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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농부가 일군 언어의 텃밭
- 김재석(물과 별 주간)
오형록 시인의 6번째 시집 『기억의 건넌방』은 시인농부가 일
군 언어의 텃밭이다. 『기억의 건넌방』을 평하기에 앞서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볼테르는 ‘시는 영혼의 음악’이라고 하였고 미국 시카고 출신
시인인 칼 샌드버그는 ‘시는 히아신스와 비스킷의 결합’이라고
하였다. ‘시는 영혼의 음악’이라는 A는 B라는 은유로 이루어
진 시에 대한 이 정의는 영감에 의하여 쓰여지는 시가 숭고하
여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칼 샌
드버그의 ‘시는 히아신스와 비스킷의 결합’이라는 정의는 ‘시
는 은유다’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꽃과 과자 두 개의 이질적인
사물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은유이며 앨런 데이트에
의하면 두 개의 사물이 거리가 멀면 멀수록 긴장감을 유발한
다고 한다. 칼 샌드버그는 시가 은유라는 점에 주목을 하고 있
으며 ‘시는 히아신스와 비스킷의 결합’이라는 시에 대한 정의
는 그가 내린 수없이 많은 시에 대한 정의 중의 하나일 뿐이
다. 볼테르의 정의가 관념적이라면 칼 샌드버그의 정의는 소동
파의 도기병진道技竝進의 기技에 가깝다.
오형록 시인은 네 번째 시집까지는 농부시인이었으나 다섯
번째 시집을 징검다리 삼은 여섯 번째 시집에 이르러서는 농
부시인 아닌 시인농부이다. 농부가 시를 쓴 게 아니라 이젠 시
인이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시집 이전 세 번째 시
집에 실린 그의 등단작 「육리陸離」가 그가 농부시인 아닌 시
인농부임을 말해주고 있다.
길모퉁이 작은 동백나무 아래 바람 부는 날이면 기묘한 소리가 들린다
바람은 뚜껑 열린 유리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은 사랑을 하고 있나보다
쉴 새 없이 열정의 숨결을 뿜어내며 붉으락푸르락 기묘한 표정으로
손잡고 춤추며
가끔 뺨을 비비기도 하고 입술을 포개 야릇한 악보를 나열하기도 한다
유리병은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얼굴 한구석엔 초조한
그림자
춥고 배고픈 을씨년스런 추억을 떠올리며 이별의 흐느낌을 들었던
게다
영원할 수 없는 진리 앞에 그는 더 크게 소리친다
아니 괴성을 질러대며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행복을 마신다
하지만 어둠과 함께 찾아온 공황 모든 것이 절망이다
밤새 부들거리는 육신 가까스로 보따리를 풀어내리니
별들이 내려와 노래를 부른다
풍선처럼 두둥실 끝없는 여행
그는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
「육리陸離」 전문
육리陸離가 무슨 뜻인지 나로 하여금 국어사전을 찾게 한
이 시는 제목의 의미처럼 병과 바람을 비롯한 별들이 서로 뒤
섞이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유리병과 바
람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둘 사이 별들까지 개입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유리병과 바람이 함께하고 난 뒤 별들이 태어났
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작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시를 쓴 시인이 고추 농사를 짓고 오이 농사를 짓는 농부라는
걸 유추해 낼 수 있을까. 뚜껑 열린 병을 농약병이라 썼을지라
도 이 시에서 농부의 흔적을 엿볼 수 없다. 그는 이제 당당한
시인농부다.
오형록 시인은 그의 다섯 번째 시집 『해운대 에필로그』 ‘시인
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숙련 농사꾼이다.
