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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6권
3. 습상응품을 풀이함②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 아비발치의 지위[阿鞞跋致地]에 머물러 부처님의 도를 청정하게 하는지요?”
【논】
【문】 사리불은 무슨 인연으로 이러한 질문을 하는가?
【답】 사리불이 위에서 뭇 지혜가 다름이 없는가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 갖가지의 비유로 보살의 지혜가 뛰어나다 함을 밝혔는지라 뜻이 이미 풀렸으므로,
이제는 “어떻게 2승(乘)을 지나 아비발치에 머무르면서 부처님의 도를 청정하게 하는가?”를 물은 것이다.
【문】 소승(小乘)은 부처님이 될 수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부처님의 도를 청정하게 하는 일을 묻는 것인가?
【답】 사리불은 바로 부처님을 따라 법륜(法輪)을 굴리고 있으므로 비록 자기에게는 이익이 없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묻는 것이다.
또 보살은 대비(大悲)로써 이익되게 하는 것이 많으므로 이 때문에 보살의 일을 물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또 사리불은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까닭에 모든 삿된 소견을 깨뜨리고 도의 과위를 이루게 되었으므로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보살의 일을 물은 것이다.
또 사리불은 성문의 지위에서는 맨 끝까지 다 궁구했고 아직 분명히 모르고 있는 것은 오직 보살의 일뿐이라 이 때문에 다시 물은 것이다.
또 보살의 법은 매우 깊고 미묘한지라 비록 얻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좋아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묘한 보배를 보고 나서 비록 자기에게는 없다 하더라도 좋아하기 때문에 묻는 것과 같다.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6바라밀을 행하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법에 머무르며 온갖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면서 부처님의 도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논】
【문】 이 세 가지의 일은 후품(後品) 중에서 저마다 인연이 있는데 부처님은 이제 무엇 때문에 아울러 말씀하시는가?
【답】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하시고 뒤에서는 세 가지 일의 인연을 자세히 설명하신다.
또 지금은 단지 공ㆍ무상ㆍ무작의 인연을 말씀할 뿐이요 뒤에서는 갖가지의 공덕을 말씀해야 되므로 세 가지 일을 합쳐서 말씀하신다.
【문】 3해탈문(解脫門)에 들게 되면 곧 열반에 이른 것인데 이제 어찌하여 공ㆍ무상ㆍ무작으로써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날 수 있다고 하시는가?
【답】 방편의 힘이 없기 때문에 3해탈문에 들어가면 곧장 열반을 취하는 것이다.
만일 방편의 힘이 있다면 3해탈문에 머물러서 열반을 보아도 자비의 마음 때문에 능히 마음을 바꾸어 도로 일으키나니, 후품(後品) 안에서의 설명과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허공을 쳐다보고 활을 쏘면서 화살과 화살이 서로 받치면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듯이,
보살도 그와 같아서 지혜의 화살을 3해탈문의 허공을 쳐다보고 쏘면서 방편으로 뒤의 화살로 앞의 화살에 쏘아 열반의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이 보살은 비록 열반을 본다 하더라도 머무르지 않고 곧장 지나가 다시금 큰 일을 기약하나니,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그것이다.
“지금은 바로 관(觀)하는 때요 바로 증득할 때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만일 이 두 지위를 지나면 모든 법이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음[不滅]을 아나니, 바로 그것이 아비발치의 지위이다.
아비발치의 지위 안에 머물러서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도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또 보살은 3해탈문에 머물러서 4제를 관찰하여 이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알고서 곧장 4제를 지나 하나의 진리[一諦]에 들어가나니, 이른바 모든 법의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不垢] 깨끗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등이다.
이 하나의 진리 안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아비발치의 지위라 한다.
이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물러서 불도의 땅을 청정하게 하며 몸과 입과 뜻의 추악한 업을 없애버리고 모든 법 안의 처음부터 잃을 바의 일을 소멸시키나니,
이것을 불도의 땅을 청정하게 한다고 한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마하살은 어떠한 자리에 머물러서 모든 성문과 벽지불을 위하여 복전(福田)을 짓는지요?”
【논】 해석한다.
사리불은 마음 깊이 보살을 공경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살은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했는데 어느 공덕에 머무르기에 모든 성문과 벽지불을 위하여 복전을 짓느냐?”라고 묻는 것이다.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낼 때부터 6바라밀을 행하면서 도량(道場)에 앉기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언제나 모든 성문과 벽지불을 위하여 복전을 짓느니라.”
【논】 해석한다.
부처님은 이런 이치로써 사리불에게 보이시나니,
비록 3해탈문이 열반의 일과 같다 하더라도 보살에게는 큰 자비가 있고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없다는 것이며,
보살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까지를 행하면서 온갖 중생을 제도하려고 온갖 부처님 법을 갖추기 때문에 뛰어나다는 것이다.
【경】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에게 인연이 있기 때문에 세간에는 모든 착한 법이 생기느니라.
【논】 해석한다.
부처님은 먼저 이미 하나의 인연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행하기 때문에 모든 성문과 벽지불을 위하여 복전을 짓는 것이요, 이제는
“보살이 밖으로 인연을 더하기 때문에 세간에는 온갖 착한 법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은 발심하여 비록 아직은 성불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제도해야 할 중생들로 하여금 3승의 도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니, 3승을 얻지 못하면 10선도(善道)에 머무르게 하는데 하물며 부처님을 이루는 일이겠는가?
【문】 성문이나 벽지불의 인연 때문에도 역시 세간으로 하여금 착한 법을 얻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단지 보살만 이 세간에 착한 법이 있게 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성문이나 벽지불로 인하여 세간에 착한 법이 있게 된 것도 역시 모두가 보살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 만일 보살이 발심하지 않았다면 세간에는 오히려 부처님의 도[佛道]조차 없을 것인데 하물며 성문이나 벽지불이겠는가?
부처님의 도는 바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 비록 성문이나 벽지불로 인하여 착한 법이 있다 하더라도 적으니, 적기 때문에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문이나 벽지불조차도 말씀하지 않는데 하물며 외도의 모든 스승이겠는가?
【경】 무엇이 착한 법인가?
이른바 10선도(善道)와 5계(戒)와 8분성취재(分成就齋)와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과 4념처(念處)와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분(覺分)과 8성도분(聖道分)이 모두 세간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또 보살의 인연 때문에 6바라밀(波羅蜜)과 18공(空)과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와 일체종지(一切種智)가 모두 세간에 나타나고,
보살의 인연 때문에 찰리(刹利)의 큰 성바지[大姓]와 바라문(婆羅門)의 큰 성바지와 거사(居士)의 대가와 사천왕천(四天王天)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까지가 모두 세간에 나타나며,
보살의 인연 때문에 수다원(須陀洹)과 사다함(斯陀含)과 아나함(阿那含)과 아라한(阿羅漢)과 벽지불(辟支佛)이 모두 세간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논】
【문】 보살의 인연 때문에 세간에 착한 법이 있다는 것은 그럴 수 있겠지만, 찰리의 큰 성바지와 바라문의 큰 성바지와 거사의 대가는 설령 세간에 보살이 없다 해도 역시 이런 귀한 성바지는 있는데 어찌하여 “모두가 보살로부터 생긴다.”라고 하시는가?
【답】 보살의 인연 때문에 세간에는 5계(戒)와 10선(善)과 8재(齋) 등이 있다. 이 법에는 상ㆍ중ㆍ하가 있는데, 상이 된 이는 도(道)를 얻고 중이 된 이는 천상에 가 나며 하가 되는 이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찰리의 큰 성바지와 바라문의 큰 성바지와 거사의 큰 성바지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문】 설령 세간에 보살이 없다 해도 세간에는 역시 5계와 10선과 8재며 찰리 등의 큰 성바지는 있다.
【답】 보살이 받는 몸은 갖가지이니, 혹 때로는 업의 인연으로 몸을 받기도 하고 혹은 변화로 된 몸을 받기도 하면서 세간을 교화하되 모든 착한 법과 세계의 법과 왕법(王法)과 세속의 법과 출가한 이의 법과 집에 있는 이의 법[在家法]과 종류의 법[種類法]과 집에서 사는 법을 연설하고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 세계를 보호하고 유지한다. 비록 보살의 법은 없다 하더라도 항상 세간의 법을 행하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모두 보살을 좇아 있게 된다.
