 한 줌 없이 덤벼들어서 잉태된 죄 많은 씨앗을
낳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당신처럼 오만하고 인간답지 못한 2세를 이 세상에 또 나오게
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공해예요. 인간 공해!"
"그래도 거짓부렁일 계속하고 있어. 떳떳한 아이였으면 왜 뗐겠어?
네 말을 믿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당장 이집에서 나가."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설희주는 더 이야기를 해 보았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던지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가서 길을 막아 놓고 물어봐! 하늘 같은 남편의 허락은 커녕 눈치 한번 안 보고
덜렁 아기를 지웠다고 그래 봐!
잘 했소 하는 미친 놈 있나. 하긴 남편 허가 맡고 가랭이 벌려준 건 아니니까."
우리가 언제 마주 앉아 이야기 한번 나눈 적 있어요? 당신은 나를 아내로 취급한 적
한번이라도 있어요? 당신 눈치 볼 틈이라도 준 일 있어요?"
"여자 하기 나름이야. 왜 남편을 그렇게 못 만들어? 솔직하게 말해서 네가 나를 진짜
남편으로 생각하니?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넌 날 사랑한 게 아니고 가진
돈을 사랑했잖아. 내가 아니고 돈 보따리, 사장 사모님 자리 보고 시집은것 아냐!"
드디어 고봉식은 가장 모욕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설희주는 오히려 담담했다.
"그런 여자랑 왜 결혼했어요?"
"내가 미친 놈이지. 눈깔이 멀었었지.
반반한 얼굴에 씌워서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잃었다고 할까?
저 마귀 같은 얼굴을 좋아했다니. 저 거울 앞에 서서 화냥년의 꼬락서니가 어떤지 잘 봐!"
설희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려는 듯 돌아앉았다.
"이제 내 몸에서 풍기는 건 증오의 냄새뿐이야. 화약 냄새야, 화약.
얼마 안 가 그 화약은 터지고 말걸. 화약 터지기 전에 죽어 없어지든지,
내 앞에서 꺼지는 게 좋을 걸!"
"당신은 증오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하하, 그래도 오기는 살아 가지고. 하지만 달라.
널 증오하는 것은 네게 증오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야.
설희주, 넌 나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었어.
내가 얼마나 무능력하고 멍청한 인간인지 깨우쳐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 !
하지만 난 너에게 허수아비가 될 수는 없었어. 넌 나와 결혼하고 얼마 못 가 통곡을 했지만,
이제 나를 짓밟은 그 알량한 우월감을 한탄하게 될 거야.
이혼해 달 라고 눈물로 애원하면 이혼해줄 거야. 하지만 일확천금의 망상은 버려야 해!
넌 처음 들어올 때처럼 빈 손으로 이 집에서 나가야 돼.
한 가지 달라진게 있다면 더럽혀진 네 밑구녕을 그대로 차고 가는 일이야!"
고봉식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러나 설희주는 모멸감을 더 견딜 수 없었는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형수는 몇 달 동안 그렇게 당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혜 누나나 영혜 누나, 시어머니까지 뻔히 알면서 한 마디 씩 거들어
형수를 괴롭히고는 했지요."
강형사는 고봉길의 이야기를 들으며 설희주가 얼마나 어 려운 처지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