자연의 이치에 생의 나날을 맡기며 살아온 인생이다
지난 2003년 5월 24일 오이 하우스에서 쏟았던 장대비
같은 땀의 일기장 한 페이지가, 이후로 내가 써왔던 시의
씨앗이 되었다
- 생략 -
다섯 번째 시집 시인의 말은 나로 하여금 ‘그러니까 그 나이
였어…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모르겠
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로 시작하는 네루다의 「시가 내
게로 왔다」를 떠올리게 한다. 오형록 시인의 시는 맨 처음 언
제 어디에서 왔을까. 그의 시는 2003년 5월 24일 날짜까지
분명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8년도 더 전 장대비 같은 땀
의 일기장 한 페이지가 이후로 써왔던 시의 씨앗이 되었다 하
니 결국 그의 땀에 젖은 일기장 한 페이지에서 온 것이다. 농
사일로 파김치가 되어 드러누울 시간에 일기를 써 왔으며 그
일기장에서 시를 건진 것이다. 오형록 시인은 ‘심마니처럼 가시
덤불을 헤치며 꼭꼭 숨어 있는 시의 문장을 찾아 걸었던 여정
이었다.’고 말하지만 오형록 시인이 시를 찾아간 게 아니라 시
가 오형록 시인에게 온 것이다.
오형록 시인은 이번 시집까지 시작 생활 18년 동안 여섯 권
의 시집을 세상에 내던지게 된다. 3년에 한 권씩 시집을 낸 샘
이다. 그것도 주경야작으로 언어의 텃밭을 일군 결과다. 농사
짓지 않고 그냥 시만 쓴 시인들보다 더 많은 시적 성취를 이루
었다. 이제 그의 언어의 텃밭에 얼굴 내민 시나무들을 만나보
도록 한다.
바닷가에서 허옇게 드러난 뼈다귀를 보았다
살점은 간 곳 없고 골육마저 수마의 발길질에 이력이 난 듯 가뭇없
이 웃어 보이던 모습이 기억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 중략-
아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내 새끼야
너만 잘 될 수 있다면 저 백사장의 모래알도 다 헤아릴 수 있단다
풍화에 닳아 없어지는 뼈 한 조각으로 남겨질지라도 기꺼이 보름달
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뭍으로 온 가시고기」 부분
시집의 가장 처음에 실린 「뭍으로 온 가시고기」는 이 시집의
서시이다. 이 시는 시인의 생각과 감정을 구체적인 사물인 가
시고기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을 수사학에선 알레
고리라 한다. 선배 시인들의 작품 중 고은의 「그 꽃」, 도종환의
「담쟁이」 그리고 송수권의 「지리산 뻐꾹새」가 다 알레고리에
해당한다. 「뭍으로 온 가시고기」 는 바닷가에서 만난 뼈다귀
하나가 오형록 시인으로 하여금 기억의 수레바퀴를 돌려 소설
『가시고기』를 연상케 한다. 가시고기류의 수컷은 암컷이 낳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이를 지키고 돌보며 산소를 공급하며 알
과 어린 고기를 침입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방어한다. 작품
속 백혈병 아들을 돌보는 아버지는 시인이다. 아내와 이혼한
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돌보는 시인 아버지는 암컷이 버리
고 간 새끼 가시고기를 키우는 수컷 가시고기다. 조정인 작가
의 소설과 방법을 달리한 이 「뭍으로 온 가시고기」 는 자식을
위하여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부모의 사랑이 담뿍 담긴 시이
다. 마지막 연 ‘풍화에 닳아 없어지는 뼈 한 조각으로 남겨질
지라도 기꺼이 보름달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는 비
장하면서도 초연하다.
오형록 시인의 언어의 텃밭에 얼굴 내민 시들 그러니까 시나
무들은 다양하다. 언어의 텃밭 아닌 실제의 텃밭으로 치면 한
종류의 유실수만 심어져 있는 텃밭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유실수들이 심어져 있다.
아지랑이
손을 흔들던 날
새롭게 단장한 집에
고추묘가 입주를 하였다
성깔 있는 햇볕이
사흘째 집들이를 왔고
기진맥진한 모종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열어놓고 살아도
그 많은 식구의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드러눕고 일으켜 세우고
해거름이 되어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나흘 후
햇살과 눈을 맞춘 가족들은
마주 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고추와 땡볕」 전문
이 시는 시인농부의 고추농사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이 시
를 운문 아닌 산문으로 표현해 본다.