【문】 보살은 청정하여 크게 자비를 행하는데 어떻게 세속의 모든 복잡한 법을 연설한다 하는가?
【답】 두 종류의 보살이 있다.
첫째는 자비를 행하면서 곧장 보살의 도에 들어가는 이다.
둘째는 부수어 무너뜨리는[敗壞] 보살이니,
그도 역시 자비심이 있고 국법(國法)으로 다스리면서도 이익을 탐내는 바가 없으며,
비록 괴롭히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안온을 누리는 이가 더 많고 하나의 악한 사람을 다스림으로써 한 집안의 안락을 이루게 한다.
이렇게 법을 세우는 사람을 비록 청정한 보살이라 하지는 못하나 부수어 무너뜨리는 보살이라고는 이름할 수 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보살을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이다.
세간의 모든 부귀는 모두가 2승(乘)의 도로부터 있게 된다.
2승의 도는 부처님으로부터 있게 되고, 부처님은 보살로 인하여 있게 되나니,
만일 보살로서 착한 법을 말하는 이가 없다면 세간에서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와 아수라도(阿修羅道)는 없게 되고,
즐거운 느낌[樂受]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은 없으며,
단지 괴로운 느낌[苦受]만이 있어 언제나 지옥의 울부짖는 소리만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크게 이익되게 하는데 어떻게 세간의 복전(福田)이라 하지 않겠는가?
사리불은 이런 보살에게 큰 공덕이 있어서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하다 함을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번뇌가 아직은 다하지 못했고 비록 큰 복은 있다 하더라도 그 공양은 소화하지 못하리니,
마치 사람이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속에 병이 있기 때문에 소화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으니,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살마하살은 청정해지고 난 후에 복을 베푸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왜냐하면 본래부터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은 처음 발심할 때부터 온갖 중생의 공양을 받을 이로서는 우두머리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음으로 결정하면서,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위하여 대신 괴로움을 받겠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 한량없고 끝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제도하고 벗어나게 하며, 온갖 부처님 법과 큰 지혜의 힘을 취하고자 하는 까닭에 세간으로 하여금 바로 열반이 되게 하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본래부터 이미 청정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부처님은 거듭하여 베풂[施]을 녹이는 인연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경】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큰 시주(施主)가 되어서 무엇을 베푸는가? 모든 착한 법을 베푸느니라.
착한 법이란 곧 10선도와 5계 내지는 18불공법과 일체종지이니, 이러한 것으로써 베풀어 주느니라.”
【논】 해석한다.
먼저는 보살의 인연을 말미암아 세간에는 착한 법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이번에는 보살은 착한 법을 베푸는 시주임을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서로 다르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응(應)하면 반야바라밀과 상응(相應)하는지요?”
【논】 해석한다.
위에서는
“하루 동안 반야바라밀을 닦아도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인연으로 부처님은 갖가지로 보살을 찬탄하면서,
“이와 같은 큰 공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로부터 생긴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묻기를,
“어떻게 보살이 이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하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지요?”라고 하는 것이다.
또 사리불은 반야바라밀은 행하기 어렵고 얻기 어려우며 환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받아 지니기도 어렵다 함을 알고 있는지라 수행하는 이가 잘못 그르칠까 두렵기 때문에 익히고 응하는[習應] 일을 물은 것이다.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물질[色]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눈[眼]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며,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마음[心]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빛깔[色]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며,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눈의 경계[眼界]의 공함ㆍ빛깔의 경계[色界]의 공함ㆍ안식의 경계[眼識界]의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며, 귀의 경계[耳界]ㆍ소리의 경계[聲界]ㆍ이식의 경계[耳識界]와 코의 경계[鼻界]ㆍ내음의 경계[香界]ㆍ비식의 경계[鼻識界]와 혀의 경계[舌界]ㆍ맛의 경계[味界]ㆍ설식의 경계[舌識界]와 몸의 경계[身界]ㆍ닿임의 경계[界]ㆍ신식의 경계[身識界]와 뜻의 경계[意界]ㆍ법의 경계[法界]ㆍ의식의 경계[意識界]의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괴로움[苦]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며,
쌓임[集]ㆍ사라짐[滅]ㆍ도(道)가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무명(無明)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며, 지어감[行]ㆍ분별[識]ㆍ이름과 모양[名色]ㆍ6처(處)ㆍ닿임[觸]ㆍ느낌[受]ㆍ욕망[愛]ㆍ취착[取]ㆍ존재[有]ㆍ남[生]과 늙어 죽음[老死]이 공함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온갖 법이 공하고 혹은 유위(有爲)이고 혹은 무위(無爲)임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5중(衆)이라 함은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다.
물질[色衆]이라 함은 볼 수 있는 법[可見法]이다. 이 물질은 인연 때문에 역시 볼 수 없으면서[不可見] 대할 수도 있다[有對]. 대할 수 있다면 비록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역시 물질이라 한다.
마치 도를 얻은 이를 도인(道人)이라 하고 그 밖의 출가한 이가 아직 도를 얻지 못했다 해도 역시 그도 도인이라 하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 바로 볼 수 있는가? 1처(處)는 볼 수 있으면서 대할 수도 있는 물질이다.
일부분은 하나의 입[一入]에 속하며 그 밖의 9처(處)와 조작이 없는 업[無作業]은 볼 수 없는 물질이라 한다.
대할 수 있는 것은 10처(處)이고 대할 수 없는 것은 조작이 없는 물질[無作色]이니,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등의 분별도 역시 그와 같다.
마치 경에서,
“물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어떤 물질은 볼 수도 있고 대할 수도 있으며[可見有對],
어떤 물질은 볼 수는 없으나 대할 수는 있으며[不可見有對],
어떤 물질은 볼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다[不可見無對]”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닌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물질의 안팎의 10처(處)에서 다섯의 식[五識]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모두 물질이라 하며, 이 물질의 갈래[分]로 인하여 조작이 없는 물질이 생기게 된다.
다시 네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안의 존재[內有]에서 느끼는 것과 느끼지 않는 것과 밖의 존재[外有]에서 느끼는 것과 느끼지 않는 것이다.
다시 다섯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이른바 5진(塵)이다.
다시 한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경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모양[惱壞相]이다.
중생의 몸이 되는 물질을 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모양이라 하고,
비중생(非衆生)의 물질 역시 무너짐을 괴로워하는 모양이라 한다.
괴로운 모양의 인연 때문에 또한 ‘괴롭다.’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몸이 있으면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덥고 늙고 병드는 일과 칼과 몽둥이 등의 괴로움이 있는 것과 같다.
다시 두 가지의 물질이 있으니,
이른바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이고,
안의 물질과 바깥의 물질이며,
느끼는 물질과 느끼지 않는 물질이며,
매인[繫] 물질과 매이지 않은 물질이며,
죄를 낳는 물질과 복을 낳는 물질이며,
업(業)의 물질과 업이 아닌 물질이며,
업의 물질과 결과[果]의 물질이며,
업의 물질과 과보[報]의 물질이며,
결과의 물질과 과보의 물질이며,
은몰무기(隱沒無記)의 물질과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의 물질이며,
볼 수 있는 물질과 볼 수 없는 물질이며,
대할 수 있는 물질과 대할 수 없는 물질이며,
유루의 물질과 무루의 물질 등이니,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물질을 분별한다.
다시 세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위에서 볼 수도 있고 대할 수도 있다[可見有對]는 것 안에서의 설명과 같다.
다시 세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선의 물질[善色]과 불선의 물질[不善色]과 무기의 물질[無記色]이고,
학의 물질[學色]과 무학의 물질[無學色]과 학도 무학도 아닌 물질[非學非無學色]이며,
견제(見諦)에서 끊을 바로부터 생기는 물질과 사유(思惟)에서 끊을 바로부터 생기는 물질과 끊을 바가 없는 데서부터 생기는 물질이다.
