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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잃지 않고 성장하는 교회
1부. 목자를 잃어버린 양
1) 먹일 것인가, 관리할 것인가?
주님이 자기 사람들을 위해 품고 계셨던 근본적인 생각, 그리고 교회를 위해 성경이 제시하는 근본적인 계획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우리는 목자와 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관계를 갈망하고, 가족을 찾으며,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잔잔한 물가’라는 사실이 모든 여론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푸른 초장 같은 곳을 원한다. 자신들의 영혼이 편히 쉴 곳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을 보살펴줄 목자다. 교인들은 목장 주인 모델을 따르는 교회의 모습에 싫증을 내고 있다. 목장에서 양들은 양털을 깎이고, 살찌우고 도살되고, 고기 덩어리로 팔려나간다. 교회는 마땅히 그와 같은 모습에서 탈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목자는 인간의 직업 중에서 하나님의 모습과 가장 밀접하고,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맺는 관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2) 무시되어온 하나님의 모델
교회가 당한 재앙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들(목회자들)’ 이 목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보다 더 극심한 것은 없었다. 교회가 당하는 거의 모든 어려움의 중심부에는 이와 같은 망각이 자리 잡고 있다고 확신한다. 영향력의 감소, 무능함, 세상 문화에 굴복함, 정체된 성장, 심화되는 목회자들의 고갈 상태, 저조한 교인들의 관심 등 이런 모든 증상들은 교회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3) 선지자들이 내리는 진단
죽음에 이르고 말았던 환자 유다에 대해 의사인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내린 진단서를 다시 꺼내보기 전에, 이 구절 속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증상들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심- 이 수많은 현대 교회들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구약 시대의 통치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떼를 책임지는 목자로 여겨졌다는 사실이다. 병들어 고통당하는 환자 같은 유다에게 예레미야가 내린 첫 번째 진단을 우리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는 유다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을 기술의 부족이나 전략의 부재에서 찾지 않고 유다의 범죄한 목자들에게 찾았다.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왜 유다의 목자들은 우준했는가? 왜 그들은 짐승 같고, 우둔하며, 어리석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이라고 간주되었는가? 예레미야는 그들이 ‘여호와를 찾이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유다에 임했던 재앙을 피하고 싶은가?” 예레미야가 오늘날 생존하고 있다면 그렇게 질문했을 것이다. “건강하고 번영을 누리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진정한 성공을 거두는 길로 되돌아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여호와를 찾기 좋아하는 목자들을 찾으라. 그것이 출발점이다. 그것이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유다의 목자들의 치명적인 잘못을 지적한 가장 긴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무서운 선언을 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 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3:1-2) 하나님께서 유다의 목자들이 백성들을 잘못 인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의 양떼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내리셨음을 기억하라. 양떼는 흩어지고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고 있다. 목자들이 그들을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서글픈 이야기는 에스겔 시대로 넘어가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에스겔은 BC 597년에 바벨론 사람들에게 끌려와 유배되었던 선지자다. 에스겔 34장 1-10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여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 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목자들에 대해 불평한 내용은 나이 많은 동료 예레미야가 한 말과 흡사해 보이지만, 에스겔은 목자들이 잘못 행한 일과 그들이 행하지 않은 일들을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에스겔은 목자들이 위에 제시한 잘못을 범했을 때, 그 결과는 3가지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1)양들이 흩어짐 2)양들이 모든 들짐승들의 밥이 됨 3)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됨. 현대적 표현으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목자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목회자들에게 인도를 받으면, 3가지 결과가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다. 첫째, 교인들이 여러 파별로 분열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 간의 교제를 결코 이루지 못한다. 둘째, 교인들은 그들을 빼내가려는 이단들과 협잡꾼들이 달콤한 말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셋째, 건전한 교리와 하나님과의 가슴 떨리는 교제는 뒷전으로 미루어놓고 모종의 영적인 경험을 약속하는 옳지 못한 교리들을 접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이 더 일어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목자들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실 것이다.
