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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예화와 설교 (45P)
성탄절의 용서
소녀의 아버지는 젊은 날 할아버지와 심하게 다투고 집을 떠났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지만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버지. 제발 용서해 주세요. 10년이나 지난 일이쟎아요.”
아버지는 명절 때만 되면 더욱 할아버지를 그리워 하고 죄책감에 괴로워 했다. 성탄절이 다가 오자 소녀는 할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었다. 소녀는 식탁에 의자를 끌고 왔다.
“슬기야, 의자는 네 개면 된다.”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엄마. 다섯개가 있어야 해요. 할아버지는 꼭 오실 거에요.”
“슬기야, 할아버지는 오시지 않을 거야. 엄만 지금 몹시 바쁘단다. 동생하고 있으렴.”
그러나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기어코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 놓았다. 어머니가 말리려고 하자 아버지는 “그냥 내버려 둬요.”라고 했다. 소녀는 현관문만 바라 보았다.
그 때였다.
“할아버지!”
소녀가 재빠르게 달려 나갔고, 정장 차림의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시는 거죠?”
아버지가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할아버지는 돌아 가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서랍장을 정리하다가, 파란색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다섯 개의 의자 중 한 개가 비어 있는 서투른 그 그림에는 네 개의 의자에 앉은 엄마, 아버지, 슬기, 동생이라고 적혀 있는 사람들의 가슴 한 가운데에 금이 간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성탄절에 서로 용서하며 살아요.
빈 자리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샌프랜시스코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루 종일 쇼핑을 다닌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지하철 정류장에는 선물상자를 한 아름씩 들고 선 사람들로 붐볐다. 그 때 대여섯 살 된 조그만 아이가 어떤 여자의 소매를 잡아 당기며 물었다.
“앉고 싶으세요?”
아이는 새로 난 빈자리로 여자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돌아 서서 다시 피곤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빈 자리가 날 때마다 아이는 재빨리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짐을 많이 들고 있는 여자를 찾았다.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전차에 탄 사람들은 서로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그맣게 웃으며 부끄러운 눈길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 남자는 보고 있던 신문을 옆 사람에게 나눠 주었고, 누군가가 선물 상자를 떨어뜨리자 세 사람이 집으려고 몸을 굽혔다. 어떤 사람은 옆에 앉은 사람과 얘기를 시작했다. 꼭 그 아이가 마술을 부린 것 같았다. 이제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따스함을 느끼며 남은 길을 갔다. 그 아이는 어디서 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전철 창 밖으로 교회의 성탄절 장식에 걸린 작은 팻말이 보였다. 그 팻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밝게 해 주었다.
“조그만 아이가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성탄절에 서로 친절을 베풀며 살아요.
베트남에서의 성탄절 추억
1969년 성탄절 전야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진다.
당시 나는 맹호부대 1연대 소속 군목으로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미 공군 푸캇비행장에 근무했던 월프 소령과 친하게 지냈다. 그 해 성탄 전야 예배를 국군과 미군이 함께 드리기로 했다.
주위에 사는 베트남인들도 초청하기로 하고, 그들에게 줄 성탄 선물을 마련했다. 양쪽 부대 부대장까지 참석, 성황을 이룬 성탄 전야 행사였다.상하(常夏)의 나라인 베트남이었지만 크리스마스 트리에 솜을 얹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흉내 냈다.
군인들이 연극을 했는데, 우리와 미군 사이에 말이 안 통해 웃겨 준 장면이 많았다. 미군과 우리 군인 두 사람이 함께 동방박사가 돼 옷을 만들어 입혔는데, 그것도 얼마나 웃겼는지 배가 아플 정도였다.
끝날 무렵 두 부대 부대장은 인사말을 통해 실수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두 나라와 베트남의 우의가 깊어졌다고 칭찬했다.
성탄 행사는 화려한 장식과 꾸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
*성탄절에 서로 웃으며 즐겁게 놀이하며 살아요.
성탄 카드에 기도를 실어...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한층 더하는 비결이 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낼 때 겉봉에 받는 이의 주소와 이름을 쓰면서 그 사람과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싫증 나기 쉬운 카드 쓰기가 큰 기쁨으로 바뀐다.
카드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면 카드가 쌓이는데, 이를 바구니에 넣어 놓고 매일 아침 식탁에서 카드를 한 장씩 뽑아 내 보낸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특별기도를 한다는 내용의 짤막한 편지도 보낸다. 카드를 보낸 사람들은 받는 이의 기도 속에 자기가 기억되고 있다는 확증을 주는 편지를 받고, 너무나 기뻐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을 할 때도 올바른 선물을 사도록 하나님께서 지시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정신으로 선물을 사고 고르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성탄절에 서로 기도하며 살아요.
산타클로스인 성 니콜라스
산타클로스는 왜 빨간색 옷을 입었을까?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있었던 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71년에 태어나 342년에 죽은 성 니콜라스 주교가 바로 그 모델이다. 그는 매우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는데 평소 빈곤과 질병으로 고난을 겪는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특히 노예로 팔리게 된 어느 소녀를 몰래 돈을 주어 구해 준 일로 인하여 「어린이들의 수호성도」라고 불리워진다. 이로부터 오늘날의 산타클로오스 상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프랑스나 네덜란드에서는 12월 6일이 성 니콜라스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이 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이 있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산타는 빨간색 옷을 입고 있다. 빨간색 옷과 흰수염의 산타가 널리 정착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코카콜라의 선전용 포스터로 말미암은 것인데 즉, 새빨간 옷을 입고 있는 산타가 콜라를 마시고 있는 그림이 등장하면서 일반인에게 퍼져 나간 것이다. 코카콜라의 상징색이 빨간색이기 때문이었다.
*성탄절에 서로 선물을 나누며 살아요.
북극에서 온 편지 - 굿리치 주교
굿리치(Robert E. Goodrich. Jr) 주교는 한 작은 여자아이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부모가 다시 하나님의 왕국 속에 들어 가도록 도와 주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본래 이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이렇게 4명의 식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고 나자 집안에서 계속 위치가 생겨났습니다. 행복하였던 가정은 거의 항상 슬픔에 싸인 가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우체국의 국장이었습니다. 성탄절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침 그는 책상에 앉아 그 위에 놓은 배달 불능의 편지더미를 바라 보았습니다. 그는 그 편지들을 분류하면서 그 가운데 일부가 북극의 산타클로스에서 보내는 편지들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그 중 한 봉투의 겉봉에 쓰인 글씨가 자기 딸의 글씨임을 알아 보았습니다. 곧 그는 봉투를 뜯고 읽어 보았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우리 가정은 우리 오빠가 죽기 전까지는 너무나 행복했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엄마와 아빠는 옛날의 엄마 아빠가 아녜요. 내가 아빠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아빠는, 오직 영원만이 우리 집을 바꾸어 줄 수 있다고 말씀하세요.
저는 영원히 무엇인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만일 할아버지가 어떤 특별한 영원들을 갖고 계신다면 그 중 하나를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우리 집에 주시지 않겠어요?"
그 날 아버지가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소녀는 그녀가 산타클로스에게 부탁하였던 그 영원이 예정보다 빨리 도착하였음을 알았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그 가정을 살아 있는 왕국으로 다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탄절에 서로 격려하고, 일으켜 주며 살아요.
성탄 전야에 나타난 낯선 노인
성탄 전야, 교회 회중들은 장엄하고도 경건한 그리스도의 탄생축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교회 복도에 낯선 사람이 쓰러졌다. 목사는 예배를 중지시켰다. 쓰러진 반백의 노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교인들은 그가 병들었거나 술이 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노인이 흐려진 시력으로 사방을 돌아볼 때, 아무도 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노인이 성전 색유리창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 유리창은 어느 부자 신도가 기념으로 교회에 바친 것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목사와 찬양대원들이 입고 있는 진홍빛과 황금빛 가운을 바라보았다. 성찬상 위에 있는 촛불은 가물거렸다. 돌아설 때, 그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찬송하는 회중을 바라보았다.
그는 거친 일을 해서 마디 투성인 손으로 참나무 의자를 잡았다. 그 순간 교인들은 그가 누구며 왜 교회에 왔고 어디로 가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와 비슷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성탄절에 서로 진실하게 삶으로 승부해요.
베들레헴 (4P)
1. 작은 마을 베들레헴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2:6) 는 말씀은 구약성경 미가 5장 2절“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를 자유롭게 번역, 인용한 것으로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이 작은 마을이요 그 곳에 자리 잡고 사는 족속이 작은 지파임을 나타 내 주는 말씀이다.
일반적으로 베들레헴은 스불론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성읍과 구별하기 위해,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불리워진다. 위치는 예루살렘의 남남서쪽 약 10Km 지점에 있으며, 예루살렘과 헤브론 및 네게브 지방을 연결하는 남북 주요도로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성읍이다.
2. 작으면서도 작지 않은 마을 베들레헴
성읍의 크기로나, 유대 족속 중에서의 위치와 세력에서 작은 에브라다 지파가 사는 땅 베들레헴은 작으면서 작지 않은 의미 있는 지역이다. 왜냐하면 비록 작고 적은 마을이지만, 그 곳에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온 백성의 목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증언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목자라 하고(창48:15, 시23:1등), 왕을 목자라 하기도 하였다(삼하5:2).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대리자’ 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리운 것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선한 목자’ 라 자칭하셨고(요10:11), ‘영혼의 목자’(벧전2:25), ‘목자장’ (벧전5:4)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참 하나님이시며, 왕이시며,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은 작으면서도 작을 수가 없는 마을인 것이다.
3. 작은 곳을 찾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왕이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출생지도 결정된 곳이 어째서 작은 곳을 베들레헴이어야 했을까?
좀 더 나은 곳, 좀 더 큰 도성이면 안되었던 것일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에덴 바깥, 즉 인간이 사는 이 세상으로 내보내셔서 우리들 인간의 처지를 그대로 경험케 하시려고 하실 때에 즉, 사람이 낙원에서 추방 되어 바라지 않는 고장, 이 세상으로 쫓겨 난 것처럼, 그 영광의 세계,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 놓고(빌2:6) 이 삭막하고, 화평이 없고, 악이 들끓고, 궁핍과 질병과 죽음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사람으로 독생 성자 예수님을 보내려고 하실 때에 철저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커지려고만 하는 세상 중에서 작은 마을을 택하시고, 높아지려고만 하는 인간들 중에서 연약한 족속의 땅을 택하신 것이리라.
