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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베르1900웃음18내용3장
웃음(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RI)
벩송, 김진성, 종로서적, 1983. P. 132.
III 성격의 웃음거리
[ 1. 예술 일반의 희극과 차이
2. 희극적인 성격의 정수: 허영
3. 직업적 희극성
4. 희극의 부조리
5. 웃음의 복합적 성격 ]] [정연복 역, 세계사, 1992에서 붙은 소제목이다.]
# **** 3. Le comique de caractère
제3장 성격의 웃음거리 101-153
§3.1. [Le comique de caractère / 1. 순수예술과 희극의 차이(131) ] 101-131
우리는 희극을 순회와 우회[우여곡적]의 경로를 따라 오면서, 어떻게 형태, 태도, 몸짓[제1장에서], 상황, 행동, 말[제2장에서]에 스며들었는가를 살펴보았다. 희극적 성격들(des caractères comiques)의 분석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우리 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이르렀다. (101)
웃음(le rire)은 사회적 의미화와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웃음거리(le comique)는 무엇보다 먼저 인격이 사회에 대한 어떤 특정한 부적응(un inadaptation)을 표현하며, 인간에게만 웃음거리가 있다. 우리가 우선 목표로 삼는 것, 그것은 인간(l’homme)이고, 그것은 성격(le caractère)이다. (101-102)
우리에게 순수 금속은 이미 주어졌고[1장] 또한 우리의 노력들은 무기물(le minéral)을 재구성하고자 했다[2장]. 이제 우리는 금속 그 자체를 연구할 것이다. (102)
마음을 움직이는 영혼의 상태들(des états d‘âme)도 있고, 공감을 이루는 환희들과 슬픔들도 있고, 고통스런 놀라움(공포 또는 연민)을 일으키는 정념들과 악들(des passions et des vice)도 있고, 감정적 공명들에 의해 영혼에서 영혼으로 이어지는 감정들(des sentiments)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본질적인 것에 관심이다. 이 모든 것은 [심층인 경우에] 진지하고, 심지어는 비극적(tragique) 이다. 타인의 인격이 우리를 감동시키기를 그치는 거기에서, 오로지 희극(la comédie)이 시작할 수 있다. 희극은 사회적 삶에 대항하는 뻣뻣함(le raidisseement contre la vie sociale)이라 불릴 수 있는 것과 더불어 시작한다. (102)
웃음은 인물의 방심을 교정하고 또 그의 꿈에서 그를 끌어내기 위해 거기에 있다. (103)
[그랑]에콜 입학 과정에 대한 예로서, .. 시험준비 .. 시험관문 통과, .. 선배들의 마련한 시련 .. 선배들이 그에게 습관의 완고함을 교정하기 위해.. 한 양식을 고안한 것이다(inventer un mode). (103) [ un bizutage (주로 신입생들을 골탕먹이는) 학생들의 신입생 환영 의식 / 통과의례(le rite de passage, initiation)도 마찬가지이다. - ]
[통과의례에서] 사회는 교정의 위협까지는 아니라도 [습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창피함의 전망[창피로 남을 것이라는]을 각자에게 머리에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웃음의 기능임에 틀림없다. 그 대상이 되는 자에게 항상 약간 창피하게 하는 웃음이 진실로 일종의 사회적 입문의식(brimade sociale)인 셈이다. (103)
이로부터 웃음거리의 애매한 성격(le caractère équivoque du comique)이 나온다. 그 성격은 예술에도 삶에도 전혀 속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주인공을 보면서 웃기보다, 고착적 행동의 뻣뻣한 경직성을 희극으로 보여주어 웃음거리로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집단]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에게 창피라는 것을 알게 하여 교정하려는 저의(une arrière-pensée) 또는 은밀한 의도(l’intention inavouée)가 있다.](103)
바로 이런 이유로 희극은 드라마(le drame)보다 실재적인 삶에 훨씬 더 가깝다. .. 반대로 희극이 실재적인 것과 구분된 것은 오직 저급한 형식들에서 이고 또한 통속희극(le vaudeville)과 소극(la farce)에서 이다. 희극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그것은 더욱더 삶과 뒤섞이는 것이다. 실재적인 삶의 장면들은 고급 희극과 너무나 유사해서, 연극(le théâtre)이 말 한마디도 바꾸지 않고서 그 장면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104)
따라서 희극적 성격의 요소들은 연극에서도 삶에서도 동일한 요소들일 것이다. 그러면 이 요소들은 무엇인가? (104)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의 가벼운 결점들(les défaut légers)이 우리를 웃게 하는 것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이런 견해에서 많은 부분에서 진리가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04)
예로서 [몰리에르의 수전노(L'Avare ou l'École du mensonge, 1668)에서] 아르빠공(Harpagon, 고리대금업자, père de Cléante et d'Élise, et amoureux de Mariane)의 인색함과 같은 것이다.
[인간 혐오자 또는 사랑에 빠진 우울증 환자(Le Misanthrope ou l'Atrabilaire amoureux, 1666)]에서 알세스뜨(Alceste)를 보고 웃는다. 웃음거리는 알세스트의 정직함이 아니라, 그 정직함이 그에게 나타나는 특수한 형식들이다. .. 우리를 웃게 하는 알세스트의 약점(ce travers, 기벽)이 그의 정직함을 웃을 수 있게 만든다(rend son honnêteté risible)는 것도 사실인데,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 (105)
사실상 희극적 인물이 엄밀히 말해서 엄격한 도덕과 청산할 수 있다(être en règle avec 양립할 수 있다). 그 인물은 오직 사회와도 청산하기에(se mettre en règle avec) 이른다. 알세스트의 성격은 완전히 정직한 인간의 성격이다. 그는 비사회적(insociable)이며, 그 때문에 바로 웃음거리이다. 유연한 악덕(un vice souple)은 굽힐 줄 모르는 덕목보다 웃을 수 있기가 쉽지 않다. 경직성(la raideur)이란 사회에 혐의를 둔다. 그 경직성이 여기서 정직함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은 알세스트의 경직성이다. (105-106) [그의 정직한 인격이 아니다, 그가 사회에 대해 유연함이 없다는 것이 희극의 요소이다.]
이처럼 웃음거리는 아주 흔하게 풍습들(les moeurs)과 관념들(les idées)에 관계있다는 것을 –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한 사회의 편견들(les préjugés)에 관계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106)
그럼에도 인류의 명예에 있어서, 사회적 이상과 도덕적 이상(l’idéal moral, 인격적 이상)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 타인의 결점들이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은 부도덕성(leur immoralité)이 아니라 비사교성(leur insociabilité, 비사회성)이기 때문이라... (106)
그러나 이 질문[결점들이 어떤 것인가?, 어떤 경우에 결점들이 그것들에 대해 웃게 에는 너무 신중하다고 판단하는가?]에 관해서 우리는 이미 은연중에 이미 대답을 해왔다. 말하자면 웃음거리는 순수 지성에 말을 건다고 이미 대답했다. 웃음은 감동(l’émotion)과 양립할 수 없다. (106) [상층에 대해서는 웃음거리가 있고, 심층에 대해서는 감동과 공감이 있다. 제국은 냉엄하고 그 속에서 어긋나면 비웃음과 질책이 있는데, 편위자에서 보면 제국의 동조자들의 행위는 뻣뻣하기에 웃음거리이다. 그런데 동조자는 찬사와 아첨을 하는데, 진솔한 자 눈에는 가식과 치장이다. 그 치장이 그 사람 자신에게 맞지 않기에 형태의 웃음거리이도 한다. 김무성이 한나라당에서 저항하는 듯 행위해도 그것은 가식이기 때문에 웃음거리(조롱)가 된다. (51RKC)]
어떤 결점에 대해 .. 나의 공감(ma sympathie), 나의 걱정(ma crainte), 나의 연민(ma pitié)에 감동을 일으킨다면(émouvoire), 그것은 끝이고, 더 이상 웃을 수 없다. (106) [인민에게 연민이 있고, 그 다음 학습이 있고, 글고 교정이 있다. 연민이 없으면 인민에 대한 경멸(개, 돼지) 과 편견의 악습(갑질, 폭언)이 개입하며 비웃음이 있다. 그것은 삶의 진실이 아니다.]
