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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63
중국의 상하이(上海)
* 중국의 국제도시
이번 여행은 중국의 남부지방 상하이와 소주, 항주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김포공항 국제선 제1 청사에 모여서 여행안내를 받고 비행기에 오른 것은 2001. 1. 19.(금) 11시였다. 비행기는 13시 40분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중국과의 시차가 1시간인 것을 감안하면 2시간이 채 안되었던 것이다.
상하이는 양자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강소성과 절강성을 경계로 하고 동쪽으로는 동해에 인접해 있다. 인구는 1400만. 인종은 한족, 회족, 만족 등이다. 상하이는 원래는 작은 어촌이었던 곳인데 20세기에 와서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대중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상하이는 뉴욕과 런던 다음의 순위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금융 중심지로서 극동의 가장 큰 상업도시가 되었다. 1949년 공산국가가 된 이후로 한 때 쇠퇴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지금에 이르러는 중국 경제 성장을 이끌어가고 있는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상하이(上海)”는 한자의 뜻이 “위에”, “꼭대기”라는 의미와 “바다”라는 뜻의 합성어다. 말하자면 “바다 보다 더 높은”이라는 뜻이다. 상하이는 “동쪽의 파리", "동양의 여왕" 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이곳은 충적평야로서 평균 해발 고도는 4미터 정도이고, 지세가 평탄하고, 산맥이 적으며 지대가 낮다. 상하이 시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곳은 항저우 만에 있는 다진 산(大金山)으로 그 고도는 103미터이다.
상하이의 강과 항구는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고 황포강과 그 지류인 오송강이 주요 역할을 한다. 황포강과 오송강은 모두 태호에서 발원하여 상하이에서 한 곳으로 모이며 오송강 입구에서 양자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황포강은 물이 풍부하고 물의 흐름이 일정하여 관개 등 수리에 적격이다. 오송강은 소주하(蘇州河)라 불리기도 하며 소주와 상하이간의 중요한 수로이다. 양자강은 황포강으로 흘러들어간 뒤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육지에는 북경과 상하이, 상하이와 항주 등 철도가 남북으로 연결되고 거미줄 같은 도로망은 성과 진, 농촌 등으로 연결된다. 항공 또한 북경, 광주, 성도, 난주, 우루무치 등 중국 전역으로 연결되고 국제선 또한 세계 각국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만큼 상하이는 교통의 요지로서 중국을 대표하는 대도시다.
그러나 상하이가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런 대도시로서의 면모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고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의 요인들을 암살한 곳으로서 우리의 민족정기를 떨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지식인들이 이곳으로 망명하여 독립의 그날만을 기다리며 청춘을 보낸 곳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이 방문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된다고 하겠다.
*노신공원(魯迅公園)과 상하이 임시정부청사(臨時政府廳舍)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노신공원이다. 이곳의 옛 이름은 홍구공원(虹口公園)이다. 공원 안에는 ‘노신의 묘’와 기념관이 있다. 노신(1881~1936)은 중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의학을 배우다가 중국인의 정신적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문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대표작으로는 <아Q정전>, <광인일기>등이 있다.
이 곳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윤봉길의사의 뜻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자와 의거 현장비가 세워져 있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 :1908-1932)은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큰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1세 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3·1운동 후 일본식 교육을 받기 싫어 중퇴하였다. 19세 때 길에서 글을 몰라 아버지의 무덤을 못 찾는 무식한 청년을 보고, 자기 집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어 농민들을 가르쳤다. 22세 때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고 근면과 협동을 강조하였다. 그러다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김구의 특명을 받아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하여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등을 죽이고 노무라등 많은 일본군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개석은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오사카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노신공원은 특별할 것이 없는 보통의 공원이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우리민족에게는 특별한 곳이 되었다. 한국의 관광객들은 상하이에 오면 으레 이 공원에 들르게 된다. 이런 필수코스의 또 하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다. 우리는 노신 공원을 둘러 본 다음에 곧장 허름한 골목길에 자리 잡고 있는 임시정부청사 유적을 찾았다.
임시정부청사는 상해의 어느 한 건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며, 초기에는 부처마다 여러 개의 청사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임시정부 청사가 사용했던 건물들 대부분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임시 정부 청사로 알고 찾아가는 곳은 마당로에 있는 3층짜리 벽돌집으로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한 곳이다. 1층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단체로 촬영한 사진이 걸려있고, 2층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외에 특별한 것은 별로 없다.
