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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리면
05 곽태중
뭐하는 거야? 시끄럽잖아. 쉿! 대화를 시도라는 거라구. 동생은 침대 위에 올라앉아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 노크하듯 벽을 두드렸다. 똑똑똑, 똑똑. 여자는 자신의 침대 시트에 라면 국물이 튄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동생은 웬만해선 여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외계인과 교신이라도 하는 듯 신중한 동작이 계속되고 있었다. 똑똑똑, 똑똑. 호기심과 기대가 잔뜩 담긴 동생의 눈빛을 보면서 여자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동생은 자신과는 달라 다분히 엉뚱한 면이 있었다. 저녁당번이면서 저 혼자 라면을 끓여먹는 얌체 같은 면을 보이는 것이 그것이었다. 야, 그만두라니까. 여자는 결국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생은 노크를 멈추지 않았다. 꼭 쓸데없는 일에만 집요하지, 저건. 바로 그 때, 건너편에서 응답이 왔다. 똑, 똑, 똑, 똑, 똑똑. 동생은 의기양양해져 여자를 향해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러나 여자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는 신기하다기보다 수상쩍고 불길했다. 여자는 동생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그런 장난은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너. 건너편에 있는 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게 뭐니.」
동생이 장난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사람 맞아. 사람 중에서도 남자. 남자 중에서도 라면을 먹고 있는 남자야. 그래, 라면을 먹고 있겠지. 여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동생이 갑자기 라면을 끓인 것은 옆집, 즉 벽 건너에서 라면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었다. 대체 집을 어떻게 지어놓은 것인지, 선명한 음식 냄새가 무방비하게 스며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남자인 건 어떻게 알아? 여자의 물음에 동생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아는 수가 있지. 408호엔 젊은 남자 혼자서 살아. 되게 잘 생겼다구. 언니 스타일일걸? 형부보다 백배는 나아. 동생은 여자의 애인을 형부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형부 대접을 해주는 건 아니었다. 만날 적마다 까불고 비싼 것 얻어먹을 궁리만 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동생을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옆집 남자가 어떻게 생겼든, 너랑 무슨 상관이니. 오지랖도 넓어.」
그 때 다시 한 번 똑, 똑, 똑, 똑, 똑똑, 신호가 온다.
혼곤한 낮잠에서 깨어나면 늘 배가 고프다. 남자에게 잠이란 마치 깊은 늪 속을 유영하는 것과 같아서, 헤어나려면 굉장히 힘이 든다. 온몸이 젖어 축축하다. 남자는 팔을 치켜든 채 겨드랑이에 코를 가까이 댄다. 수중 식물의 비릿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남자는 책장 뒤편의 여닫이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한여름 오피스텔의 내부는 숨이 막히도록 푹푹 찐다. 그러나 남자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들여놓지 않았다.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기는 해도, 더위 때문에 짜증을 내는 법이라곤 없다. 특별히 인내심이 강해서는 아니다. 참기 힘든 열기를 외부의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남자의 배에서 크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남자는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허둥댔다. 턱에 덜 깎인 턱수염이 갓 자라는 버섯같이 보였다. 뭘 좀 먹어야겠군. 혼잣말치고는 지나치게 크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아, 잠깐만. 전화하는 걸 잊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신호가 가기 시작하자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점잖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머니, 접니다. 아버지 몸은 어떠세요? 다행이네요. 예, 내일도 전화하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남자는 통화가 끝나자 눈에 띄게 긴장을 풀었다. 잔뜩 올라가 있던 어깨가 제 위치로 돌아왔다. 남자는 매일 양부모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안부 전화가 흔히 그렇듯,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남자에게 방학 동안 편히 쉬어둘 것을 당부했다. 그래야 개강하면 힘내서 학교 다닐 것 아니냐고. 남자는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휴학한 지 벌써 일 년도 넘었다. 그 일 년 동안 남자는 집 안에서만 지냈다. 일하지 않고, 공부하지도 않고, 놀지도 않았다.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을 사랑했다. 내키면 언제든 잠을 자는데, 마음만 먹으면 하루이건 이틀이건 깨지 않고 잘 수 있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누군가 혀를 찬다 해도 남자는 태연할 것이다.