악덕이 나의 감동을 불러일으키(émouvoire)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분명히 충분조건([la condition] suffisante)이 아닐지라도, 바로 유일한 실재적 필수조건(la condition nécessaire) 이다. (106) [인격은 심층 속으로 들어가면 웃지 못한다. 상층이 심층을 바라볼 때 편견 때문에 비웃는다. 심층은 상층의 허구와 가식을 알아채면 거구로 상층의 비굴과 고착에 대해 웃는다. ]
그러면 희극 시인은 우리가 감동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는가? 이 질문은 당황스럽다.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하여, ..인위적 공감을 분석해야하고, 우리가 상상적 환희들와 고통들을 어떤 경우에는 받아들이고 어떤 경우에는 거부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
한편으로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우리의 감성(notre sensibilité)을 잠재워서 꿈[몽상]들을 준비하게 하는 기교(un art)가 있다. 다른 한편 우리의 공감이 열려지려는 바로 순간에도 우리의 공감(notre sympathie)을 누그러뜨려 심각한 상황조차도 심각하지 않게[무심하게, 건성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기교(un art)도 있다. 두 절차(Deux procédés, 방식)는 이 마지막 기교가 지배하는 것 같다. 즉 희극 시인은 이 마지막 기교를 다소 무의식적으로 적용한다. (107) [여기서 절차란 2장에 나오는 절차가 아니라, 이 문단 끝을 보건데, 희극과 드라마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한데, 너무 멀리 있다. 단순히 두 기교를 두 절차라 하고 그리고 마지막 기교가 둘을 지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최면과 몽상 대 무심함과 건성]
첫째 [기교, 절차]는 등장인물의 영혼 가운데서 주인공에게 부여한 감정(le sentiment)을 분리하는(isoler)데, 말하자면 독립적 현존이 갖춰진 기생적 상태로 만드는데 있다. .. 이와 반대로[둘째 절차] .. 우리를 무차별하게 하여 웃음거리가 되게 하는 감동(l’émotion) 속에서 웃음거리를 감동에 사로잡힌 영혼과 관계맺지 못하게 하는 경직성(une raideur)이 있다. (108)
수전노(L'Avare ou l'École du mensonge, 1668)에는 드라마와 나란히 가는 장면이 있다. 돈을 빌린 자와 고리대금업자가 서로 만나지 못했다가, 마주하여 만나서 아들과 아버지사이인 것으로 발견되는 장면이다. 인색함(l’avarce, 구두쇠)과 부정(父情)이 아르빠공의 영혼에 서로 충격을 주면서, 어느 정도 참신한 결합을 이루었다면 이 경우에 진실로 드라마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 “네, 아들아, 난 그래도 지난 일을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거야.” 따라서 인색함은 다른 감정에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지도 않고, 그 옆으로 건성으로(distraitement)으로 지나쳐 버렸다. (108)
감정들과 애정들, 욕망들과 혐오들, 악덕들과 미덕들, 이 모든 것은 새로운 종류의 삶을 소통하게 하는 소재[재료]가 되었으리라. 이것이 고급 희극과 드라마 사이에서 첫째 본질적 차이 인듯하다.
둘째 차이는 보다 눈에 띄기는 하나, 실은 첫째 차이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영혼의 상태를 드라마로 만들 의도를 가지고 또는 영혼의 상태를 신중하게 처신하게 할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영혼 상태를 묘사할 때, 사람들은 .. 영혼의 상태를 행동들(vers des actions)로 향하게 한다. (109) [드라마는 인격을 의도를 묘사하는데 비해, 희극은 몸짓과 같은 행동들로 향하게 한다. 뒷문장에서 의도는 내적 작동(les actes)로 행동들은 몸짓들(les gestes)으로 바꾸어 서술한다. 즉 인격 내부가 아니라 인격이 외부로 실행하는 표시 또는 표현(몸짓)이 희극을 만든다.]
[수전노는 돈벌이에만, 사이비 독신자(따르띠프)는 하늘만 주시하는체 한다. 그런데 벩송의 견해로는 기계화된 방식들(les machinations)이라는 것이다.]
희극은 우리의 주의를 [의식적] 작동들(les actes)을 향해 집중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몸짓들(les gestes)로 향하게 한다. 여기서 몸짓들이란 그것들을 통해서 영혼의 상태가 아무런 목적이나 소득이 없이 그저 일종의 내적인 근질거림(démangeaison, 가려움)의 결과[효과]로서만 표현되는 일체의 태도들, 움직임들, 대담들로 나(벩송)는 이해한다. (109)
이렇게 정의된 몸짓은 행동으로부터 깊이있게 차이가 있다. .. 몸짓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자동적이다. 행동에 있어서는 인격 전체가 개입하는데, 몸짓에 있어서는 인격의 고립된 부분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전체 인격성으로부터 떨어져서 표현된다. (109-110)
따라서 우리의 주의가 [내적] 작동(l’acte)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몸짓(le geste)에 근거한다. .. 따르띠프의 몸짓을 고려해 보자. 그가 무대에 등장할 때 그 첫마디가 “로랑(하인), (고행자의) 채찍과 함께 내 참회복을 챙겨줘” 그는 도린(Dorine 마리안의 하녀)가 자기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안다. (110) [말과 몸짓으로만 하는 척하지, 실재 행동으로 채찍과 참회복을 입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은 드라마 속에서 본질이지만, 희극 속에서는 부수적인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110)
요약하자면, 어떤 성격이 선하냐 악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 심각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우리가 그것에 감동받지(émus, émouvoir) 않는 한, 우리를 웃게 할 수 있다. 작중 인물의 비사회성(insociabilité)과 관객의 무감성(insensibilité)이 결국 두 가지 본질적 조건이다. 셋째 조건이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모든 분석들 이 셋째를 분간해내려고 했다. (RI 111, Oe 456) [셋째 조건은 다음 문장에서 자동주의이다.]
그것은 자동주의(automatisme)이다. ..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 본질상으로 웃을 수 있는 것이다. .. 모든 방심은 웃음거리이다. (111)
동키호테의 경우 .. 112
[몰리에르의 서민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1670)에서], 쥬르댕(M. Jourdin)씨는 분노에 대해 일장 설교를 하고 난뒤 스스로 화를 내고 .. (112)
[몰리에르의 유식한 여자들(Les Femmes savantes, 1672)에서], 바디위스(Vadius)는 시를 읽는 이를 빈정대고 나서 호주머니에서 시를 꺼내는 식이다. (112)
경직성, 자동주의, 방심, 비사회성, 이 모든 것이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으로부터 성격의 웃음거리가 만들어 진다. (113)
요약하면 [희극과 드라마의 사이에서 차이를 분간하는 세 조건 / 다음으로 희극과 다른 예술사이의 차이 즉 희극이 다른 예술들 속에서 위상(la place, 지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113)]
§3.1.-1, [희극의 위상: 모든 예술들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성격(caractère)이 웃음거리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성격을 이해하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이다. 우리의 인격에서 이미 만들어진 것(tout fait, 기성적인 것) 즉 우리 내부에 있는 마치 태엽처럼 일단 감긴 후에 자동적으로 기능하는 기계주의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 따라서 희극적 인물은 하나의 전형(un type)이다. 거꾸로 전형에 유사한 것은 웃음거리의 어떤 것이다. (113)
자기 스스로로부터 일탈하도록 자신을 내 맡기는 것(se laisser distraire), 말하자면 준비된 틀에 삽입되게 내버려 두는 것, 그것이 웃음거리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웃음거리가 되는 것, 그것은 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이 흔히 삽입되는 틀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고 또 스스로를 성격으로 굳게[경직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114)
성격들을 즉 일반적 전형들을 그리는 것, 그것이야 말로 고급 희극의 목적이다. .. 사실 희극이 우리에게 일반적 전형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견해로는 일반적인 것을 지향하는 모든 예술들 중에서 유일한(le seul) 예술이다. (114)
우리는 여기서 이처럼 방대한 연구에 뛰어들 수 없다. 그러나 희극적인 연극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을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그 중요한 연구의 윤곽만을 그려보아야(d’en esquisser le plan) 할 것이다. (114)
[§3.1-1예술론: 예술의 목적 ]
예술의 목적은 어떤 것인가? (115) [125쪽을 참조하자.] 만일 실재성이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직접적으로(dirctement) 와 닿는다면, 또 만일 우리가 사물들과 우리자신들 사이에 무매개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아마도 예술은 소용없으리라(inutile). 오히려 우리들 모두가 예술가들이 되리라. 왜냐하면 이때에는 우리의 영혼이 연속적으로[지속적으로] 자연(la nature, 본성)과 일치하여 진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115)
고대 조각처럼 ... 독창적인 음악처럼 ... 보통사람에게는 두꺼운 장막(le voile épais)이 드리워져 있는데 비해, 예술가[조작가]와 [음류 ]시인[음악]에게는 얇은 장막(le voile léger)가 드리워져 있다. 어떤 요정(Quelle fée)이[선녀가] 이 장막을 드리웠을까? 그것은 짓궂은 장난으로 또는 우정으로 드리워졌는가? (115) [책을 읽는 독자에게 장막은 글자의 배치이고, 의미에서 배열을 독자와 작가 사이에 차이를 지닐 수 있지만, 배치든 배열이든 사이(non dit)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도 사이를 미처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텍스트가 나오면 꼭 저자의 것으로만 여기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한다. (51RKD)