다시 세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욕계에 매인 물질[欲界繫色]과 색계에 매인 물질[色界繫色]과 아무 데도 매이지 않은 물질이고,
탐욕을 내게 하는 물질과 성을 내게 하는 물질과 어리석음을 내게 하는 물질이다.
3결(結)과 3루(漏) 등에서도 역시 그와 같으니,
물질은 능히 탐내지 않는 선근(善根)과 성을 내지 않는 선근과 어리석지 않은 선근을 낳는다.
이와 같이 모든 세 가지의 선근이 자세히 설명되어야 하리라.
어떤 물질은 은몰무기(隱沒無記)의 법을 내고 불은몰무기(不隱沒無記)의 법을 낸다.
이 불은몰무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보생(報生)이 있고 보생이 아닌 것이 있나니,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무기가 있다.
다시 네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위의 느끼고 느끼지 않는[受不受] 것 안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4대(大) 및 만들어진 물질의 세 가지인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이며,
신업(身業)으로 조작하거나 조작이 없는 물질과 구업(口業)으로 조작하거나 조작이 없는 물질이며,
받는 물질受色: 수계(受戒)할 때에 율의(律儀)를 얻는 것과,
금지하는 물질止色: 나쁘고 착하지 않은 일을 금지하는 것과,
수용하는 물질用色: 대중 스님들이 단월(檀越)이 보시한 물건을 받아쓰는 것과,
수용하지 않는 물질不用色: 그 밖의 받아쓰지 않는 물질 등이니,
이와 같은 것들이 네 가지의 물질이다.
다시 다섯 가지의 물질이 있나니,
몸으로 조작하거나 조작이 없는 물질과 입으로 조작하거나 조작이 없는 물질 및 업(業)이 아닌 물질이고,
5정(情)과 5진(塵)이며,
거친 물질[麤色]과 움직이는 물질[動色]과 그림자의 물질[影色]과 형상의 물질[像色]과 속이는 물질[誑色]이다.
거친 물질이라 함은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냄새 맡을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고 접촉할 수도 있는 것이니, 마치 흙과 돌 따위와 같다.
움직이는 물질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중생의 동작(動作)이고, 둘째는 중생이 아닌 것의 동작이다.
마치 물과 불과 바람의 동작과 같아서,
땅은 다른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움직이고,
아래에 큰 바람이 있으면서 물을 움직이며,
물은 땅을 움직이고 바람은 나무를 움직인다.
마치 술이 저절로 발효되어 끓어 움직이는 것과 같다.
또한 자석(磁石)이 쇠를 빨아들이는 것과 같고,
진주(眞珠)와 옥(玉)과 자거(車渠)와 마노(馬碯)가 밤에 저절로 빛을 발하는 것과 같나니,
이는 모두 중생들이 전생에 지은 복덕의 인연이요 불가사의한 것이다.
【문】 그림자의 물질[影色]과 형상의 물질[像色]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눈의 광명이 청정한 거울을 대하기 때문에 도리어 자신을 비추어 보기 때문이다.
그림자도 역시 그와 같아서 광명을 차단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나타나게 되나니, 다시 달리 어떠한 법이 없는 것이다.
【답】 그 일은 그렇지 않다.
마치 기름 가운데서 형상을 본다면 검은 것이 본래의 빛깔이 아닌 것과 같다.
마치 다섯 자 되는 칼을 옆으로 놓고 보면 얼굴 형상이 넓적하고 세로로 세워 놓고 보면 얼굴 형상이 길쭉하게 보이지만 그것이 본래의 얼굴이 아닌 것과 같다.
마치 대진(大秦)의 수정(水精) 가운데 옥돌[玷]과도 같으니, 이지러진 곳[玷]에서는 모두 얼굴의 형상이 있지만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도리어 본래의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또 거울이 있고 사람이 있고 가진 이가 있고 광명이 있는 등 뭇 연(緣)이 화합한 까닭에 형상이 생기게 된다.
만일 뭇 연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형상은 생기지 않나니, 이 형상 또한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역시 인연 가운데 있지도 않다.
이와 같이 달리 스스로의 법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 얼굴은 아니다.
이것은 미세한 물질로 생기는 법으로서 이와 같은 것은 거친 물질과는 같지 않나니,
마치 불로 인하여 연기가 있고 불이 꺼져도 연기는 있는 것과 같다.
【문】 만일 그렇다면 따로 그림자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 똑같이 이것은 미세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답】 거울 속의 형상에는 갖가지의 물질이 있지만 그림자는 곧 하나의 물질이니, 이 때문에 같지는 않다.
이 두 가지는 비록 형상을 기다려서 함께 움직인다 하더라도 형질(形質)은 저마다 다르다.
그림자는 광명을 차단함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형상은 갖가지의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비록 똑같이 미세한 물질이라 하더라도 저마다 차별이 있다.
속이는 물질[誑色]이라 함은 마치 아지랑이와 같고 요술과 허깨비와 같고 건달바성(乾達婆城)과 같은 것으로, 멀리서는 사람의 눈을 속이지만 다가가면 아무것도 없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한량없는 물질을 통틀어서 색중(色衆)이라 한다.
느낌[受衆]이라 함은 마치 경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눈으로 인하여 빛깔을 반연하고 안식(眼識)을 낳으며,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접촉[觸]이 생긴다.
이 접촉은 바로 그때 세 가지가 같이 생기는 것이니, 이른바 느낌[受]과 생각[想]과 지어감[行]이다.
【문】 안식도 역시 세 가지의 인(因)이 되어 주는데 무엇 때문에 접촉[觸]만을 말하는가?
【답】 안식은 잠시 동안 머무르면서 빛깔을 보자마자 이내 사라지고 다음에는 의식(意識)이 생겨서 빛깔의 좋음과 추함을 분별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안식은 말하지 않는다.
눈과 빛깔과 식의 세 가지 일의 화합으로 인하여 접촉을 내고 접촉은 심수(心數)의 법을 낸다.
안식의 인연은 멀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문】 온갖 식(識)에는 모두가 접촉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접촉의 인연만으로 마음에 속한 법이 생기는가?
【답】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고 하는 마음[念念生滅心]이고,
둘째는 차례로 계속 이어지는 마음[次第相續心]이다.
접촉도 그와 같아서 차례로 계속 이어지는 접촉은 거칠기 때문에 접촉으로 인하여 마음에 속한 법이 생긴다고 설명하며,
생각생각의 접촉도 미세하면서 역시 함께 마음에 속한 법이 생기지만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다.
만일 정(情)ㆍ진(塵)ㆍ식(識)의 세 가지 일이 화합하여 고통과 쾌락을 느끼면 그때의 접촉의 법은 똑똑히 알 수 있나니, 이 때문에 접촉으로 인하여 마음에 속한 법이 생긴다고 한다.
마치 물질의 법은 인연의 화합에서 생기듯이 마음에 속한 법도 그와 같아서 접촉하는 법의 화합에서 생기며,
마치 물질의 법이 화합에서 생기고 화합이 없으면 생기지 않듯이 마음에 속한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접촉이 있으면 생기고 접촉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이 느낌[受衆]에서 한 가지는 이른바 느끼는 모양[受相]이다.
다시 두 가지 느낌이 있나니,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이고, 안의 느낌과 바깥의 느낌이며, 거친 느낌과 미세한 느낌이며, 먼 느낌과 가까운 느낌이며, 깨끗한 느낌과 깨끗하지 않은 느낌 등이다.
다시 세 가지의 느낌이 있나니,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며,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이며,
학(學)과 무학(無學)과 학도 무학도 아니며[非學非無學],
견제(見諦)에서 끊을 바와 사유(思惟)에서 끊을 바와 끊지 않을 바이며,
견제에서 끊는 바로 인하여 생기는 느낌과 사유에서 끊는 바로 인하여 생기는 느낌과 끊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느낌이다.
혹은 몸에 대한 소견[身見]으로 인하여 생기면서도 도리어 몸에 대한 소견의 인(因)이 되지 않기도 하고,
혹은 몸에 대한 소견으로 인하여 생기면서 도리어 몸에 대한 소견의 인이 되기도 하며,
혹은 몸에 대한 소견으로 인하여 생기지도 않고 도리어 몸에 대한 소견의 인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한다.