우리는 작은 마을 베들레헴을 당신의 출생지로 정하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들을 오늘도 긍휼히 여기시고, 선택해 주시며,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게 된다.
4. 떡집에 오신 생명의 떡
다윗의 옛 고향이기도 한 베들레헴에 담겨진 뜻은 “떡의 집” 이다. 또한 “떡의 집” 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서 “생명의 떡”(요6:35) 이라고 하셨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떡의 집”에 오신 “생명의 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떡”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성전에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떡상’ 위에 매일 새롭게 진설되던 것이었다.
또한 특별히 떡은 손님들이 사용하는 선물로서 언급되고 있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맞으러 나오며(창14:18), 유숙할 곳이 없어서 성읍 거리에 앉아 있던 레위 사람은 그를 청하는 한 베냐민 노인에게 자신들을 유숙 시킬 집 주인의 종들에게도 줄 떡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삿19:19).
이런 점에서 ‘떡집’인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생명의 떡이시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가리켜서 “참 떡” 이라고 하신다. 제자들이 “만나” 에 대해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리신 떡” 이라고 말하자, 예수는 그 자신이 바로 이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신 “참 떡”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옵소서.” 라고 요청하자(요6:31-34), 예수께서는 다시 자신이 “생명의 떡” 이며, “그를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셨다(요6:35).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니...”(요6:48-52)
이런 점에서 볼 때에,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시며, 세상의 생명을 위한 사랑과 희생 그 자체이다.
♥ 성탄의 메시지가 된 말
어느 교회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성탄 이브 행사의 밤이었다. 주일학교 유년부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그 성극을 지도하시던 선생님은 고민이 많았다. 그 고민이란 다름 아닌 반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성탄 축하행사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선생님은 말이 어눌한 한 아이의 배역을 간단한 말 몇 마디 만으로 그 역을 해낼 수 있도록 처리했다.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빈 방이 없습니다.”
이 말만 해도 되도록 내용을 각색해서 그 아이에게 몇 번이나 다짐 다짐을 해서 무대에 올려 보냈다. 그러나 무대 위에 그를 올려 보낸 선생님은 내심 초조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아이 때문에 극을 망쳐 놓지나 않을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더러 그렇게도 일러서 시킨 말만 하라고 했는데, 이 아이는 그 말에다 한 마디를 더 보태더라는 것이다. 다름 아닌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빈 방이 없습니다." 그래 놓고서는, “그런데 제가 잘 방은 있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순간 교인 들이 와르르 웃었다. 교사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실상은 이 한마디 말이 그 날의 성탄절 메시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웃던 교인들은 이내 심각한 얼굴로 성탄절의 메시지를 새기고 있었다. 어떤 해의 성탄절보다 뜻 깊은 밤이었다.
♥ 또 다른 얘기는 감동적이다.
빈 방이 없다는 여관주인의 말에 슬프게 돌아서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하는 약간 바보스러운 덜떨어진 아이의 말,
“잠간만요. 제 방에서 주무시면 돼요.”
♥ ‘제임스 해플리’는 뜻 깊은 성탄절을 위해 「크리스마스 십계명」을 만들었다.
1. 크리스마스에는 예수님을 마음 안에 간직하라.
2. 세상 업무를 중지하고,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리라.
3. 예수님을 위해 드릴 최상의 방은 우리의 마음임을 기억하라.
4.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에 즐거이 참석하라.
5.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와 이웃이 요구하는 호소에 관대히 호응하라.
6. 시간을 내어 가정, 친구 외의 사람들을 도우라.
7. 크리스마스 캐롤, 크리스마스 예술이 무한히 값진 예술임을 음미하라.
8. 선물 주는 것을 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선물 받는 것으로 만족감을 채우지 말라.
9.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을 기억하라.
10. 자녀에게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를 가르치라.
♥ 가슴 아픈 성탄절
성탄절 전야에 교회에서 아이들끼리 선물을 교환하기로 했다. 정성스럽게 마련한 선물 상자들을 가운데에 쌓아 놓고는, 산타크로스 복장을 한 주일학교 선생이 한 사람씩 불러 내 그것을 뜯어 보게 했다. 과연 무슨 선물이 들어 있을까 궁금해 하며 다들 포장을 뜯는 걸 바라 보고 있었다.
태어 날 때부터 저능아인 한 아이도 거기에 있었다. 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지만, 그래도 산타크로스 만큼은 자기를 기억해 주리라 고대하며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제일 나중에야 산타크로스가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지만, 그래도 산타크로스는 커다란 상자를 건네 주자, 아이들이 또 웃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 이 아이를 놀려 주려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어..?”
아이는 상자를 거꾸로 들고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으...앙...”
아이는 텅빈 성자를 안고 바닥에 앉아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선물을 안고 큰소리로 웃으며 하나씩 밖으로 나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찬송가를 부르며... 오색등이 찬란한 크리스마스 트리 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이의 눈물처럼...
*성탄절에 다른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말아요.
♥ 어느 목사님이 성탄절 아침에 걸인으로 변장을 하고 몇몇 교인의 가정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을 열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한다.
성탄절이 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언젠가 내가 속한 어느 모임에서 라면 상자 들을 쌓아 놓고 고아들과 기념 사진을 찍고는 그 곳을 나왔다.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 보았는데, 그 때 한 아이가 우리의 뒷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외로워 보였다.
그 애는 울고 있었던 게다.
나는 그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성탄절에 작은 자로 살아요.
성탄 전날 밤 설교
어떤 사람이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외롭고 불안하여 성탄 전날 밤 작은 교회를 찾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예배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영감이 그에게 육박해 오면서 당장에 하나님과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목사가 '순진한 어린이의 학살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여 그의 위로와 고요한 평화가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돼! 성탄 전날에 어린이를 죽이는 설교를 한다는 것은 너무 주책 없어!"
그는 병원에 근무하는 사람이어서 앓는 사람, 죽는 사람들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성탄 전날 밤에는 촛불과 고요한 평화 속에서 지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는 중에 진리는 차츰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처 투성이인 세상에 예수는 찾아 오신 것이다. 그는 각박하고 거칠고 피투성이고 전쟁과 기근과 고독과 비극이 가득한 그런 세상에 오신 것이다.
*성탄절에 아픈 이웃을 기억하며 살아요.
‘제 2차 세계 대전사’를 다시 시청한다.
역사의 狂氣(광기)는 어느 누구도 대신 메꿀 수가 없다.
수 많은 피와 고통을 댓가로 치러야 한다.
히틀러의 나치나 문재인의 주사파가 뭐가 다른가?
중공의 시진핑이나, 러시아의 푸틴이나, 저 미개국들의 독재자들도 다 마찬가지들이다.
미친 놈들의 대행진이다.
이재명 이 놈은 줒대라고는 없다. 무조건 말 바꾸기, 거짓 사과 일색이다.
정말 이 놈은 팔색조로구나!
진실이라고는 없구나...
이 나라는 주사파 간첩 집단이 장악하여, 바야흐로 적화 되려 한다.
다 죽을 것이다.
어이할꼬? 이 일을 어이할꼬?
그리고 인간은 이 역사의 악순환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과 청소로 본다.
이제 제 3차 세계대전이 눈 앞에 닥쳐 오고 있다.
전 인구의 1/3이 죽을 것이다.
어쩌면 내 시대에 오지 않을까?
내 자녀와 손자녀는 어찌할꼬?
*성탄절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피눈물로 기도해요.
성탄절 축제
성탄절 축제가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기독교의 성립 후 처음 300년 동안에는 성탄절 축제가 없었다. 왜냐하면 온 교회의 관심이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육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사상가들이 주님의 인성에 대하여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교회도 성육신의 심오한 의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별히 동방의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교회는 성탄절을 기쁨과 경이로써 축하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알려진 성탄절에 대한 기록 중의 최초는 4세기 초기의 이집트 파피루스에 남은 기록이다. 이 파피루스에는 수많은 손자국들이 찍혀 있는데, 이것은 이미 그 파피루스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파피루스는 4세기 초의 성탄절이 1월 6일 저녁부터 7일까지 축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냈을까? 2세기에 있었던 이단 분파인 알렉산드리아의 영지주의 추종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날(1월 6일 또는 10일)을 축제일로 지켰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통하여 신성의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또한 1월 5-6일 밤엔 나일강 물이 놀라운 기적의 힘을 갖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날을 에피파니(Epiphany) 또는 `현현'이라고 불렀다. 한편 정통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인식하고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세례 받으심과 탄생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역시 1월 6일을 축제일로 선택했다. 이 에피파니 축제는 오랫동안 팔레스틴에서 장엄하게 행해졌다.
성탄절이 1월 6일에서 12월 25일로 바뀐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리고 왜 바뀌게 되었나?
가장 유력한 가설은 AD 325년에서 354년 사이에 로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AD 336년에는 그리스도의 성탄일이 12월 25일로 증명되고 모두가 그것을 신봉하도록 공포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12월 25일은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을 경배하는 이교도들의 축제일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빛의 축제가 세상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성 암부로스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로운 태양'이라고 말했다. 한 동안은 태양의 축제를 그리스도의 성탄절에 통합한 것이 많은 혼란을 주었다. 그리고 많은 반대도 있었다. 성탄절을 12월 25일로 확정지은 것은 크리소스톰에 의해서였다.
1. 여인의 후손
A. 예언 - 창3:15
B. 성취 - 마1:16,18, 눅2;6,7, 갈4:4
2. 동정녀 탄생
A. 예언 - 사7:14, 9:6
B. 성취 - 눅1:31,34,35, 마1:23
3. 탄생의 시기
A. 예언 - 창49:10, 단9:25,26, 말3:1
B. 성취 - 눅2:1,7, 갈4:4
4. 탄생의 장소
A. 예언 - 미5:2
B. 성취 - 마2:1, 눅2:4-7
5. 유아 살해
A. 예언 - 렘31:15
B. 성취 - 마2:16-18
6. 애굽 피신
A. 예언 - 호11:1
B. 성취 - 마2:14,15
7. 거주지
A. 예언 - 사11:1
B. 성취 - 마2:23
크리스마스는 성육신의 날
크리스마스(Christmas)란 말은 그리스도(Christ)와 마스(mas) 의 두 말이 합하여 된 말이다. "마스"란 말은 "예배"란 말과 같다. 카톨릭교회에서 에배를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미사"와 "마스"는 같은 말이다.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하는 거기에 참 뜻이 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할까? 그 이유는 2천년전 유대 베들레헴에서 그 분이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단순한 "나심"의 사건에 연결짓는다면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성자로 모시고 그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 될지언정 그가 예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예배의 근거는 "나심"(자연인의 탄생) 때문이 아니요, "오심"의 사건, 곧 성육신(Incarnation)에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속에서 인간 구원을 위해 그의 "오심"의 사건을 알려주는 칭호는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의미를 지녀야 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을,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과 국가간에는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었다(눅2:14).