우리는 살아야만 했다(Il fallait vivire). 그리고 삶은, 사물들이 우리의 필요들(nos besoins)에 따라 맺는 연관에서 우리가 그 사물들을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산다는 것은 행동(작동)하는데 있다(Vivre consiste à agir). 산다(Vivre), 그것은 대상들로부터 거기에 적당한 반작용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유용한(utile) 인상들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인상들은 희미해지거나 또는 흐릿하게(confusément)만 우리에게 도달한다. 나는 [유용하게] 주의해서 보면서(regarder) [흐릿하게] 그저 보는(voir) 것으로 믿고, 귀 기울여 들으면서(écouter), 그저 듣는(entendre) 것으로 여기며, [관심으로] 연구하면서 나의 심정(coeur)의 깊이[심층]에서 읽는 것으로 믿는다. (115-116) [세 가지 전자는 표상적 사고이며, 세 가지 후자는 내재적 사유이다. 사유가 진실로 느껴지지 않고 흐릿하게 여기는 것은 일상이 유용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51RKD)]
나의 감관들과 나의 의식들이 실재성에서 실천적 단순화작업(une simplification pratique)만 나에게 전수할 뿐이다. 이것들[감관과 의식]이 사물들과 나 자신으로부터 주어진 관점(la vision)에서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은(inutile) 차이들은 지워지고, 인간에 유용한 유사성들은 강조되고, [표면의 행위의] 길들은 나의 행동이 참여할 것에 미리 그려진다. 이 길들은 전 인류가 나보다 앞서서 지난 온 길이다. (116) [여기서 길들은 표면위에 상층의 사고의 길들이다. / 지성의 진화는 EC에서 고착적 물체에 대한 지식의 확장이다. 그런데 자연에 의한 자기 생성은 생명의 길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그래서 창조적 진화이다. 상층에서 유용성의 계열을 확장하는 것은 종이란 개체의 특수성(particuleir)의 관점이고, 무용해보이지만 총체성의 노력은 류적 개체성의 특이성에서 사유하는 것이리라. (51RKD)]
사물들이나 존재들의 개채성(l’individualité)은,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유용하지 않을 때마다 우리를 회피한다. 심지어 우리가 개체성을 주목하는 그 경우에(한 인간과 다른 인간을 구별하는 때처럼), 우리의 눈이 파악하는 것은 개체성도 아니고, 형태와 색의 완전히 독창적인 조화(une harmonie)도 아니며, 실천적 재인식을 쉽게 해주는 한두 가지의 윤곽들(traits, 특성)일 뿐이다. (116-117)
결국, 말하자면 우리는 사물자체는 보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매우 자주 사물들에 붙여진 상표들(des étiquettes, 표시들)을 읽는데 그친다. 필요에서 나온 이 경향은 언어의 영향으로 강조되었다. 왜냐하면 단어들은 류(類)(고유명사를 제외하고)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117)
언어는 사물의 형식을 은폐하는데(masquer) .. [은폐된 것 또는 감춰진 것] 그것은 외적 대상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고유한 상태들이 지니고 있는 내밀함, 인격[개성], 독창적으로 살아온 것들도 감춰진다. (117) [언어의 기표적 작용은 내재성을 상실, 실재성의 상실이다. 언어가 지칭하는 것 안에는 개채성, 인격은 없다. 이것이 스토아학파가 걱정한 이데아론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관해 지각하는 것은 그것의 외적인 전개(son déploiement)일 뿐이다. .. 또한 우리들 고유의 개인에게 있어서까지도 개체성은 우리를 벗어난다(회피한다). (117-118)
그러나 좀 더 멀리 나가면, 방심에 의해 자연은 삶으로부터 보다 초연해진(détachées) 영혼들을 자극한다. 내가 말하는 초연함(超然 détachement)이란 반성과 철학[지성]의 소산인 의도적이고 추론에 근거한 체계적인 초연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그리고 감관과 의식의 구조에 선천적인 초연함으로써, 말하자만 사물을 보고, 듣고, 사유하는 순진무구한 방식(une manière virginale)에 의해 즉시 발현되는 초연함이다. .. 이 영혼은 세상 사람이 아직까지 본적이 없는 예술가의 영혼일 것이다. (118) [영혼의 초연함은 심층에서 자유로운 생성을 의미하며, 이러한 발현을 예술가의 것이라 하는데, MR에서 신비가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감관(snes)이라고 불렀던 것... 그[감관] 기원에서 예술들의 다양성(la diversité des arts)이 나온다. (119) [다양성을 아래에서 세 가지로 설명한다. 예술, 문학, 춤(음악).]
어떤 이들은 색과 형태에 애착을 가질 것이다. ... [회화와 조각을 의미한다] (119)
또 다른 이들은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다. 감정의 외적인 표현인 수많은 생겨나는 행동 아래서, .. 이들은 감정과 영혼의 원상태를 단순하고 순수한 본질 속에서 찾고자 한다. [시 또는 문학을 의미한다] (119)
또 다른 이들은 보다 깊이 파내려 갈 수 있다. .. 인간의 내적인 감정보다 더 더 내적인 생명과 호흡의 일정한 리듬을 포착할 것이다. .. 이들은 마치 지나가다 춤판에 끼어들어 함께 어울리는 행인과 같이, 우리들이 이 음악에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참여하게 한다. (120) [음악의 예인데 춤판에 비유했다. 노래를 사랑하는 민족은 공감과 공명이 강한 편이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성 자체와 마주하기 위하여, 실천적으로 유용한 상징들을, 인습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받아들인 일반성을,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실재성을 은폐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외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 (120) [예술의 목적 설명]
예술은 실재성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전망(une vision plus directe de la réalité)이다.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에서... [이들] 단어들의 의미에 어떠한 역할을 부여함이 없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실재론은 작품 속에 있고, 관념론은 영혼 속에 있으며, 또한 실재성과 다시 접촉하는 것은 오직 관념성의 힘입어서 이다. (120, 121)
[[§3.1-2. 예술 중에서 비극: 드라마 분석]
드라마 예술(l'art dramatique)도 이 법칙에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드라마(le drame)가 추구하려고 하고 또 명백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은, 삶의 필연성들(les nécessités) 의해 우리의 이익(intérêt, 관심)에서 종종 우리에게 감추어진 깊은 실재성이다(une réalité profonde, 심층)이다. 이 실재성들은 어떤 것이며, 이 필연성들은 어떤 것들인가? 모든 시는 영혼의 상태들을 표현한다. (121)
[영혼의 상태들은 마치 양전기와 음전기처럼]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 [서로 밀치기도 하고] 두 극판에서 불꽃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처럼, 깊은 인력들과 척력들이 생산되고, 평형의 완전한 단절이 있을 수 있고, 정념(la passion)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전기작용화(cette électrisation)도 생겨난다. (121) [상반된 두 힘은, MR에서 두 가지 열정((loi de double frénésie, 이중열정의 법칙, MR 316)을 말한다. 이 둘은 들뢰즈 “주름”에서 말하듯이 부딪혀 배가될 수 있고, 또는 소멸할 수 있다. 배가 되는 점에서 진동의 곡선에서 변곡점일 수 있다. (51RKF)] [벩송의 이중성의 실증은 입자와 파동보다 자기장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고, 따라서 규칙에 제한 받는다 것이 필수적(nécessaire)이다. 이익[관심]이 조언하는 것, 그것을 이성은 따른다. 따라서 의무가 있고, 우리의 사명(la destination)은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121) [예전 주, 1911년 논문 “의식과 생명”에는 “the destiny of man”이 나온다] / [사명이라는 개념은 피히테의 것이라는 설이 있다. 벩송에게 이에 관한 피히테 강의록이 있다. - 비에이야르-바롱. ]
이 이중적 영향(cette double influence) 하에서 류적 인간에게서는 감정들과 관념들이라는 피상적 층이 형성되었음이 틀림없다. 이 감정들과 관념들은 불변전성을 지니고 있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고 원했을 것이고, 사람들이 개인적 정념의 내적 불(le feu interieur)을 끌 힘이 없을 때는 그 내적 불을 덮으려한다. (122) [드라마을 이야기하면서 사회성을 이야기한 것은 MR 4장을 예견할 수 있다. / 예노트, “내적 불”은 스토아주의 것인데, 헤라클레이토스 불의 생성에도 연관이 있다. 벩송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투쟁관계로 보기보다, 둘 사이에 상승과 소멸효과를 동시에 이야기한 것은 자기학과 전자학의 실증적 성과를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51RKF)] [옛 노트에 이 문단 121 드라마 예술에서부터 123까지는 MR의 4장을 연상하게 한다고 하다. 헤라클레이토스, 스토아주의, [금욕주의], 루소의 자연주의(심층)가 내포되어 있다.]
인류가 평화롭게 되는 사회적 삶을 향한 느린 진보는 조금씩 이 층[피상적 층]을 굳혀 왔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 지구상의 생명이, 끊어 오르는 금속 덩어리를 차겁고 단단한 막으로 덮어버리는, 긴 노력을 행한 것과 같은 것이다[지성의 노력]. 그러나 화산의 분출들(des éruptions volcaniques)이 있다. (122) [PM 25, 벩송의 철학이 불의 철학이라고 바슐라르가 말했다.]
신화가 그렇게[가이아를] 믿었듯이 지구가 살아있는 존재라면, 지구는 아마도 휴식을 취하고 있더라도, 자기의 가장 깊은 곳[심층]에서 갑자기 스스로 알게 된(se ressaisit) 갑작스런 폭발[의 기회]을 꿈꾸기를 좋아할 것이다. 드라마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즐거움일 것이다. (122) [심층의 분출은 사회의 고착된 지각(地殼, 땅껍질) 표면을 뚫고 솟아날 것이다. MR에서 신비가들의 역할이 이런 측면이다.]
