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슬강좌/ 출애굽기 20 장(1)
출 20장(1).wma
결혼 십계명 (출 20:1~17)
일명 ‘밥퍼’로 세간에 알려진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라는 책에 보면 ‘결혼 십계명’이 나옵니다. 공감이 가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열 개의 항목이 모두 ‘하지 말라’는 부정(否定)형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지만 이제 출발하는 새내기 부부들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어찌 보면 본능적 경향을 거스르는 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 있어도 흠을 보지 말며, 입이 있어도 실수를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의 본능은 흠이나 실수가 더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걸 하지 말랍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두가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런 어이없는 당부가 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밭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장에서 목욕재계하고 하나님을 처음 만났는데, 당신의 법을 주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오늘 본문의 구조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법을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바로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신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도 이러한 생각에 다음과 같이 동조합니다.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44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 105:43-45) 그러므로 성경에서 십계명이나 그 외 하나님의 법을 주셨다는 것을 단순히 지키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공식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취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일종의 결혼십계명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변함없이 그 본질적인 속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의 결혼은 남자의 주권적 개념이 절대적인 시대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내는 남편의 소유라는 개념이 아주 강하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라는 개념입니다.(창 18:12 -사라가 아브라함을 내 주인으로 부름) 그래서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도 그 당시의 이런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아내를 네 이웃의 소유라는 범주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특별하고 귀중한 소유로 이스라엘이 지칭되었다는 것(출 19:5-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은 그들을 하나님의 인격적인 아내로 구별(거룩)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통해주신 십계명은 앞으로 동거 동락할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결혼 생활을 위해서 고안된 최선의 행복 틀이라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의 틀 안에서 살면 이스라엘은 지고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주신 행복 틀 결혼십계명도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부정형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형태로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죄인들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을 돕기 위한 목적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너는 ~하지 말지니라”는 말의 반복은 나의 마음속에 억제되어야 할 악한 경향들이 있음을 고발합니다.(렘 17:9; 롬 7:17~23; 딤전 1:9~10) 이렇게 행복을 망치는 요소들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므로 내가 왜 불행한지를 알도록 돕는 것입니다. 불행의 이유를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형이든지 긍정형이든지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이 강조하는 것은 악한 인간의 본성과 이기적 경향을 거부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할지라도 여기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 결혼생활이 순탄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 중 누가 자기의 악한 본성과 이기적 경향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렇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계명이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부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신랑되시는 예수께서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지고한 행복의 청사진을 사랑하는 신부에게 제시하신 것입니다. 신부를 사랑하되 죽기까지 사랑하사 자기 목숨으로 구속하시고 이 자리에 세우신 만주의 주, 창조주 하나님께서 신부를 위한 자기의 생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번도 선한 생각과 동기를 가지고 살지 못한 나를 향하여 무엇이 선한 것인지 그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절할 이유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의 시선을 돌려 매 순간 누가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서게 하였으며, 누가 나를 구원하였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렇습니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나 죽었음을 인정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롬 7:25~8:3)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죽은 내 속에 하나님 성령께서 임하사 예수의 생명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롬 8: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할렐루야.
존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재림교회의 석학 조지 나이트(George R, Knight)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사들에게는 살인하지 말라 혹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까닭이다.” 그리고 그는 “십계명이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랑 안에서는 사실 십계명이 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저 나를 사랑하시는 자의 선한 말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의 주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주의 음성을 들으니 사랑함이 넘칩니다. 믿는 맘으로 십자가의 주님께 나가오니 받아주시옵소서. 오늘도 더욱 가까이 십자가로 갑니다. 구세주의 보혈 흘린 그 곳에 나를 인도하시오니 오늘도 보혈의 바다에서 나는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0.6.17
Crossabbath Gospel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안식하세요,
내안에 임하신 성령께서 당신을 위한 소원을 이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