- 고추묘가 입주하고 성깔 있는 햇볕이 사흘째 집들이를 왔다.
고추모종은 시들시들 앓기 시작하고 물을 줘도 갈증은 해
소되지 않는다. 드러누운 고추모종을 일으켜 세우는데 해거름
이 되어서야 마음이 놓인다. 나흘 뒤에 햇볕과 모종은 화해하
듯 이야기꽃을 피운다.-
문학적으로 표현한 이 산문을 운문으로 표현하면 시 「고추
와 땡볕」이 된다. 「고추와 땡볕」은 오형록 시인이 은유를 정확
히 구사하는 시인이란 걸 입증한다. 성깔 있는 햇볕에서 ‘성깔
있는’은 형용사 은유이고 ‘햇볕이 사흘째 집들이 온 것’ 은 두
개의 명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반동사를 사용한 동사 은유
이다. ‘바다는 쇠죽 쓰는 외양간(이다)’는 연계 동사를 이용한
동사 은유이고 ‘내 죽으면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는 변형 동
사를 이용한 동사 은유이고 ‘풀이 눕는다’는 일반 동사를 이
용한 동사 은유인데 오형록 시인이 이러한 은유를 자유자재
로 사용하고 있다. 고추를 재배하는 과정이 가정을 꾸려나가
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 시는 그야말로 이 시집에서 화려
하지 않고 소박한 시이지만 클리언드 브룩스가 말한 잘 만들
어진 항아리와 같은 시다. 고추와 땡볕으로 매운 맛이 나야할
이 시는 맵지 않고 단맛이 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형록 시인에게 어느 날 시가 찾아와 시와
함께한 세월이 무려 18년이다. 그 동안 시는 오형록 시인에게
무얼 안겨주고 무얼 앗아갔을까. 지금은 시인농부이지만 한때
농부시인이었던 오형록 시인에게 처음 찾아온 시는 그에게 기
쁨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밥이 되지 않는, 돈이 되지 않는 시
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으며 이제는 시 없이는 살아갈 수 없
게 되었다. 시는 무엇보다도 중독성이 강하다. 시는 시인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시인을 폐인이 되게 할 정도로 많은 것
을 앗아가기도 한다. 시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생계문제
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농부로서 농사일에 전념하였다면 진
즉 부농의 꿈을 실현하였을 것이다. 18년 동안 무려 6권의 시
집을 보란 듯이 세상에 내던진 오형록 시인은 부농의 꿈은 이
루지 못했어도 정신적 유산인 시집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았
다. 이제 다시 오형록 시인의 언어의 텃밭으로 들어가 본다.
봄바람은
아무리 황량한 벌판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뿌렸기에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을까
예로부터 봄처녀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바리바리 보쌈해 온 꽃향기는
눈 속에 피어난 홍매화를 시작으로
눈부신 군락을 이루었다
여객선 화물선 어선은 물론 LNG 운반선과
독보적 기술을 자랑하는 쇄빙선에 이르기까지
조선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우리의 첨단 기술이 꽃망울을 터트렸고
해양을 지배했던 유럽 바이킹족이
꿀 향기에 심취한 것이다
아예 가족과 이주해버린 까닭에
거제도는 제2의 유럽을 잉태하였고
쑥쑥 황금알을 낳기 시작했다.
「유럽을 보쌈하다」 전문
이 시는 대한민국의 조선업의 메카라 할 수 있는 거제도에서
선박의 수주가 활황인 것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제목인 ‘유럽
을 보쌈하다’라는 은유가 신선하다. ‘보쌈하다’는 ‘ 여자를 밤
에 몰래 보자기에 싸서 데려다가 아내나 첩으로 삼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옛날에 실제 있었던 일로 비인륜적인 행위이다.