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재미로 살아왔다. 물론 양부모는 남자의 이런 생활을 전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독립하기 이전의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남자는 남몰래 지독한 휴식을 꿈꾸곤 했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져 외따로 살아가는 죽음 같은 삶. 예전에 남자가 가장 자주 꾸던 꿈은 무인도에 관한 것이었다. 현재 남자는 그 꿈을 거의 이룬 셈이다. 양부모가 그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 즉시 까무러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배고프지? 조금만 참아. 남자는 중얼거리며 걸어가 전기밥솥을 열다. 밥은 누렇게 변색돼 있고, 그것도 한 주걱이 될까 말까한 양이었다. 아, 이런. 갑자기 시무룩해진 남자는 이윽고 조심스럽게 찬장을 열어보았다. 라면 한 개가 남아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꺼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가끔은 밥 대신 라면도 괜찮잖아.」
물이 끓는 동안 남자는 가벼운 운동을 했다. 티브이 건강 프로에서 주의깊이 봐두었던 동작이었다. 크게 박수를 한 번 치고, 두 손을 허리 뒤편으로 돌려 다시 한 번 쳤다. 이것을 빠르게 반복하다 보면 하체를 앞뒤로 흔들게 되는데, 남자는 그 리듬이 우스워서 히힛 웃곤 했다. 뜨거운 면발을 입안에 우겨넣던 중, 남자는 벽으로부터 들려오는 어떠한 소리를 들었다.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남자는 소리의 진원지인 벽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숨이 가빠왔다. 침착해, 아무것도 아니니까. 남자를 안심시키려는 내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고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를 부르고 있어.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벽 쪽으로 다가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여자의 구두 굽 소리가 일정치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 여자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절전을 이유로 불이 모두 꺼져 있어 복도는 매우 어둡고, 그래서 더욱더 길어 보였다. 여자를 초조하게 만드는 다른 누군가의 발소리는 단순한 환청일 수도 있었지만, 여자는 무언가의 두려움을 쫓으려는 듯 손이 자주 뒷목에 가 머물렀다. 뒤를 돌아본 여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아니 그 어둠 속에 뭔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잠시 숨을 멈춘 채, 뭔지 모를 것과 눈싸움을 벌였다. 물론 먼저 시선을 피하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여자였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꾹꾹 누른 후 손잡이를 꺾어 잡아당겼다. 집은 비어 있었다. 동생은 학과 동기들과 일박이일 엠티를 갔으므로 내일 오전쯤 돌아올 것이었다. 여자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왼손을 들어 올려 눈앞에 가져다댔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허전해진 네 번째 손가락만은 아주 잘 보였다.
「황당해 죽겠어.」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여자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애인은 다짜고짜 여자의 손을 잡아채더니 억지로 커플링을 빼냈다. 약간 작은 듯 꼭 맞던 반지가 한 번에 벗겨져나가자 손가락이 얼얼했다. 영문을 몰라 벙벙하게 서 있는 여자의 눈에 애인의 엉망이 된 얼굴이 들어왔다. 오른쪽 눈두덩이 잔뜩 부어오르고 입술 양끝은 찢어져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역겨워.」
그는 씩씩거리며 이 한마디를 내뱉더니 성큼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그가 역겹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임을 처음 알았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이라니. 여자는 온힘을 다해 그를 쫓아갔다. 왜 이래? 폭발하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여자가 짜낼 수 있었던 말은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러나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여자의 흐느낌이 멈췄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억울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따지고 보면 여자에게 일어난 일은 너무도 자명했다. 그 자명함 때문에 울었다. 궁금한 것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일이 아주 심각한 것이라고 해도, 여자는 그의 행동을 용서할 자신이 없었다. 여자에게는 애인의 유무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역겹다’니. 하늘에 맹세코 역겨울 만한 짓은 단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결 흥분이 가라앉았다.
근래 들어 여자에게는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그다지 큰일이 아니라 그냥 넘어갔던 것인데, 곰곰 생각해보면 하나하나가 다 의심스러웠다.