또 세 가지의 느낌이 있나니,
욕계의 매임[欲界繫]과 색계의 매임[色界繫]과 무색계의 매임[無色繫]이니, 이와 같은 세 가지 느낌이 있다.
다시 네 가지의 느낌이 있나니,
안 몸[內身]의 느낌과 바깥 몸[外身]의 느낌과 안 마음[內心]의 느낌과 바깥 마음[外心]의 느낌이며,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 등과 상응하는 느낌이며,
4류(流)와 4박(縛) 등과 상응하는 느낌이니,
이것을 네 가지의 느낌이라 한다.
다시 다섯 가지의 느낌이 있나니, 낙근(樂根)ㆍ고근(苦根)ㆍ우근(憂根)ㆍ희근(喜根)ㆍ사근(捨根)이며,
고제를 보아 끊는 경지[見苦所斷]와 상응하는 느낌 내지는 사유에서 끊는 경지[思惟所斷]에 이르기까지의 느낌이다.
5개(蓋)와 5결(結)의 모든 번뇌와 상응한 느낌도 역시 그와 같다.
다시 여섯 가지의 느낌이 있나니, 6식(識)과 상응한 느낌이다.
다시 의식(意識)으로 분별하는 데에 18의 느낌이 있나니,
이른바 눈으로 빛깔을 본 뒤에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에 기쁨을 내고,
눈으로 빛깔을 본 뒤에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에 근심을 내며,
눈으로 빛깔을 본 뒤에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에 버림[捨]을 내는 것이니,
의식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이 18의 느낌 가운데 깨끗함[淨]이 있고 더러움[垢]이 있어 36이 되고 3세(世)에 각각 서른여섯 가지 느낌이 있으므로 합하여 108가지가 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분별하며 느낌이 이치가 한량없음을 일컬어 수중(受衆)이라 한다.
상중(想衆)이나 상응하는 행중(行衆)ㆍ식중(識衆) 역시 이와 같이 분별한다. 왜냐하면 수중과는 상응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네 가지 생각[四種想]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나니,
작은 생각[小想]과 큰 생각[大想]과 한량없는 생각[無量想]과 있는 바가 없는 생각[無所有想]이 있다.
작은 생각이라 함은 작은 법을 깨닫고 아는 것이다.
일컬어지듯이 작은 법이란 작은 욕망이나 작은 믿음이나 작은 물질이나 작은 연(緣)과 같은 모양이니, 이것을 작은 생각이라 한다.
또 욕계에 매인 생각을 일컬어 작다 하고,
색계에 매인 생각을 크다고 하며,
3무색천(無色天)에 매인 생각은 한량없다고 하며,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매인 생각을 있는 바가 없는 생각이라 한다.
다시 번뇌와 상응한 생각을 작은 생각이라 함은 번뇌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유루(有漏)로써 때가 없는[無垢] 생각을 큰 생각이라 하며,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생각을 있는 바가 없는 생각이라 하며,
무루(無漏)의 생각을 한량없는 생각이라 하나니, 열반의 한량없는 법이 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여섯 가지 생각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나니,
눈의 접촉과 상응하여 생기는 생각 내지는 뜻의 접촉과 상응하여 생기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상중(想衆)이라 한다.
지어감[行衆]이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간혹 “온갖 유위의 법[有爲法]을 일컬어 지어감이라 한다.”라고 하셨고
혹은 세 가지의 지어감도 말씀하셨으니, 몸의 지어감[身行]과 입의 지어감[口行]과 뜻의 지어감[意行]이다.
몸의 지어감이라 함은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숨[息]은 몸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입의 지어감이라 함은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먼저 큰 생각과 세밀한 생각이 있고 난 후에 말을 하기 때문이다.
뜻의 지어감이라 함은 느낌[受]과 생각[想]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모양을 취하면서 마음이 발동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뜻의 지어감이라 한다.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소견[見]에 속하고, 둘째는 애착[愛]에 속한 것이다.
애착에 속한 것의 주(主)된 것을 느낌[受]이라 하고,
소견에 속한 것의 주된 것을 생각[想]이라 한다.
이 때문에 이 두 가지 법을 말해 뜻의 지어감을 삼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혹은 12인연(因緣) 안에서 세 가지의 지어감을 말씀하셨나니,
복의 지어감[福行]과 죄의 지어감[罪行]과 움직임이 없는 지어감[無動行]이 그것이다.
복의 지어감이라 함은 욕계에 매인 착한 업[善業]이고,
죄의 지어감이라 함은 착하지 않은 업[不善業]이며,
움직임이 없는 지어감이라 함은 색계와 무색계에 매인 업이다.
아비담(阿毘曇)에서는 느낌과 생각을 제외한 그 밖의 마음에 속한 법 내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등의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을 바로 행중(行衆)이라 한다.
의식[識衆]이라 함은 안팎의 6입(入)이 화합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의 깨달음을 내므로 의식[識]이라 한다.
안의 연의 힘[內緣力]이 크기 때문에 안식(眼識)이라 하고 나아가 의식(意識)이라 한다.
【문】 뜻이 곧 의식인데 어찌하여 연의 힘[意緣力] 때문에 의식이 생기는가?
【답】 뜻은 나고 멸하는 모양이기 때문이니, 대부분 앞의 뜻으로 인하여 법을 반연하면서 의식을 낳게 된다.
【문】 앞의 뜻은 이미 사라졌는데 어떻게 뒤의 의식이 생길 수 있는가?
【답】 뜻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생각생각마다 사라지는 것이다.
둘째는 마음이 차례로 이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하나[一]라 하고, 계속 이어지는 마음 때문에 모든 마음을 일의(一意)라 한다.
이 때문에 뜻에 의지하면서 의식이 생긴다 해도 허물이 없다.
의식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96종의 외도(外道)들은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의식이 생긴다.”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신(神)에 의지함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이 5중(衆)은 4념처(念處) 중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신념처(身念處)는 물질[色衆]을 말하고, 수념처(受念處)는 느낌[受衆]을 말하며, 심념처(心念處)는 의식[識衆]을 말하고, 법념처(法念處)는 생각[想衆]과 지어감[行衆]을 말하기 때문이다.
【문】 5중은 있을 수 없고 단지 물질과 의식만이 있어야 한다.
의식은 때에 따라 분별하기 때문에 다른 이름이 있게 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이라 한다.
마치 청정하지 않은 식[不淨識]을 번뇌라 하고 청정한 식[淨識]을 착한 법이라 하는 것과 같다.
【답】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이름이 다르다면 그 때문에 진실도 역시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법이 없다면 이름도 다르지 않아야 한다.
만일 오직 마음만 있고 마음의 법이 없다면 마음은 더러움이 있다거나 깨끗함이 있다고 하지 않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깨끗한 물에 미친 코끼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면 그 물은 혼탁하게 되며,
만일 물을 맑게 하는 구슬[淸水珠]을 그 물에다 넣으면 이내 깨끗하게 되는 것과 같다.
물 이외에는 코끼리가 없다거나 구슬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마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번뇌가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이 혼탁하게 되고 모든 자비 등의 착한 법이 마음으로 들어가면 마음을 청정하게 하나니, 이 때문에 번뇌와 자비 등의 법이 곧 마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문】 그대는 내가 먼저 “더러운 마음[垢心]이 곧 번뇌요 깨끗한 마음[淨心]이 곧 착한 법”이라 함을 듣지 않았었는가?
【답】 만일 더러운 마음이라면 차례로 어떻게 깨끗한 마음을 낼 수 있으며, 깨끗한 마음이라면 차례로 어떻게 더러운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일은 옳지 못하다.
그대는 단지 거칠게 나타나는 일만을 알고 마음에 속한 법을 모를 뿐이다. 모른다 하여 곧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5중은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문】 만일 있다면 무엇 때문에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단지 다섯 가지만을 말씀하는가?