제목은 ‘유럽을 보쌈하다’이나 ‘보쌈하다’는 은유는 세 번째 연
‘바리바리 보쌈해 온 꽃향기는/눈 속에 피어난 홍매화를 시작
으로/눈부신 군락을 이루었다.’에 나온다. ‘눈부신 군락’은 여
러 조선소가 함께한 것을 뜻하며 ‘눈 속에 피어난 홍매화’는
어려운 가운데 피어난 대한민국의 조선업을 가리키며 ‘바리바
리 보쌈해 온 꽃향기’는 조선업이 활황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제목 ‘유럽을 보쌈하다’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 연 ‘우리의 첨단 기술이 꽃망울을 터트렸고/해양을 지배
했던 유럽 바이킹족이/꿀 향기에 심취한 것이다’와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시의 내용과 무관하게 제목이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유럽을 보쌈하다’는 은유가 신선해서다.
멍 하나가
가슴에 입주했다
마을은 발칵 뒤집혔고
와중에 삽살개 한 마리가
고양이를 쫓는다
그들의 목덜미에
앞을 볼 수 없는 방울이
딸랑거리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은 골짜기는
갈수록 난장판이다
해가 뜨고 지듯 달도 차면 기울듯이
무허가 달방을 떠나는
뒷모습을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월권일 것이다
생뚱맞은 겨울의 초입
미동도 없던 앙상한 감나무에
보름달이 걸렸다
「기억의 건넌방」 전문
「기억의 건넌방」은 표제시답게 이 시집에서 가장 뛰어난 작
품이다. ‘멍 하나가/ 가슴에 입주했다’는 표현이 범상치 않다.
뒤이어 따르는 표현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며 ‘해가 뜨고 지
듯 달도 차면 기울 듯이/무허가 달방을 떠나는/뒷모습을 기억
하는 것은/어쩌면 월권일 것이다.’에서 절정에 이르며 ‘생뚱맞
은 겨울의 초입/미동도 없던 앙상한 감나무에/보름달이 걸렸
다’로 마무리짓는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연은 이 시에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승承의 단계에 해당된다. 월권은 월권越
權이자 ‘달방’으로 중첩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님과 바람이
어둠에 잠겼던 하루를 열면
벙그러진 웃음소리가
혼을 앗아간다
- 중략-
꼬깃꼬깃한
정신줄을 풀어헤치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이 된다
돌아누운 천년바위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이
오직 당신뿐이다
「메밀꽃 당신」 부분
제목이 명사 은유로 이루어진 「메밀꽃 당신」은 제목이 ‘유럽
을 보쌈하다’ 못지않게 신선하다. 오형록 시인은 「메밀꽃 당신」
과 비슷한 연애시에 가까운 「미완성」이라는 시에서 ‘사랑은/
심중에 그리는/한 폭의 수채화다’라고 노래하였다. ‘물질이나
질량에 비교할 수 없는/순수한 빛깔로 터치된/미완성의 그림
을’로 마무리한 미완성이라는 시도 돋보이지만 「메밀꽃 당신」
이 더 돋보인다. 그러한 이유는 제목이 한몫하기도 하지만 제
목 못지않게 마지막 연 ‘돌아누운 천년바위를/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이/오직 당신뿐이다’는 절창이 더 큰 몫을 하고 있
다.