쓰레기봉투가 하나 가득 다 차면 일단 현관문 앞에 내놓곤 했다. 나중에 외출하면서 들고 나가 오피스텔 밖 지정장소에 버렸다. 그런데 여자가 문 앞에 세워뒀던 쓰레기봉투가 최근 서너 번인가 계속 사라졌다. 동생은 청소를 비롯한 집안일 대부분을 여자에게 미루고 자신은 손도 까딱 않고 있었다. 웬일로 기특한 일을 했는가 묻자, 동생은 무슨 소리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여자는 자신이 갖다버리고 착각을 하는가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같은 일이 몇 번씩 반복되자 상황은 명백해졌다. 누군가 여자네 집에서 내놓은 쓰레기를 매번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남의 집 쓰레기를 어디다 쓰려고 훔치나 싶어 여자는 찜찜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수고를 덜기 위한 누군가의 호의일 수도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동생이 외출해 있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다짜고짜 ‘시켜놓고 왜 안 와?’ 했다. 알고 보니 집으로 생선초밥이 배달돼온 상태였다. 여자가 생선초밥을 유난히 좋아해 자주 시켜먹는 건 사실이지만 그 때는 아니었다. ‘맛있게 드세요’ 하고는 그냥 가버리던걸. 그래서 계산은 언니가 했나보다 했지. 아니야? 배달이 잘못 됐나보지, 땡잡았다. 그러더니 동생은 전화를 끊었다. 집에 가 보니 초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너 괜찮아? 배 아픈 것 같지 않니? 여자는 의심 섞인 눈초리로 동생에게 물었다. 상했거나 독이 든 것은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생각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동생은 아주 멀쩡했다.
여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십팔 평 원룸의 좁은 공간을 천천히 걸어 다닌다. 그러다 바닥에 팽개쳐뒀던 가방을 집어 들어 속에서 삼단우산을 꺼낸다. 화사한 분홍색인데다 가장자리에는 레이스까지 달려 있어 옷차림과의 조화를 필히 고려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우산이었다. 아침에는 소나기가 내렸다. 동생은 자기 우산을 잃어버렸는지 여자의 우산을 들고 나갔다. 나 언니 우산 가져갈게. 여자는 잠결에 응, 하고 대답해버렸을 것이다. 여자도 외출을 해야 하는데 당장 쓰고 나갈 우산이 없으니 난처했다. 편의점까지는 거리가 멀었다. 우산을 사러 가는 동안 흠뻑 젖을 게 분명했다. 여자는 일단 밖으로 나갔다. 건물 현관 안쪽에 서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는 듯했다. 약속을 미룰까 생각하던 차에 자신의 집, 407호 우체통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거짓말처럼 우산이 하나 꽂혀 있었다. 여자는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그 우산을 쓰고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폭우보다 더한 봉변을 당했다. 여자는 아직도 입고 있는 자신의 외출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분홍빛 정장 투피스가 함부로 주름져 있었다.
여자는 누군가가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느꼈다. 그가 자신에게 선의를 갖고 있는 인물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튼 누군가 있었다. 여자의 생활 속에 침투하려 하는 미지의 인물이. 최근 여자는 자신을 따라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어쩌면 그것은 평소에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사소한 소리인지도 몰랐다. 여자가 새삼스럽게 의식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여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에게 이야기했다. 내버려둬요.
여자는 샤워를 하고 나와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켠 후, 그와 주고받았던 메일들을 하나하나 열어보고 모두 지웠다. 여자 스스로도 그것이 별 의미 없는 짓인 줄 알고 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 딱히 무슨 행동을 해야 좋을지 여자는 알지 못했다. 한참 그 일에 열중하던 여자는 새로이 할 일을 발견해냈다. 모니터 옆에 세워진 액자 속에서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여자에게는 다정한 둘의 모습이 넌센스였다. 여자는 액자를 들어 벽을 향해 집어던졌다.
남자는 찬물에 적신 수건과 얼음주머니를 이불 옆에 가만히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벽을 향해 옆으로 누웠다. 눈앞이 자꾸 흐려져 아예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칠 새 없이 땀이 솟는다. 온몸이 홀랑 타서 재가 돼버릴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무력하게 견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남자는 믿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남자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이목구비를 떠올리려 하면 머릿속이 금세 새하얘졌다. 가물거리는 형상이 잡힐 듯 말 듯 다가오면 누군가 재빨리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느낌이었다. 그 지우개는 어쩌면 남자 자신의 것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대신, 그들이 했던 말과 행동들은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의 평온한 일상에 가끔씩 끼어드는 유년의 기억들은, 예측과 대비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큰 해를 입히는 태풍과도 같았다. 태풍을 일 년 내내 의식하고 걱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남자도 보통 때 그것을 잊고 지냈다. 다행한 점은 그것이 매우 규칙적으로 찾아오고, 그 주기가 꽤 길다는 것이었다. 현재 남자는 이 년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는 얼른 스스로 대꾸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자의 열병은 시작과 끝이 비교적 분명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바로 눈앞의 일인 듯 현란하게 펼쳐지기 시작하면, 남자는 어쩔 수 없는 살의로 거세게 몸부림쳤다. 그 살의가 일단락 지어질 수 있는 것은 남자가 그들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분명치 않은 것을 대하고 있으면, 그것을 향한 감정 역시 분명치 않아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열병은 늘 그렇게 수그러들었다.
