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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의학을 빛낸 인물들』⑦ <대한응급학회>
- 박재황 전 원광대 의과대학 교수
■ 대한응급의학회 수련규정 만들고 수련제도 정착 기틀 마련
전국 최초로 원광대 의과대학에 응급의학교실 개설
전주~군산·전주~남원 도로, 전국 최고 교통사고 지역으로 환자 몰려
1980~90년대 초 대한민국의 산업화 속도는 가파르게 뛰어오르며 경제도 덩달아 발전했다. 국민소득 증가로 자동차 소유자가 많이 늘어나면서 교통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발생하는 교통사고가 세계에서 가장 많을 정도로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도 불가피했다.
그중 전북 전주와 군산시에 개설된 자동차도로인 전군도로(全群道路, 전주시와 군산시의 첫 글자만을 따서 전군도로라 부름)와 전주~남원 도로는 대한민국에서 사고가 가장 높은 구간이었다. 전주와 익산, 그리고 군산과 남원을 연결해주는 가장 중요한 도로였다. 전군도로는 일제 강점기에 호남평야의 쌀을 군산으로 운송해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1908년 개통된 국내 최초의 신작로였다.
이곳 도로에는 군산항으로 오가는 탱크로리 등 화물차들이 많이 움직였고, 대형사고가 종종 일어났다. 사고가 나면 환자들은 인근 병원으로 긴급후송됐다. 그러나 치료할 만한 곳은 원광대병원과 군산의료원 외에 없었다. 특히 의과대학이 있는 원광대병원에는 응급환자가 하루 100~200명 몰려들어 극도로 혼잡했다. 외상으로 오는 수술환자의 80~90%가 교통사고 환자였다. 추석 같은 명절에는 250여 명이 몰려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전북은 물론 충남 남서부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환자들도 대부분 원광대병원으로 후송됐다. 대전까지는 오히려 거리가 더 멀었기 때문이다. 원광대병원이 호남 서북부와 충남 남서부 지역 외상환자 치료를 도맡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원광대병원 외상환자 수술을 담당할 의사는 부족했고, 이들에 따라 환자의 생사가 갈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89년 외과 전문의가 된 박재황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원광대병원에 긴급 투입돼 외과수술을 담당했다. 전남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광주에서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스승인 조영국 교수가 3개월만 원광대병원에서 수술하라고 해서 파견을 나온 것이다. 당시 전남대병원은 광주의학전문학교의 맥을 잇는 부속병원으로 호남의 의사 인재 양성의 중추 기관이었다. 외과 의사였던 박재황은 광주에서 전북 익산까지 오가며 외상으로 인한 응급환자 수술을 임시로 담당하고 있었다.
■ 응급실 개선 필요성을 느낀 원광대 총장의 제안
원광대병원 응급실에는 환자들로 항상 넘쳐났다. 바닥에는 매트리스가 깔려 병상을 차지하지 못한 환자들이 이러저리 뒹굴며 길바닥에 그냥 누웠다. 그나마 매트리스에 누우면 다행이었다. 환자는 물론 의사들도 몰려드는 환자로 응급실이 지옥 같이 느껴졌다. 이 같은 상황은 의사뿐 아니라 원광대학의 경영진도 모를 리 없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은 게 경영진의 마음이었다.
원광대 총장이었던 김삼룡 교수에게도 응급실의 과밀화 해소는 중요한 과제였다. 그는 1989년 미국 휴스턴 허만 병원(Hermann Hospital)에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김 총장은 이곳 옥상으로 헬기가 내렸다 앉았다 반복하는 것을 보며 신기하게 쳐다봤다. 헬기에서 무선으로 교신하며 환자를 내리게 한 뒤 곧바로 수술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김 총장은 궁금해 병원 관계자에게 물어봤다. “이곳 병원에 응급환자만을 보는 전문의가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바로 수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응급의학 전문의가 대기하며 외상환자를 수술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응급의료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할 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곧바로 원광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박재황이 1989년 원광대병원 외과 교수로 발령이 난 뒤 응급실장으로 있었을 때였다. 박재황은 외과 교수였지만 2년씩 돌아가며 의무적으로 맡아야 하는 응급실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응급실에는 응급실장이었던 박재황과 인턴 2명이 근무했다. 응급실은 의사들도 기피하는, 임상 과로도 만들어지지 않은 응급환자 치료를 위한 임시로 거쳐 가는 곳에 불과했다. 김삼룡 총장이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박재황은 수술하고 있어 둘은 만나지 못했다.