【답】 모든 법에는 각기 일정한 한계가 있나니,
마치 손의 법은 다섯 손가락이어서 그보다 많고 적음을 바랄 것이 없는 것과 같다.
또 유위의 법은 비록 한량없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다섯으로 분간하고 판단하여 다 알고 계신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12입(入)과 18계(界)를 말씀하셨는가?
【답】 중(衆)의 이치는 마땅히 그러해야 되지만 입(入)과 계(界)의 이치는 다르다.
부처님은 법왕(法王)이 되시어 중생들을 위하여 때로는 간략하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자세하게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어떤 중생은 색식(色識) 안에서는 크게 사혹(邪惑)되지 않으나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 안에서는 착오가 많기 때문에 5중(衆)을 말씀하신다.
어떤 중생은 마음과 심수법 안에서는 사혹을 내지 않으나 단지 물질에 대해서만은 미혹되므로 이런 중생들을 위해서는 물질을 10처(處)로 삼아 말씀하셨고 마음과 심수법을 통틀어 2처(處)로 말씀하셨다.
혹 어떤 중생은 심수법 안에서는 조금 사혹을 내면서도 대부분 물질과 마음[色心]을 분명히 알지 못하니,
이런 중생들을 위해서는 마음에 속한 법은 1계(界)로 삼아 말씀하셨고 물질과 마음은 17계(界)로 삼아 말씀하셨다.
혹 어떤 중생은 세간의 괴로운 법과 나고 없어짐을 모르고 괴로움의 길을 여읠 줄을 알지 못하니,
이런 중생들을 위해서는 4제(諦)를 말씀하시면서,
“세간과 몸은 모두가 괴로운 것이요 탐애 등의 번뇌가 그 괴로움의 원인이며 번뇌가 사라지면 바로 그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니, 번뇌가 사라지게 하는 방편의 법을 바로 도(道)라 한다.”라고 하셨다.
혹 어떤 중생은 나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서 삿된 소견으로 ‘하나다,’ ‘다르다.’ 하는 모양을 내기도 한다.
혹은 “세간에는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혹은 삿된 인연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 중생들을 위해서는 12인연(因緣)을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항상된 법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신(神)은 항상하다.”라고 말하기도 하며.
혹은 “온갖 법은 항상하다. 단지 소멸할 때는 은몰되어 미세해지는 것일 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인연을 만나게 되면 도로 나오게 되는 것이어서 이 이외에 다른 법은 없다.”라고 하기도 하나니,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온갖 유위의 법은 모두가 조작하는 법이어서 영원히 정해진 것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나무로 만든 사람은 갖가지의 기관(機關)과 나무쐐기가 화합한 까닭에 동작할 수 있는 것일 뿐 실제로 있는 일은 없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유위의 법이라 한다.
【문】 여기서 말씀하는 5중(衆)에는 어떤 차례가 있는가?
【답】 수행하는 이는 처음에 관법(觀法)을 익히되 먼저 거친 법부터 관찰하면서 몸은 깨끗하지 못하고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는 등 몸에 있는 우환(憂患)을 알게 된다.
이처럼 중생이 몸에 대하여 집착하는 까닭은 즐거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즐거움을 자세히 관찰하면 한량없는 괴로움이 있어 항상 그것이 붙따르고 있으니, 이 즐거움도 역시 무상하고 공하고 나가 없는 것이다.
6진(塵) 안에는 한량없는 괴로움이 있는데 중생은 무슨 인연으로 집착을 내는가? 곧 중생들은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 몸의 한 가지에 치우쳐서 집착이 있을 때는 생명을 없앨 정도로 죽도록 모양을 취하면서 고통과 쾌락을 받고 발동하며, 사(思) 등의 모든 행(行)을 내는 것과 같다.
마음의 작용이 발동할 때에 고통을 여의고 쾌락을 얻는 방편을 알게 되니, 이것이 의식[識]이 된다.
또 중생은 5욕(欲)의 인연 때문에 고통과 쾌락을 받고 모양을 취하는 인연 때문에 이런 쾌락에 깊이 집착하며 쾌락에 깊이 집착하기 때문에 혹은 3독(毒)이나 3선근(善根)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지어감[行]이라 하니, 의식[識]은 그의 주인이 되어서 위의 일을 수용(受用)하는 것이다.
5욕은 바로 그것이 물질이고 물질은 바로 근본이기 때문에 처음에 물질[色衆]을 말하고 그 밖의 나머지가 차례로 이름이 있게 된다.
그 밖의 입(入)과 계(界)의 모든 법 등은 모두가 5중의 차례로 말미암는다.
오직 법입(法入)과 법계(法界) 안에는 무위의 법[無爲法]만을 더하고 4제 안에는 지연멸(智緣滅)을 더하며, 입(入)ㆍ계(界) 내지는 유위ㆍ무위까지의 법은 위의 설명에서와 같다.
이제 5중(衆) 등의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나니, 왜냐하면 성주(聖主)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인에는 하ㆍ중ㆍ상의 세 가지가 있는데, 부처님은 그 주(主)가 되신다.
마치 별이나 달 가운데서 해가 가장 으뜸이 되는 것과 같으니, 광명이 크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를 얻으셨기 때문에 성주라 하며, 성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은 진실이어야 한다.
또 18공(空)이 있기 때문에 온갖 법은 공하다.
설령 단지 성공(性空)만으로써도 온갖 법을 공하게 하는데 하물며 18공이겠는가?
설령 내공(內空)과 외공(外空)으로써도 온갖 법을 공하게 하는데 하물며 18공이겠는가?
또 만일 어떤 법이 공하지 않다면 응당 두 가지가 있어야 하나니, 물질의 법[色法]과 물질이 아닌 법[非色法]이다.
이 물질의 법은 따로따로 나누고 깨뜨려 가르면 아주 작은 티끌에 이르며, 그 작은 티끌을 따로 나누려 해도 역시 얻을 수 없으니 마침내는 모두가 공하여 물질이라는 법이 없게 된다.
나아가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고 하기 때문에도 모두가 공하나니, 마치 4념처(念處)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또 모든 법은 성품이 공하고 단지 이름뿐으로, 인연이 화합한 까닭에 존재할 뿐이다.
마치 산하(山河)ㆍ초목(草木)ㆍ토지(土地)ㆍ인민(人民)ㆍ주군(州郡) 및 성읍(城邑)이 있는 데를 나라라 하고,
큰 마을ㆍ저자ㆍ큰 길ㆍ여관 및 궁전이 있는 데를 도읍이라 하며,
들보ㆍ기둥ㆍ서까래ㆍ마룻대ㆍ기와ㆍ대ㆍ벽 및 돌이 어울려 된 것을 전각(殿閣)이라 함과 같다.
위와 중간과 아래의 부분이 합하여 된 것을 기둥이라 하고,
조각조각이 화합한 까닭에 부분이라 하는 이름이 있으며,
여러 개의 패찰[札]이 화합한 까닭에 조각이라 하는 이름이 있으며,
여러 작은 것이 화합한 까닭에 패찰이라 하는 이름이 있는 것이다.
이 작은 티끌[微塵]에는 큰 것이 있고 중간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나니,
큰 것은 돌아다니는 티끌이라 볼 수가 있고, 중간 것은 모든 하늘들이 보며, 작은 것은 으뜸가는 성인의 천안(天眼)으로 볼 수 있지만 혜안(慧眼)으로 이것들을 관찰하면 보이는 것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성품은 진실로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작은 티끌이 진실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항상해서 나누어 쪼갤 수도 없고 부스러뜨릴 수도 없으며 불에 태울 수도 없고 물에 빠뜨릴 수도 없을 것이다.
또 만일 작은 티끌에 형상이 있거나 형상이 없으면 둘 다 같이 허물이 있다.