여덟 살 때였을 것이다. 남자는 햇빛을 쐬지 못해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창백하고, 몸집이 조그만 아이였다. 당시 남자의 집에는 새떼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자개농이 하나 있었다. 혼수로 장만해왔던 그 장롱을, 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성껏 닦았다. 그러면서 단조의 느린 노래를 불렀고, 남자는 컴컴하고 비좁은 공간에서 그것을 듣곤 했다. 아주 먼 곳에서 흘러오는 듯한 그 소리가 남자의 몸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남자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얕은 웅덩이가 여러 군데 패였고, 곳곳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잔잔히 고여 있는. 고인 물은 어머니의 눈처럼 맑을까. 어머니의 체온처럼…… 서늘할까. 남자도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장롱 안에서 잠을 잤다. 잠에서 깨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남자를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것은 처음 닷새 정도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장롱 안에서 지냈다. 자신을 둘러싼 어둠이 마치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했다. 세월이 흘러 남자가 ‘아늑하다’라는 표현을 배우게 됐을 때, 그는 어머니의 품속이 아닌 다른 곳을 떠올렸다.
밥을 먹을 때만은 밖으로 나와야 했는데,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던 그 고운 목소리로 남자를 불러주지 않았다. 단지 장롱을 똑똑똑, 똑똑, 하고 두드릴 뿐이었다. 밥 먹자, 아들. 그러면 남자는 똑, 똑, 똑, 똑, 똑, 똑, 하고 응답했다. 알았어요, 엄마. 남자는 손 갈퀴를 만들어 흐트러진 머리를 서둘러 정리했다. 그리고 대강이나마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머니는 정돈되지 않은 모든 것을 싫어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마주하는 밥상은 늘 반찬이 형편없었다. 그래도 남자는 투정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싹 긁어먹었다. 그러지 않으면 어머니가 설거지를 할 때 그릇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할 테니까. 남자는 입안에 든 것을 씹으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살피는 데 익숙했다. 어머니는 식사를 마칠 때까지도 남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젓가락질만 반복했다. 어머니의 밥 먹는 모습은 흡사 고된 노동처럼 보였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쉬워서 오히려 괴로운 작업 같았다. 남자는 어머니의 삶 역시 그러한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벌겋게 부어오른 뺨이나 터진 입술을 볼 때 남자는 예의 그 노랫소리를 들었다. 느려서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슬퍼서 느린 것 같기도 한 노래. 남자에게 있어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차갑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기도 한 사람이었다.
왜 어머니를 못 나가게 해요? 남자는 꼭 한 번 아버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직접 뭔가를 묻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낸 용기는 물거품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남자는 내심 ‘사랑해서’라는 대답을 기대했었다.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작정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고, 도망치면 죽여 버릴 거라고도 했다. 어머니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집 안에만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왜 도망치지 않느냐면서 어머니를 때렸다. 그 해 여름, 어머니는 남자를 장롱 안에 가두었다. 남자는 울면서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살갗이 벗겨지도록 장롱 문을 두드렸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가두어야 하지?
남자는 눈앞의 벽에 이마를 가져다댔다. 서늘한 촉감에 양어깨가 절로 떨렸다. 머릿속에서 안타까이 맴돌기만 하던 노랫가락이 순간 선명해졌다. 남자는 불안한 허밍으로나마 애써 그것을 붙잡았다.