(2) 성육신하셔서 영원자, 구원자로 오셨다(빌2:6-11).
(3)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눅4:18-19).
(4) 죄의 어둠과 실패와 좌절의 어둠을 이기는 빛으로 오셨다(요1:4-5).
(5) 복을 주시고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요10:10).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처럼 천대받는 차별사회 속에서 만인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동등한 자녀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다. 항상 이웃속에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 이웃이 누군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분은 오셨다. 참 종교는 제사(종교의식) 그 자체 보다도 사랑의 실천(순종)에 있다는 순수한 진리를 알려주기 위해 예수님은 오셨다.
민중들의 가난, 질병, 고독함, 공포 그리고 각종 악령에 고통받는 아픔을 대신 짊어 지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죄의 댓가로 죽음이란 제한성 속에 사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대속의 제물(어린양)이 되고자 예수님은 오셨다.
혼돈과 무질서의 역사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세상 인간들에게 천사가 전한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 분에게 존경과 경배의 예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뜻도 모르고 막연하게 흥청대거나, 단순한 연례행사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보다 엄숙하고 정중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이다.
첫번째 경배자들인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 왔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늘의 종교이다.
주의 사자가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에게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한다고 하면서 베들레헴에 주의 나심을 전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이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노래했다. 기독교는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교요 인간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탄생은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의 사건이다. 인간의 일, 세상의 일은 결코 "온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은 되지 못한다.
우리 속담에 비가 오면 나막신 장수가 웃고, 날이 맑으면 짚신 장수가 웃는다. 인간의 일이란 언제나 상대적이다. 그러나 주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이다
1.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게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하나님과 불화한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없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진정한 친구가 없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인간은 행복하고 모든 것과도 화목하게 된다.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려고 오셨다.
2. 주님은 우리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
사람은 누구나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한다. 그러나 주님이 오심으로 우리의 죄는 우리 어깨에서 벗어지게 되었다. 인간의 최대 축복은 죄짐을 벗는 것인데 주님이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기 위하여 오셨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주님의 오심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소식이다.
3.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은 문제를 가진 존재"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는 분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만난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간증했다. 누가복음 7:20에서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기쁨이 되시는 분이다.
4. 주님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시는 분이므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다.
주님은 말구유에서 나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
산타클로스는 예수를 잊게 한다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이 산타클로스다.
그는 서기 270년에 소아시아지방 리키아의 파타라에서 출생했고, 후에 미라의 대주교를 역임한 바 있는 성 니콜라스(270-350)라는 실재 인물이다. 그가 실제 자신의 이름과 전혀 상관없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렇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상투스 리콜라우스라고 불렸고, 이를 네덜란드 사람들은 산 니콜라스라고 했는데 특히 그들 중에서도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한 사람들은 산테 클로스라 불렀다고 한다.
이 발음이 그대로 미국화하면서 오늘의 산타클로스가 된 것이다.
원래 니콜라스는 남달리 베푸는 마음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카톨릭에서는 그를 성자로 받들었고, 아울러 어린 아이들의 수호성인이라고 인정하면서 크리스마스 때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설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을 수호해 주는 존재는 그렇게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 죽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사를 시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아무 상관도 없는 산타클로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잊게 하고자 하는 사탄의 전략임이 분명함을 알아야 한다.
산타클로스의 기원
4세기 경 성 니꼴라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대단한 자선가였다.
어느 해 12월 23일 밤 거리를 걷고 있다가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창틈으로 들여다 보니 한 노인이 세 딸과 함께 너무도 가난함에 서러워 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몰래 금화 몇닢을 넣어주고는 사라졌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금화를 던져 주었는데 마침내 그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는 거침없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내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시켜서 그렇게 따랐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매년 12월 24일을 정하여 그 날에는 커다란 자루에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듯한 물건을 넣고는 거리를 누비고 다녔는데, 이것이 곧 산타크로스의 기원이다.
생일 챙기기
사람이면 누구나 생일이 있다. 그 날을 맞는 사람들은 자기의 생일을 다른 사람들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를 원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생일을 거창하게 맞이한다.
예를 들어 보자.
고대 이집트의 절대 주권자였던 파라오들은 자기의 생일날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수백명의 신하들에게 거창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기가 사랑하는 안토니우스에게 화려한 생일 만찬을 차려 주었는데, 그 때 무진장한 선물을 내려 연회에 빈 손으로 왔던 손님들이 부자가 되어 돌아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뻑적지근한 생일이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왕통을 말아먹은 고종의 생일이다.
그는 자기의 생일을 만수성절이라고 이름짓고, 그 날을 국가적인 경축일로 삼았다. 그래놓고 생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만조백관에게 공식적으로 뇌물을 받았으며, 허기진 백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청난 잔치를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생일날 어이없는 살인을 저지른 사람도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왕이다.
그는 생일을 자축하다가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버리는 악행을 범했다.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지만, 춘향전에 등장하는 변학도는 자기의 생일을 뜻있게 한다고 춘향이를 닥달하다가 오히려 예기치 못한 파멸을 당한다.
자기의 생일을 지나치게 자축했던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삶을 산 사람이 없다.
인간의 교만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실까?
예수님은 자기의 생일을 자축하신 적이 없다.
그의 제자들 또한 주님의 생일 기억하고 잔치상을 차려 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들은 모두 생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온 세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주님의 생일 대신에 일년 중 가장 의미로운 날, 12월 25일을 그 분의 생일로 정하여 범세계적인 축제를 벌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무릇 사람의 생일은 이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자신은 자신의 생일에 무관심했는데, 다음 후세인들이 그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유달리 자기의 생일을 챙기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배우자가 자기의 생일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싸움을 벌여서, 결국 이혼까지 하는 사례도 있다.
이북의 김일성과 김정일을 보라. 그들의 자신들의 생일은 국가의 경축일로 떠벌리고 있다. 그래서 고혈을 짜낸 인민들의 피로 잔치를 벌이고, 그들은 호화롭게 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말로가 역사를 통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니, 어찌 불쌍한 인간이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의 생일은 나를 경축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다음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생일은 나의 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날이요,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날임이 분명하다.
성탄 카드의 문제
크리스마스는 이제 복제된 카드만큼이나 흔하고 가치없고 의미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 한국의 연하장(年賀狀)이나 크리스마스 카드에 인쇄된 글귀는 천편일률적이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나, 축 성탄(祝聖誕),
그리고 그 말의 영어 표현인 뉴 해피 이어나, 메리 크리스마스가 고작이다.
그러기에 자기 감각에 맞는 그림이나 디자인 위주로 카드를 고른다.
한데 미국 사람들 카드 고르는 걸 보면 카드에 적힌 글귀의 내용이 자기가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들어 맞은 사연인가 여부로 선택을 한다. 그 만큼 카드에 적힌 글귀가 다양하고 세분화돼 있으며 개성적이다. 우리나라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단조롭지가 않다.
병원에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외국에 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일선에 가 있는 친지에게 보내는 글귀, 선물이나 호의에 사의를 표하는 글귀 등 내용이 다양하게 유형화돼 있어 자기의 사연에 맞는 글귀를 고른다. 생일 축하카드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딸에게, 할머니가 손자에게, 약혼자로부터 미래의 아내에게, 제자가 옛날 소학교 스승에게, 심지어는 '다섯 살 맞는 딸에게'라고 세분돼 있기도 하다.
이런 우스갯 이야기를 외지에서 본 적이 있다.
한 아가씨가 가게에 들어 '오로지 당신에게만(Only to you).....' 하는 글귀의 카드만을 수십 장 골라 사자, 가게 주인이 "얼마나 많은 오로지 당신입니까" 하고 감탄하는 그런 내용의 것이었다. 그걸 받아 든 남자들은“오로지 당신에게만”하는 말에 오금을 저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번져가는 복제문화(複製文化)의 희극을 보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 이렇게 복재된 카드모양으로 가치없게 전락해 버린다면 얼마나 사탄이 좋아서 배꼽을 잡고 웃겠는가?
그것을 생각하면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기분이 상해지고, 어느 때는 약이 오른다.
산타클로스, 저질 케롤송(예수님의,이름은 단 한번도 들어가지 않고 오로지 산타만 찬양하고 있는)그런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특히 교회주위에서 사라져야 한다.
성탄 문화도 개혁되어야 한다
현란한 불빛 아래 크리스마스 트리가 내걸린다. 그리고 캐럴이 지나가는 발걸음을 붙잡고 매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성탄절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 성탄의 밤은 사치기로 무르익어 간다. 원리틀, 투리틀, 쓰리리틀 인디언... 성탄은 그렇게 해서 우리 곁을 떠난다.
성탄절을 가장 반갑게, 그리고 맨 먼저 맞이하는 곳은 백화점과 시내의 환등가이다. 성탄절을 떠나보내며 가장 아쉬워하는 이들이 젊은 연인들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성탄절을 가장 저주스러워 하며 가슴을 치며 죽어가는 이들은 말 못하는 크리스마스 베이비들이다.
찾아야 할 것들을 되찾자. 예수 그리스도는 '나신' 분이 아니라 '오신' 분이시다. 이 때 성탄은 불탄절과 격이 다른 날로 다가선다. 여태껏 교회가 '오심'보다 '나심'에 무게 중심을 두었으나 '오심'으로 중심을 옮겨 놓을 때, 그리스도가 주셨던 평화와 자유, 어두음을 이겼던 빛, 백성들에게 던져진 구원의 의미가 살아났다.