4) 기본으로 돌아가라.
미국 풋볼리그(NFL)에서 가장 별볼 일없는 팀, 팩카스에 롬바르디 감독이 부임해서는 8년 동안 지구 우승을 6번 FFL우승을 5번 그리고 수퍼볼에서 2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롬바르디는 그 팀이 무한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단 한 가지 요소가 결여되어 있음을 알았다. 경기에서 이기려 한다면, 그 팀은 기본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역사는 그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우리 교회가 그와 유사한 지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로운 접근법과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적용하려 노력하고, 흥미로운 방법론과 신선한 기법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실패를 거듭하며 진창에 빠져 헤매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롬바르디 감독의 말처럼 서둘러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효과적인 목회 사역을 세우기 위해 최신 과학을 이끌어가는 과학자만큼 많은 훈련과 지식이 요구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비록 목회하는 가운데 가끔씩 상당히 힘겨운 일을 겪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목회를 복잡하게 만들어놓지 않으셨다. 목회의 기본은 참으로 단순하다. 단순한 것과 쉬운 것은 동일하지 않다. 나는 절대 목회가 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적어도 3가지의 목회 현실이 때때로 목회를 어렵게 만든다. (1) 어떤 양들은 우리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모든 양들이 다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모든 양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어떤 양들은 우리가 등을 보일 때 우리를 내몰고 머리로 박기도 한다. 그것도 한 번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해를 거듭하며 계속한다. 어떤 양들은 모당가려 하고, 또 어떤 양들은 다른 양들의 우리를 계속 넘겨다본다. 그들은 건너편에 있는 풀이 더 싱싱하고 맛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목회는 ‘쉽지’않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은 여전히 단순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2) 감정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간단한’ 치료의 완성은 실제로 감정적, 영적, 개인적인 여러 단계에서 상당히 어렵게 진행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일을 수행해나갈수록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것, 바로 그것이 목회다. (3) 현대적인 삶의 요구가 목회 사역을 복잡하게 한다. 비록 목회가 본질적으로 복잡한 성질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회와 관련된 사역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인적 자원 법규, 납세 신고 규정, 회계 규정, 내국세 수입 서비스 코드, 법룰 개정, 조직 내의 인사 문제, 퇴직 계획과 같은 무수한 요소들이 목회 사역을 한 세기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목회 그 자체는 복잡하지 않고 목회의 본질은 전혀 어렵지 않다. 목회 사역의 기본 요점은 의외로 단순하다.
2부. 기억 상실증에 걸린 목자
5) 나는 누구 인가?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효율적인 능력도 상실하게 된다. 성경에 근거한 강력한 정체성을 갖추지 못하면, 우리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말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는 물론이고 일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로서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목회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힘들어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목회자들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적분을 감당해야 하며, 정체성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갖지 않으면 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또한 나는 목회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나 사역을 하면, 아무리 많은 기법과 장치를 동원하더라도 합당한 결과를 거두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는 헛수고만 일삼고 시시각각 변하는 유향을 맹목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결국 우리를 따라오는 것은 낭패와 무력함이라는 반갑지 않은 친구들뿐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회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목자라면, 다음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는 목자의 모델을 택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목사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pastor'는 ’목자(shepherd)'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라틴어 ‘pascere’는 문자적으로 ‘목초지로 데리고가다’는 뜻이다. 누군가 우리를 ‘목사’라고 부를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양떼의 목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목자가 되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강조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목자들처럼 행동하라고 그토록 단호하게 말씀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정체성을 목자의 심장으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려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1) 목자들은 양들을 돌본다. 목회자들이 목자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가장 분명한 이유는 교인들이 양들처럼 목회자들의 보호 아래 맡겨졌기 때문이다. 