드라마는 자연이 사회에게 보복할 기회를 준다. .. 때로는 드라마는 심층에서 표면으로 정열들(les passions)을 불러낼 것이고 ... 때로는 마치 동시대 드라마가 자주 그러하듯이, 옆길로 샐 것이다. . 이 두 경우에서 사회를 약화하든 자연을 강화하든 드라마는 동일한 목적을 추구한다. (122-123)
따라서 드라마가 보다 유용한 획득물들 그 아래에서 찾으러 갔던 것은 보다 깊은 실재성(une réalité plus profonde)이다. 이 예술은 다른 예술들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123)
이로부터 예술이란 언제나 개별자를 지향하는 것이다는 점이다. 화가 화폭에.. 시인이 노래하는 ..극작가가 우리 앞에 펼쳐보이는 .. [등의 것들은] 그것들은 개별화되어 있다(indivitualisés) 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술에 속한다. 왜냐하면 일반성들, 상징들, 전형들 자체는,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의 일상적 지각의 유통화폐(la monnaie courante)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점에 대한 오해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124)
그 이유는 우리가 서로 매우 다른 두 가지 사물들을 혼동하는데 있다. 우리가 근거하는 사물들로는 대상들의 일반성과 판단들의 일반성이다. 한 감정이 일반적으로(généralement) 진실하다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일반적 감정이라는 데는 이르지 않는다. 햄릿이라는 인물보다 더 특이한(singulier) 인물도 없다. (124) [개인의 특수한 감정이라도 그것이 일반성일 수 있다. 각자에게 달리 드러나는 슬픔[사태]이지만 슬픔[일반성]과 다르지만 특수성이라는 자체가 일반성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특이성이 보편성을 지닌다고 할 때 그것이 누구나 그것[동일한 사실]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겪음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이 특이성의 보편성은 특히 생성의 보편성인데, 그 생성은 누구나 다 있지만 만들어진 사태(사건, 사실)는 현실적으로 모두 다르다. 동적[권능]인 면에서 보편적이지, 생성된 것 또는 만들어진 것의 보편성은 없다.(51RKF)]
[등장인물에서] 특이(singulier)하고, .. 유일(unique)하고 ... 진지함(la sincérité)이 있고 ... 진심으로(pour tout bon).. 그러므로 진리란 그 자체 안에 확신의 권능(une puissance de conviction)이, 전향의(de conversion) 권능이 있고, 이것은 진리가 인정되는 표시이다. (125) [들뢰즈의 특이성의 개념과 다를바 없다. 확신의 권능은 스피노자, 전향의 권능은 플로티누스를 연상케 한다. (51RKF)]
작품이 위대하면 할수록 그 속에 보이는 진리는 더욱더 깊고(심층), 효과는 더욱더 기대되며, 또한 그만큼 더 효과가 보편적(univerel)이 된다. 따라서 보편성(l’universalité)은 생산된 효과 속에 있으며, 원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125) [상층으로 갈수록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으로 갈수록 보편적이다. 이것은 드라마의 인물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분열분석에서 활용론을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드라마의 한편이며, 현실은 그 한 장면이다. 한 장면을 산다는 것은 보편적이다. (51RKF)]
[[§3.1-3. 예술 중에서 희극 125]
희극의 목적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일반성(la généralité)은 작품자체에 있다. (101) [심층에서 일반성은 특이성에 있고, 상층에서 일반성은 류적인 것에 있다. 들뢰즈가 이를 잘 이용하여 “차이와 반복”에서 특이성의 생성의 일반성이 보편성이라고 할때는 생성이라는 권능이 모든 생명체에 보편적으로 있다는 것이고, 동일반복의 일반성은 모든 류적 개념의 일반성이라는 것을 넘어서 최상의 류적 개념의 보편성이다. 이것은 외연개념의 확장이라는 보편성인 셈이다. 즉 부동의 원동자의 보편성은 사고의 형식적 추상이며, 생성하는 일자(권능)로부터 사유했기에 보편성은 질료로부터 추상일 따름이다. 들뢰즈는 전자를 기표적 또는 코드화라로 부른데 비해, 후자를 추상적이며 구체적이라 불렀다. (51RKF)]
희극은 우리가 만났던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에서 또다시 만날 성격들을 묘사한다. 희극은 유사함(des ressemblances)을 주목한다. 그것은 우리 눈에 전형들(des types)를 주목하게 한다. (125)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만날 표본, 전형, 원본 같은 인물을, 특이성이 아니라 일반성으로 만날 닮은이들, 유사성들, 모방체들을 주목한다. ]
유명한 희극의 제목 자체가 이미 의미심장하다. 염세가, 수전노, 노름꾼, 얼빵이(le Distrait, 멍한이) 등 모두 어떤 류(類, des genres)의 명사들이다. .. 우리는 따르뛰프 같은 사람(un Tartuffe)이라고 하지만, 페드르 같은 이(une phèdre), 또는 폴리왹뜨같은 이(un Polyeucte)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125)
무엇보다도 비극 시인에게는 주인공 주위에 이 주인공의 단순화된 모조품들(des copies)이라 할 수 있는 이차적 인물들을 등장시키려는 생각이 없을 것이다. 비극의 영웅은 그 류(類)에서 유일한 개체성(une individualité)이다. 사람들은 그를 모방할 수 있을 것이나, 그러면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비극적인 것이 희극적인 것이 된다. .. 왜냐하면 그는 누구하고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125-126)
많은 희극 작품들은 복수적인 이름이나 집단명사를 제목으로 한다. 유식한 여자들(Les Femmes savantes, 1672), 우스꽝스러운 재녀들(Les Précieuses ridicules, 1659), 지루한 세상(Le Monde où l'on s'amuse, 1868) 등... (126)
희극의 경향성에서 .. 그 경향성에서 아마도 사람들은 의사들에 의해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예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즉 동일한 종류의 불균형들[정신병리]의 비밀스런 인력에 의해서 서로 서로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126) [옛 노트: 유유상종이다. 정신적으로 비슷한 연령대끼리 잘 어울린다. 말하자면 병리적 상태에 있는 자들끼리는 서로가 소통이 잘 된다. 촛불시위를 계엄군으로 해결하겠다는 박근혜와 조현천 전 기무사 사령관, 김관진 전 국방장관, 한민구 안보실장 등이 있었다고 하고, 다른 한편 홍준표 김성태 등 자한당 패거리도 마찬가지이다. (51RKG)]
웃음거리는 인물이 일상적으로 방심한 이(un distrait) ... 만일 시인의 목적이 이런 전형들을, 다시 말하면 반복될 수 있는 성격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시인이 동일한 전형으로부터 여러 다른 견본들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겠는가? 박물학자가 종(種)을 정의할 때 이와 다르지 않다. (126)
[[§3.1-4. 비극과 희극의 차이]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본질적 차이는 하나는 개체에 다른 하나는 류(類)의 관계하며, 다른 방식으로 번역된다. (127)
[비극]
이러한 주장이 매우 역설적(paradoxale)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비극 시인에게 필수적인 것 같지 않다. 우선 사실상 위대한 비극 시인들은 매우 은둔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삶은 영위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 시인의 작품에서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것은 이주 깊은 영혼의 상태들에 대한 통찰(la vision)이거나 내적 갈등에 대한 통찰이다. (127)
어떻게 동일한 인간이 멕베스, 오셀로, 햄릿, 리어왕, 그리고 또다른 수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문제에 있어서 아마도 어떤 사람이 지니고 있는(qu’on a) 인격과 지녔을 수 있었을(qu’on aurait pu) 인격들을 구별해야할 것이다. (128)
세익스피어는 맥베스도 햄릿도 오셀로도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상황이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지의 동의(le consentement, 수긍)가 자기에게서 내적 추진력(poussée intérieure)이었을 뿐인 것을 극렬한 폭발 상태로 끌어냈다면, 그는 이런 다양한 인물들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il eût été).(128) [보르헤스는 인물을 인격으로 등장시킨다. 실재성은 가치판단 이전에 있다.]