세속적인 때를 벗겨내고 영적인 옷을 입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자. 성탄절의 하루 만을 때우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부활, 승천과 재림의 전체 복음과 연결시켜 균형 잡힌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구속사적 사건들은 성탄만이 아닌데도 성탄에만 매달려 배불뚝이 절기를 만들어 내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해서 기형적인 신앙 인격자 출산을 막기 위해 말씀의 예방 접종을 할 필요가 있다.
성탄은 겨울의 사순절이라 불리는 대강절 없이는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교회들과 많은 신앙인들이 대강절 없는 절름발이 성탄을 지키는 것도 문제이다. 깡그리 무시된 절기교육은 성탄절을 잘못된 기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강림절을 중심한 교육적 접근만이 성탄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성탄문화는 이러한 의식개혁 작업부터 출발된다. 복음을 더 널리, 더 높이, 더 깊이 증거하고 자유와 평화를 심어 빛이 되기 위해 우리도 모두 성육신하자. 거기 성탄문화의 핵심이 있다.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세상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 그것은 죄 때문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기에 세상은 불쌍한 자리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사랑으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성탄은 하나님 자신의 약속의 성취이다. 그 증거로 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나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 그 목적은 믿고 영생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탄은 구원의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의 성탄절은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맞이해야 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믿는 자를 거듭나게 한다.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주 예수님의 구원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믿는 자는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러한 은혜를 인간에게 베풀기 위하여 주님은 이 땅에 나신 것이다.
성탄의 메시지가 된 말
어느 교회에 실제 있었던 일이다. 성탄 이브 행사의 밤이었다. 주일학교 유년부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그 성극을 지도하시던 선생님은 고민이 많았다. 그 고민이란 다름 아닌 반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성탄 축하행사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선생님은 말이 어눌한 한 아이의 배역을 간단한 말 몇 마디만으로 그 역을 해낼 수 있도록 처리했다.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빈 방이 없습니다."
이 말만 해도 되도록 내용을 각색해서 그 아이에게 몇 번이나 다짐 다짐을 해서 무대에 올려 보냈다. 그러나 무대 위에 그를 올려 보낸 선생님은 내심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저 아이 때문에 극을 망쳐 놓지나 않을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더러 그렇게도 일러서 시킨 말만 하라고 했는데, 이 아이는 그 말에다 한마디를 더 보태더라는 것이다. 다름 아닌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빈 방이 없습니다."
그래 놓고서는 "그런데 제가 잘 방은 있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순간 교인 들이 와르르 웃었을 것은 틀림없다. 교사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실상은 이 한마디 말이 그 날의 성탄절 메시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웃던 교인들은 이내 심각한 얼굴로 성탄절의 메시지를 새기고 있었다. 어떤 해의 성탄절보다 뜻 깊은 밤이었다.
성탄의 의미
성탄은 믿는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의 기쁨이며 축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성탄을 맞이하는 요 몇 년간 아쉬움이 항상 있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탄은 두 가지 의미로 새겨볼 수 있다.
첫째는 "나심"이며, 둘째는 "오심"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성탄의 의미는 예수가 단순히 이 세상에 탄생했다는 사건의 기념식이 결코 성탄 일 수 없다. 그런데도 이 날이 어김없이 행사로 둔갑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지는 것이다.
때문에 예수 대신 산타클로스가 성탄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교회는 산타클로스 화형식이라도 해야 할 때가 왔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성탄은 "나심"이 아니라, "오심"이 지켜져야 한다.
그 분은 나의 죄를 위해 오셨다. 높아지시려고 오시지 않고, 하나님이신 그 분이 한없이 낮아져 섬기려 오셨다. 이 점을 명백히 할 때 우리는 성탄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될 것이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
크리스마스의 추억이라든가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라든가 등의 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좀 외람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란 성자의 탄생일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구세주의 탄신일(誕辰日)이기에, 가장 경건하고 성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진리를 음미하고 그가 태어나신 큰 뜻을 기려야 하는 성탄이야말로 세속적인 재미나, 추억, 세속적인 어떤 축제일과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탄일이 기독교인이 아닌 많은 세계인들에게도 커다란 축제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만큼 크리스마스는 이제 우리들에게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마지막 달의 가슴 뿌듯한 축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성탄의 참 의미
범신론을 믿고 있는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대단히 화려하게 성탄절을 준비하며, 즐긴다. 일본의 기업가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성탄절을 취급한다.
그리고 일본의 많은 사람들은 "흥청거리며 놀 수 있는 날" 쯤으로 성탄절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처럼 안타까운 일은 일본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당신은 어떻게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는가?
알맹이 없는 성탄절 행사를 계획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왜 성탄절이 즐거워야 하는지, 그리고 왜 성탄절 행사를 해야 하는지 그 진정한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성탄일에 탁주
김길창 목사가 어렸을 때에는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못 들었고, 다만 '구주성탄일'이라고 하였다. 성탄일이라고 해도 솔잎으로 솔문을 세우고, 붓글씨로 구주 성탄이라고 써 붙일 정도였다. 성탄절 찬송은 하나도 몰랐고, 밤낮 부르는 찬송이라야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라든가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하신 보배..." 정도였다.
크리스마스 되어도 그 찬송만 목청 높여 부르곤 했는데, 1900년대 초의 어느 성탄절이었다. 그가 집에 돌아 와 보니 부친이 친구 두 분과 사랑방에서 담소를 나누다가 "일국의 왕자가 태어 나도 온 국민이 기뻐 춤으로 즐기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신 날에 그대로 지낼 수가 있나!" 하면서 탁주를 서로 권하였다.
제임스 헤플리는 뜻깊은 성탄절을 위해 「크리스마스 십계명」을 만들었다.
1. 크리스마스에는 예수님을 마음 안에 간직하라.
2. 세상 업무를 중지하고,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리라.
3. 예수님을 위해 드릴 최상의 방은 우리의 마음임을 기억하라.
4.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에 즐거이 참석하라.
5.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와 이웃이 요구하는 호소에 관대히 호응하라.
6. 시간을 내어 가정, 친구 외의 사람들을 도우라.
7. 크리스마스 캐롤, 크리스마스 예술이 무한히 값진 예술임을 음미하라.
8. 선물 주는 것을 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선물받는 것으로 만족감을 채우지 말라.
9.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을 기억하라.
10. 자녀에게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를 가르치라.
성탄절 기도 -이해인
온유와 사랑의 주님… 희망으로 오십시오.
절제 모르고 사치했던 우리 남에게 인색했던 우리 겸손 모르고 오만했던 우리 새 사람새생활 거듭나게 하소서.
이해인 수녀가 성탄절을 맞아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를 담은 글을 보냈다. 경제 불황의 한파로 유난히 추운 세밑을 보내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꽁꽁 얼어붙은 마음에 희망의 입김을 불어넣는 기도다.
푸른 솔숲 사이로 동백꽃 활짝 핀 수녀원 언덕길엔 유순한 눈빛의 비둘기 떼가 평화로이 노닐고 있습니다.추운 줄 몰랐던 남쪽의 겨울이 올해는 마음부터 스산하여 꽃을 보아도 기쁘지 않고 새소리를 들어도 즐겁지 않습니다.바쁜 가운데도 따뜻한 설렘이 피어나야 할 12월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잃은 초조함으로 늘상 해 오던 일상의 일들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촛불을 켜고 차분히 기도하려 해도 마음엔 황량한 바람소리 뿐 불안한 슬픔의 눈보라가 앞을 가립니다.
『수녀님,애들 아빠가 직장을 잃었어요.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합니다.』
『무지한 탓에 큰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열심히 저축하여 갚겠으니 무이자로 돈을 꾸어주세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제 콩팥이라도 팔려고 합니다.』
『겁도 없이 낭비하던 모습들.제가 고국을 방문했을 때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음을 고백합니다.그 두려움이 지금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 같아 괴롭습니다.저도 다시 연꽃같은 마음을 지니려 애쓰겠습니다.』
서리맞은 낙엽처럼 날아드는 친지들의 편지에 갈수록 잠 안오는 날들이 많습니다.하루 아침에 큰 빚더미에 앉게 된 우리나, 믿었던 이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노여움과 배신감으로 할 말을 잊은 국민들은 이제 누구를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요?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시며 가장 온유한 사랑의 아기로 오시는 주님! 현실을 거부하며 얼굴을 가리고 싶은 부끄러움,좌절과 혼돈으로 흔들리는 우리가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한 줄기 빛을 향해 함께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분수를 모르고 허영에 들떴던 우리,겸손을 모르고 오만했던 우리,절제를 모르고 사치했던 우리,맑고 정직하게 깨어 살지 못했던 우리,자기 실속만 차리느라 남에게 인색했던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몰랐던 우리,이제라도 회심하여 생활태도를 바꾸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십시오. 하늘을 두려워하는 겸손으로 새 생활을 시작하게 해 주십시오.
이젠 남의 탓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작은 일도 충실하게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무분별하고 충동적인 낭비를 줄이고 청빈서원한 수도자처럼 겸손하게 살겠습니다.말로만 외치는 애국자이기보다는 동네 골목길이라도 조용히 쓸어주는 실천적인 애국심을 키워가겠습니다.
어쩌다 떠나 있으면 사무치게 그리운 조국.사계절의 산과 들이 아기자기 아름답고 은은한 인정이 들꽃향기로 피어나는 모국.작지만 아름다운 이 나라 이 땅에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고 서로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용서하며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고 싶은 우리, 힘과 지혜를 모아 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다시 행복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기심으로 빈 방이 없는 세상 한가운데,가장 겸손한 구원의 빛으로 태어나시는 주님.어서 오십시오,희망으로 오십시오.절망을 딛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겸손한 희망과 겸손한 용기만이 오늘 우리가 주고 받는 소중한 성탄선물,새해선물임을 새롭게 감사드립니다. 아픔 속에 오히려 맑아진 눈빛으로 게으름 떨치고 함께 일어선 우리.이제 가야할 길을 서둘러 가게 해 주십시오.
성탄절 아침 마더 테레사께 -이해인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차가운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지 말고, 겸손하고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 분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그리스도는 성탄절에 아주 작고 무력하고 사랑이 필요한 한 어린아기처럼 오십니다.우리에겐 그 분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테레사 수녀님,성탄절의 기쁨과 평화를 먼 데 계신 수녀님과도 함께 나누고 싶은 오늘, 조용히 마음을 모으고 당신의 묵상집을 읽노라니 2년 전 인도에서 제가 뵈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웃음과 미사 중에 힘차게 성가를 부르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최근 병환으로 사경을 헤매는 고통 속에서도『나를 다른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대우해 달라』며 특별치료를 거부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훌륭한 사람이라도 너무 괴로우면 자연히 얼마쯤의「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토록 놀라운 발언을 하시다니요.