이 건물은 전에 중국인이 살고 있었지만 한국 정부가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그들을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했고 현재는 한국 관광객을 위하여 항시 개방되어 있다. 관람을 하고자하는 사람은 골목 입구에 있는 안내사무실에서 접수를 하고 비디오를 상영한 뒤에 안내를 받아 관람하게 된다. 청사안과 밖에 기념품 판매소와 성금함이 마련되어 있으며 청사를 보존 관리하는데 쓰여진다고 한다.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골목길은 매우 어수선하다. 2, 3층의 낡은 건물 사이로 작은 물도랑이 흐르고 있는데 이 물도랑에 오물을 그냥 투척해서 똥물 그대로다. 창가에는 빨래가 아무렇게 널려서 도시 미관을 해쳤다. 습기가 많은 지역이어서 방안에서는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빨래의 내용물을 통해서 남루한 중국인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화장실을 따로 만들지 않고 임시로 변기에다 방뇨한 것을 골목길 물도랑에 그냥 투척한다고 한다. 그것이 중국인들의 오랜 관습이다. 그리하여 골목길의 물도랑은 일종의 수로로서 물건을 판매하는 배들이 다닐 정도로 수량도 상당하지만 물고기가 전혀 살 수 없는 하수구로 변해 있었다. 상하이는 큰 빌딩이 늘어선 대도시이지만 그 이면 뒷골목은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와이탄(外灘)과 황포강(黃浦江), 그리고 볼거리
관광객들은 저녁식사 후에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가인 와이탄(外灘) 지구로 나갔다. 남경동로를 따라 황포강으로 걸어가면 와이탄이 나온다. 와이탄은 황포강 제방과 중산동로 사이에 있는 상하이 시민의 휴식처이다. 동쪽으로는 황포강에 면해 있고, 서쪽으로는 상하이 시 인민정부 청사를 비롯한 대형빌딩들이 늘어서 있다. 상하이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와이탄은 과거 100여 년 동안 상하이의 역사를 보여주는 축도이다. 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 상하이가 개방된 이후 와이탄 일대는 ‘외국의 조계(租界)’가 되었다. 즉 영토가 임시로 외국인의 통치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843년 11월 영국 초대 영사 발포어가 와이탄에 상륙했다. 그는 1845년 ‘외국인 거류지’ 라는 뜻으로 번역어인 ‘조계(租界)’를 처음 설치했다. 이렇게 외국의 권력에 놓였던 상하이 조계는 1943년이 되서야 중국에 반환되었다. 그러니 그 이전까지 상하이 조계는 ‘나라 속의 나라’로서 치외법권적 위치에 있었다. 이곳에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소련 등 열강의 각종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이미 오늘날과 같은 고층 빌딩가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서양의 여러 나라 건축양식이 밀집되어 있는 양상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별한 모습이기도 하다.
와이탄을 가로지르는 황포강은 양자강의 한 지류다. 우리가 주권을 잃은 시절 우리의 망명객들이 이 강을 바라보며 조국을 생각했던 곳이기도 하다. 바다처럼 넓은 강의 양안으로 건물이 세워져 있고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우리의 망명객들이 이곳에서 나라 잃은 회포를 달래었던 것이다.
황포강은 상하이를 푸동(浦東)과 푸시(浦西)로 나눈다. 상하이를 관통하는 황포(黃浦)강 동쪽에는 푸둥(浦東)의 마천루가 숲을 이루고, 서쪽 와이탄(外灘)에는 서양식 건물들이 ‘만국 건축 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황포강과 오송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황포공원(黃浦公園)이 조성되어 있다. 이 공원은 1886년에 조성되었으며 상하이 최초의 유럽식 화원이기도 하다. 옛 조계시대에는 공원입구에 '개와 중국인은 들어갈 수 없음(華人與狗不得入內)'이라는 모욕적인 간판이 걸리기도 했던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공원 옆에는 황포강 유람선을 탈 수 있는 부두가 있는데, 왕복 60km, 약 6시간 걸린다. 그 밖에도 여러 볼거리가 있다.