생명[la vie 삶]은 짜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삶]은 단순하게 바라보게 되어 있다. .. 시인은 아주 매우 힘있는 내적 관찰의 노력에 의하여 스스로 깊이 파고들어가, 실재적인 것 안에서 잠재적인 것(le virtuel)을 포착하고, 그것을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연이 그에게 남겨놓은 초안의 상태 또는 단순한 기획을 그가 되찾는 것이다. (128-129)
[다시 희극]
희극이 생겨나게 하는 관찰은 [비극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외적 관찰이다. 희극 시인이 인간 본성의 우스꽝스러운 것들로부터 있을 수 있는 호기심이 매우 많이 동한다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자기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것들[희극적인 것들]을 탐구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129)
우리가 외적인 효과에 대해 웃음을 터뜨리게 시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원인을 영혼의 중간 지대에 위치시켜야 한다. (129) [개인의 특이성을 일반성(généralité)으로 올려놓아야 희극 또는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다]
한마디로 이때의 방법과 목적은 관찰이 외적이며 결과가 일반화될(généralisable)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귀납적 과학들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130)
[작은 마무리, 결론]
우리는 오랜 우회로를 거쳐서 우리 연구를 통해 이끌어낸 이중 결론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한편으로 어떤 인물은, 방심에 흡사한 성향(une disposition)에 의해서만, 기생충처럼 그의 인격과 유기적이 되지 못한 채 그에게 붙어사는 어떤 것에 의해서만, 우스꽝스럽게 된다. ... 다른 한편으로 웃음의 목적은 이러한 교정 자체이므로, 이 교정이 가능한한 많은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필요하다. (130)
이 [희극적] 작품이 그 목적에는 즐거움이 있다는 의미에서 예술에 속하지만, 그 일반성의 특성에 의해 또한 교정하고 가르치려는 무의식적 저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예술작품과는 확연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130-131)
그러므로 우리는 희극(la comédie)이 예술과 삶 사이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고 말할 권리를 가졌다. 희극은 순수예술처럼 이해관계 없이(désintéressée) 있지 않다. 희극은 웃음을 조직화하면서, 사회생활을 자연적 환경(un milieu social)처럼 받아들인다. 희극은 심지어는 사회생활의 추진력들(des impulsions, 촉진들) 중의 하나를 따라간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희극은 예술에 등을 돌리는데, 그 예술이 사회와 단절의 예술이고 또 단순한 자연으로 회귀인 예술일 경우이다. (131) - [무이해관계가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며, 이것들은 심층의 작동이며, 스피노자의 아펙투스에 관한 것이다. 표면에서는 서로의 배치와 배열에 따른 이해관계와 친소의 범위가 있어서, 웃음거리는 어느 편에 속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 희극은 사회성인데 비해, 심층의 본성은 욕망이며 감화이다. 그러나 희극이 심층에 뿌리가 닿지 않는 경우에는 공허(망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기계적 자동주의나 뻣뻣함이란 그 저의(심층)에 생명성이라는 대구(對句)와 은연중의 연결이 있을 경우에 웃음거리이기 때문이다. - 벩송이 성격의 웃음거리를 말하고자 한 것은 인격 없는 사회성은 없다는 것이고, 희극은 사회성이 인격없이 제4자(l’on)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계, 교정, 일침(一針)을 가하자는 것이다. (51RKB)]
§3.2. [Le comique de caractère / 3.2. 희극적인 성격의 정수: 허영] 131
이제 앞에서 일어난 절차에 따라서, 웃음거리 그 자체로서 웃음거리인, 그 기원에서 웃음거리인, 모든 표출들에서 웃음거리인, 이상적으로 웃음거리인 성격의 성향(une disposition)을 창조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31)
인격의 성향은, ... 희극적 성격의 창조하기 위해 깊어야 하고(profonde), .. 위해 피상적이어야 하고(superficielle), ...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invisible), 눈에 띌 정도로(visible, 빤히 드러나는), .. 지극히 관대하고(pleine d’indulgence), ... 거추장스럽고(gênante), .. 즉시 교정될 수 있는(corrigible), .. 사회적 삶과 분리할 수 없고(inséparable), .. 덧붙일 수 있는(capable de s’additionner) .. 자, 이제 함께 용해해야 할 요소들이다. 영혼의 화학자는 이 정교한 조제(調劑, cette préparation)를 위임받을 것이고, 증류기에서 끄집어내는 순간에 약간 실망할 것이다. (131-132) [상반된 성질들의 것을 잘 조합하여 조제하였으나 결과물은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 혼합물은 허영(la vanité)이다. 이보다 더 피상적(superficielle)이며 더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보다 더 깊이(profonde) 뿌리박힌 결점도 없을 것이다. .. 허영 그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모든 종류의 악이 그 주위를 회전하며 점점 세련됨에 따라, 이 허영을 만족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된다. 허영은 우리가 주위에 불러일으켰다고 믿는 찬양에 근거한 자기 예찬이므로 사회생활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보다 본성적이며 이기심보다 훨씬 더 보편적으로 타고 난 것이다. (132)
우리가 겸손하게 태어났다고 믿지 않는다. .. 진정한 겸손(la modestie vraie)은 허영에 대한 성찰에 지니지 않는다. .. 겸손은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생각할 것에 대한 일종의 과학적 조심성(une circonspection, scientifique)같은 것이다. 겸손은 교정과 정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국 그것은 후천적 덕목이다. (132-133)
겸손해지고 하는 배려(le souci, 염려, ἐπιμέλεια)와 우스꽝스럽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la crainte, 걱정)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분리되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133)
우리는 이러한 연구[우스꽝스러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웃음이 그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를 한결같이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능이란 방심상태에 있는 어떤 종류의 자존심들(les amours-propres)을 완전한 [자기]의식(la pleine conscience)으로 이끌어 이러한 성격들로 하여금 가능한 최대한의 사회성(la sociabilité)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133) []
이런 의미에서 허영에 대한 특수한 치유법(le remède spécifique)이 웃음(le rire)이며, 본질적으로 웃을 수 있는 결점(le défaut)이 허영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133)
우리는 형태들과 운동들에 대한 웃음거리를 다루었을 때[제1장], 우리는 그 자체로서 웃음을 자아내는 이러저러한 단순한 이미지가 어떻게 보다 복잡한 이미지에 삽입되어[제2장] 모종의 희극적 효과를 주입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따라서 웃음거리의 가장 고급적 형태들은 가끔 가장 저급한 형태들에 의해 설명된다. .. 이처럼 웃음거리의 상위의 형태로서 허영은 우리들의 일상적 활동의 모든 표현 속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꼼꼼히 찾으려고 하는 요소이다. (133-134)
일정한 웃음의 효과를 지닌 아주 거칠은 희극이 있는데,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대비(le contraste)의 관점에서 만족스럽지 못하게 설명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바로 허영이라는 기원(cette origine)에 돌려져야 할 것이다. 키가 작은 사람이 커다란 문을 지나가면서 고개를 숙인다. 한 친구는 장대 같고 다른 한 친구는 작달막한 두 사람이 서로 팔짱을 끼고 장중하게 걷는 모습 등. 이 후자의 이미지를 보다 더 까까이서 고찰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키 작은 친구가 키 큰 친구를 향해 발돋움하려는(se hausser)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임을 발견할 것이다. 마치 황소만큼 스스로 커지기를 원하는 개구리처럼. (134)
§3.3. [Le comique de caractère / 3. 직업적 희극성 ] 134
희극 시인의 주의를 끌만큼 허영과 결합되어 있거나, 그것과 경쟁하는 성격의 특수성들(les particulrarité)을 여기서 나열하는 것이 문제거리일 수 없다. .. [나열하는] 목록이 순수한 환타지의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창조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제까지 감지되지 않는 희극적 방향들(des directions)을 분간해냄으로써 이다. .. 우리가 알다시피 본질적인 조건은, 많은 등장인물들이 그 속에서 삽입될 수 있는 틀(un cadre)처럼, 이 관찰된 특수성이 곧장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134-135)
그러나 사회 자체에 의해 형성된, 즉 사회에 이미 완전히 만들어진 틀(des cadres tout faits) 있는데, 사회가 분업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135) [만들어진 틀들의 배치가 분자적이다. 만들어가는 실재 사회는 분자그램적이다. 전자의 관료적 기계에 비해 후자에는 전쟁기계라 리좀으로 흐른다. 배치된 기계의 언설에는 개인의 특이성이 없고, 후자에서 특이성이 주체성을 가지며 의미성을 생산할 수 있다. / 전자에 분업의 결과로 계층이 또는 절편이 나누어져 있으며 이 계층과 절편들은 상층의 지배적 담론에 종속된다. 이에 비해 심층의 절편들은 서로 다른 계열이지만 또는 서로 다른 언설같이 섞이지 않는 것 같지만 공감과 상호침투로서 방향들을 갖고 있으며 변용태를 표출할 수 있다. (51RLB)]
그러나 만일 이 조그만 사회들이 서로 유리되면(s’isoler), 사회성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웃음은 바로 이 분리되는(séparatiste) 경향을 억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의 역할을 경직성을 유연성으로 교정하고, 각자를 전체에 재적응시키고, 모진 것들(les angels)을 둥글게 하는데 있다. 여기에 일종의 웃음거리가 있으며, 이것의 다양한 것들(les variétés)은 미리 규정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이 웃음거리를 직업적 웃음거리(le comique professionnel)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35-136) [여기서 웃음은 신입생 골리기가 속한다.]
우리는 이 다양한 것들(les variétés)의 세부사항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136)
주르댕(M. Jourdain)씨의 선생들 각각은 하나 같이 자기 과목을 다음 모든 과목보다 높이 평가한다. (136)
라비슈(Eugène Labiche, 1815-1888) 작품 중의 한 인물은, 사람이 나무 장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경우에 허영은 종사하는 직업이 엉터리 성격(charlatanisme)을 지니면 지닐수록 근엄한 모습(solennité)을 띠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근엄함의 밑바닥에는 있는 것이 착각(cette illusion)이다.(136)
몰리에르의 의사들의 웃음거리는 대부분 이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환자가 의사들을 위해 창조된 것처럼, 자연 자체가 의학에 의존하는 것처럼 다룬다. (136) [원인에 대해 전도된 사고를 하는 이를 웃어야 할까 말까? 주지주의적 사고가 목적론과 결과론인데 결과를 원인 앞에 두니 말이다.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1509-1571)의 파자(破字)풀이가 그러하다.]
