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人生)은 요지경(瑤池鏡)
3. 우리나라 화장실
내가 어렸을 적이니 50년대 초가 되는데 그 당시 우리 동네(강릉 학산 3리) 화장실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이야 아무리 강원도 시골 마을이라도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 대부분이지만 당시를 되돌아보면 그저 웃음 밖에 안 나온다.
강릉말로 화장실을『정낭(뒷간)』이라고 했는데 지금처럼 시멘트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니 대부분 커다란 항아리를 묻거나 돌로 쌓고 진흙을 발라 수분(오줌)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변(便) 보는 사람의 ‘발 받침(부출)’을 강릉지방에서는 ‘구틀’이라고 했는데 통나무를 걸쳐 놓기도 하고 조금 형편이 나으면 판자 쪼가리를 걸쳐 놓기도 했다.
옛 화장실 구틀(발 받침) / 화장실 울타리 / 1969년 가평(加平)의 화장실 / 현대식 화장실
그리고 소변을 받는 기왓장 쪼가리를 앞에 놓는데 조금 낫다면 좁다랗고 앞이 막힌 막새기와를 구해다 앞에 뒤집어 비스듬히 설치하였다. 당시 화장실은 대부분 지붕이 없었고 둘레를 울타리처럼 둘러막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조금 나은 집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둘러치기도 했다.
암(♀)기와 / 수(♂)기와 / 막새 기와 / 한옥 지붕과 담장
화장지는 대부분 짚단을 가져다 세워 놓았는데 조금 세월이 지난 후 신문지를 네모나게 잘라서 실에 꿰어 앞 기둥에 매달아 놓던가 한 장씩 떼어 내는 달력(日曆)이 인기가 있었다.
지푸라기를 쓸 시절에는 짚을 서너 줄기 뽑아 두어 번 꼬부려 접어서 닦았는데 아버지는 그 지푸라기를 변통에 넣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논밭에 퍼낼 때 거추장스럽기 때문이었다. 빗물이라도 들어가 똥물이 튀어 오르면 매우 곤란했는데 우리 누님은 튀어 오르지 못하도록 낙엽을 긁어다 집어넣기도 해서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곤 했다.
우리 집 화장실은 처음에는 둘레를 돌로 쌓았었다. 높이가 고작 1m 남짓이어서 구부리고 앉으면 보이지 않지만, 머리를 들면 지나가는 사람도 다 보였다. 언젠가 누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동네 꼬마 녀석이 지나가다가 얼굴이 언뜻 보였던지, “안녕하슈?” 하고 인사를 하더라고 하여 한참 웃던 일이 생각난다.
똥바가지 / 뀌때동이 / 똥장군
어느 집이나 변소 뒤에는 항상 똥바가지가 세워져 있었고 귀때동이, 똥장군도 있다.
똥바가지는 바가지(박 껍질)를 기다란 막대 끝에 매달아 퍼내기 편리하도록 만들었는데 한국전쟁(6.25) 후에는 녹슨 국군 철모(鐵帽)나 플라스틱 모자를 주워다 막대기를 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귀때동이는 화장실(정낭)에서 똥바가지로 퍼 올려 똥장군에 붓거나, 밭으로 들고 나가 뿌리기도 하였는데 흙으로 빚어 물동이처럼 생겼고 한쪽에 삐죽이 부어낼 수 있도록 귀가 달려 있다. 당시 마스크가 없던 시절이니 냄새를 맡기 싫어 상을 찡그리고 들고 다니던 기억이 난다.
똥장군은 옹기로 구워낸 것은 위 주둥이 모양의 구멍이 나 있는 모양인데 나무 판대기를 붙여 만든 것도 있었다. 나무판자 틈새는 송진을 발라 똥오줌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 똥장군에 똥을 퍼담고 져 나르려면 출렁거려서 아이들은 힘들었는데 지게로 저 나를 때 튀지 않도록 커다란 지푸라기 뭉치로 입구를 막아야 한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1960년) 우리 집 화장실이 동네에서 제일 멋진 화장실로 탈바꿈하였다.
조금 비뚤비뚤 하기는 했지만 네 기둥을 세우고 저릅대(겨릅대)로 외를 엮고 진흙에 볏짚을 썰어 넣어 섞어서 진흙 반대기를 만들어 벽을 발랐다. 굵지는 않지만, 대들보도 얹었는데 내가 서툰 솜씨로 대들보에다 상량문(上樑文)을 써서 붙이기도 했으니 제법 꼴을 갖춘 화장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별 희한한 변소도 다 있다며 구경을 오기도 했는데 사람이 여기서 살꺼냐는 둥 말도 있었으니 당시로는 최신식 화장실이었던 셈인데 화장지는 신문지 쪼가리를 면하지 못하였었다.
1969년도, 나의 초등교사 첫 발령지가 경기도 가평(加平)이었다. 지금은 춘천으로 가는 길목으로 도로 사정이 좋지만, 당시만 해도 가평은 오지(奧地)요, 벽지(僻地)였다.
처음 가서 제일 놀랐던 것이 화장실이었는데 60년대 말인데도 내 어릴 적 강릉의 화장실만도 못했다.
겉모양은 기다란 장대를 세모꼴로 맞물려 세우고 짚을 덮어 움집처럼 지었는데 바닥은 맨땅이었다.
발 받침으로 납작한 돌멩이를 두 개 놓고는 맨땅바닥에다가 변을 본다.
화장지는 지푸라기.... 앞에는 말뚝(부짓대)을 박아 놓았는데 노인네들이나 술 취한 사람들이 붙잡고 중심을 잡으라는 듯.... 옆에는 아궁이의 재를 받아다가 쌓아놓고 그 옆에 나무로 만든 자그마한 고무래와 가래도 있다. 변을 본 후 가래로 재를 퍼서 변(便) 위에 끼얹고는 뒤적뒤적해서 고무래로 뒤편으로 밀어 놓는다. 따라서 뒤편에는 재를 뒤집어쓴 똥(便)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여기서는 똥장군이나 귀때동이, 똥바가지가 없고 소쿠리를 얹은 지게가 있는데 이 재를 묻힌 똥(便)을 소쿠리에 지고 밭으로 나르는 모양이었다. 논이 없고 대부분 밭이다 보니....
우스갯소리인지 사실인지, 화장실 안쪽 한편에 새끼로 줄을 매어놓고 엉덩이를 깐 채 줄을 타고 왔다 갔다 하며 닦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