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스님의 금강경 강설 - 64
수월,혜월 스님의 무심도행
부산 혜월노장(慧月老丈)님은 견성한 스님입니다.
한번은 절에서 산꼭대기 절 근방에 논을 몇 마지기 일구어 놓고 농사를 지었는데
산돼지가 벼를 전부 뜯어 먹어도 놓아 두므로 한 수좌가 노장님 보고
『저 산돼지 좀 지키십시오.』『그러지.』이렇게 대답하고는 옆에 가만히 서서
돼지가 오면 돼지 잘 먹으라고 숨도 크게 안 쉬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노장님이 왔다갔다해도 돼지가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스님들이 와서
『노스님 돈을 얼마나 들여 해놓은 농사인데 돼지가 다 먹으면 어쩌라고 그럽니까.』
『우리는 이 벼가 아니라도 먹을 게 있지 않은가.
돼지란 놈은 농사를 짓나 장사를 하나 천생 좀 먹어야 할게 아니냐.』
그런 식으로 나옵니다.
또 마당에 벼를 널어 놓고 새가 오면 그것좀 쫓아 달라고 하면
『그리하지.』하고 서 있는데 노장님 앞으로 새가 몰려와 줏어 먹고 있습니다.
그거 먹으면 안 된다고 손을 내저어 쫓으면 저쪽으로 가서 줏어 먹고
그리 가면 또 이쪽으로 오고 새가 그 노장님을 전혀 겁내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생할 마음으로 해물지심(해물지심)이 없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남을 해칠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것이 나에게 따르는 법입니다.
또 그 노장님이 있던 어느 절 위에 한참 올라가면 암자가 있는데
가는 길에 바위 모퉁이를 지나야만 법당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혹 바위 모퉁이에 시퍼렇게 생긴 살모사한 마리가 움크리고 않아 있다가
부처님께 올리는 마지를 들고 아이들이 올라가면 머리를 딱 쳐들고
짝짝 소리를 내고 씩식거리며 혀를 내두르고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게 되면
아이들이 『노스님 저 나쁜 독사 놈좀 쫒아 주십시오.』그럽니다.
『그리하지, 나쁘기는 너희가 나쁘지 독사가 나빠.』하고
이 노장님이 가서 독사를 쓰다듬어 주면서
『너를 나쁘단다. 저희가 나쁜 줄 모르고 그러니 참 뭐가 나쁜지 모르겠다.』
이래 가면서 독사 머리를 들고 있으면 이놈이 죽은 모양으로 흔들지도 않고
축 늘어져서 가만히 있습니다.
저쪽으로 가만히 놓으면 그 쪽에 가만히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평생을 앓지도 않고 솔방울 같은 거나 따 먹고
빗자루 만들어 가지고 가난한 집에 나누어 주고 그런게 일 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지냈는데 일화(逸話)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중국에 누구누구 일본에 어떤 선사라 하지만 우리나라에 참 희한한 얘기가 많습니다.
한 번은 그때 돈으로 이십오원을 들여가지고 산골짜기를 돌 .
나무로 막아 놓고 그 위에 흙을 져다 부어 놓고는 팥을 갈았는데
가을에 팥을 타작해 보니까 반 말 닷 되가 나왔습니다.
옛날 돈으로 이십오원이면 팥을 여러 섬 살 때입니다.
수좌들이 모두들 한 마디씩 합니다.
「아 노스님, 돈 이십오원을 들여 가지고 고생만 하시고
겨우 이것뿐이니 이거 밑지는 장사가 되었습니다.」 「 그러면 멍텅구리 아니냐.
돈 이십오원은 이 세상에 어디에 그대로 있어. 팥만 반말 공짜로 생겼지.」
일평생 사는 게 그런 식으로 삽니다.
저 북간도에 가서 돌아가신 수월(水月)스님이라는 도인(道人)이 있었는데,
내가 젊어서 평생 모시고 도를 배우다 같이 죽으려고
내가 그때 개운사 강원(開運寺講院)에 있다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한 번 갔는데
그 분은 평생 40년 동안 그곳에서만 계십니다.