0세기공원(世記公園): 세기공원은 상해에서 가장 크면서 자연의 모습이 살아있는 생태공원이다. 동서양 문화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융합 속에 현대적 특색을 잘 살린 중국의 전통적 정원풍격이 잘 드러나 있다.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와 삼림, 호수 사이로 조류보호 구역, 과학체험시설, 놀이공원, 대형조각, 낚시터 등의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0예원(豫園): 1559년 명나라 때 착공하여, 18년 만에 완공한 정원이다. 명나라의 관료였던 반윤단이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예원이라는 이름은 '유열노친(愉悅老親=부모를 기쁘게 한다.)'의 '유'자와 '예'자의 뜻이 같은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정원 안에는 40여 개의 정자와 누각이 있으며, 그 중 예원 입구에 있는 호심정(湖心停)은 가장 유명하여 항상 관광객으로 붐빈다.
0동방명주(東方明珠): 동방명주탑은 방송탑으로 1991년 7월 30일 착공, 1994년 10월 1일에 완성했다. 탑 높이는 468m로 동양에서 제일 높고, 세계에서 세 번째다. 와이탄과 마주보고 있는 이 탑은 3개의 주축기둥과 좌하구체, 상구체, 태공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방명주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단지 10초 만에 263m 높이의 상부 원형 구조물에 다다를 수가 있다. 이 곳에서는 상하이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0옥불사(玉佛寺): 이곳은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선종의 명찰이다. 이 절간 옥불루(玉佛樓) 안의 불상 가운데 좌불(坐佛)과 와불(臥佛)이 유명한데, 좌불은 높이 19m, 폭 134cm이며, 와불의 길이는 96cm이다. 둘 다 옥으로 만들어진 옥불(玉佛)인데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옥불 이외에도 화려하게 채색된 사천왕상, 금색의 삼존대불이라든지 미륵보살, 명나라 시대의 관음보살목살 등이 유명하다.
*발전하는 상하이의 거리 풍경
상하이는 오랜 전통의 도시라기보다 세계열강의 중국 침략에서 파생된 것이어서 거리의 이름도 새롭게 지어져서 예컨대 북경로, 남경로 하는 식으로 여러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경우가 많다. 각 거리마다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기 때문에 상하이 관광은 이런 특색 있는 거리들을 둘러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0운남로(云南路): 상하이 사람들이 음식점을 가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운남거리(云南路)이다. 장안교자루(長安餃子樓), 금릉주가(金陵酒家), 삼화루채관(三化樓菜館)등의 음식점이 유명하다. 운남로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음식은 북경 카오야로 불리는 오리구이를 비롯해서 갈비떡, 닭요리, 중국식 샤브샤브 등이다. 노점상들이 팔고 있는 양꼬치 구이도 유명하다.
0황하로(黃河路): 남경로에서 안쪽으로 돌면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는 거리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황하로이다. 남경로에서 쇼핑하고 이곳에 와서 중국의 음식세계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0사포로(乍浦路): 홍구(虹口)의 유명한 미식거리로, 사천북로(四川北路)같은 상업중심 거리와 이웃하고 있다. 이곳은 각 지역의 특색 있는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주로 상류층의 연회나 모임장소로 많이 이용되는 곳이다.
0남경로(南京路): 남경로는 중국인들에게 쇼핑의 천국으로 여겨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상해제일백화점, 신세계상가, 화련상가, 제일식품상점, 상해패션회사 등의 유명 상점들이 있다. 그리고 외국의 체인호텔을 비롯하여 중국계의 화평호텔, 금문호텔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상점에는 금가게, 실크상점, 시계점, 남방특산물 상점, 안경점, 극장, 도자기상점, 구두상점 등 각종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각양각색의 상점과 레스토랑, 호텔이 위치한 이곳은 주말이면 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0회해로(淮海路): 남경로와 같은 쇼핑거리이면서 풍미, 품격, 유행의 거리로 알려져 있다. 회해로는 크게 동(東), 중(中),서(西)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각기 다른 분위기와 특색을 가지고 있다. 동(東)구역은 고급 상무지대로 홍콩광장, 상해광장 등 고급 사무실 등 비즈니스 빌딩들이 있다. 중(中)구역은 고급 상업지대로 거리 양편으로 멋진 인테리어의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백화점에서는 고가의 최신유행상품과 명품들을 판매한다. 서(西)구역에는 고급주택지대와 유행 쇼핑지대다. 여성 전문 패션상품과 의류, 장신구 등의 시장이 있다.