계속된 장맛비에
면역이 흐트러진 고추의 주름은
날로날로 깊어만 간다
소리 소문 없는 감염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더더욱 애달픈 것은
내 사랑하는 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며
의지를 꺾는 까닭이다
아랑곳없이
빗방울의 목말을 타고
유흥을 즐기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밤에 물 폭탄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욱신거리는 팔 다리를 비웃으며
고추밭을 쓸고 다니는
동선을 차단하라
* 바이러스; 고추 탄저병
「동선을 차단하라」 전문
시인농부의 언어의 텃밭에 얼굴 내민 시나무 「동선을 차단
하라」는 코로나 정국이여 제목만으로 코로나를 차단하라는
의미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동선을 차단하라’는 고추 탄
저병의 동선을 차단하라는 의미다. 한 해 고추농사의 흥망을
결정하는 것은 고추에게 찾아온 탄저병이다. 농사꾼에게 농작
물의 질병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고추농사가 잘못되면 누
구보다 시인 자신이 상처를 입지만 아내가 입을 상처를 생각
하면 상처가 덧난다. 그런 상황을 오형록 시인은 ‘더더욱 애달
픈 것은/내 사랑하는 이에게/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며/의지
를 꺾는 까닭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 쓰는 남편을 둔 아
내는 오형록 시인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시가 농사일에 아무
런 도움을 주지 않기에 만에 하나 농사일이 잘못되면 시 쓰느
라 농사일에 전념하지 못하여 그런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시를
원망할 수도 있다. 이 시의 탄생 과정을 생각하니 시는 농사에
도움을 주지 못해도 농사는 시가 태어나는 데 도움을 주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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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강변을 달린다 아른거리는 연둣빛 치마저고리 강물을 전전
하는 질퍽한 벚꽃 십 리 길 잠들지 못한 구구절절한 사연이 버드
나무 치맛자락으로 숨어든다
재첩국 한 그릇에 녹아내리는 가슴 한편에 걸핏하면 가재걸음을 하
던 몽환의 숲이 안개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내 사라지곤 한다
- 중략-
우리 아기 솔방울처럼 태연하고 강물처럼 도도한 기품을 가진 모래
톱 무용담에 해지는 줄 모르고 상사화처럼 피어나는 노을을 마음
껏 토해 보자꾸나
『해탈의 강』 부분
이 시나무는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서 형식을 달리하는
몇 편의 시 중의 하나이다. 어떤 작품이 문학성이 있는가, 없는
가 알아보는 기준은 그 작품의 언어가 낯설고 그 형식이 낯선
데 있다. 언어가 낯설다는 고어 투성이의 남들이 알지도 못하
는 언어를 나열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낯설게 하기 곧 비
유와 상징을 의미하며 형식을 낯설게 한다는 구태의연한 형식
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형식
의 선례를 보면 미국의 어느 시인은 ‘플라타너스’란 시에서 플
라타너스 모양대로 언어를 나열하였다. 그런 시에 비하면 이
시는 그다지 낯선 시는 아니나 이 시집에선 낯선 시에 속한다.
「해탈의 강」이라는 제목이 신선하면서도 무겁다. 결국 강이 해
탈하였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시의 밑줄 친 부분들이 은유
와 직유로 언어를 낯설게 한 표현들이다. ‘잠들지 못한 구구절
절한 사연이 버드나무 치맛자락으로 숨어든다’와 ‘가재걸음을
하던 몽환의 숲이 안개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내 사라지
곤 한다’에는 형용사 은유, 명사은유 그리고 동사은유가 함께
하고 있다. 화자가 강물인지 인간인지 애매모호한 이 시는 오
형록 시인이 은유의 달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게 해 준다.
시인농부가 일군 언어의 텃밭에서 서시인 「뭍으로 온 가시고
기」, 「고추와 땡볕」, 「유럽을 보쌈하다」, 「기억의 건넌방」, 「메밀
꽃 당신」, 「동선을 차단하라」, 「해탈의 강」을 만나보았으며 그
의 세 번째 시집 『꼭지를 따면서』에 실린 등단작 「육리陸離」까
지 만나보았다. 이러한 시 이외에도 「미완성」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시들이 눈에 띈다.
여섯 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던지게 된 농부시인 아닌 시인농
부인 오형록 시인은 이제 농사와 관련된 시를 아무리 많이 써
도 그에게서는 이제 농부라는 이미지보다는 시인이라는 이미
지가 더 풍길 것이다. 그는 시인농부이기에 앞서 《시아문학》
동인의 회장직을 여러 해 동안 맡아왔다. 《시아문학》 동인은
여러 해 동안 발전을 거듭하여 《시아문학》 동인지가 문예지
수준에 이르렀다. 《시아문학》 동인지는 이제 누가 봐도 동인지
라기보다는 문예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신인
을 발굴하여 배출하고 있다. 그 시아문학의 주간이 바로 오형
록 시인이다. 앞으로 오형록 시인의 시작이 더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그가 이끄는 문예지 수준에 다다른 《시아문학》 동인
지가 정식 문예지로 발전하는 쾌거를 성취하기를 바라며 이만
가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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