만일 형상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이 물질이겠으며, 만일 작은 티끌에 형상이 있다 하면 허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역시 시방의 한 부분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만일 시방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하면 작다[微]고 하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 법 안에서 물질에는 멀거나 가깝거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간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다시 이 인연과 이름을 여의면 곧 법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제 산하(山河)와 토지의 인연과 이름을 제거하면 다시는 나라라는 이름이 없고,
큰 마을과 길과 거리의 인연과 이름을 제거하면 도읍이라는 이름이 없으며,
들보ㆍ서까래ㆍ대ㆍ기와의 인연과 이름을 제거하면 다시는 전각이라는 이름이 없고,
세 부분의 인연과 이름을 제거하면 다시는 기둥이라는 이름이 없으며,
조각의 인연과 이름을 제거하면 부분이라는 이름이 없다.
패의 인연과 이름을 제거하면 조각이라는 이름이 없고,
뭇 작은 것의 인연과 이름을 제거하면 패라 하는 이름이 없으며,
중간 티끌이라는 이름을 제거하면 큰 티끌이라 하는 이름이 없고,
작은 티끌이라 하는 이름을 제거하면 중간 티끌이라는 이름이 없으며,
천안(天眼)과 허망하게 보는 일을 제거하면 작은 티끌이라는 이름이 없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의 이치 때문에 모든 법이 결국에는 공한 줄 아는 것이다.
【문】 만일 법이 필경공(畢竟空)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름이 있는가?
【답】 이름이 만일 있다 하면 법과 함께 파괴될 것이요, 만일 없다 한다면 논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과 법은 다 같이 다름이 없나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이 공한 줄 알 것이다.
또 온갖 법은 진실로 공하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하나의 법도 일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여러 법이 화합에서 생기는 것이다.
만일 하나가 없다면 역시 여럿도 없게 되나니, 마치 나무는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화합한 까닭에 임시 이름인 나무가 있는 것 같다.
만일 나무라는 법이 없다면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무엇을 위하여 화합하겠는가?
만일 화합이 없다면 하나라는 법도 없고 하나라는 법이 없으면 또한 여럿도 없을 것이니, 처음의 하나가 나중에는 여럿이 되기 때문이다.
또 모든 관(觀)과 언어와 쓸모없는 이론이 모두 진실이 없다면 세간이 항상하다는 것도 옳지 못하고, 세간이 무상하다는 것도 옳지 못하며,
중생이 있다거나 중생이 없다거나 끝이 있다거나 끝이 없다거나 나가 있다거나 나가 없다거나 모든 법은 진실하다거나 모든 법은 공하다고 하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나니,
먼저 갖가지의 논의문(論議門)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만일 이 모든 관과 쓸모없는 이론이 모두 없다면 어떻게 공하지 않겠는가?
【문】 그대는 “모든 법이 진실하거나 모든 법이 공하거나 간에 모두가 옳지 못하다.”라고 하면서 이제 어떻게 다시 모든 법이 공하다고 말하는가?
【답】 두 가지의 공함 있다.
첫째는 이름이 공함을 말해 단지 있다[有]는 데 대한 집착만을 깨뜨리면서 그 공은 깨뜨리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공으로써 있다는 것을 깨뜨릴뿐더러 역시 공한 것까지도 없는 것이니,
마치 소겁(小劫)이 다할 때에는 싸움[力兵]과 질병[疾病]과 굶주림[飢餓]이 있어도 오히려 사람과 물건과 날짐승ㆍ길짐승과 산과 강물이 남아 있지만,
대겁(大劫)에 다 탈 때에는 산과 강물과 수목 내지는 나아가 금강(金剛)과 땅 아래에 있는 큰물까지도 역시 다하고 겁화(劫火)도 꺼지며 물을 지탱하는 바람도 없어져서 온갖 것은 횅댕그렁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공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법을 깨뜨려 모두가 공하면 오직 공만이 남아 그 모양을 취하면서 집착하게 되지만,
대공(大空)이면 온갖 법을 깨뜨린 그 공도 다시 공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그대는 그런 힐난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모든 쓸모없는 이론이 소멸된다면 어떻게 공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곳곳에서 공함을 말하고 있나니, 그러므로 온갖 법이 공한 줄 알아야 한다.
익힌다[習] 함은 반야바라밀을 따라 닦고 익혀 행하고 관하면서 그치지 않고 쉬지도 않는 것이니, 이것을 익힌다고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스승의 뜻을 어기지 않으면 이것을 상응(相應)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반야바라밀의 모양처럼 보살도 역시 이 모양을 따르면서 지혜로써 관하여 능히 얻고 능히 성취하게 되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면 이것을 상응한다고 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함[函]의 뚜껑이 크건 적건 간에 꼭 들어맞는 것과 같다.
비록 반야바라밀이 모든 관법(觀法)을 멸한다 하더라도 지혜의 힘 때문에,
“능하지 않는 바가 없고 관하지 않는 바가 없다.”라고 하며,
이와 같이 알게 되면 두 치우침[二邊]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이 반야와 상응하는 것이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성공(性空)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7공(空), 즉 성공(性空)과 자상공(自相空)과 제법공(諸法空)과 불가득공(不可得空)과 무법공(無法空)과 유법공(有法空)과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문】 무엇 때문에 18공(空)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7공에 머물러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시는가?
【답】 부처님 법 안에서 자세하게 설명하면 18공이고, 간략하게 설명하면 7공이다.
마치 도를 돕는 법[助道法]을 자세히 설명하면 37품(品)이 있고 간략히 설명하면 7각분(覺分)인 것과 같다.
또 이 7공은 많이 이용하면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니,
마치 대공(大空)과 무시공(無始空)으로 간혹 어떤 중생들이 삿된 소견을 일으키면 그들을 위하여 일부러 설명하는 것과 같다.
성공(性空)이라 함은, 모든 법의 성품은 그 근본과 줄기조차도 오히려 스스로 공한데 하물며 현재 있는 것이겠는가? 그 인연조차도 오히려 공한데 하물며 과보(果報)이겠는가?
자상공(自相空)이라 함은, 모든 법의 전체의 모양[總相]이나 각각의 모양[別相]은 그 공함을 모조리 관찰하면 마음이 곧 멀리 떠나게 된다.
이 두 가지의 공으로써도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나니, 이것을 제법공(諸法空)이라 한다.
성품이 공함을 좇기 때문에 모양[相]이 있고, 이 모양조차도 공하기 때문에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며, 모든 법이 공하기 때문에 다시는 얻는 바가 없나니, 이것을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 한다.
이 네 가지의 공으로써 온갖 존재하는 법[有法]을 깨뜨리지만 만일 법이 있고 모양이 있다는 것을 잘못이라 여긴다면 법이 없다[無]는 것을 취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무법공(無法空)을 말하게 된다.
만일 법이 없다는 것을 잘못이라 여긴다면 도리어 법이 있다[有]는 것을 취하려 하나니, 이 때문에 유법공(有法空)을 말하게 된다.
먼저 네 가지의 공을 말하여 비록 법 있다[有法]는 것을 깨뜨렸다 하더라도 수행하는 이의 마음은 곧 있다는 것을 여의면서 없다는 것에 있게 되니, 이에 곧 무법공을 말한다.
만일 법이 없다[無法]는 것을 틀렸다고 말한다면 마음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어 도리어 있다는 데에 두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법공을 간략하게 설명하게 되나니, 있다는 데에 두려는 마음이 엷기 때문이다.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무법공을 그르다 여기면서 마음으로는 도리어 있다[有]도 의심하고, 만일 마음에 있다고 관하면 도리어 법이 없다[無]고 의심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있고 없는 것에 다 같이 그것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다.
마치 내외공(內外空)의 관과 같다. 이 때문에 단지 7공(空)만을 설명할 뿐이다.
【문】 그대는 “온갖 법이 공한 줄을 알아 모든 관(觀)이 소멸한 것을 바로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관하는 것을 바로 상응한다 하고, 이렇게 관하지 않으면 상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관인데, 어떻게 소멸한다 하는가?
【답】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7공(空)을 익히고 응할 때에는 물질의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과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으며,
물질의 나는 모양과 멸하는 모양을 보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나는 모양이나 멸하는 모양을 보지 않으며,
물질의 더러운 모양이나 깨끗한 모양을 보지 않고 수ㆍ상ㆍ생ㆍ식의 더러운 모양이나 깨끗한 모양을 보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물질의 나는 모양과 멸하는 모양을 보지 않는다 함은, 5중(衆)에 남이 있고 없어짐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5중에 나고 멸하는 모양이 있다면 곧 단멸(斷滅) 가운데 떨어지고, 단멸에 떨어지기 때문에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죄도 없고 복도 없기 때문에 금수나 다름없게 된다.