빈 손을 쳐들고 서 있는 창밖의 겨울나무들을 바라보며 가난하고 겸손하게 인간이 되어오신 예수님의 사랑을,또한 예수님처럼 이웃사랑에 불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은 수녀님의 겨울나무 같은 그 모습을 생각해봅니다.소박하고 단순하다 못해 초라함을 느낄 만큼 아무 장식도 되어있지 않던 당신이 계신 곳의 성탄나무와 구유를 떠올리며,오늘 우리의 성탄절은 너무도 호화로운 장식과 세속적 상혼의 축제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본래의 거룩한 의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축제가 되고,내적인 고요 속에 만나야 할 주인공인 예수님은 외면하고 파티를 열며 값비싼 물건을 주고받는 허황된 축제로 변질되어 버린듯 합니다.성탄절이야말로 우리 안의 이기심과 욕심의 요란한 장식을 떼어버리고 겸허하고 담백한 한 그루 겨울나무로 서서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누며 기도하는 때라고 생각됩니다.
올해도 성탄맞이 청소를 하고,과자를 굽고 합창연습을 하고, 친지들에게 평화,기쁨,희망이란 단어를 수없이 적어 카드를 보내면서도 마음에 파도처럼 큰 기쁨이 출렁이지 않는 것은 제 안에 숨어있는 이기심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남보다 자신의 유익을 챙기는 이기심이야말로 기쁨을 방해하는 요인임을 자주 체험하곤 합니다.
지치고 외로운 누군가 도움을 요청해 올 때「빈 방이 없다」고 마음의 문마저 닫아버린 저의 인색함과 불친절이 부끄럽습니다.북한동포가 굶주리고 있어도 편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저의 냉랭함과 태연함이 밉습니다.가장 가난한 이를 선택하겠다고 외치는 교회가 부자들하고만 손잡는 모습이 싫다고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좀더 가난하게 살기를 두려워하는 저의 비겁함이 밉습니다.
「누군가가 하겠지」하고 애덕의 실천을 미루는 안일함,집안에 있는 가까운 이와 불목하면서도 집 밖에 나가서는 정의와 인류애를 부르짖는 저의 위선과 이중성이 부끄럽습니다.신앙과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서도 변명과 합리화에 능한 저의 오만함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제라도 좀 더 겸손해져서 그만큼 기쁨도 넘쳐나는 성탄절, 예수 아기께 제가 고쳐야 할 잘못들을 뉘우쳐서 열매맺은 좋은 결심 한 묶음이라도 소박하고 정성스런 예물로 드리는 성탄절을 꿈꾸어 봅니다.병환 중에도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으신 수녀님의 쾌유를 비오며 이 말씀을 저의 가족,친지,이웃들과 성탄선물로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미소를 지을 시간도,서로 이야기 할 시간도 없이 지냅니다.
먼저 우리 가정에 그 사랑과 자비심을 가져옵시다.
가정은 우리가 사랑과 헌신과 봉사를 실천할 최초의 활동분야입니다.
성탄절 이브
미국의 어느 화려한 예배당. 한 흑인 여인이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 안에 들어가려다가 제지를 당했다. 흑인은 입장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벤치에 앉아 기도를 하려니 눈물이 쏟아져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며 왜 우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럴 수가 있느냐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처럼 쫓겨났소." 그 흑인 여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아! 그 은 바로 예수님이셨다.
성탄절 전야에 교회에서 아이들끼리 선물을 교환하기로 했다. 정성스럽게 마련한 선물 상자들을 가운데에 쌓아 놓고는, 산타크로스 복장을 한 사회자가 한 사람씩 불러내 그것을 뜯어보게 했다. 과연 무슨 선물이 들어있을까 궁금해 하며 다들 포장을 뜯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저능아인 한 아이도 거기에 있었다. 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지만, 그래도 산타크로스 만큼은 자기를 기억해 주리라 고대하며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제일 나중에야 산타크로스가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지만, 그래도 산타크로스는 커다란 상자를 건네주자, 아이들이 또 웃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누군가 이 아이를 놀려 주려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어..?"
아이는 상자를 거꾸로 들고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으...앙..."
아이는 텅빈 성자를 안고 바닥에 앉아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선물을 안고 큰소리로 웃으며 하나씩 밖으로 나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찬송가를 부르며... 오색등이 찬란한 크리스마스 트리 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이의 눈물처럼... 학창시절, 교회에서 학생회원들과 밤을 세우며 선물을 주고받던 일이 생각난다.
어떤 친구들은 이상한 선물에다가 짓궂은 벌칙을 써 넣어 선물을 받는 사람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청년이 되어서는 성탄절 전야엔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명동으로 나가 밤거리를 쏘다니다가 새벽에 집에 돌아왔다.
지금도 성탄 전날에 잠을 자지 않고 놀다가 정작 성탄절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거나, 예배시간에 꾸벅 꾸벅 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느 목사님이 성탄절 아침에 걸인으로 변장을 하고 몇몇 교인의 가정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을 열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한다. 성탄절이 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언젠가 내가 속한 어느 모임에서 라면 상자들을 쌓아놓고 고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는 그 곳을 나왔다.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 보았는데, 그 때 한 아이가 우리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외로워 보였다. 그 애는 울고 있었던 게다. 나는 그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성탄절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난리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조차 예수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이상한 성탄절'을 맞이하는 수가 많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선물 상자, 올 나잇은 예수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결코 '화려한 스타 탄생'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그런 화려한 데에 관심이 없었다. 그분이 어디에 관심이 있었는지 누가복음 십삼장 십절 이하를 한번 읽어보시라.
성탄절을 기다리는 마음
미국 워싱턴 대학의 토머스 홈스 교수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는 때를 조사했더니, 가장 큰 변화가 오는 것은 배우자가 죽었을 때였다.
이 경우를 100으로 하고 그 밖의 다른 경우들을 점수화했는데 이혼의 경우가 73, 임신했을 때가 40, 집을 옮기거나 고쳤을 때가 25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크리스마스가 무려 12나 된다는 것이었다.
매년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는 마침 연말과 겹쳐 무엇인가 마음의 변화를 가져 오기 쉬운 때이다.아직도 이 땅에는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만일 크리스마스를 즐거운 파티 기분으로만 넘긴다면 그것은 예수 탄생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나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주지 못하는 허망한 시간이 되고 말 것이다. 낮은 데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하신 깊고 높은 뜻을 헤아려 그 사랑을 실천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성탄절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작은 구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탄절의 유래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로써, A.D. 336년경부터 시작되었다.
날짜를 12월 25일로 정한 최초의 인물은 히폴리투스로 추정되는데, 그는 수태고지 또는 수태로부터 아홉 달을 계산하여 그리스도의 생일이 12월 25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성탄절이면 징글벨을...
존 파이어펜트는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완전히 실패로 인생을 마친 사람이다. 그의 첫 출발은 의외로 훌륭했다.
그는 자기 할아버지가 설립을 도왔던 예일 대학을 졸업한 후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교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에게 너무 너그럽게 대했다는 이유로 실패하였다.
그는 변호사로도 실패했다. 손님들에게 너무 너그럽고 정의감이 투철해서 돈벌이되는 사건을 맡을 수 없었다.
그는 사업가로도 실패했다. 물건값을 제대로 쳐서 받지 못해 이윤을 낼 수 없었고 외상을 너무 잘 주었기에....
그는 정치가로도 실패했다. 노예 제도 페지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한 존 파이어펜트였지만 그는 진정으로 사회정의를 위해 힘썼고, 사랑을 베푸는 한 인간이 되기를 바랐으며, 인간 정신의 힘에 대한 믿음을 지녔다.
그러기에 패배라고 믿었던 그 당시의 일들이 대부분 이루어졌다. 교육은 개혁되었으며, 소송절차는 개선되었고, 신용거래법도 개정되었으며, 노예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의 기념품이 있다. 성탄절이면 울며 퍼지는 노래 "징글벨" 바로 그것은 그가 만든 노래인 것이다.
세계 수십억의 사람들이 성탄절이 오면 누구나 한번 쯤 불러보는 이 기쁨의 노래를 완전한 실패자가 만들었다면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생은 살아봐야 알고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크리스마스, X-mas
크리스마스를 X-mas라고 쓰기도 하는데, X(키)는 크라이스트를 나타내는 그리이스어의 첫글자이므로 크리스마스로 읽어야 하고, X-mas는 ‘그리스도(Christ)의 미사(mass)’, ‘그리스도의 예배’라는 뜻이다. 크리스마스 전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이지만, 크리스마스 다음날은 박싱 데이(boxing day)라고 해서, 우편집배원이나 고용인 등에게 크리스마스 박스(선물상자)를 주는 날이다.
1974년 크리스마스 시즌, 프랑스 파리에서 경찰이 한 청소차를 정지시켰다. 청소원들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경찰이 말했다.“여러분은 지스카르 데스댕 대통령의 초대를 받았습니다.”그래서 청소원들은 식사 대접을 받고 샴페인과 칠면조를 선물로 받았다. 크리스마스 행사가 최초로 있었던 것은 서기 98년이었는데,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40년이 지나서였고, 일부 신학자는 이교도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영구적으로 매년 축하행사를 갖게된 것은 서기 336년이다. 그 전까지는 일정한 크리스마스 날짜가 없어서 4월, 5월, 12월에 갖기도 했는데, 가장 자주 있었던 것은 1월이었다.
예수님께 보낸 편지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미케닉스버그에 사는 13세 소녀 줄리언 홀런드는 예수님께 크리스마스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예수님. 저는 열세살 난 소녀입니다. 예수님께 편지를 쓰다니 저를 이상한 아이로 생각하시겠지요? 왜냐하면 이 편지가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는 걸 잘 아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께 편지를 쓰고 싶어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모두 생각하는 건 선물받는 것 뿐이에요.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이 세상에 사랑과 아름다움을 주셨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는 친구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줄리언에게 답장이 왔다.“우리는 편지를 천국에 까지 배달할 수 없지만, 너의 뜻만은 예수님도 아실 거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아시니까 네가 쓴 그 아름다운 마음씨는 우리가 설사 배달을 못해도 그 분을 감동시켰을 것이다. 네 편지가 아무데도 가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그 편지는 내 마음을 감동시켰단다. 분명히 그 분도 아신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거라.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도널드 오너로부터”
오너 씨는 그 지방 우체국에서 일하던 중 줄리언의 편지를 보았다. 이 소식이 신문기자에게 알려져 세상에 전해졌다.