수술이 끝나자 박재황은 병원장인 원종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총장님이 너 수술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마무리하고 원장실로 올라와, 총장님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박재황과 김삼룡, 원종진은 원장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인근 한정식집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박재황 선생! 내가 최근에 미국을 한 달 동안 갔다 왔는데, 희한한 것을 봤어요.”
총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 뭔데요?”
“병원 옥상에 헬기가 기다리고 있고 바로 수술장에 들어가 수술을 하는 거예요. 참 신기했습니다. 응급환자만 보는 전문의가 있더군요.”
“아! 그래요?”
총장의 말은 대한민국 의료체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생소한 이야기였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박 선생이 응급실장을 하고 계시죠?”
“네.”
“우리 병원 응급실에 오는 환자가 너무 많아요. 환자들도 불편하고 의사들도 혼잡스럽죠? 우리 응급실을 제대로 한번 만들어 봅시다. 그리고 병원에 응급의학과를 하나 만들어 보죠? 응급실 전담이 필요합니다. 박 선생이 좀 맡아주세요!”
“네 총장님. 그런데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 고민하는 박재황…스승에게 자문 구해
박재황도 응급실의 상황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 누구나 가기를 기피하는 곳, 그렇지만 환자들은 넘쳐나는 곳. 그런 곳이 응급실이었다. 그러나 응급실장을 하면서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 대한 개선 필요성은 항상 느끼고 있었다. 응급의학 전문의의 필요성, 응급실의 활성화에 대한 의사로서의 일말의 사명감 등을 생각하며 대한응급의학회의 필요성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1989년 2월 대한응급의학회 준비위원회 구성에 주축이 되었고, 1989년 12월 1일 대한응급의학회 창립총회 구성원으로도 등록했다. 응급의학 학회를 만드는 중심에 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대학 총장의 제안을 들었고,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할 일만 남았다. 또 외과 전문의로서 외과를 버리고 다른 과를 한다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외과에서 쌓아왔던 기득권을 모두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승은 물론 주위의 의견을 물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박재황은 사실 응급의학이 어떤 학문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대학 때 배운 적도 없는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한 학문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외과 전문의를 따고 그곳에서 선진의료기술을 많이 접했던 스승인 김신곤 전남대 의과대학 교수를 찾아갔다. 박재황은 김신곤 교수가 미국에서 막 돌아왔을 때 그의 밑에서 외과를 배웠다. 박재황은 김 교수에게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김 교수는 박재황에게 미국에서 자기가 배웠던 응급의료와 관련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응급실은 당직서는 것이 아니야! 독극물 화학, 응급정신과 등 응급환자 전체를 보는 것을 말하는 거야. 외상만 보는 것은 외상센터라고 하지. 응급실에는 의료장비만 갖춰놓고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할 일이 많은 곳이 응급실이야!”
김신곤 교수는 응급의학과 외상학 등의 개념을 하나씩 설명하며 책 한 권을 불쑥 내밀었다.
하버드 의과대학 부속병원인 MGH(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에서 발행한 응급의학 관련 교과서였다. “외과 의사도 응급의학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 나도 그곳에서 응급의학 교육을 받았네.”
김신곤 교수는 박재황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처음으로 응급의학에 대한 학문적 개념을 알려줬다.
박재황은 이어 자신을 원광대병원에 추천한 스승인 조영국 전남대 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를 찾아갔다. 외과에서 응급의학과로 과를 바꾸기 위해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도리였다.
주변에서는 외과에서 응급의학과로 전과하는 것을 반대했다. 4년 동안 고생하면서 외과 수련을 했는데 이제 와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응급의학과로, 그것도 아직 과로서도 인정받지 않는 곳으로 옮기겠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영국 교수도 반대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스승의 의견을 들을 참이었다.