물질의 더러움과 깨끗함을 보지 않는다 함은 5중에 속박이 있고 해탈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니,
만일 5중이 곧 속박하는 성품이라면 해탈을 얻는 이가 없을 것이고,
만일 5중 이것이 청정한 성품이라면 도를 배우는 법이 없을 것이다.
【경】 물질[色]과 느낌[受]이 합한 것을 보지 못하고 느낌과 생각(想)이 합한 것을 보지 못하며,
생각과 지어감[行]이 합한 것을 보지 못하고 지어감과 의식[識]이 합한 것도 보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법과 법이 합하는 일이 없고 그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논】 해석한다.
마음[心]과 심수법[心數法]은 형상이 없고 형상이 없기 때문에 머무는 곳도 없나니, 이 때문에 물질은 느낌과 합하지 않는다.
마치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물질은 두 가지가 접촉하고 화합하지만 마음과 심수법 안에서는 닿는 법이 없기 때문에 화합할 수가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은 함께 화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부처님께서 여기에 대하여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어떤 법도 법과는 합하는 것이 없다.”라고 하셨나니,
왜냐하면 온갖 법의 성품은 항상 공하기 때문이다.
만일 법과 법이 합하는 일이 없다면 역시 떨어지는 일도 없다.
또 부처님은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셨다.
【경】 “사리불아, 물질이 공한 가운데는 물질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 공한 가운데에는 느낌ㆍ생각ㆍ지어감과 의식이 없느니라.”
【논】 해석한다.
왜냐하면 물질은 공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니, 만일 공이 오게 되면 물질이 소멸되는데, 어떻게 물질이 공한 가운데에 물질이 있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물속에는 불이 없고 불 속에는 물이 없는 것과 같나니, 성품이 서로 틀리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물질은 실로 공이 아니어서 수행하는 이는 공삼매(空三昧) 안에 들어가 물질을 보고는 공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물질이 공한 가운데는 전혀 물질이 없다.’고 말한다.”라고 하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역시 그와 같다.
【경】 “사리불아, 물질이 공하기 때문에 괴롭히고 무너지는 모양[惱壞相]이 없고,
느낌이 공하기 때문에 느끼는 모양[受相]이 없으며,
생각이 공하기 때문에 아는 모양[知相]이 없고,
지어감이 공하기 때문에 짓는 모양[作相]이 없으며,
의식이 공하기 때문에 깨닫는 모양[覺相]이 없느니라.”
【논】
【문】 이 이치에는 어떤 차례가 있는가?
【답】 먼저는 5중이 공한 가운데에는 5중이 없음을 말씀하셨고, 지금 여기에서는 그 인연을 말씀하셨다.
5중은 저마다 자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5중이 공한 가운데는 5중이 없다.”라고 하신 것이다.
【경】 “왜냐하면 사리불아,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기 때문이니, 느낌과 생각과 지어감과 분별도 또한 그러하니라.”
【논】 해석한다.
부처님께서는 거듭 인연을 말씀하신다.
만일 5중이 공과 다르다면 공 가운데에는 5중이 있어야 하리라. 이제 5중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도 5중과 다르지 않으며 5중이 곧 공이요 공이 곧 5중이니, 이 때문에 공은 5중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경】 사리불아, 이 모든 법은 공한 모양이어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이 공한 법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며 현재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이 없고 느낌‧생각‧지어감‧분별도 없으며,
눈‧귀‧코‧혀‧몸‧뜻도 없으며, 빛깔‧소리‧냄새‧맛‧닿임‧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에 이르기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괴로움‧괴로움의 원인‧괴로움의 없어짐‧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또한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수다원도 없고 수다원의 과위도 없으며, 사다함도 없고 사다함의 과위도 없으며, 아나함도 없고 아나함의 과위도 없으며, 아라한도 없고 아라한의 과위도 없으며, 벽지불도 없고 벽지불의 도(道)도 없으며 부처님도 없고 또한 부처님의 길도 없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문】 사람은 모두가 공 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아서 온갖 법이 없는 줄 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분별하시어 “5중 등의 모든 법은 저마다 공하다.”라고 말씀하셨는가?
【답】 어떤 사람이 비록 공을 익힌다 하더라도 공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에는 오히려 모든 법이 있는 것이다.
마치 자비를 행하는 사람과 같으니, 비록 중생이 없다 하더라도,
“중생은 즐거움을 얻을 것이요 스스로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의 성품은 항상 스스로가 공하니, 공삼매(空三昧) 때문에 법이 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라.
마치 물의 찬 성질을 불이 뜨겁게 하는 것처럼, 만일 공삼매로써 법을 공하게 한다고 한다면 이런 일은 옳지 않다.”라고 하셨다.
지혜[智]라 함은 바로 무루(無漏)의 8지(智)이며, 얻음[得]이라 함은 처음의 성인의 도[聖道]가 되는 수다원의 과위를 얻고 나아가 부처님의 도를 얻는다는 것이니, 이 이치들은 먼저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경】 “사리불아,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으며,
단(檀)바라밀ㆍ시(尸)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과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느니라.
또한 물질[色]과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도 보지 않고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과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도 보지 않으며,
눈[眼]으로부터 뜻[意]에 이르기까지와 빛깔[色]로부터 법(法)에 이르기까지와,
눈ㆍ빛깔ㆍ안식계(眼識界)로부터 뜻ㆍ법ㆍ의식계(意識界)에 이르기까지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도 보지 않으며,
4념처(念處)로부터 8성도분(聖道分)에 이르기까지와 부처님의 10력(力)에서부터 일체종지(一切種智)에 이르기까지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과 상응함을 알아야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어서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면 곧 반야바라밀에 있어서 일정한 모양과 상응함과 상응하지 않음을 보지 않는데 하물며 그 밖의 다른 법이 있겠는가?
어떻게 반야와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는가?
이와 같이 행하면 반야바라밀과는 상응한다 함도 보지 않고 이와 같이 행하지 않으면 반야바라밀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함도 보지 않는 것이다.
마치 “항상하고[常], 즐겁고[樂], 나[我] 있다.”라고 행하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지 않고,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나 없다[無我]”라고 행하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과 같다.
만일 “실답다[實]”라고 행하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지 않고,
만일 “공(空)하다.”라고 행하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게 된다.
마치 “있다, 없다[有無]”라고 행하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지 않고,
마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행하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는 것과 같으나,
반야바라밀 가운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결국에는 청정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의 바라밀과 5중 내지는 일체종지까지도 역시 그러하다.
【문】 반야바라밀은 마침내 청정한지라 마땅히 그러해야 하겠지만 다섯 가지 바라밀과 그 밖의 법이야 어떻게 청정하겠는가?
【답】 먼저 “다섯 가지 일이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바라밀이라 하지 못하며 반야바라밀과 화합한 까닭에 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라고 설명했다.
『반야바라밀』의 「초품(初品)」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어떤 것을 단(檀)바라밀이라 하는가? 보시하는 이[施者]도 보지 않고 받는 이[受者]도 보지 않으며 재물(財物)도 없기 때문이다. 5중(衆)의 법은 바로 보살이 관(觀)하는 곳이다.
반야바라밀과 화합하는 까닭이니, 마침내 청정한 까닭에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는다. 12입(入)과 18계(界)와 12인연(因緣)도 역시 그와 같다.
이 모든 법에는 정해진 성품이 없고 일정한 법이 없다. 이 때문에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으며, 18공(空)과 4념처(念處)에서 대자대비(大慈大悲)와 일체종지(一切種智)에 이르기까지도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는다.
【문】 이 보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이 아닌데 어떻게 37품(品)이 있는가? 아직 부처님의 도를 얻지 못했는데 어떻게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가 있는가?