크리스마스 선물 -오 헨리
미국의 소설가 오 헨리의 작품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다.
한 도시에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살았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각각 걱정이 되었다.
서로에게 선물은 하고 싶은데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 짐은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머리핀을 사기로 마음먹고 갖고 있던 시계를 팔기로 결정했다.
아내 델라는 남편에게 시계줄을 선물하기로 하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았다.
두 사람은 시장으로 나가 선물을 구입했다.
짐과 델라는 서로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거의 같은 시간 집에 도착했다.
짐은 머리핀을 들고 아내의 머리에 꽂아 주려고 했으나, 아내의 머리는 이미 짧게 깎여 있었다.
델라 역시 시계줄을 들고 있었으나, 남편에겐 이미 그 시계가 없었다.
준비된 선물은 쓸모없게 됐지만, 둘은 곧 부둥켜 안고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사랑은 추위를 녹인다.
크리스마스 찬가 -임성숙
놀라와라 눈부시어라,
하늘의 당신이
어떻게 이 땅의 아기로 오셨습니까.
어떻게 하늘 보좌에서
가난한 시골 말구유로 옮겨오셨습니까.
고마워라 가슴 설레어라,
하나님 당신이
어찌 미천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친히 오셨습니까.
낭패한 우리를 위로하고 용서하시려고
병든 우리 대신 아프시고 곤욕을 치루시려고,
죄 많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죽을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해마다 당신은 강보에 쌓여
어여삐 오십니까.
냉냉하게 식어가는 우리들 품안에
추운 겨울 한 밤중에 오십니까.
눈물겨워라 가슴 뛰어라,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
크리스마스 카드의 유래 -헨리 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이웃에게 정성껏 편지를 써서 보내던 미국의 박물관장이 있었다.
평소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정감 있는 추억담과 함께 전하던 이 사람의 이름은 헨리 콜. 1843년 12월 초 갑자기 바빠진 콜은 '사랑의 편지'를 일일이 다 쓰지 못하게 되자 친구인 화가 존 호슬리에게 그림을 한 장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기꺼이 그림을 그려 주었고, 콜은 이것을 인쇄해서 짤막한 글을 그 안에 담아 이웃에게 보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카드'는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마틴 루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밤중에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 날은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루터는 평소 어둡던 숲이 전등을 켜놓은 것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전나무 숲 사이로 영롱한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둡던 숲에 빛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도 저 전나무와 같다. 한 개인은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루터는 이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전나무 하나를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나무에 눈 모양의 솜과 빛을 발하는 꼬마전구와 촛불을 장식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이다.
인간은 지극히 나약한 존재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에 예수의 빛이 스며들면 보석처럼 영롱한 인생으로 변한다.
크리스마스 후의 구유
크리스마스가 지난 어느 우중충하고 비오는 날 우연히 교회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진짜 구유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아마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하여 사용했었던 소품이었을 것이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축제 속에서 밝은 빛이 있었고, 은은한 감미로운 음악이 있었으며, 마리아와 요셉, 동방박사, 목자들,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즐거워하며 기뻐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축제는 잠시 뿐 지금은 구유 안에 남겨진 어린아기 인형만 쓸쓸히 비를 맞으며 울고 있었다.
그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예수님께 대하여 해 온,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대접일 것이다. 우리는 편할 때는 예수를 관심과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그 후에는 다른 사건과 물건에 달려 가, 무섭게 집착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제 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막을 내릴 즈음 어느 치열했던 전선.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접전을 벌이던 저녁, 눈이 내렸다.
프랑스군의 참호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크리스마스야!』
참호 속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것은 합창이 되었다.
그 합창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독일군의 참호 속에서도 울려퍼졌다.
누가 제의하지 않았어도 그 날은 휴전이 되었다.
평화로운 전쟁터였다.
이후 지구상엔 해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어도 「크리스마스 휴전」이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두려운 사람들
크리스마스 휴가가 다가오자, 엘라는 고독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미스 부부는 나이 많은 외로운 사람들로 거의 바깥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해 있었고, 또 필요한 돈도 없었으며, 어디로 갈 수도 없는, 단지 두려움만 갖고 있었다.
잭은 자기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는 외로움을 느꼈다.
이들은 모두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기 보다는 두려워 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포인세티아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화초 포인세티아가 있다.
이 꽃의 색깔은 유난히 붉어서 종종 예수의 보혈로 상징된다.
그런데 이 화초는 아주 춥고 캄캄한 곳에서 특유의 붉은 꽃을 피운다.
빛이 완전히 차단되고 냉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남모르게 꽃을 피운다.
포인세티아의 파란 잎사귀가 어둠과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만약 포인세티아가 있는 곳에 빛이 새어 들어가면 붉은 꽃에 얼룩이 생긴다.
심지어 비상구의 약한 불빛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포인세티아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립과 어둠의 세월이 필요한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춥고 고독한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이 역경의 터널을 거쳐 인간은 비로소 아름답고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고난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회피하는 사람은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다.
크리스마스에 찾아오신 하나님
루시와 그의 여동생 빌마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
그들의 부모는 가난했고 따라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루시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열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바로 크리스마스 때였는데, 우리에게는 아무 선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동생과 나는 알았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다른 날과 아무 다름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는 식탁에 앉았습니다. 어머니는 주기도문을 외우셨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구절을 말씀하실 때는 그 목소리가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울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 동생과 나는 끝까지 주기도문을 다 외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막 끝냈을 때, 어떤 사람이 우리 집 문에 왔습니다. 그 분은 우리 이웃집 사람인데 우리의 조찬을 위해 새 빵을 갖다 주셨습니다.
크리스마스 그 날, 하나님은 스스로 친히 우리에게 와 주셨습니다.
타향에서 맞은 첫 성탄절
별이 빛나는 맑은 겨울밤이었다. 한 청년이 건조한 밤 공기속을 홀로 걷고 있었다. 그는 집이 그리웠다. 그는 새로 맡은 일 때문에 부모님을 떠나 다른 주로 이사를 해야 했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 집에서 떨어진 채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다.
1마일 쯤 떨어진 곳에 밤하늘을 배경으로 교회 하나가 언덕위에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교회당 첨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음악을 들으려고 멈췄는데, 그 캐럴의 가사는 마치 그를 위한 것 같았다.
그 노래는 양을 치는 목동들에게 전한 천사들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는 그와 머리 떨어진 가족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새로운 확신으로 가득 찼다.
구세주 탄생의 소식은 오래 전의 목동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마찬가지로 또 그를 위한 것이었다. 가족은 멀리 떨어져 크리스마스를 보냈겠지만, 성탄의 기쁜 소식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된 것이다.
청년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마지막으로 한번 쳐다보고는 새로운 가정의 따스함과 끊임없는 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불화와 화해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던 쟈코모 푸치니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크게 다투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푸치니는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탈리아식 크리스마스 케이크인‘파넷토네’를 친한 사람들에게 보내곤 했다. 그 해에도 비서로 하여금 친지들의 명단을 만들어‘파넷토네’를 선물로 부치게 했다. 그런데 푸치니는 그 케이크 선물이 토스카니니에게도 부쳐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 그는 부랴 부랴 토스카니니에게 전보를 쳤다.
“파넷토네는 실수로 보내진 것임.”
토스카니니도 곧 전보로 답장을 보내왔다.
“파넷토네, 실수로 먹었음.”
