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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3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사도행전 제 22 강)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말씀 / 사도행전 25 : 1 - 26 : 32
요절 / 사도행전 26 :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지지 못합니다. 등불, 조명은 방안을 밝힐 수 있는 높은 곳에 달아둡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16).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총독과 임금과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 리더들이 자라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빛을 비추라고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님의 빛을 우리의 세상에 힘차게 비추기를 기도합니다.
1. 베스도 앞에 선 바울(1-10)
1절을 보십시오. 총독 베스도가 총독으로 왔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AD 59년입니다. 그는 AD 62년까지 총독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베스도는 부임한 지 3일만에 유대지역을 파악하고자 예루살렘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미 빌라도 총독 시절부터 유대, 갈릴리 곳곳에서는 반란이 계속되었습니다. 빌라도에 대하여 우리가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사실은 많은 유대인을 죽이며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펠릭스 역시 유대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지 못하였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계속 반로마 봉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총독 베스도는 유대인들을 잘 달래보려고 시도 하였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총독을 만난 대제사장과 유대 장로들은 베스도가 오자 다시 바울을 고소하였습니다.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호송되어 오는 길에서 습격하여 바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새 총독 베스도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과 소통하고 유대인들을 달래고자 하였지만, 대제사장과 유대 장로들 역시 유대 일반백성들에게 원망과 적개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 역시 로마와 한통속이 되어 백성들을 착취하는 자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자기들의 탐욕과 이익을 지속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총독 베스도가 유대인들을 누그러뜨리려 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다른 시도를 하여야 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되어 있으므로 가이사랴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소송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 하여금 가이사랴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열흘가량 지낸 후 가이사랴로 돌아왔습니다. 가이사랴에 돌아온 베스도는 재판을 열었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송사하러 온 유대인들은 여러 중대한 사건을 바울이 저질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바울이 율법을 모독하였고, 성전을 모독하였고, 소요사태가 일어나도록 선동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주장만 할 뿐 증거도 없고 증인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분명하게 반박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바울은 율법에 비추어 흠 잡힐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전 안으로 헬라인을 데리고 들어간 적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맞서라고 한 적 없으며, 흥분하고 난리를 피운 것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바울은 전임 펠릭스 총독 때에도 재판을 받았고 죄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증거를 대지 못하고 있고, 바울의 결백함은 분명합니다. 이러한데도 베스도 총독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가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묻습니다. 유다는 그야말로 총독들의 무덤이 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 것은 총독들의 정치 경력을 크게 손상 하였습니다. 총독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려고 노력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당하게 바울을 계속 구금하고 불합리하게 예루살렘으로 가겠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때 낙심하지 않았고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사도 바울은 세계의 중심 로마에 세워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졌고 말씀을 이루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으므로 불의하고 불합리한 자들로 인하여 불리한 상황이 이루어져도 당황하거나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중에 불편부당한 일들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나만 불리해지고 나만 손해보는 입장이 된다는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잡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굳게 믿으면 잘 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잘 참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게 해 주십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로마는 상소제도를 운영했습니다. 이 제도에 따라 로마 시민은 하급 재판에서 불리하다 판단 될 때, 상급 법정에 상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로마에 세우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믿으며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일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석방을 최우선 고려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세계선교를 최우선 고려하였으므로 빨리 석방되는 것보다 가이사에게 상소하노라 한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베스도는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일 것인지 재판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법대로 로마로 보낼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13-22절을 보십시오. 신임 총독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헤롯 아그립바II세와 그의 누나 버니게가 가이사랴에 왔습니다. 베스도는 전임 총독이 구류해둔 바울의 건을 가지고 아그립바와 상의하였습니다. 베스도의 의견에도 로마법에 위반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것과 그것을 전하는 것은 로마법과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므로 법에 따라 가이사에게 보내야 하는데 이 때 보고서를 작성하여야 했습니다. 황제의 법정에 소송당사자를 보내면서 1차 재판을 주관한 총독의 적절한 이유와 상소 내용이 반드시 보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스도는 유대를 잘 아는 아그립바의 의견을 보고서에 반영하고 합니다.
23-27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위엄과 격식을 갖추고 나왔습니다. 천부장들과 성 중의 높은 사람들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을 데려오라고 하여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작정하였나이다” 베스도는 말했습니다.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왕 당신 앞에 그를 내 세웠나이다 그 죄목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베스도는 무죄한 사람을 죄목도 없이 황제에게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유대의 사정을 잘 아는 아그립바가 왔으므로 재심문하여 보고서 작성에 도움 받고자 하였습니다.
26장 1절을 보십시오. 베스도는 바울을 아그립바 앞에 불렀고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변론해 보라고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유대 풍속과 문제를 잘 아는 아그립바 앞에서 변론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론하는 기회를 활용하여 예수님을 전하고자 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해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말합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유대인들이 잘 아는 바인데,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바라는 것과 동일하게 밤낮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 하나님께로부터 절실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6~8절).