희극적 완고함의 다른 형태는 직업적 옹고집(l‘endurcissement professionnel, 무뚝뚝함)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희극적 인물은 그의 직분의 견고한 틀 속에서 너무나 틀어박혀서, 다른 사람처럼 처신하거나 특히 감동할 여지를 더 이상 갖지 못한다. 이자벨(Isabelle)이 재판관 삐에르 당댕(Pierre Dandin)에게 어떻게 죄인이 고문당하는 지를 구경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하는 말, / 까짓것! 으례 한 두 시간이면 되는 걸. (136-137)
따르띠프가 오르공(Orgon)의 입을 통해 한 말 역시 일종의 직업적 무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 형제고, 아이고, 어머니고, 아내도 모두 죽게 나 둬. / 내가 이 이상 더 할게 뭐람! (137)
직업을 웃음 거리로 밀고 나가기 위해 가장 흔히 쓰이는 수법은 직업을 그 고유한 언어의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이다. 재판관, 의사, 군인이 마치 보통사람처럼 말할 수 없는 듯이, 흔히 눈에 띄는 사물들에 법학, 의학, 전략의 용어로 적용하는 것이다. (137)
예로서 르냐르(Regnard 1655-1709)의 작품에 나오는 노름꾼을 상기해보자. 여기서 노름꾼은 도박 용어를 기막히게 구사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예컨대 하인에게 핵토르(Hector)라는 이름을 주고 자기 약혼녀를 이처럼 부르게 한다. / 스페이드의 이름으로 유명한 팔래스(Pallas)여. (137)
유식한 여자들(Les Femmes savantes, 1672)에서 .. 학문적 질서의 관념들을 여성적 감수성이 깃든 용어들로 옮겨놓는데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가 내 맘에 드는데”(“Epicure me plait..”), “내가 와동을 좋아해”(“J’aime les tourbillons”) 등이 그것이다. 제3막에는 아르망드(Armande), 팔라맹뜨(Philaminte), 벨리즈(Bélise) 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38). [춘향의 모(월매) 암행어사가 사위라는 것을 ‘엉덩이 춤이나 춰보자’]
이런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가면 직업적 논리(une logique professionnelle), 말하자면, 일정한 범위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고 그 영역에서는 참이지만, 나머지 세계에서는 거짓이 되는 일정한 추론의 방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두 논리의 대비는, 하나는 부분적(particulière)이고 다른 하나는 보편적(universelle)인데, 특수한 본성(une nature spéciale)의 희극적 효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다 길게 고찰해보는 것도 헛되지 않으리라. (138) [부분을 전체로, 특수를 보편으로 오류는 철학적이지만, 연극에서 과장 또는 확장은 웃음거리이다. / 자유 한국당 김성태(金聖泰, 1958-)의 국회 대표발언(180905)에서 ‘출산주도성장’이란 발언이 그러하다.]
§3.4. [Le comique de caractère / 4.. 희극적 부조리 ] 138
웃음거리의 깊은 원인을 이끌어 내는 데 너무 열중하다 보니, 우리는 그것의 가장 현저한 현상의 하나를 이제까지 소홀히 취급하게 되었다. ..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한 부조리(l’absurdité)를 내포할 수 있는 이 기이한 논리(logique étrange)에 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138)
테오필 고띠에(Théophile Gautier, 1811-1872)는 기상천외의 웃음거리를 말하는데, 그것은 부조리 논리(la logique de l’absurde)라는 것이다. ..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은 구체적 형태 속에서 실현된 부조리(l’absurde), “볼 수 있는 부조리”, - 또는 처음에는 용납되었다가 이내 교정되는 겉보기의 부조리 – 또는 한편으로 부조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는 것 등일 것이다. (139)
따라서 웃음거리 속에서 부조리(l’absurdité)를 만났을 때, 그 부조리는 임이의 부조리가 아니라 그것은 규정된(déterminée) 부조리이다. 그것은 웃음거리를 창조하기보다 오히려 웃음거리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리라. 부조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게다가 그것을 산출하는 원인의 특수한 본성이 반영되는 아주 특수한 결과이다. 우리는 이 원인을 알고 있다. 이제 우리가 결과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수고도 없을 것이다. (139)
어느 날 들판을 산책하다가 언덕 꼭대기에서 빙빙 도는 팔을 가진 부동의 물체와 어렴풋이 닮은 어떤 것을 보았다고 가정해보자. (139-140) [동키호테]
양식(le bon sens)이 회상할 줄 아는 데 있으며, 그러나 또한 특히 망각할 줄 아는 데 있다. 양식은 대상이 생각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적응하고 다시 적응하는 정신의 노력(l’effort d’un esprit)이다. 사물의 변화에 정확히 자신을 맞추는 지성의 운동성(l’une mobilité de l’intelligence)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주의를 삶에 맞추는 운동하는 연속성(la continuité mouvnate de notre attention à la vie)이다. (140) [보초수칙: 흔들리는 물체를 마음대로 상상하지 말라. - 상상이 적의 침투로 만든다.]
그러나 동키호테는 전쟁으로 떠나기를 원한다. 그는 소설에서 기사가 도중에 거인이란 적을 만나는 이야기를 읽었다. .. 추억(le souvenir) 물질화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마주치는 대상이 거인의 형태와 어렴풋이나마 비슷하게 되면 추억에 의해 거인의 모습을 부여받는 것이다. (140)
그래서 동키호테는 우기가 단순히 풍차를 보는 곳에서 거인을 발견한다. 이것은 웃음거리이며, 또한 부조리(absurde)[환각]이다. 그러나 이것이 임의의 부조리(l'absurdité quelconque)인가? (140-141)
이것은 상식(le sens commun)의 특수한 전도(une inversion toute speciale)이다. 이 전도는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에 사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관념에 맞추려고 하는 데서 성립한다. (141) [심층은 사물에서 표상과 개념을 만드는데 비해, 상층은 관념에 맞는 사물이냐 아니냐를 사고한다. 심층은 삶에 구체적인데 비해, 상층은 자기의 사고에 맞게 사물 또는 사건을 구성한다. 그 구성에 필요한 요소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모두 버린다. (51RLB)]
이렇게 일단 착각(l’illusion)이 이루어지면 동키호테는 그것을 모든 귀결에 있어서 제법 논리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꿈꾸는 대로 움직이는 몽유병환자의 확실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이것이 오류의 기원이며, 또한 부조리를 지배하는 특수한 논리(la logique spéciale)이다. 그렇다면 이 논리는 동키호테에게만 고유한 것인가? (141)
희극적 인물은 정신이나 성격의 완고함(obstination, 옹고집), 방심, 자동주의에 의하여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이미 지적했다. .. 경직성 .. 몰리에르 연극에서 얼마나 많은 희극적 장면이 이 단순한 전형으로 이끌어졌는가! [그 전형이란] 자기 생각만 따라가는 어떤 인물, 사람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그를 가로 막는데도 막무가내로 으레 자기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인물 말이다. (141-142)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s’obstiner) 정신은 결국 제 생각을 사물에 맞추는 대신에 사물을 생각에 굽히게(plier) 하는 것이다. 모든 희극적 인물은 결국 우리가 바로 위에서 묘사한 착각의 길(la voie de l’illusion) 위에 있으며 동키호테는 희극적 부조리의 일반적 전형을 제공하고 있다. (142)
이러한 상식의 전도(cette inversion)에 이름이 있을까? 사람들은 광기(la folie)의 몇몇 형태들 속에서 – 그것이 급성이든 만성이든 – 발견된다. 이것은 많은 면에서 고정관념(l’idée fixe)에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광기나 고정관념은 우리를 웃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질병들(des maladies)이기 때문이다. 이 질병들은 우리의 연민(notre pitié) 유발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웃음은 감동(l’émotion)과 양립 할 수 없다. (142) [옛 노트: 프로이트에서 고정된 관념은 신경증의 일종이다. 애정적 상흔으로 트라우마는 발명하게 한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광기를 모방하는 정신의 정상 상태가 있다. 광기에서 사람들은 정신이상(l’aliénation)에서와 같은 관념연합들을 발견하고, 고정관념에서와 동일한 특이한 논리(la même logique singulière)를 발견한다. 이것은 꿈(le rêve)의 상태이다. 따라서 우리의 분석이 부정확한지 또는 그 분석이 다음 정리(le théorème)로 정식화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희극적 부조리(l’absurdité comique)는 꿈의 부조리와 같은 본성이다. (142) [옛노트: 고정적 관념이 병리적이라고 보는 것은 프로이트인데, 희극적 요소와 같다고 보는 것은 벩송이다.] [히스테리, 강박, 우울증 등은 타(생활, 생태, 문화)와 접촉으로 자연스레 변화와 치유로 넘어갈 수 있다. 약물은 위험하다.]
우선 꿈에서 지성의 진행방식(la marche)은 우리가 조금 전에 서술했던 진행방식이다. 정신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빠져서, 자기의 상상력들의 물질화할 구실을 외부 세계(le monde extérieur)에서만 찾는다. (143) [옛노트: 예수를 넘어서며, 니체의 원인애(遠人愛)에 가깝다.] [상층의 사고는 무한히 확장하여도 허구 또는 저세상인데, 지성의 논리는 저세상을 물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데서 착각이다. (51RLC)]
그러나 꿈꾸는 자는 감각이 지각한 것을 해석하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추억들에게 호소하는 대신에, 반대로 선호한 추억에 신체를 부여하기 위하여 그가 지각한 것을 사용한다. 벽난로에 불어오는 동일한 바람 소리도, 꿈꾸는 이의 영혼 상태에 따라, 즉 그의 상상이 차지하는 관념에 따라, 야수의 울부짖음 또는 감미로운 노래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꿈의 착각이 갖는 일상적 메커니즘이다. (143) [옛노트: 프로이드의 설명은 무의식의 실재성은 꿈꾸는 이의 애정적 관심에 결부되어 있다고 한다. 벩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지각과 추억의 결합에서 재인식이 활동의 유용성에 관계있다고 한다.]