양이 생명을 유지하고 잘 성장하려면 목자를 필요로 한다. (2) 좋은 목자는 자기 양들을 절대적으로 책임진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목자가 되라고 가르치신 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보다는 양들의 유익을 우선순위에 두도록 일깨우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최고경영자나 지휘관이나 왕이 아니라 목자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목회자들이 진실로 양들을 위해 헌신하기를 바라신다. (3) 좋은 목자는 자기 양들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다. 훌륭하고 신실한 목자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며, 잃은 양을 찾고, 좋은 풀밭으로 인도한다. 장군들, 왕들, 최고경영자들은 길을 잃고 상처 받은 양보다는 손의 결산과 최종적인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훌륭한 목자는 자기 양과 친밀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양들과의 친밀한 결합은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부르신 모든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필수 조건이다. (4) 좋은 목자는 자기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목자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교회의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행20:29). 바울은 그들에게 양떼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외부의 공격에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5) 목자들은 비천한 자들이다. 최고경영자나 왕, 장군이나 지도자를 생각해 볼 때 비천함이라는 말이 마음에 떠오르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목자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 말이 뒤따라 연상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목회자가 따라야 할 모델로 목자를 택하신 이유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도자나 중요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면, 우리를 믿고 뒤따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천대하기 쉽다. 결국, 그들은 우리가 꼭대기에서 다스리는 피라미드의 밑바닥을 떠받치는 자들로 전락하고 만다. 목자들은 애초부터 비천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비천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목자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지도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비천함은 우리 목회 사역 속에서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6) 목자에 대한 오해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목회 모델은 ‘지도자’ 모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교회의 리더십에 관한 훌륭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목회자들은 그것을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지도자와 목자라는 단어가 부분적으로 의미가 중복되긴 하지만, 그 단어들이 표현하는 접근법을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가지 모델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지도자 모델은 주변 문화를 변혁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오로지 목자 모델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도자가 아닌 목자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은 어떠한 직무를 수행하느냐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이 직무를 완성하려면 사람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사람이 아니라 직무에 있다. 목자와 지도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형태 속에서 분명하게 목격할 수 있다. 다윗은 분명히 백성들을 다스렸지만 그보다 백성들을 돌보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존경스러운 목자 왕에 대한 사랑을 결코 잊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비교해보자. 솔로몬은 과거 어떤 왕보다 나라의 영토를 더 넓게 확장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다.”(대하1:15) 그는 한마디로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목자’라 부르지 않는다. 사실 그의 순조롭던 통치 기간의 막바지에 이르러, 백성들은 지치고, 피폐해지고, 고갈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도자 모델이 힘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쉽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섬기는 지도자’라는 표현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섬기는 지도자에 관한 논의들은 지도자들에게 싫증난 교회의 외침에서 나왔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너의 왕권을 상징하는 홀(scepter)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여기에 목자의 지팡이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왕의 홀은 사치스럽고 장식적이며 강한 인상을 주지만 주님은 목자의 지팡이를 잡고 걸으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왕족이 아니라, 목자장의 권위 아래 복종하며 힘써 일하는 목자들이다. 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체 상태에 빠져 발버둥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목회자들이 최고경영자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런 사고방식은 교인들의 필요와 그들이 갈망하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했다. 지금 시대의 교인들은 지도자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싫어한다. 그들은 이 땅의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거짓된 약속들을 들어왔다. 그들은 신실한 목자를 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목자를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따라갈 것이다.