그런데 조 교수는 의외로 쾌히 승낙하며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다. 가서 해라. 외과에서 파생된 것이 정형외과, 흉부외과 등이다. 모두 외과 전문의가 만든 과이다. 외과는 이미 8차선 도로와 같다. 응급의학과는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응급환자를 누가 책임져야 하냐? 바로 외과 의사가 해야 한다. 관련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처음이라서 어렵고 힘들겠지만, 그 길을 가다 보면 외과보다 더 큰 보람을 찾을 것이다. 응급진료는 공공진료이며,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고 특히 대학교수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 원광대 의과대학에 전국 처음으로 응급의학교실 개설
박재황은 외과를 그만두고 응급의학만을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하고, 김삼룡 총장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병원 내 응급의학과를 만들겠지만, 학생들에게 응급의학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의과대학에 응급의학교실을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강의를 편성해주고 이를 가르칠 교수 2명의 T/O를 주십시오. 그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박재황은 의과대학에 교실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결국 병원에서 환자만 보고 제자들을 양성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응급의학교실로 대학에 정식 등록해주기를 바란 것이다.
이 제안을 대학이 받아들여 1990년 3월 1일 병원 내에 응급의학과를, 다음 해인 1991년에 전국 처음으로 의과대학에 응급의학교실을 개설했다. 박재황은 병원 내에서는 과장, 의과대학에서는 주임교수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교수 2명의 채용은 무산됐다. 전망 있고 당시에 잘 나가는 외과 교수직을 버리고 응급의학과로 오려고 한 교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3월 유인술(현 충남대 의과대학 교수)이 1년 차로 입국하면서 원광대병원 응급의학과는 기틀을 다져나간다. 유인술은 레지던트를 하면서 1년에 한 번 집에 들어갈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 엑셀런트했다. 그는 집이 대전이었지만 신념과 고집으로 사명감이 있었으며 응급의학에 재미를 느꼈다. 각 과에서도 서로 데려가려고 했다.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원종진 원장도 박재황에게 “우수한 사람을 왜 응급실에 당직시키려고 해?” 하면서 유인술을 방사선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인술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응급실의 기틀을 다져나가고 있었던 유인술이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은 박재황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다음 날 박재황은 유인술에게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냐? 왜 사라졌어?”
“응급의학과에서 죽도록 고생해도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가 알아줘서 일하냐? 제대로 하려고 하면 여기 붙어 있고, 아니면 너 알아서 해!”
박재황은 유인술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오히려 으름장으로 제자에게 호통을 친 것이다. 그것은 더 강인하게 제자를 키우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유인술이 레지던트를 할 당시 전국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정부가 조직폭력배 일제 소탕 작전을 벌이던 때였다. 1990년 10월 13일 대통령 노태우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모든 권한을 동원해 폭력조직의 전면 소탕을 선언한 것이다. 익산에도 조직폭력배 간의 살인 및 폭력 사건으로 응급실에 수많은 환자가 몰려들었다. 2년 동안 범죄와의 전쟁이 진행됐지만, 조직폭력배들끼리의 폭력은 근절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흉기로 찔린 조직폭력배를 반대쪽 사람들이 원광대병원 응급실까지 흉기를 들고 난입하면서 유인술은 환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서 그들을 온몸으로 막기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이 모든 게 유인술에게는 고통처럼 다가왔고,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주위의 시선은 좋지 않아 일종의 회의감이 들었던 것일까?
■ 대한응급의학회 수련규정 만들고 수련제도 정착 기틀 마련
당시 3년제 및 4년제 수련 기간의 전문의 과정이 운영되고 있었다. 대한응급의학회도 4년제 전공의 수련과정으로 결정하고 수련계획과 전공의 기록지 초안을 작성해 사용하도록 했다. 관계 의학 분야는 10개 과로 결정했고 타과 전문의가 응급의학의 수련을 원할 경우 3년 차 전공의로 수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91년에 수련 과정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9명으로 이들은 전문의 인정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수련은 전문의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것으로 의사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했다. 특히 이제 갓 생겨난 응급의학회에서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성도 없었다. 자리에 대한 부담감으로 수련위원회를 떠맡는 것을 서로 꺼렸다. 그렇지만 후배들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수련규정이 필요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선배들의 당연한 책무이자 의무였다.