만일 희극적 착각이 꿈(de rêve)의 착각이라면, 또 만일 희극의 논리가 몽상(des songes)의 논리라면, 사람들은 웃을 수 있는 것(du risible)의 논리 속에서 꿈의 논리의 다양한 특성들(les diverses particularité)을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43)
이런 이유로, 모든 관념 놀이(tout jeu d'idées)가 그것이 다소간 꿈이 취하는 유희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재미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143)
먼저 추론의 규칙들 중에 어떤 일반적 이완(un certain relâchement généra)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웃는 추론들은 우리가 거짓(틀렸다)이라는 것을 아는 추론들이고, 만일 우리가 꿈속에서 그것들을 들었다면 진실로서 간주할 수도 있는 추론들이다. (143-144)
많은 “재담들”(traits d'esprit)이 이러한 종류의 추론들, 우리에게 출발점과 결론만을 주는 생략된[요약된] 추론들이다. (144)
게다가 재치놀이(ce jeu d'esprit)는 관념들 사이에 관계가 더욱 피상적으로 되는 것에 따라서, 말놀이(le jeu de mots)의 방향으로 진화한다. (144)
[말놀이의 예로서] 쁘띠-장(Petit Jean)과 수플뢰르(Souffleur) 사이 장면... (144)
꿈에서와 유사한 강박증들과 아주 유사한 희극적 강박들(des obsessions comiques)도 있다. 꿈들이 아무런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는데도 똑같은 이미지가 연속적인 여러 꿈 속에서 되풀이 등장하고, 그런 때마다 그럴듯한 의미를 갖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반복의 효과들은 때로 연극이나 소설에 있어서 이와 같은 특수한 형태(cette forme spéciale)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 효과들 중의 몇몇은 꿈의 공명들(des résonances)이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노래에 있어서 후렴(le refrain)도 마찬가지이다. 후렴은 각절들(tous les couplets) 끝에서 마다 매번 다른 음조로 변하지 않고 끈질기게 되풀이 된다. (144-145) [옛 노트: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보라] / [지성의 후렴과 감성의 후렴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후자는 공감과 감응인데 비해, 전자는 먹물들의 자기 위치 확인일 것이며, 자~식들(개돼지들) 웃기고 있네...(51TKG)]
우리는 꿈 속에서 독특한 형태의 점점 세게(un crescendo)나 꿈이 진행될수록 강조되는 기묘한 결과를 드물지 않게 대한다. 일단 이성의 길에서 벗어나면, 이것이 둘째 결과를 낳고, 이것이 다시 더 심각한 결과를 이끌면서 마지막 부조리에 이르기까지 이어준다. (145) [옛 노트: 꿈에서 점점 강하기, 어린이들이 오줌을 싸고 꿈에서 가는 물줄기, 시냇물, 강물 그리고 바다로 그 속에 빠진다. 그래서 깬다. 그 꼬마가 오줌싸고 식을 때 쯤에는 (추위라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꿈을 깨게 한다고 한다. ]
이것은 술꾼이 취하면서 논리고 예절이고 아무것도 문제되지 않은 상태로 기분 좋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 때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45)
몰리에르의 푸르소냐크 씨(Monsieur de Pourceaugnac, 1669)에서는 처음엔 거의 사리에 맞게 출발해서 갈수록 온갖 종류의 해괴한 짓(des excentricités de toute sorte) 펼쳐진다. (145)
또 다른 예로 서민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 1670)에는 연극이 진전됨에 따라 주인공들이 광기(la folie)의 소용돌이 속에 이끌리도록 자신들을 내맡기는 듯하다. “만일 보다 더 바보(un plus fou)를 볼[만날] 수 있다면, 로마에서라도 그를 말하러 갈 것이다.”[M. Joudain] 이 말은 연극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145) [온 세상에 소문 낼 것이다?]
그러나 특히, 꿈에 알맞은 치매끼(une démence)가 있다. 꿈꾸는 사람의 상상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깨어있는 사람의 이성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정확하고 완전한 관념을 주기가 불가능한 특수한 몇몇 모순들이 있다. (146)
그는 다른 자기[alter soi]가 그의 신체를 빌고 그의 목소리를 훔친 듯이 느끼는 것이다. (146) [이 예는 데망스(치매)의 예라기보다, 맹인 점장이, 접신 무당의 예일 수 있으며, 또한 분열증자의 경우에도 그런 현상이 있다.]
나는 [몰리에르의] 앙피트리옹(Amphitryon, 1668)(3막 운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물론 혼동이 관객의 마음에 암시되는 하지만, 희극적 효과의 태반은 우리가 위에서 “두 계열의 상호간섭”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118)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혼동(cette confusion)이 진정으로 그 순수 상태로서 나타나는 - 비록 그것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숙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 기상천외한 희극적 추론들(des raisonnements extravagants et comiques)이다. 예를 들어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이 그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에게 한 대답을 들어보자. “형제가 있습니까? - 그렇소, 빌(Bill)이라고 불렀지, 불쌍한 빌! - 왜요 죽었나요? - 결코 알 수 없었던 게 바로 그거요.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지요. 그 죽은 녀석과 나는 쌍둥이였소. 그리고 우리가 겨우 생후 15일이 넘었을 때 목욕통에서 함께 멱을 감았는데 우리들 중의 하나가 익사해 버린거요. 그런데 우리는 그게 누구였는지를 몰랐던 거요. 어떤 사람은 그게 빌이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나였다고 하는 거요. - 묘한 일이군요. 헌데,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들어 보시오. 내가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비밀을 당신에게 털어놓겠소. 우리들 중의 하나에겐 두드러진 특징, 즉 왼손 등에 보기 좋은 큰 점이 하나있었지요. 그리고 그게 나였소. 헌데 물에 빠져 죽은 놈이 바로 그 애였거든… 등등” (147)
그것은 마크 트웨인이 쌍둥이의 하나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제3자인 것처럼 말하는데 있다. 많은 경우의 꿈속에서 우리는 다른 절차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147)
§3.5. [Le comique de caractère / 5. 웃음의 복합적 성격 ]
§3.5. [웃음의 결론: 마무리] 147.
이 마지막 관점에서 본다면, 웃음거리는 우리가 부여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제까지 우리는 웃음 속에서 무엇보다도 교정의 수단을 보았다. 웃음거리의 효과의 전형에서 점점 더 멀리 가서, 지배적인 전형들을 따로 떼어내면, .. 이 전형들이 사회에 대한 무례의 본보기들(modèles d’impertinence, 건방짐)임을 알 수 있다. 이 무례에 대해 사회는 웃음으로 응수하는데, 웃음은 훨씬 더 강한 무례이다. 따라서 웃음은 매우 관대한 어떤 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웃음은 악[le mal, 잘못]에 대해 악을(le mal pour le mal) 되돌려 준다. (147-148) [앞에서도 나온, 사기당한 사기꾼의 예]
그러나 우선 웃기는 것의 인상에서 처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희극적 인물은 흔히 우리가 실질적으로 공감함으로써 시작하는 인물이다. ..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가 우리와 함께 즐기기를 권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우선 동료로서(en camarde)로서 취급한다. 그러므로 웃는 자에게는 적어도 겉으로는 친절(de bonhomie)과 싹싹한 쾌할함(de jovialité aimable)이 있으며,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특히 웃음 속에는 자주 주목받는 [긴장완화] 이완의 운동(un mouvement de détente)이 있으며, 우리는 그 원인을 규명해야만 한다. (148) [긴장 이완은 다른 표현으로 방심에 가깝다.]
희극적 인물이 자기의 생각을 자동적으로 따를 때, 그는 결국 꿈꾸고 있던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꿈은 이완이다. 사물들과 사람들과 접촉한다는 것, [현실을 산다는 것], .. 그러한 것은 지적 긴장의 중단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149)
양식(le bon sens)은 노력자체이며, 노동인 것이다. 그러나 사물로부터 떨어지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이미지들을 깨닫는 것, 논리와 단절하면서도 그럼에도 계속해서 관념들을 짜맞추는 것, 그것은 단순히 놀이(le jeu)나, 당신이 원한다면, 게으름(la paresse)에 속한다. 따라서 희극적 부조리(l’absurdité comique)는 무엇보다도 관념 놀이(tout jeu d'idées)[143]의 인상을 준다. 우리의 첫째 운동은 이 놀이에 가담하는 것이다. (149) [부조리의 이해에는 관념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그러한 것은 사유한다는 피곤함(la fatigue de penser)으로부터 휴식하는 것이다. (149) [습관적 사고에서 웃음이 나오지, 노력하고 일하는 양식에서는 추구하는 사유가 활동하기에 웃음보다 사실의 극복이 먼저 일 것이다.]