【답】 이 보살이 비록 성문이나 벽지불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을 관하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로써 중생을 제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를 행하면서도 단지 증득(證得)만을 취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하나니,
마치 후품(後品) 중의 설명과 같다.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에 들어가면 보살은 이 세 가지 해탈문(解脫門)에 머무르면서 생각하기를,
“지금은 바로 관(觀)하는 때이지 증득할 때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혹 새로 뜻을 낸 어떤 보살은 성문과 벽지불에게 37품(品)의 법이 있음을 듣고는 읽고 외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분별하나니, 이 때문에 보살에게는 37품이 있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10력 등도 역시 그와 같다.。
보살은 스스로 보살의 10력과 4무소외와 18불공법 가운데 머무르나니, 이 법 가운데 머무르며 듣고 생각하고 분별하기를,
“부처님의 10력과 4무외소와 18불공법 등은 심히 깊고 미묘하며 또한 이것은 나의 몫[分]이다.”라고 한다.
또 이 보살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 등을 닦아 익혔고 부처나무[佛樹] 아래 앉았을 때에 무애해탈(無礙解脫)을 얻었기 때문에 더욱더 청정하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공훈을 세운 연후에 그 상(賞)을 받게 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런 공덕이 있었기에 그런 이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런 공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의 세력이 합해진 까닭에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는다 함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법의 이치는 6바라밀로부터 일체지(一切智)에 이르기까지 먼저 이미 설명했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공과 공이 합하지 않고, 무상(無相)과 무상이 합하지 않으며, 무작(無作)과 무작이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공ㆍ무상ㆍ무작에는 합함과 합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문】 한마음 가운데는 두 개의 공이 없는데 어찌하여 공과 공이 합하지 않는다고 하시는가?
【답】 공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공삼매(空三昧)요, 둘째는 법공(法空)이다.
공삼매는 법공과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만일 공삼매의 힘으로써 법공과 합한다면 이 법은 자성이 공한 것[自性空]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공이라 함은 성품이 저절로 공한 것으로 인연(因緣)에서 생기지 않는다.
만일 인연에서 생긴다면 성품이 공하다고 하지 못하나니, 수행하는 이가 만일 들어갈 때에는 공을 보고 나올 때에는 공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허망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공 가운데에는 합함도 없고 합하지 않음도 없으며 무상과 무작 역시 그와 같으니라.
사리불아, 보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라고 하신다.
【문】 단지 한 곳에서만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음을 보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셔도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갖가지로 상응함과 상응하지 않는 인연을 말씀하셨는가?
만일 한 곳에서 상응한다면 나머지도 모두 상응할 것이고, 만일 한 곳에서 상응하지 않는다면 나머지도 역시 상응하지 않을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한 사람의 소경이 볼 수 없다 하면 천 사람의 소경도 다 같이 그런 것과 같다.
【답】 그렇지 않다.
만일 희론으로써 이기기를 바란다면 이러한 힐난이 있을 수 있다. 모든 법의 모양은 비록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대자대비로써 갖가지의 방편으로 말씀하신다.
또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심에 일부 중생은 도를 얻게 되지만, 아직 깨치지 못한 이를 위해 거듭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한 번 말씀하시어 견제(見諦)에서의 번뇌[結使]를 끊게 하시고, 두 번 말씀하시어 사유(思惟)에서의 번뇌를 끊게 하시며, 다시금 말씀하시어 모든 남아 있는 번뇌를 따로 따로 모두 다 끊게 하셨다.
또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어떤 사람은 성문의 도를 얻게도 되고,
또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벽지불의 도의 인연을 심게 되며,
다시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고,
다시 더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6바라밀을 행하며,
다시 더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방편을 행하여 무생인(無生忍)을 얻고,
다시 더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초주(初住)의 지위에 머무르며,
다시 더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10주(住)의 지위까지 이르게 된다.
한 번 말씀하심은 사람을 위해서이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심은 하늘을 위해서이다.
또 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심히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지라,
부처님은 중생의 마음과 근기에 영리함과 둔함이 있음을 아셔서 근기가 둔하여 지혜가 적은 이면 그에게는 거듭하여 말씀해 주시며,
만일 근기가 영리한 이면 한 번의 말씀이나 두 번의 말씀으로도 이내 깨치므로 갖가지를 거듭하여 말씀하실 필요조차 없다.
마치 빨리 달리는 좋은 말은 한 번 채찍을 내리쳐도 이내 달리지만 느린 말은 여러 번 채찍을 맞은 뒤에야 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경 가운데에서 거듭 말씀하신다 해도 허물은 없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법의 자상공(自相空)에 들어가느니라.
들어간 뒤에는 물질과 합하려 하지 않고 합하지 않으려 하지도 않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과 합하려 하지 않고 합하지 않으려 하지도 않느니라.
물질은 전제(前際)와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전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물질은 후제(後際)와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후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물질은 현재(現在)와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현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역시 그러하니라.”
【논】 해석한다.
먼저는 “공하고 모양[相]이 없고 조작[作]이 없고 합(合)함도 없고 합하지 않음도 없다.” 함을 말씀하셨고,
이제는 다시 인연을 말씀하신다.
자상공에 들기 때문에 5중(衆)과 합하려 하지 않고 합하지 않으려 하지도 않으니, 만일 온갖 법의 자상(自相)이 공하다면 그 가운데는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
합한다 함은 모든 법이 그 모양대로인 것이다.
마치 땅은 단단한 모양이요 의식[識]은 아는 모양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자상이 다른 법에 있지 않으니, 이것을 합한다고 한다.
합하지 않는다 함은 자상이 제 법 가운데에 있지 않는 것이니, 요약하여 말하면 모든 법의 모양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다.
물질은 전제(前際)와 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제는 공하여 아무것도 없고 단지 이름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물질이 과거에 들면 소멸되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전제와 합하겠는가?
후제(後際)는 아직 있지도 않고 아직 생기지도 않았으므로 물질은 후제와도 합하지 않아야 하며,
현재의 물질은 나고 없어져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모양을 취할 수도 없으므로 물질은 현재와도 합하지 않아야 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셨다.
“물질은 전제와 합하지도 않고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전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물질은 후제와 합하지도 않고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후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물질은 현재와 합하지도 않고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현재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전제는 후제와 합하지 않고 후제는 전제와 합하지 않으며,
현재는 전제ㆍ후제와도 합하지 않고 전제ㆍ후제도 역시 현재와 합하지 않나니, 3제(際)의 이름이 공한 까닭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문】 어떻게 하는 것이 전제와 후제가 합하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세(世)의 모든 법은 모두가 존재한다. 미래의 법이 바뀌어져서 현재가 되고 현재가 바뀌어져서 과거가 된다.
마치 진흙덩이가 현재라면 병은 미래가 되고 흙은 과거가 되는 것과 같다.
만일 병으로 만들어졌을 때는 병은 현재가 되고 진흙덩이는 과거가 되며 병이 깨지는 일은 미래가 된다. 이와 같다면 이것이 합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만일 3세(世)의 모양이 있다 하면 이런 일은 옳지 못하나니, 허물이 많기 때문에 이것은 합하지 않는 것이다.
또 3세(世)가 합한다면 마치 과거의 법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세상의 인(因)이 되어 주고,
현재의 법은 현재와 미래세상의 인이 되어 주며,
미래의 법은 미래의 세상의 인이 되어 주는 것과 같다.
또 과거의 마음[心]과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은 3세(世)의 법을 반연하고, 미래와 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도 역시 그와 같다.
끊는[斷]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은 끊지 않는 법을 능히 반연하고,
끊지 않는[不斷]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은 끊을 수 있는 법을 능히 반연하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3세(世)의 모든 법의 인연과 과보는 함께 서로가 화합하는데, 이것을 합한다 한다.
보살은 이러한 합함을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치 먼저 말씀하심과 같아서 과거는 이미 소멸했는데 어떻게 인(因)이 될 수 있고 연(緣)이 될 수 있겠는가?
미래는 아직 있지 못하니 어떻게 인연이 되겠는가?
이것이 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이다.
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3세와 이름조차도 공하거늘 어떻게 합한다고 말하겠느냐?”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