0복우로(福佑路): 관광기념용품 상점과 크고 작은 노점상들이 밀집되어 있다. 상가들이 특화되어 있는데 소,토,특,다(小土特多)로 명명하여 "소(小)"에는 일상 잡화들의 천국, 만여 종의 전통적인 일상용품들이 모여 있다. "토(土)"는 상하이의 토산품들은 이곳에서 모두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전역의 토산품들도 구할 수 있다. "특(特)"은 특색있는 상점들이 많이 모여 있다. 지팡이 가게나 병마개 상점, 젓가락 상점, 어구 상점, 우산 상점 등 독특하면서 전문적인 상점들을 볼 수 있다), "다(多)"에는 품종과 규격 등이 매우 다양하다. 이런 식의 특화를 통하여 중국인들 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0사천북로(四川北路): 상하이가 개항된 후 가장 일찍 조성된 몇 개의 거리 중 하나이다. 현대적인 "일반대중들을 위한 상업 거리"로 고품질의 상품들을 중저가의 가격으로 쇼핑할 수 있으며, 유명 브랜드 상품들이 많아 이곳을 찾는 상하이 시민들과 중국 국내외 여행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평균 1일 방문객 수가 9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개벽천지의 상하이와 한국임시정부
상하이는 근래에 놀랍게 발전되고 있어서 중국발전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보다 조금 앞서 이곳을 방문한 북한의 김정일이 상하이의 발전상이 ‘천지개벽의 사건’이었다고 평한 말들이 가이드의 입을 통해서 전해졌다. 높은 빌딩과 고가차도, 네온싸인이 명멸하는 상가건물들이 상하이의 발전상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이런 발전은 중국공산당이 그들의 이념을 포기하고 개혁, 개방 정책으로 전환한 것의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정치지도자 등소평은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을 바꾸어 보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좋은 정치다.”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근래에 들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실용주의적인 중국인의 기질과도 잘 맞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확인하고도 김정일의 의식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북한의 빈곤과 경제난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김정일은 그들의 종주국인 중국의 정책만이라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한국과 미국을 겨냥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개량하고 남한 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를 확장하는 등으로 전투력 향상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식량이 없어 굶주리는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채다. 그는 상하이의 놀라운 발전을 거울삼아 자신의 백성들에게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에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하나 더 배워야 할 것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민족의 주권을 찾기 위해 온갖 희생과 헌신을 한 독립투사들의 위대한 뜻을 깨닫는 일이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일의 중요성만큼 분단된 민족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일도 참으로 중요하다.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무력 일변도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가 상하이에 와서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다. 그리고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실현하는데 기여하는 일이다. 그가 상하이 방문에서 도시발전에 경탄하면서도 독립투사들에 대해 간과한 점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6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9월 6일에는 노령정부와 통합하고 제1차 개헌을 거쳐 대통령중심제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26년 9월 임시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하였으며, 이후 의원내각제가 정부형태의 주류를 이루었다.
망명정부의 독립활동은 참으로 곤고했다. 그리하여 청사를 계속 옮겨 다니며 명맥을 유지했는데 그 과정을 보면 상하이(1919)·항저우(1932)·전장(1935)·창사(1937)·광저우(1938)·류저우(1938)·치장(1939)·충칭(1940) 등지로 청사를 옮겨야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이했지만 미소 점령군은 우리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로 임정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민족의 분단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비극이 오늘의 분단을 가져온 것이다. 비록 상하이 임시정부청사가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경을 헤치고 독립의 그날까지 버티어준 선조들의 위대함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한 개인의 생명은 고귀하다. 그리고 한 민족의 생존은 개인 생명의 총화다. 그런 점에서 민족과 국가, 조국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독립투사들의 희생은 개인을 버리고 민족을 선택한 것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희생 위에 민족 전체를 살리고자 하는 고귀한 뜻을 실천한 것이다. 상하이 관광에서 나는 개인을 버리고 민족을 선택한 독립투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되새기며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더불어 그분들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의 한국은 그런 분들의 염원을 실현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