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땅 중동(中東/Middle East)<2>
2. 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
기원전(BC) 5세기경에 벌어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은 30여 년간이나 계속되는데, 신화의 나라 그리스와 다리우스(Darius) 황제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마라톤(Marathon) 전쟁’, ‘사라미스(Salamis) 해전’은 역사에 길이 남는 인류의 비극이다.
마라톤 전쟁의 승리를 전하려 마라톤 벌판에서 달려온 병사는 ‘우리가 승리했습니다.’하고 말한 뒤 쓰러져 숨을 거둔다. 그 병사가 달려온 거리를 측정해보았더니 42.195km로 오늘날의 마라톤 구간이다.
그런데 이것은 꾸며진 이야기이고 실제로 전령(傳令)이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려고 달려온 거리가 42.195km로 오늘날의 마라톤 거리라는 기록도 있다.
3. 중동지방 약사(略史)
<1> 세계 4대 문명발상지(文明發祥地) 중동(中東)
세계 4대 문명발상지(文明發祥地)로 꼽히는 곳은 ①나일(Nile)강 유역의 이집트(Egypt) 문명 ②이곳 티그리스·유프라테스(Tigris-Euphrates)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 ③중국의 황하·양쯔강 유역의 황하(黃河) 문명 ④인도 인더스(Indus)강 유역의 인더스(Indus) 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이다.
다시 말하면 이곳 중동지역은 까마득한 옛날, 인류 초기의 문명이 일어났던 곳인 셈이다.
기원전 35세기, 최초로 국가의 형태를 갖춘 나라가 수메르(Sumer), 뒤이어 바빌로니아(Babylonia)-아시리아(Assyria)-신바빌로니아(新 Babylonia)로 이어지다가 뒤이어 페르시아(Persia) 제국이 들어서게 된다.
까마득한 기원전 이야기지만 이들은 굉장히 발달한 문명을 이룩하였고 쐐기(설형)문자 등 문자(文字)를 창안하여 남긴 기록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물유적도 수없이 많이 발견되어 보존되고 있다.
<2> 중동지방의 석유(石油)산업
이곳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토질(土質) 비옥(肥沃)하여 농업이 일찍 발달하였으며 살기가 좋은 지역도 많았지만, 아라비아반도 대부분 지역이 사막화되면서 대부분 유목 생활을 하거나 부근 지역을 떠돌며 물건을 사고파는 캐러밴(Caravan) 활동 등, 열악(劣惡)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캐러밴(Caravan)은 낙타에 자질구레한 생활용품을 싣고 사막을 가로질러 다니는 장사치들이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영국인이 이곳 사막 지역에서 석유를 발견하면서 얼마 후부터 갑자기 중동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이곳의 석유를 두고 영국, 미국 등 세계의 강국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1960년 들어 이곳 산유국(産油國)들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결성하여 뭉치고 가장 큰 대국(大國)인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가 이끌면서 차츰 경제권을 거머쥐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에도 중동 붐이 일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박정희 정권 시절로, 정주영을 앞세워 중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산업역군들이 수없이 많이 중동으로 가서 돈을 벌어들였는데 주로 사우디아라비아였고, 내 친구들도 많이 다녀왔다.
4. 중동지역의 고대(古代)문명
메소포타미아 지방(중동) 지도 / 쐐기문자 / 사람 머리 사자상
<1>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문명
BC 4000년경, 서남아시아의 티그리스(Tigris)강과 유프라테스(Euphrates)강 유역인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남부에 정착한 수메르(Sumer)인들은 인구 7~8만 명이 거주하는 우르크(Uruk)라는 도시를 세웠다.
그 밖에도 우르(Ur), 키시(Kish), 니푸르(Nippur) 등도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다고 한다.
수메르인은 BC 2000년경에 바빌로니아(Babylonia) 왕국을 세웠고 수도는 바빌론(Babylon)이었다.
그리고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유명한 바벨탑(Tower of Babel)이 있었는데 바벨(Babel)은 ‘신의 문(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도시 가운데에는 지구라트(Ziggurat:피라미드)라는 신전(神殿)을 세우고 굉장히 발달한 문명을 이루었으며, 그림 문자를 개량한 쐐기문자로 창세(創世) 신화, 홍수, 전설 등을 기록했다.
숫자는 60진법을 사용했고 태음력(太陰曆)이 사용되었으며 점성술(占星術)과 수학 등도 발달했다.
BC 1800년경, 바빌로니아의 국왕 함무라비(Hammurabi)는 법을 만들고 돌에 새겨 공포했는데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전하는데 이것이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으로, 이 법전(法典)은 282조, 8천 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2.25m의 돌기둥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한다.
기록된 문자는 그림 문자보다 한 단계 발전한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쐐기문자는 점토판에 끝이 구부러진 뾰족한 첨필(尖筆)로 꾹꾹 눌러 기록하여 말린 것으로, 수많은 점토판으로 만들어 기록을 보관했다. 삐죽삐죽한 글자 모양이 틈새에 끼워 박아 넣는 쐐기를 닮아서 쐐기문자(楔形<설형>文字)라 불렸다. (楔:문설주 설, 쐐기 설)
<2> 이집트 나일(Nile) 문명
나일(Nile) 문명은 BC 3200년경, 아프리카 나일(Nile)강 유역에 발달했던 고대문명으로, 32개 왕조(王朝)가 이어져 왔는데 이름이 알려진 파라오(Pharaoh:임금)만도 200명 정도이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들도 수없이 많아 파라오(王)들이 3천여 년간 왕권을 이어 내려왔을 것이라고 한다. 이집트는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로도 보지만 위치상 중동지역에 포함된다.