그 스님이 누구에게나 「나 한테 농사지은 양식이 있으니까 탁발(托鉢)하지 말고
이거 먹고 공부하라」고 늘 이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한테는 나가라고만 하셔서 아마 일부러 시험해 보는 게 아닌가 하고
별 짓을 다 했는데도 나에게는 기어코 나가라고만 하시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진짜로 나가라는 것 같아서 나오기로 작정한 뒤에 동량이나 한 댓새 해서
양식이나 좀 보태드리고 떠나야겠다고 동량을 나섰습니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흑룡강(黑龍江)이 나오고 한국 독립군들의 근거지인데
일본 토벌대들이 비행기를 가지고 가서 만주 사람 한국 사람 무수히 죽인 바로 그 뒤에서
무서운 개를 많이 기르고 그럽니다.
여러 사람들에게「수월스님을 어떻게 아느냐.」 이러니까
나이 많은 노장님 한 사람이 동량이나 해 먹고 사는 분으로 알지 별사람으로 안 본다는 겁니다.
모두들 수월 노장을 이렇게 모른다고 하기에 내가 우리 고국(故國)에서는
굉장한 도인으로 안다고 수월 스님에 대한 얘기를 해 주니까 그때에야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도인인가 보다고 하면서 이 얘기를 합니다.
만주 개는 세퍼드보다 더 무섭습니다.
사람을 잡아 먹을 정도이고 키도 세퍼드보다 더 큰데 그 개한테 내가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수백리 먼길을 가게 되서 길을 묻고 싶어도 개가 나올까봐 일부러 다른 곳으로 피해서
산을 넘어 다니고 그럽니다.
그 곳에 한국 사람이 한 7백호 살고 중국 사람이 한 3백호 사는데
수월노장님의 모습이 참 기이하다는 겁니다.
옷도 다 떨어져서 빨간 것 . 푸른 것 . 흰 것 모두 누덕누덕 기어입고
집신도 상주(喪主)들 신 모양으로 불룩해 가지고
머리에 쓴 것도 이상스럽게 걸레인지 모자인지 모를 정도로 이런 걸 쓰고 오는 걸 보면
그야말로 죽은 개도 기겁을 해 짖게 생겼는데도 그렇게 사나운 개들이
그 노장님 보고는 가만히 엎드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월 스님 보고는 무서운 개가 짖지 않는다 하는 소문이 있다는 겁니다.
이와같이 탐진치(貪嗔痴)의 삼독(三毒)이 뿌리채 딱 떨어지면
호랑이와 함께 있을 수가 있고, 토끼나 노루가
그 사람 앉아 있는 곳에 뛰어들어오고 그러는데 그렇게까지 없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때 나는 나를 보고 자꾸 짖어대는 개를 보고 속으로 참 부끄럽고 고개를 못들었습니다.
명색이 장삼 입고 수도하는 중이라면서 개가 짖도록 되어 놨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 해물지심(害物之心)이 남아 있어서 그럽니다.
지금도 우리가 정화(淨化)한다고 이러지만 교단종풍(敎團宗風)을 바로 잡아서
앞으로 이제 무수한 도인이 나오도록 하느라고 전체를 위해 하는 짓이지마는
한쪽으로는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짓을 기어코 해 놨으니
남 한테는 나쁜 과보(果報)도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시기심(猜忌心)이 있고 해물지심이 있으면 개가 짖습니다.
가령 사냥꾼이 아무리 목욕을 깨끗이 하고 몸에 향수(香水)를 바르고
새옷을 입고 다녀도 개가 틀림 없이 그 사람만 오면 문둥이 오는 것처럼 짖어 댑니다.
견성한 뒤에 보림 수행
도가 높아지면 죽을 때 몸뚱이를 옷 벗듯 벗고 갑니다.
실은 죽는 것도 아니지만 육체가 죽는다고 보고 지게를 지고 가다 지게를 세워 놓듯이 합니다.
그렇게 놓고도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갈 때는 미(迷)해서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있지만 탁한 마음, 곧 색정(色情)이 일어 납니다.
금생의 자기 몸뚱이는 옷 벗듯이 했지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 깜박 미해서 피로 엉켜서 있습니다.
그런데 도가 더 높은 사람은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하지 않고
자기 공부 그대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달 동안 가만히 하는 이도 있고
아홉달 만에 자기 공부하던 걸 나와서 미한 사람도 있고 또 여덟달에 미한 사람,
한달에 미한 사람, 또 열달을 다 선방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으로 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백팔십일 동안 하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속에서 나오느라고 큰 고통을 겪게 되므로 출태(出胎)할 때 제일 미합니다.
그래서 깊고 완전하게 될 때 까지 계속 닦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견성하고 닦는 것을 보임(保任)이라 합니다.