성탄절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 길거리나 상점에서 먼저 캐롤송이 울리고 온통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감을 볼 수 있습니다. 정작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해야 할 교회는 오히려 조용하고 덤덤하게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상에 뺏긴 성탄의 기쁨을 다시 찾아와야 하겠습니다. 성탄절을 통하여 절망하고 낙심한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마음에 소망을 선포하고,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물질과 몸으로 마음껏 사랑을 베푸는 사랑의 축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누가복음2:1-14
2. 성탄의 은혜 갈라디아서4:3-7
3. 성탄의 비전과 새시대 미가5:1-15
4. 요셉의 성탄 마태복음1:18-25
5. 빈 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2:1-7
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누가복음 2:1-14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천재들 덕분에 온 인류는 큰 혜택을 입고 또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세 명의 천재들은 심리학자 프로이드와 화가 피카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이 기사를 보면서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20세기 과학과 문화 예술을 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여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전 인류가 어떠한 혜택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이를 다 끌어 모아 놓아도 그 내용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간증과 개인이 받은 은혜들을 다 기록하려 한다면 종이가 모자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에 싸여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류가 어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입었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알고 있다 해도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신문 한 모퉁이에라도 거기에 대해 감사하다고 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묘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슨 용기가 필요합니까? 용기라는 덕목은 하나님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처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세상에 오신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때면, '아무리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용기 없이는 그렇게 하시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탁월한 저술가가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다시 설명을 하면 육안으로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이 불안에 떨고 있는 10대 소녀 마리아의 태 중에서,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 분열을 계속해서 커져 가야 될 난세포가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심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고, 지나친 상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작아지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생할 때에 유대 나라에 있는 왕과 모든 귀족들이 정장을 하고 서서 무슨 환영 축제를 했습니까? 팡파레를 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민들이 와서 축하를 드리기를 했습니까?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구간에 있는 짐승 몇 마리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달려온 가난하고 천한 몇 명의 목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셔서, 그토록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얼마 전에 미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그의 행차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며 경쟁하듯이 여왕의 의전품 목록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행사 때마다 2벌씩 갈아입을 옷을 가져갔고, 누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상복까지 가지고 갔으며 왕이 병이 들면 급하게 쓰려고 19l짜리 혈장액을 들고 가고, 또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무 변기에나 앉다가 세균에 오염될까 두려워서 변기 깔개까지 들고 간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챙기다 보니 짐만 해도 2000kg이 넘었고, 게다가 전속 미용사 두 사람에 경호원과 수행원을 수십 명씩 데리고 갔습니다. 이 여행에 들어간 경비가 우리 돈으로 무려 26억원이나 되었습니다. 여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유명하다는 사람은 다 모여서 그를 영접하느라고, 또 언론사들은 그 사실을 보도하느라고 이만저만 요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영국이라는 나라는 먼지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다. 제 방에는 밀키웨이 즉, 천문학자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은하계를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펴놓고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태양계는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태양계 중에서도 아주 작은 별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 중에 하나인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데도 그렇게 요란을 떠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 크신 분이 오신 것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14절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샬롬이요 에이레, 우리 나라 말로 화평이요, 화목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바로 위에 있는 1장 79절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냄을 받았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 될 이유, 그것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 천년 전에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평강의 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없는 우리의 현주소가 무엇인가 잘 아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에서 명료하고 간단하게 우리의 현주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였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임금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베개를 높이 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현주소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 세대를 완전히 불로 심판하시면서 다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고 범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성을 본보기로 심판하시면서 남아있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경고하시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화해의 몸짓에 눈을 돌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해당하는 평민의 모습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친히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 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설명한 글을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일년 동안 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 십년이지만 그 우정의 탑을 발로 차 버리는 것은 1분이면 족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우정입니다. 1년이 넘도록 서로가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아마 교회를 다녔나 봅니다.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가책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해서 되겠는가?' 집으로 돌아간 후 그 옛날 친구와 다시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 노력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편지를 5통이나 보냈는데도 그 친구에게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못해서 이 사람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도무지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기면 안될 것 같아 눈을 맞으며 꽤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 있던 친구가 문을 열어 보니 자기 친구가 눈을 소복이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와 평화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그 앞에 녹아지지 아니할 사람의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사람의 모습, 그것도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마구간에 탄생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눈을 맞고 떨면서 문 밖에 서서 벨을 누르는 친구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 이상이다. 이건 비유가 안된다.'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 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의교회에서는 1년에 한 400건 정도 장례가 납니다. 400건이면 매일 한 건 이상 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엄청나게 많습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그런 십자가도 져야 됩니다. 물론 그 중에 대부분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는 장례입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도 많이 있지만, 가슴 아픈 장례도 있습니다. 자녀가 먼저 예수 믿고 주님을 만난 뒤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예수 믿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하고는 수년 동안 부모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어떤 때는 직접 찾아가서 꼭 예수 믿으라고 눈물로 전하기도 하고, 대각성 전도 집회 때는 초대해서 복음을 듣게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안 믿고 계속 미루기만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손잡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면 온 인류가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과 평화하는 은혜의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자기와 화목하시고 자기 품에 안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마.'라고 약속하시게 되었습니다. 한순간도 나를 혼자 떼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31절 이하에 바울이 너무나 흥분하고 너무나 황홀해서 소리친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 마음에 그대로 와 닿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 다시 말하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어찌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미리 아시고, 나 같은 것을 예정하시고, 나 같은 것을 때가 되자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다음에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롭게 하셨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고, 우리와 평화 하셨는데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는가?'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롬8:32) 의롭다 하시는 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받으시고 우리와 평화하신 하나님인데 누가 우리를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겠는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눅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왜 기쁩니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암흑과 혼돈 속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찬송가 469장을 여러분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스럽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 혼자 불러도 1시간이라도 부를 수 있는 찬송가입니다.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얼마나 우리 예수님이 좋은지요. 우리 중에 아직도 믿음이 없어서 이 평화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 잘 몰라서 이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십시오. 그분 앞에 더 가까이 나가서 그의 영광을 보십시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너무 무거워 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의 왕입니다. 근심, 걱정을 그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다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평화 할 수 있게 하시게 위해서 오셨습니다. 티끌보다 많은 죄, 석탄보다 검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람은 자기 안에 놀라운 능력이 생기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 하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은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서 12장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가 뒤에 따라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명령합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형제까지도 나는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종교적인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 잊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고부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봐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가 좀 심한 다툼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절대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장담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 내 가슴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무조건 백번이고 천번이고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용서함으로써 그들과 평화를 누림으로 우리가 평화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묵은 감정을 가지고 계속 그를 접대합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알아두십시오. 주기도문을 통해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같이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보십시오.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평화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보류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마음에 증오가 있으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손해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병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들어갑니다. 병이 들어가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신까지 병이 납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평화의 왕을 모시고 있다면서 모순된 삶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새천년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 하였다고 하면서 형제와 불화하면 안됩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20세기를 잊어버리십시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 갈 자세를 다시 가다듬으십시오. 과거의 묵은 감정이나 원한, 피해의식을 다 묻어 버리십시오. 다시 말하면 과거에 대해서 문을 닫고 못질을 해 버리십시오. 자물통을 잠가 버리고 다시 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새로운 2000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시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으로서, 가는 곳마다 이 평화의 왕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어 미움이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이 강단에서 어느 자매가 한 세례 간증을 제가 기억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을 때 그는 생활이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간염이 걸려서 고생을 하고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그런대로 수입이 좋고 잘 사니까 마음이 다른 데로 갔나 봅니다. 투병 생활을 하는 아내를 돌볼 생각은 안하고 바깥으로 돌면서 마음을 다른 데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잠을 못 자고 고민하는데 이웃에 있던 우리 교회 순장이 가서 전도를 했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 믿으면 다 이길 수 있어요.' 새가족반에 나왔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날 말씀을 배웠습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점점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그 놀라운 평화가 자기 마음에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갈등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왕, 살아계신 주님이 그 자매의 마음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이 그 마음을 다스리니까 평화를 해치는 모든 것들이 다 쓸려 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남편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다 용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으로 자녀들을 들볶으며 그들에 대해 항상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연약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얼마나 감사하게 여겨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애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집안의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치유를 받으니까 얼마 후에 간염까지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끝으로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마음의 평안이 있기에 인생의 거센 파도를 두려움 없이 타고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신으로, 평화의 대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 합시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였음을 선포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평화를 통해서 새로워지는 은혜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 역사가 창조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면서 사는 내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성탄의 은혜
갈라디아서 4:3-7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4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 신앙이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오늘 말씀 드리는 임마누엘 신앙이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능치 못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신앙이다. 주님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셔서 역사와 인류를 심판하시며 믿는 자가 휴거되고 부활하리라는 믿음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죄 아래 있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업을 누리게 된 것을 찬양하고 있다.
먼저 3절에 보면 예수님 오시기 전 우리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실존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율법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정죄되고 율법과 죄의 종노릇하던 삶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여러분! 세상에서 뭐니 뭐니해도 가장 비참한 삶이 종의 삶이다. 노예의 신분이다. 종에게는 자기 인권이나 권리나 소유가 없다.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마저 자동으로 다시 종의 신분이 된다.
종은 짐승처럼 마구 다루어진다. 미국의 노예역사를 보아도 참 얼마나 비참한지 모른다. 채찍으로 얻어맞고 부모와 자식이 팔려 생이별하고 부부가 갈라지는 그러한 쓰라린 경험을 했다.
옛날 예수님 시대에 보면 종이 되는 몇 가지 케이스가 있었다. 첫째는 남의 돈을 빌려 빚을 갚지 못하면 그 빚 때문에 종이 된다. 다음으로는 전쟁에서 전쟁포로로 사로잡혀갈 때 종이 되었다. 그리고 종의 자녀로 태어나면 자연히 종이 된다. 한번 종이 되면 누가 빛을 갚아주거나 탕감해 주지 않는 한 종에서 자유인이 되는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종된 우리 인간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이 무엇인가?
4절에 보니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때가 차매'하는 말씀이다.
그 다음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하였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희생이었다. 저는 제
가 목회하면서 가장 마음으로 힘든 경우가 자녀를 잃은 가정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였다. 아직 나이 젊은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가정에게 참 위로할 말이 없다. 그 때마다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늘 생각해 본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주님의 그 고통하는 사랑을 생각해 보곤 하였다. 성탄은 이 고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고 축복받게 된 사건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임마누엘의 축복과 사랑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1)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무슨 말인가? 인간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요 내용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 이브를 유혹해서 범죄케 한 뱀을 향해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셨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마귀의 권세와 세력을 꺾으시고 인간을 그 손에서 빼앗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지난 주 Homeless를 위한 성탄예배 때 그런 말을 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어떤 의미에서는 Homeless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우리의 고독과 아픔, 슬픔과 고통, 헐벗음과 굶주림을 잘 알고 계신다. 여기에 큰 위로가 있다. 그가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그가 채찍에 맞고 찔림은 우리를 고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2) 율법아래 나게 하셨다
율법으로 우리는 정죄 아래 있게 되었다. 죄를 범한 우리는 법에 의해 모두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의롭다고 판단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쏟아바침으로 그 모든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는데 그 말은 헬라어로 '테테루스타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빚을 다 갚았다는 뜻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의 빚을 다 갚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 할렐루야! 이것이 가장 큰 성탄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제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의 유업을 얻게 하셨다.
성탄절은 홀로 된 자나 병상에 있는 분들이나 객지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더 외롭고 쓸쓸한 계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뻗치고 베푸는 계절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길이 되는 것이다.
성탄의 비전과 새 시대
미가서 5:1-15
미가는 주전 8세기경에 약 60여 년간이나 오래 활동한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요담왕(왕하 15:32-36)과, 친 앗수르적 사대주의 정책을 취하던 아하스왕과(왕하 16:1-16), 반 앗수르적 정책을 취하다가 그의 침략을 받았던 히스기야왕(왕하 18:1-8)의 치세 어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선지자 미가에게 임한 영감의 사명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남은 자의 구원을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죄와 심판과 구원에 대한 외침은 비단 미가의 경우뿐 아니라, 사실상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외친 저들의 존재적 사명의 주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미가 선지자에게 영감된 거룩한 메시야의 탄생, 곧 성탄과 그 성탄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새 시대인 신약복음시대의 영광을 예언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Ⅰ. 메시야 성탄의 비전을 받았습니다(미 5:1-4).
메시야의 탄생은 유대땅 베들레헴이고, 그의 기원은 태초요 영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하였습니다.
1. 언제 탄생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수난기라고 하였습니다. 딸 군대, 딸 시온(미 4:8, 10, 13, 5:1), 곧 이스라엘의 통치자(재판자)가 이방의 침략을 받아 업신여김을 받을 때(미 5:1)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임산한 여인이 고통을 겪는 해산의 기간'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미 5:3). 바로 이러한 성경의 표현은 이스라엘에 왕이 끊어진 수난기를 뜻합니다.