이집트의 중심부를 흐르는 나일강은 매년 범람해 상류의 흙을 날라다 하류에 퇴적하여 농경에 적합한 비옥한 땅이 형성되어 고대 인류가 일찍부터 정착해 살았다. 이들은 농업과 관개(灌漑)기술이 발달했고 태양력을 사용했으며, 토지측량술, 기하학, 의학 등 실용학문이 크게 발달했다.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 아부심벨 신전 / 신전의 벽화
이집트인들은 왕(파라오)을 태양신 라(Ra)의 아들인 살아 있는 최고의 신으로 믿었으며, 사후 세계와 영혼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내세(來世)를 위하여 시신을 미라(Mummy)로 만들어 영원토록 보관했다.
관(棺) 속에는 ‘사자의 서(死者의 書)’를 함께 넣었는데 그 내용은 죽은 사람을 내세를 보호하는 주문(呪文)과 영생을 기원하는 글, 신에 대한 찬가(讚歌)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나일강 상류 테베(Thebe)의 룩소르(Luxor) 신전과 카르나크(Karnak) 신전, 수많은 왕족 무덤이 발굴된 왕가(王家)의 골짜기, 아스완(Aswan)댐 건설로 수몰될 뻔했던 아부심벨(Abu Simbel) 신전 등 이집트에는 유명한 고대 유적들이 널려있다. 이집트 최대 신전인 카르나크 신전의 대 열주실(列柱室)은 가로 100m, 세로 53m의 거대한 방으로, 23m 높이의 석주(石柱)가 134개가 늘어서 있다.
룩소르 신전 / 카르나크 신전 / 로제타석(영국 대영박물관 보관)
현재 이집트의 기자(Giza)에 있는 쿠푸(Khufu)왕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3대 피라미드도 유명하며 가장 큰데 밑변 평균 길이 230.4m, 높이가 147m나 된다고 한다.
두 번째 카프레(Khafre)왕 피라미드는 밑변길이 216m, 높이 143m이고 남쪽 끝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멘카우레(Menkaure)왕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높이 66m이다.
그 밖에 신전 입구에 세워진 하늘을 찌르는 첨탑인 오벨리스크(Obelisk), 수많은 신전과 무덤 등 수많은 유적(遺蹟)이 있고, 신전의 벽면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벽화들도 엄청나게 많고 신비롭다.
고대 이집트 문자에는 비석이나 무덤에 새긴 신성(神聖) 문자와 파피루스(Papyrus:종이)에 쓴 민중(民衆) 문자가 있었으며 왕을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을 돌에 새겨 넣은 로제타석(Rosetta Stone)도 발견되었다. 이 로제타석에 씌어있는 글자는 같은 내용을 상형(象形)문자, 민용(民用) 문자, 그리스 알파벳의 3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어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결정적 열쇠가 되었던 유물이다. 상형문자(象形文字)는 기호화된 문자가 나오기 전의 그림 문자를 말한다.
이 로제타석은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는 것을 보고 왔다.
<위 로제타석은 내가 런던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3> 튀르키예 차탈회위크 (Çatalhöyük) 문명
고대 차탈회위크 주거지역 / 벽화(채색화) / 조소(토용/土俑)
BC 7500년~BC 5700년경, 튀르키예 중앙 아나톨리아(Anatolia) 지역에 번성하였던 고대문명이다.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James Mellaart)가 1961~1965년에 걸쳐 발굴하였는데 신석기 시대 문화의 중심지로 밝혀졌다고 한다.
점토판(설형문자) / 히타이트 유적 / 히타이트 벽면 조형
이집트 기마(騎馬) 전차 / 카데슈 전투(이집트 벽화) / 람세스 2세 조상(彫像)
BC 1800년,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Anatolia) 평원 중북부(中北部)에 번성하였던 고대왕국 히타이트(Hittite)는 보가즈쾨이(Bogazköy)라는 튀르키예의 작은 마을에서 유적이 발굴되었고, 1만여 점의 점토판(粘土板)이 출토되었는데 히타이트의 실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점토판의 기록에 의하면, 히타이트(Hittite)는 이집트 람세스 2세(Ramses II)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카데슈(Kadesh)라는 지역을 차지하고자 전쟁을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승부를 내지 못한 두 나라는 BC 1258년 조약을 맺고 점토판에 그 내용을 새겼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국제조약(國際條約)이라고 한다.
히타이트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은이나 구리와 납 등을 캐내어 주변 국가와 교역을 했다고 하며, 또한 역사상 최초로 법률 체계를 갖춘 법치 국가였다고 한다. 히타이트는 태양신을 중심으로,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숭배했다고 한다.
쐐기문자는 일명 설형문자(楔形文字)라고도 하는데 설(楔)은 ‘문설주 설’로, 진흙을 말랑말랑하게 만든 후 끝이 뾰족한 첨필(尖筆)로 꾹꾹 눌러서 말린 글자인데 글자 모양이 각이 져서 쐐기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글자 이름이다. 이 설형문자는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BC 1세기까지 중동지방에서 사용되던 문자로, 지금도 설형문자로 기록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