옛날에도 견성해 놓고 이십년 . 삼십년 . 사십년 수도를 하는데
얼굴에 흙칠하고 잿더미 바르고 미친 사람 짓을 하면서 남들이 미친놈 미친놈 하는
그 가운데 자기는 멀쩡하게 천하태평이 되어 개 닭소리 안 들리고
사람 오지 못하는 산중에 깊이 들어가서 토굴(土窟)하나 만들고
솔잎이나 도토리나 먹고 들어 앉아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자성(自性)을 잘 보호해서 임의로 거기에 맡겨서
조금도 탈선(脫線) 행동이 없도록 하고 「응무소주 이생기심」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보임(保任)이라 한 것입니다.
범부가 탐진치(貪嗔痴)로 움직이는 마음과는 달라서
무심(無心)으로 움직이는 이것은 움직이는 것도 안 움직이는 거고
안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는 거고 안 움직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어서
마치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어서(水波不二) 사람이 그것을 파도라 할 뿐
물 자체는 파도가 아니고 움직였다 해도 달라진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물이 더 깨끗해진 것도 아니며, 물
은 움직인 때나 항상 그런 것처럼 도를 깨쳐 놓고
자기 마음자리를 응무소주(應無所住)하며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것도 종일 설법해도 설법한 게 아니고
이와 같이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농사짓고 종일 일해도
고된 줄 모르고 생각 없이 일합니다.
이게 내 일이라 생각 말고, 꼭 나만 먹을 거다 이런 생각 말고,
아무나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거고 헐 벗은 사람이 먼저 입을 옷이라 생각하여
열 벌이고 한 벌이고 장만하는 것이 도인이 하는 행동이며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대보살이고 자기도 완전히 의식주를 초월하고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수양이 돼서 맑아지면
소탈해지고 번뇌가 없어져서 남의 사정을 잘 알게 됩니다.
마누라를 대할 때도 그렇고 영감을 대할 때도 그렇고
제 감정으로 대하면 영감 말이 제대로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을 때 미운 생각으로 대하면 좋게 말해도 밉고 나쁘게 말해도 밉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대하면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그것을 척 알게 되니까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고 해결할 도리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감정이 앞선 중생이 되어 놓으니깐 마누라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팔월 추석이 되면 아이들 고무신 하나 사주고 옷가지나 사주자고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렇겠다고 얼른 주고 돈이 없으면
어디가 빛을 내 오든지 해 보자고 하고빚도 못낼 형편이면
「거 참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이 없어 참 안됐다고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당신 말을 못 들어주니 참 안 됐다」고 말이라도 고맙게 해 주면
서로 섭섭한 눈물을 흘리며 목을 안고 울수도 있는 거고 아무 시비가 없는 세상인데,
꼭 막혀 있으니까 큰 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그러니 시어머니 사정 모르고 며느리 사정 모릅니다.
응무소주로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시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저렇게 하시는가 하는 걸
환히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줄 지혜가 나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안하기 때문에 주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지옥으로, 삼악도로만 가서 인간세상이 혼란해집니다.
아무데도 머물지 않는 무소주(無所住)는 옳게 머무는 것이고
머무는 것은 그릇되게 머무는 비극(悲劇)이며 또 중생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육도만행을 행해야 하니까
그게 이생기심(而生其心)인데 「해도 한 것도 없이하라」 항복기심(降伏其心)이 됩니다.
일체 중생 무량무수 중생을 제도했지만 사실 제도한 나도 제도한 생각이 없고
또 제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법문을 듣고 그 방법 배우고 있는 범부 때
그 자체가 앉아서 배웠고 잠깐 지나간 생각이고 흘러간 강물과 같아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 것도 없고 무슨 말을 해 줬단 말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종일 얘기해 본 일 없이 얘기하라」하는 게
항복기심(降伏其心)이니 레코드나 녹음기보다도 더 무심한 것입니다.
범부라도 억지로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조직으로 하는 것이지만 하면 할수록 그 만큼 근사해지고
좀 탈속(脫俗)해져서 마음이 편해지고 일은 일대로 잘 됩니다.
청담스님이 함께 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간절히 권유했지만 성철스님은 산중 수행승으로 남았다.
그것은 이 땅에 선풍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청담스님이 그릇을 제조했다면
성철스님은 그 내용물을 만들었음이었다.
정화운동 기간에 두문불출했던
성철스님을 두고 여기저기서 시비를 걸어올 때
이를 막아준 이도 청담스님이었다.”
출처::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