메시야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에 붙인바 되어 고난을 겪을 것이고, 그 동안에 베들레헴에서 먼저 난 다윗 왕가는 단절이 되어 버린 때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시기를 가리켜 「고통하던 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여 년간의 암흑기를 가리킵니다.
2. 어디에서 탄생할 것인가?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인데 여기에 에브라다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에브라다는 '열매가 많다'라는 뜻인데, 스불론의 베들레헴과(수 19:5) 구별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에브라다'는 라헬이 베냐민을 해산하고서 죽어 장사되어, 라헬의 묘비가 세워진 기념 장소로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창 35:19, 48:7).
베들레헴은 '유다 족속 중에 작은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나의 동네였습니다(눅 2:4). 초라한 시골 촌락이었습니다(요 7:42).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오실 메시야는 어떤 특정 지역의 후광을 입고 오시지 않고, 이름 없는 한 작은 촌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민이 먹을 생명의 양식으로 떡집인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어떤 분이신가? 메시야의 실체가 어떠한가?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하였습니다(미 5:2).
곧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바로 왕되신 메시야를 뜻합니다(마 2:2). 그 분은 영원하신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옛날부터, 영원의 날부터'라는 뜻으로, 메시야의 자존적 영원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야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었습니다(요 1:1).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사 9:6).
하나님의 영감은 선지자 미가에게 거룩한 메시야 성탄의 비전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막대기 아래 압제를 당하던 흑암의 날(때), 곧 임산한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날에, 작은 고을 유다 베들레헴에서 상고, 태초이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그 분이, 곧 왕이 탄생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출생하실 하나님의 독생자로,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7:14). 학개 선지자는 그 분을 가리켜 '만국의 보배' 곧 만국의 소원이라고 하였습니다(학 2:7). 말라기 선지자는 '의로운 태양',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말 4:2).
Ⅱ. 메시야의 새로운 통치 시대를 예언하였습니다(미 5:5-15).
하나님의 영감은 선지자 미가에게 메시야의 탄생으로 말미암는 새 시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 시대의 영적 통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메시야 시대 곧 새 시대의 영적 통치를 몇 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신적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오실 메시야 자신이 여호와의 자격으로 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에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섰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으로 서서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오실 메시야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하나님(아버지)은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요 5:17-23, 14:7-10).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목자적 통치(다스림)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 중에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그는 자신이 선언하신 대로 선한 목자였습니다(요 10:11). 그는 양의 문이었습니다(요 10:9). 그가 양의 목자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양의 목자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0:10). 그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그의 양떼를 먹이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손에서 그 양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양들에게 영생을 보장한다고 하였습니다(요 10:28).
이렇게 선지자 미가는 선한 목자, 능력의 목자, 구원의 목자, 생명의 목자로서의 메시야적 통치시대를 내다보았습니다.
3) 그는 우주적 통치자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 하반절에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오실 메시야의 통치 영역을 말합니다.
여기 '창대하다'는 말은 '크게 자라다', '크게 되다', '굳게 되다', '강하게 되다'라는 뜻으로 메시야적 통치 영역이 땅끝까지 미칠 영향을 나타내는 예언입니다. 과연 그의 통치 영역은 예루살렘이었고, 온 유대였고, 사마리아와 땅끝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8). 모든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8:19). 온 천하만민이라고 하였습니다(막 16:15). 모든 민족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14). 결국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로부터 이루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영역이 되고 말았습니다(계 7:9). 그래서 천사는 외치기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였습니다(눅 2:10).
4) 평화의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5절에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앗수르 사람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고 하였습니다(미 5:6b).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땅과 이스라엘 궁을 짓밟을 때 하나님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같은 용맹스러운 지도자, 권능 있는 지도자들을 일으켜 그를 격퇴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가의 표현은 구약적입니다. 신약에 오실 메시야께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같은 용맹스러운 지도자, 권능 있는 지도자를 일으켜 교회가 당하는 모든 위험에서 영전(靈戰)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하는 예언입니다.
말하자면 미가서 5장 5절의 「이 사람」은 그 뒤 6절 하반절에 「…그가 우리를 그(원수)에게서 건져내리라」고 예언된 사람과 같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 메시야는 우리의 '평강'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바울은 그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하였습니다(엡 2:14).
5) 메시야적 통치는 남은 자, 곧 선택 자가 그 대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7절에 「야곱의 남은 자」, 8절에도 「야곱의 남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 성경에서 보여주는 '남은 자'의 궁극적 의미는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을 의미하였습니다. 저들의 영적 특질을 두 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1) 그 하나가 이슬 같고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미 5:7).
① 즉 저들의 구원이 천적(天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 남은 자의 구원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율주의적인 구원임을 알려줍니다(요일 4:10).
② 그것은 공개적 비밀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슬과 단비는 실로 고요합니다. 들레지 아니합니다. 더욱이 이슬은 밤에, 아무도 모르게 고요히 하늘에서 내립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가 그러하다는 사실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체험은 참으로 신비한 비밀인 동시에 또한 결과적으로 드러나고 마는 공개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2) 또 다른 하나는 사자와 같은 기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8절에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는 소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승리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승리의 표상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믿는 신자들도 이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요 19:30), 부전승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6:33). 그 부전승의 비결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 5:4).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요일 2:13), 사망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56-57).
말하자면 오실 메시야의 통치권내에 들어가는 신약시대 구원받을 신자들은 이슬 같고 단비 같은 고요한 생명의 통치와, 사자 같은 능력의 힘을 받아 살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6) 종말론적 구원역사 시대라고 하였습니다(미 5:10-15).
이 부분 중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를 보면,
① 먼저 전쟁을 종결짓는다고 하였습니다. '말'과 '병거'와 '성읍'들을 훼파하고 무너뜨린다고 하였습니다(미 5:10-11).
② 각종 우상들과 여러 우상숭배의 행위들을 끝장내어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복술', '점장이', '새긴 우상과 주상', '아세라 목상'들을 섬기는 백성과 나라들을 하나님은 진노와 분한으로 심판하겠다고 하였습니다(미 5:12-15).
세상에 전쟁이 종식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없어지고 마는 때는 종말의 때가 아닌가? 바로 그 시대는 예수 재림과 함께 성취될 완전 신권 통치시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미가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종말론적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재림까지 내다보며 새 시대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선지자 미가는 오실 메시야 예수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우주적 통치자, 평화의 통치자, 선택받은 자의 메시야, 그리고 전쟁과 우상을 종식시킬 공의로운 심판의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의 탄생(강세)은 새 시대를 여는 축복의 관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를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들인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밝아오는 미래 즉 새 시대의 비전을 받고, 그 세계를 믿음으로 소망하면서, 그 미래의 새 시대를 예언하고 살았습니다.
주전 8세기경, 미가 선지자도 예외없이 이 예언 사명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서 탄생하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바도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과 함께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성탄과 함께 도래할 새 시대는 어떤 성격의 시대입니까?
바로 새 역사의 신기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강세)과 함께 전 인류의 역사는 새 시대,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B.C.(주전)가 끝나고 A.D.(주후)의 역사가 기록되는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부터 세계 역사의 연호가 시작되어 지금 1999년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새 나라, 새 복음이 반포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시대였습니다. 예수의 성탄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제국을 건설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유대나라나 헬라제국이나 로마제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왕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하나님 백성(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운동이었습니다.
이 새 나라, 새 복음 곧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기 위하여 세계와 역사는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다 전파된 후에는, 이 세상 역사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우주적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였습니다.
※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맞는 성탄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탄은 새 역사의 신기원이 됩니다. 인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서 그 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탄은 새 나라, 새 복음 곧 천국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실로 인류가 받은 무한에의 선물, 영광의 선물, 축복의 선물이 아닌가? 바로 예수 성탄이 지닌 표적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새 시대의 표적이 아닌가?
그는 바로 많은 사람 곧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그에게로 되돌리기(찾음) 위하여 별들의 전쟁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그의 성탄은 실로 별들의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포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성탄은 위대한 새 시대의 출발이 된 것입니다. 성탄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요셉의 성탄
마태복음1:18-25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 9:9)"
요셉 청년은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후 일년 후 이 소박하나 왕궁도 부럽지 않을 꿈을 꿉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임신으로 모든 꿈이 깨어집니다. 성령의 계시로 아내를 데려와 아기 예수 탄생때까지 불침 하고 대부가 됩니다. 이 사건 통해 우리가 받을 은혜는?
1.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일을 주관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더 니 …"
요셉의 파혼사건이 실상은 하나님이 역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을 성령의 계시 없이는 인간은 모릅니다. 베르나드 성자는 이 세상에서 나외에는 아무도 해할자가 없다 했습니다. 나로 실패하게 한 것은 원수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무지와 나태와 게으름과 교만과 우월감입니다. 절망, 좌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장된 축복, 고난의 보자기에 쌓인 축복이란 엄청난 영적 비밀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합성어 갖고 살아야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선 으로 인도하십니다. 고난이 왔다면 변장하고 온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일에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으로 이거할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11 절)"
침묵의 칼 침묵의 심판이 있습니다. 말 안한 것은 부모가 자식 심판 할 때 갈등할 때 친구가 말안함 으로 무시함으로 칼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침묵으로 아브람 심판 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륙세 이었더라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 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6:16-17:1)"
아브람 죄지을 때 15년간 하나님은 침묵으로 심판 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4:6-7)"
지식이 없어 이 백성이 망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릴 때 희망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 들릴 때 절망이요 심판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일에 은혜 주십니다.
왜 시골 처녀 총각 선택했습니까? 그들은 믿었고 들었습니다. 믿는 것 보면, 순종한 것 보면 선택함이 분명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하나님은 은혜 주실 때 도구 쓰실 때 있으나 마리아의 선택은 도구없이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교통 사고 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건져 주신 하나님 보고 참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오직 은혜임을 고백 합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고전11:5)" 기도 응답될 때 하나님이 참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위기에서 쓰시고 건져 줄 때 하나님이 나를 아직도 이땅에서 쓰시고 계시는 구나하는 사랑과 은혜의 확신이 옵니 다. 성탄은 마리아와 요셉의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누구 용서 못해준다고 좌절 마시요 용서할 마음만 먹으면 내가 1%만 해 도 99%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불가능한 일 1%만 하십시오 하나님 이 다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구원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