네 얼굴은 이제 말짱하구나. 근데 내 속은 아직 누더기란다, 개자식아. 여자는 옛 애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마음속에서 수십 번 재생되는 말들을 밖으로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자 여자는 그럼 그렇지, 했다. 사과하겠지, 오해했다고,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용서해달라고. 그러나 ‘만나야겠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여자는 이대로 그를 만나지 말까도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유라도 알아내야지, 어떤 이유를 대든 무조건 면상에 침을 뱉어줘야지, 그게 어려우면 음료수라도 끼얹어야지. 여자는 굳게 마음먹고 나왔다. 그러나 여자의 컵에 시선을 둔 그는 벌써 십오 분 째 아무 말이 없다. 결국은 기다리다 지친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하자는 거야? 뭘 하자는 게 아니야.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그의 대답이 곧바로 뒤따라왔다. 여자의 눈동자가 커지며 입이 반쯤 벌어졌다. 난 더 이상 너란 애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여자는 어이가 없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눈도 깜빡하지 않고 독설을 풀어내는 그가 숫제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자가 알고 있던 그는 심약하고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 정말, 죽고 싶었다. 그런 건 다 남들 얘긴 줄 알았어. 그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여자의 입이 달싹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죽고 싶었던 건, 남들 얘긴 줄만 알았던 일을 실제로 당한 건, 그가 아니라 여자였다. 뭐가 어째? 여자가 언성을 높이자 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씹어뱉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말을 씹어뱉기 시작했다. 그 놈이 왔었어, 나한테. 누구냐고? 여태 상황파악이 안 되나보지? 이미 다 끝났다구. 더 이상 연기 안 해도 된단 말이야. 여자는 오렌지 주스가 가득 담긴 컵을 잡는다. 손아귀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그 놈은 뭐고, 연기는 뭐야? 이게 지금 무슨 수작이야, 너. 그의 얼굴 전체가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그가 내쉰 한숨이 여자의 손등에 닿아 부서졌다. 그는 아무래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목까지 붉게 물들어 있다. 여자는 그의 충혈 된 두 눈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것을, 넋 놓고 지켜보았다.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진다면 자신도 모르게 급히 손바닥을 내밀어 받아낼 것만 같았다. 그의 말투는 하소연조로 변했다. 너 진짜 왜 그래, 응? 너, 이런 애 아니잖아. 난 용서할 수 있는데, 그러려고 나왔는데, 너 왜 그러니.
집에 돌아온 여자는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막 끝내고 문을 나서는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자신이 여자와 오 년째 사귀어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 ××, 그만 놔주세요’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여자가 너무 힘들어한다고, 그 애가 사랑하는 건 예전에도 지금도 나 하나라고 덧붙이면서. 여자는 그의 설명을 듣고 마구 화를 냈다. 어떻게 낯선 사람의 말만 믿고 자신을 의심할 수 있느냐고, 그런 미친놈 따위 나는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변명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 새끼, 태도나 표정이 너무 진실해 보였다니까. 진짜야. 처절하기까지 했어. 나 아니라 누구든 믿을 수밖에 없었을 거야. 씨팔.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난. 거짓말을 하면서, 어떻게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여자는 남자의 외모에 대해 일부러 묻지 않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나면, 남자가 완전한 실물이 되어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여자는 이미 잠긴 문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분홍색 우산을 꺼내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 날 자신의 외출복과 우산의 색이 맞아떨어졌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여자는 자신의 의문을 묵살하듯 우산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리고는 다 차지도 않은 쓰레기봉투를 밖에 내다 버렸다. 올 테면 와라, 하는 심정이 되자 잠시나마 겁먹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여자는 다시 집을 나섰다.
비디오 대여점 주인이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였다. 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요? 여자는 괜한 관심이 성가셔 짐짓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얼마 전 출시된 코미디 영화 테이프를 골라 카운터로 가져갔다. 주인은 바코드를 찍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남자친구가 참 잘생겼데. 좋겠어, 아가씨. 여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남자친구라뇨? 주인은 뭐 그런 걸 가지고 정색을 하느냐면서 넉살 좋게 받아 넘겼다. 며칠 전에 아가씨 왔다가고 나서, 바로 그 친구가 들어 오더라구. 아가씨 안 왔느냐고 묻기에 방금 나갔다고 해줬지. 나가려다 말고는,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작게 묻는 거야. 우리 ××는 어떤 영화 좋아해요?