박재황은 1993년부터 수련 이사로 활동한다. 미국에서 정식으로 응급의학 학회 수련 담당자로 초청자로 초대받았다. 미국과 유럽, 일본의 수련규정과 교육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부족한 부분은 인터넷으로 자료를 보강했다. 다른 나라 시스템은 우리와 맞지 않는 것이 많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수련규정을 바꿨다. 박재황의 손에서 수련제도의 중요한 골자가 만들어졌다.
박재황은 대한응급의학회의 수련규정의 목표는
첫째, 각종 질환의 응급 발현 시와 대량재해 등의 사고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환자의 생명을 보존하며 활력징후 등을 최단 시간에 안정화시키는 역량을 숙지시키고
둘째, 이를 뒷받침하는 기초의학적 연구능력을 함양하며
셋째, 응급의료체계의 행정적인 관리능력을 기르는데 있다고 보고 이를 제도적으로 만들었다.
박재황은 1991년 5월 응급의학과 전공의 수련규정 안을 보건사회부에 건의했다. 그해 10월에는 응급의학 전공의의 군의요원 배정을 국방부에 건의해 배정을 받았다.
■ 노인요양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자세로 근무
3개월간 원광대병원에 파견을 나가 수술하기로 했던 박재황은 고향이 아닌 타향인 익산에서 3개월이 아니라 무려 40년의 세월을 흘러보냈다. 박재황은 원광대 의과대학 교수를 정년 퇴임한 뒤 5년간 연세대에서 근무한 뒤 고희(古稀)인 70세에 다시 원광대에서 운영하는 의료재단인 익산원광효도요양병원으로 돌아왔다. 제2의 고향인 익산으로 다시 컴백한 것이다. 의사로서 마지막으로 봉사한다는 자세로 요양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 것이다. 의사로서 나이 든 노인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할 수 있을 때 한다고 마음먹었다.
“지금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많은 분이 80~90대로 저보다 나이가 약간 많지만, 대화는 잘 통합니다. 30~40대 의사들은 의학적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는 있지만, 연세가 많으신 분들과 대화는 쉽지 않습니다. 치료도 좋지만, 가족들이나 친자식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 주려고 합니다. 고통 없이 돌아가실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이곳에는 병명이 10개도 넘는 중환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잘 나갔던 갑부, 고위직 공무원, 장군 등 다양한 분들이 입원해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참 묘한 것 같기도 하고, 허무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잘 나갔던 사람이 세월의 무게 앞에서는 똑같다는 것이지요.”
박재황은 의과대학 제자들에게 의사의 소명을 자주 말했다. 환자만을 위하는 의사가 되라는 당부였다. 스승의 그 말에 감명을 받은 고창석 전 원광대 산본병원 교수는 최근 수도권에 개업해 병원 입구에다 스승의 평소 했던 이야기를 적어놓았다. 그 제자는 이 문구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면 읽어본다는 의미로 적었다고 한다.
『의사란
하늘의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손가락, 발가락이 되어
희생과 봉사로 살아가는 도우미일 뿐이다.
몸을 바닥에 엎드려
환자가 회복하기만을 온 마음 바쳐 기도하는
애처로운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환자의 아픔을 더불어 나눌지 아는
연민의 영혼일 뿐이다.
참 의사의 길이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의 스승이신 박재황 교수님』
◆ 박재황 교수 프로필
- 학력 전남대 의과대학 졸업
전남대 의학박사
- 경력 원광대 의대부속병원 외과 교수
원광대 의대 응급의학교실 교수
원광대학교병원 응급의료센터 소장
대한응급의학회 회장
대한응급의학회 호남지회장 및 삼남학회장
미국응급의학회 정회원
- 자격/면허 응급의학 전문의/외과 전문의/중환자 의학 전문의
(원문)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198458&memberNo=48151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