9절을 보십시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유대교에 열심 있는 사람들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한 결과입니다.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사울은 가장 위험한 무기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독선과 영적 무지에 깊이 빠져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생각하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루살렘에서 크리스천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스테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는 옳다고 지지하고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지켰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체포한 크리스천들을 위협하고 벌주며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하여 격한 분노를 가졌으며 심지어 외국까지 나가 핍박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식과 열정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없이 육에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빛의 세계를 모르는 그에게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임하였습니다. 땅에 속한 그에게 하늘의 빛, 예수님의 빛이 내려와 비추었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늘에서 내려온 강하고 밝은 빛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의 그릇된 열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잘못 된 열정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 생명의 주님을 괴롭게 하고 있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잘못된 열정의 결과는 사울 자신에게 돌아가고 있음도 알려 주셨습니다. 유대에서 농사지을 때, 소가 옳은 길을 가지 않으면 가시채로 툭 쳐서 길을 바로잡는데, 어떤 소는 가시채로 쳐도 그 가시채를 오히려 발길질 하며 계속 그릇된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가치채로 또 소 다리를 치고, 소는 또 그 아픈 가시채를 발길질하고 이렇게 하여 방향을 바꾸지 않는 소는 계속 가시채로 다리를 얻어맞기를 반복하여 통증이 점점 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삶은 이런 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여 인생의 나쁜 열매 맺고 살아서는 악독의 대가요 죽어서는 심판받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내하심과 넓은 은혜 아래 사울은 자신의 그릇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파하고, 아름다운 열정을 드리도록 방향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본 것을 증언하는 일이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과 모든 인생들에게 다시 오실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 아래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그로 인하여 큰 상급과 영광을 덧입혀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바울은 더 이상 거스리는 자로 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악행을 일삼던 데서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땅에 속한 자에서 영원한 기업과 생명의 상급을 받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20-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메섹과 예루살렘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 나아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도록 널리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미워하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사 지금까지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부활의 주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베스도는 큰 소리로 바울의 이야기를 멈추게 하였습니다. 바울에 대하여 말하기를 유대교 전통을 지나치게 배우고 심취하여 미친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과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아그립바왕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27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는 바울의 담대하고 용기 있는 모습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잡혀 온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자신에 대한 변론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렇게 적은 말로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느냐? 아그립바는 바울의 전도에 대하여 마음을 열지는 않았으며 믿음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더라”
사도 바울의 변론의 결론입니다.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왕과 총독은 유대와 갈릴리를 다스리는 통치자이며 이 사람들과 함께 한 사람들은 유대와 갈릴리와 주변의 주류이자 지도층이며 유명인사들이며 영향력을 가진 Influencer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공회와 총독관저에서 총독과 임금 앞에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9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이 당시 세계는 권력이 임금들과 권력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이 사람들이 어떤 결정하는지에 관심이 컸습니다. 이들이 법을 정하고 법을 실행함에 따라 큰 이익이 날 수 있고 해가 날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의 생활 안정은 물론이며 살고 죽는 것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하여 예언하신 메시야 이심을 믿는 사람들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기독교인의 믿고 바라는 바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셨으며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부활, 영생을 주심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유대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로마법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공식 변론하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력을 통한 정복과 물질 풍요를 선이라 여기며 살고 있는 로마인들과 그들을 부러워하는 속주의 백성들에게 정복과 소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가장 귀한 부활의 생명임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총독 베스도와 헤롯 아그립바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의 변론을 통하여 함께 한 유력자들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님의 택함 입은 사람들은 변론을 들으며 마음에 울림과 영혼의 끌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입법, 사법, 행정 권력기관에서 일할 사람들이 어디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납니까? 대학 캠퍼스입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부활을 증언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임금들과 권력자들 앞에 전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임금들과 권력자들과 그 시대의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였다면, 우리는 예비 권력자들과 예비 인플루언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누구나 영혼의 소유자로서 평등하지만, 각 사람이 가진 영향력은 저마다 다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고 적게 배운 사람이 비중이 낮은 일을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습니다.
학생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총독과 임금과 당시의 유력한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논리를 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영향력 있는 말씀의 종이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사람이 영향력을 갖기 위하여 지식이 필요하고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말씀이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똑똑한 사람이 평생 쌓아 온 것을 한 번에 무너지게 할 수 있는데 그를 추켜 세워주는 것입니다.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높여 주면 곧바로 바른 판단을 상실하고 실수와 악수를 저지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몰락하게 하는 것은 돈 벌 찬스를 자꾸 주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에 완전히 마음이 빼앗겨 다시는 정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살아 있고 자기 이름보다, 더 많은 소유보다 예수님을 사랑할 때,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총독과 임금과 유력자들에게 능히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전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삶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영접한 그들은 더 큰 영향을 끼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할 것입니다. 졸업하신 분들은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청년들을 어리고 미숙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말고 장차 큰 영향력을 가질 큰 인재로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청년들을 높여주고 정중하게 잘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캠퍼스에 올라가지 못하여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터를 둘러보십시오. 대학교육을 받고 아직 젊어 앞날 창창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졸업하신 분들도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으면 누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그들에게 알게 하겠습니까? 세상이 정의롭지 않고 평등하지 않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화시키지 않는 것이 세상을 죄 아래 방치하고 불의가 더해가게 하는 일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내면의 죄와 싸우고 죄인의 삶을 청산하도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언하여야 합니다.
30-32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와 베스도와 버니게는 바울에게서는 로마 실정법상 죄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하였으므로 로마 법에 따르 그는 로마로 보내집니다. 이로써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오래 기도하였던 로마로 출발합니다. 로마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군대의 비용으로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씻음 받고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자든지 깨든지 먹든지 일하든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졸업하신 분들은 직장에서 말로써 증언하고 삶과 생활로써 인격으로써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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