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국방 이야기💜
서울 종로에 안국동(安國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안국동은 조선시대 대제학을 지낸 '김안국' 이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김안국의 아버지는 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김숙이었다. 대제학은 당대 최고의 학자가 앉을 수 있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김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로 3대가 대제학을 지냈으니, 가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런 명문가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안국이었다. 자연히 한 몸에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외모만 총명하게 생겼을 뿐 속은 맹탕이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안국의 나이가 열네살이 되도록 하늘천 따지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아버지 김숙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조상을 뵐 면목이 없었다.
김숙은 냉혹한 결정을 내렸다. 어느 날 사촌동생 김청이 안동 지방의 관리로 가게 되었다며 인사를 왔다.
김숙은 그에게 아들 안국을 딸려 보내며 당부했다.
“아들을 거기에 정착시켜 영영 안동 사람으로 만들어 살도록 하게.”
김숙은 이어 아들에게 차갑게 덧붙였다.
“이제부터 난 너를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
너도 나를 아비로 여기지 마라. 그리고 다시는 서울에 오지 마라. 만약 오면 죽여 버리겠다.”
김청은 결국 안국을 데리고 안동에 부임해서 평범한 양반 규수를 물색했다.
마침 좌수(座首) 이유신에게 딸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혼담을 넣었다.
이유신은 김안국이 공부만 못할 뿐 집안 좋고 꽃미남이어서 사윗감으로 만족해했다.
안국은 처가에 얹혀 데릴사위로 살면서 밥만 축냈다. 장인 이유신은 들은 바가 있어 그를 가르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대장부께서 어찌 방 안에서 꼼짝을 안 하십니까? 글공부를 하셔야지요.”
김안국이 얼굴을 찌푸리며 속사정을 말했다.
“글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터질 듯 지끈거려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보다 못한 부인이 묘수를 생각해 냈다.
배려가 사람을 바꾸다
“우리 옛날이야기나 하며 놀아요.”
부인은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듯 풀어서 들려주었다.
본래 안국은 머리가 비상한데다 이야기를 좋아했다.
부인이 “들은 바를 말해보라.”고 하자, 안국은 한 대목도 틀리지 않고 줄줄 말하지 않는가? 부인은 뛸 듯이 기뻤다.
부인은 그날부터 매일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들려줬다.
물론 안국은 몽땅 다 외웠다. 어느 날 안국이 물었다.
“부인이 매일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다 어디서 난 거요?”
“책에서 읽은 거지요.”
“허어! 정말 글이란 게 그토록 재미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내 오늘부터 글을 읽어보겠소.”
이렇게 해서 김안국은 공부를 시작했다.
안국은 본래 영리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재미를 느끼자,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열심히 글을 읽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안국은 급기야 과거를 보러 서울로 향했다.
안국은 집으로 가지 못하고 자신을 길러주었던 유모 집에 몰래 숨어 지내며 과거를 치렀다.
결과는 수석합격, 장원급제였다. 그런데 시험지에 ‘김숙의 아들 김안국’이라고 썼기에 그날 저녁 시험관들은 축하인사 차 김숙의 집에 몰려갔다.
김숙은 분노가 폭발했다.
죽은 듯이 지내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아들놈이 올라와 내이름을 팔아 부정하게 시험을 치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시험관들의 설명을 들은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김숙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안국은 관직에 나가게 됐고 훗날 대제학에 이르렀다.
‘김안국전"을 지은 백두용은
평전에서
'대문은 잠겨 있고 쪽문은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대문만 두드릴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안국의 부인)이 대문이 잠겨 있자, 쪽문으로 들어가 대문을 열었다.'
김안국의 아버지, 작은아버지, 장인 모두 대문만 열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부인은 김안국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대문을 열기 위해 여러 고민하다 쪽문으로 들어가 안에서 대문을 열었다.
그것이 김안국 부인의 지혜였다.
김안국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그 댓가로 임금으로부터 많은 땅을 하사받았는데,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그중의 한 곳이 바로 북촌 일대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며 그곳을 안국방(安國坊)이라 불렀고,
안국방이 후에 안국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2024년 11월16일
이순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