우리가 우스꽝스러운 것의 다른 많은 형태들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희극의 밑바탕에는 손쉬운(안이한)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으며,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습관의 비탈길(la pente de l’habitude)이다. (149)
이렇게 희극적 인물은 다소간 방심한 사람의 모습을 닮는다. 이 경우 지성의 방심보다 의지의 방심이 보다 문제되며, 결국 이것은 게으름(la paresse)인 것이다. .. 여기서 또한 우리의 첫째[둘째]의 운동은 이 게으름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49)
그러한 것은 산다는 피곤함(la fatigue de vivre)으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150) [산다는 것이 먼저이고 사유한다는 것이 다음이다. 이 둘 다 중요한데, 삶의 과정에서 휴식을 취할 필요도 있고, 약간은 거기서 벗어나 방심할 수도 있고, 또는 수도나 명상에 깊이 들어가 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순간만 휴식을 취할 뿐이다. 웃음거리의 인상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감(une sympathie)은 아주 쉽게 사라지는 공감인 것이다. 공감 역시 방심에서 오는 것이다. (150) [심층의 공감과 표면의 공감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의식 내재성의 공감은 일치와 조화일 것인데, 사회에서 공감은 일시적 동의 또는 부분적 합의 정도이다. 관념연합이 이런 공감에 속할 것 같다. - 문맥과 위상에 따라 다르다. (51RLI)]
웃음이란 무엇보다도 교정(une correction)이다. 창피를 주기(겸손해지기)위해 만들어진 웃음은 그 대상인 인격에게 고통스런 인상을 주어야만 한다. 사회는, 사람들이 사회와 부담없이 지냈던 것들을[사회와 더불어 누렸던 자유감들에 대해(des libertés)], 웃음을 통해서 한풀이 한다(se venger). 만일 웃음이 공감과 선의(la bonté)에 표시를 지닌다면, 웃음은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150)
이 말은 웃음 의도가 어쨌든 선할 수 있는 것이고, 종종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벌을 주며, 그래서 웃음은 우리의 최고선을 위해서 어떤 결점의 외적인 표현을 억제함으로써 이 결점 자체를 고치고(corriger), 내재적으로 개선되도록 우리를 인도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까?(150) [내재란 도덕성과 양심에 관한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으리라. .. 웃음은 의심할 바 없이 유용한 기능을 행사한다. .. 이러한 사실로부터 웃음이 언제나 때릴 데를 때린다(frapper, 공격하다)거나. 친절의 사상(une pensée de bienveillance)이나 공정성(équité)의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고 결론 지을 수 없다. (150)
때릴 곳을 언제나 정확하게 때리기 위해서는 웃음에 앞서 반성 작업(un acte de réflexion)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웃음이란 단순히, 자연에 의하여(par la nature), 결국 같은 말이지만 사회생활의 아주 오랜 습관에 의해, 우리 안에 장치된 메카니즘의 효과이다. 웃음은 혼자서 시작하여, 검술에서 한 대 맞고 잽싸게 되찌르듯이 한다. .. 웃음은 마치 병이 어떤 무절제를 벌주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일정한 결점을 징계한다(châtier).(150-151)
정의의 평균치는 세세한 개체적인 경우에서가 아니라, 전체적인 결과 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 (151) [정의(justice)를 여러 개별자들(多)의 공존을 위한 조화로 생각하는 플라톤이 있는가 하면, 세세한 개체들에게 평균 또는 비례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이 있다. / 들뢰즈의 분자적 과 그램분자적을 상기해 보라..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가장 위대한 기술, 분자적 다양체들(les multiplicités moléculaires)의 기술을 발견하자마자 부단히 그램분자적 통일체들(les unités molaires)로 돌아가며. - (천개의 고원 원39-40, 번61-62)> ]
이런 의미에서 웃음은 절대적으로 공평(juste)하지 않다. 다시 반복하지만 웃음 선한 것도 아니다. 웃음은 상대방에게 창피를 줌으로써(en humiliant) 겁을 집어먹게 하는(intimider)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151) [교정, 징계, 창피.]
우리들 중에 가장 선한 사람에게까지도 짖궂음(méchancté)이나 최소한 놀림(malice)의 흔적(un petit fond, 토대)을 남겨 놓지 않았더라면 웃음이 이런 일을 하는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이점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겉 같다.(151)
이완과 확장(de détente et d’expension)의 운동이 웃음의 전조일 뿐이며, 웃는 자(le rieur)는 즉시 자기 스스로로 되돌아 와서, 자기 스스로 다소 자신을 오만하게 평가하고 있고, 타인의 인격을 마치 자신이 그 줄들을 쥐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간주하고자 한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이다. (151) [웃는 자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갖게 한다] - [이어서]
게다가 이러한 추측에서 우리는 곧바로 약간의 이기주의를, 그리고 이기주의 뒤에 있는 덜 자발적이고 덜 쓴 어떤 것을, 나도 모를 생겨나는 어떤 염세주의(pessimisme)를 분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염세주의란 웃는 자가 자기 웃음을 추론하면 할수록 더욱더 주장이 되는 그것이다. (151-152)
여기서,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은 선(le bien)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잘못(le mal)을 이용한다. 우리가 이 연구에서 관심을 기울인 것은 바로 선(善)이다. 사회가 개선되면 될수록 .. 유연성(une souplesse)과 .. 균형을 유지하며(s’équilibrer) .. 표면에서 상당한 양의 혼란(les perturbations)을 추방하는 것을, 그리고 웃음이 파동(ces ondulation)의 형태를 강조함으로써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우리가 보았다. (RI 152, Oe 483)
[마지막 문단 전체 - ]
바다의 표면에서 파도들이 휴전 없이 이렇게 싸우는데, 아래층들(les chouches inférieure)은 깊은 평화가 자리잡고 있다. 파도들은 서로 부딪히고 서로 밀치면서 자신들의 균형을 찾는다. 희고, 가볍고, 유쾌한 물보라(une écume 물거품)가 그것들의 변화하는 모습들(les contours changeants)을 따른다. 가끔은 달아나는 물결이 모래사장에 약간의 거품을 남겨놓기도 한다. 거기 가까이서 노는 어린이는 다가와 한 움큼(une poignée)의 물보라(cette écume 거품)을 모으려다가, 한 순간에 손바닥에 몇 물방울만 남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 한다. 그러나 이 물방울은 그것을 몰고온 파도의 물방울 보다 훨씬 더 짭짤하고(salée), 씁쓸한(amère, 쓴맛) 것이다. 웃음은 이 물거품과 같이 생겨난다. 웃음은 사회생활의 외부에서 피상적인 봉기들(les révoltes superficielles)을 알린다. 웃음은 순간적으로 이 동요들(ces ébranlements)의 움직이는 형태를 그린다. 그것은 또한 소금끼를 바탕에 깔고 있는 거품(une mousse)이다. 거품처럼 그것은 타닥타닥 터진다. 이것이 유쾌함(la gaîté)이다. 그것을 맛보기 위해 그것을 모으는 철학자는 거기에서 가끔은 그 소량의 재료에서 약간의 쓴맛의 정량(une certaine dose d’amertume)을 발견할 것이다. (152-153)
(23:19, 51RLJ) (24:10, 51SNA) (25:10, 51TKG) (재정리, 22:18, 51TKI)
참조***마크 트웨인 인터뷰
"Sam Clemens interviews Mark Twain" -An Encounter with an Interviewer(1874년 서른아홉, 11월.)
Q. How could I think otherwise? Why, look here! who is this a picture of on the wall? Isn't that a brother of yours?
A. Oh! yes, yes, yes! Now you remind me of it, that was a brother of mine. That's William,--Bill we called him. Poor old Bill!
Q. Why? Is he dead, then?
A. Ah, well, I suppose so. We never could tell. There was a great mystery about it.
Q. That is sad, very sad. He disappeared, then?‥…‥…‥…
A. Well, yes, in a sort of general way. We buried him.
Q. Buried him! Buried him without knowing whether he was dead or not?
A. O no! Not that. He was dead enough.
Q. Well, I confess that I can't understand this. If you buried him and you knew he was dead--
A. No! no! we only thought he was.
Q. O, I see! He came to life again?
A. I bet he didn't.
Q. Well, I never heard anything like this. Somebody was dead. Somebody was buried. Now, where was the mystery?
A. Ah, that's just it! That's it exactly. You see we were twins,--defunct and I,--and we got mixed in the bath-tub when we were only two weeks old, and one of us was drowned. But we didn't know which. Some think it was Bill, some think it was me.
Q. Well, that is remarkable. What do you think? []
A. Goodness knows! I would give whole worlds to know. This solemn, this awful mystery has cast a gloom over my whole life. But I will tell you a secret now, which I never have revealed to any creature before. One of us had a peculiar mark, a large mole on the back of the left hand,--that was me. That child was the one that was drowned.
Q. Very well, then, I don't see that there is any mystery about it, after all.
A. You don't? Well, I do. Anyway I don't see how they could ever have been such a blundering lot as to go and bury the wrong child. But, 'sh!--don't mention it where the family can hear of it. Heaven knows they have heart-breaking troubles enough without adding this.
Q. Well, I believe I have got material enough for the present, and I am very much obliged to you for the pains you have taken. But I was a good deal interested in that account of Aaron Burr's funeral. Would you mind telling me what particular circumstance it was that made you think Burr was such a remarkable man?
A. O, it was a mere trifle! Not one man in fifty would have noticed it at all. When the sermon was over, and the procession all ready to start for the cemetery, and the body all arranged nice in the hearse, he said he wanted to take a last look at the scenery, and so he got up and rode with the driver.
Then the young man reverently withdrew. He was very pleasant company, and I was sorry to see him go.
--18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