여자는 정신이 들자 인상부터 찡그렸다.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무거웠다. 집이구나. 여자는 낯익은 풍경에 안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느낌이 약간 이상했다. 여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누워 있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새삼 집 안을 휘둘러보았다. 침대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가구들의 배치도 달랐다. 자신의 집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여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양팔에는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여자에게 말했다. 낯선 얼굴에 낯선 목소리였다. 그러나 남자의 말투나 표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마치 여자와 자신이 오 년 동안 사귀어온 사이이기나 한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태에서 ‘납치’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여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여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는 여자를 남자가 가로막았다. 남자의 흰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감정의 동요가 없는, 편안하고 밝은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서둘러? 여기 408호야. 넌 옆집에 초대 받은 거야.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남자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해맑게 웃었다. 여자는 아찔해졌다. 이 남자 말대로 우리가 정말 사귀었던 건 아닐까? 여자는 잠깐이지만 이런 황당한 생각도 했다. 그만큼 남자의 태도는 친근했다. 여기 앉아. 커피 줄게. 남자가 식탁의 의자를 빼주며 떠밀자 여자는 얼떨결에 앉고 말았다. 남자는 커피포트에서 원두커피를 한 잔 따라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 와 있는 거죠? 우린 모르는 사이잖아요. 여자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침착하고자 노력하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져갔다. 눈빛이 불안정했다. 여자는 일단 남자를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극해서 이로울 것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설탕을 넣어야겠어요. 나 쓴 거 싫어하잖아요. 여자가 처음으로 웃어 보이자 남자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잠깐만. 남자가 설탕을 꺼내려 등을 돌리자마자 여자는 벌떡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컵이 떨어져 박살나는 소리와 남자의 다급한 발소리가 차례로 들린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남자가 여자의 팔을 낚아챘다.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날 모른다고 했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야? 네가 먼저 날 불렀잖아. 불렀다니요? 누가 당신을 불렀다는 거예요? 그 때,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짧게 신음했다 여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저 소리 때문이었어요? 불렀다는 게 저걸 말하는 거였냐구요. 남자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스쳐갔다.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아니었어? 네가 날 부른 줄 알았는데, 아니야?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다. 미친 소리 좀 그만해요! 그건 그냥 장난이었어요. 동생이 장난친 거라구요, 방금처럼. 여자는 옆에 벽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렸다. 이게 부르는 소리로 들려요? 여자는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엉엉 울었다. 울다가 쭈그려 앉았다. 여자는 남자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가 흠칫 놀라 거둬들였다. 남자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짧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여자는 몸을 굽히고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왜 나를 꺼내주지 않아? 남자의 음성은 간절했다. 여자는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미안해요. 여자는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른 채, 남자의 귓가에 몇 번이고 속삭였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갈게요. 가도 되죠? 여자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또 놀러 와도 돼요? 초대해줄래요? 남자가 고개를 들어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잠시,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여자는 남자를 남겨두고 자신의 집, 407호로 돌아왔다. 들어서자마자 동생이 쾌활하게 물었다. 왜 이제 와? 비디오 반납하고 온다더니. 여자는 말없이 침대로 가 누웠다. 남자의 어린애 같은 울음소리는 여자의 뇌리에서 당분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천장의 전등을 뚫어져라 주시하던 여자가 이내 시린 눈을 감았다. 오피스텔 안이 네모난 상자로 변하는 상상을 했다. 몽롱한 의식 사이로 동생의 말소리가 끼어들었다. 언니, 이젠 응답이 안 오네. 재미없어.(*)
아, 조낸 힘들어.
첫댓글 군대 마이 좋아졌네,,, 조낸 힘든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봐라. 소설을 쓰면서 왜 조낸 힘들었는지 답은 마지막에 나와있는 것도 같고 ㅋㅋㅋㅋ 태중아, 형이 학부 때 너에게는 살갑게 대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제대하면 많이 친해지자,,, 군대에서도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구나. 사랑한다.
그래 태중아, 찬세선배님 말씀 잘 새겨들어라. 너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구나. 읽으면서 내내 김영하의<이사>를 떠올렸다. 대화자체를 서술로 쓰면 확실히 속도감이나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 도언선배의 <Empty loom>도 생각나더라. 읽어봤으려나. 읽어봤겠지. 어쨌든 아주 자알 읽었다. 니가 아주 선배를 약올리는구나 ㅋ 다음에 휴가 나오면 제대로 쏠 생각하고 대전 오거라. 옴팡지게 뜯어먹어주마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