7) 목자의 소명
유명한 복음주의 계열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한 친구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소명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 학생들이 눈만 껌벅이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교수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느 반에서는 단지 30%의 학생들만 긍정적인 대답을 했고, 다른 반은 4% 미만의 학생들만 “예”라고 대답했다. 목회자들이 나아갈 방향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소명 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진정한 목회자는 그가 맡은 특별한 사역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사역은 불행하고 비생산적인 것이 되고 만다. 자신이 위대하고 장엄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거룩한 소명에 대한 자각만이 목회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위의 확신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우리의 삶을 목회 사역에 헌신할 때 반드시 요구되는 중요한 핵심 요소는 목회를 위한 흔들림 없는 열정이다. 목회 사역을 감당하려면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목회의 길에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불타는 심령 속에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목회 사역을 위한 은사를 받았다고 믿는다. 사역을 위한 열정도 느끼고 있다. 다른 것에 한눈팔지도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회자로 부르신 것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자기 양떼를 위한 목자로 부르실 때, 그분은 모든 것과 분리된 상태에서 부르시지 않는다. 개인적인 확신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지만, 교회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 어윈 루처는 이에 대해 정확하게 말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내적 확신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확증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내면적인 확신과 교회에 의한 외면적인 확인 절차를 모두 포함한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자기가 선교사라고 선포하지 않았다. 그와 바나바는 교회를 섬기고 있는 동안에 소명을 받았고, 온 회중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행13:2) 그 사건이 일어났다. 바울의 소명이 누구에게 공포되었는지 주목해보자.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성령님께서는 이 말씀을 바울과 바나바에게 은밀하게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하셨다.
8) 목자의 영광.
목회자들이 거룩한 부르심을 기뻐해야 할 가장 큰 이유 5가지를 꼽아보겠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목자의 직분을 맡기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부르셨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가장 귀한 보물을 맡기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놀랍고 특별한 뜻을 가지고 당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 (2) 우리는 목자장의 지도를 받는 목자로 인정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선한 목자’(요10:11)라고 부르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목자장’(벧전5:4)이라 했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주님을 가리켜 ‘양의 큰 목자’(히13:20)라고 했다. 이러한 모든 기록들은 다른 많은 목자들이 목자장이신 그분의 권위와 명령에 따라 사역을 감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는 목자장의 명령에 따라 그분을 섬기는 목자들이다. 비록 겉으로 나타나는 특권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목자로 부름 받은 특권적인 소명을 기뻐해야 한다. (3) 양은 자기 목자에게 반응한다. 양들은 지도자나 최고 경영자, 또는 관리자나 행정가, 또는 목장 주인에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목자에게 반응을 나타낸다. 바로 며칠 전에 나는 이 원리를 다시한번 확인했다. 내가 갈보리교회에 부임하기 전, 교인들은 힘든 시기를 거처왔다. 야심적인 교회 건축 프로그램으로 인해 교회는 수백만 달러의 집을 지게 되었고, 몇 년 동안 교인 수는 계속 줄고 있었다. 내가 부임했을 때, 일반적으로 ‘건축 헌금 모금’이라고 알려진 계획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건축 헌금 모금을 위한 위원회가 이미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요소들이 있는지 자세히 조사했다. 나는 헌금 거두는 일을 거부하고 ‘양들을 억누르고 조종하려는’ 시도들을 중간시켰다. 그 대신 기도와 금식에 힘쓰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행진’이라는 훈련을 진행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40일 동안 기도하며 금식했다. 어떤 부목사는 영적인 생활과 성정에 관한 다양한 영역을 다룬 기도 소책자를 만들었다. 우리는 24시간 기도 불침번 순서를 정하고 계속해서 기도회를 열었다. 교인들은 구역별로 모여 교회에 대한 정확한 소식을 듣고,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기도했다. 이렇게 기도하며 금식하는 동안 우리는 부부와 교인들 사이, 그리고 교회에서 놀랄 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것은 중요한 영적 전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 교인들 사이에서는 건축 헌금 모금 운동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재정적인 이득보다 훨씬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 마지막 날 밤, 나는 최종적인 채무 상태를 발표했다. 그보다 앞서 나는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기적적인 일들을 소개하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나서, 그날 아침 우리는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액수의 헌금을 받았으며 성도들은 이후 3년 동안 더 많은 헌금을 하겠다고 작정했다. 성도 수가 과거에 건축 헌금을 모금했던 때보다 훨씬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났다. 금전적인 문제는 정말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들 사이를 다니며, 그들에게 하나 됨과 소망과 기대를 심어주셨다. 나는 예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양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는 목자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의 보살핌에 반응을 보였다. (4) 우리는 양이 태어나고 자라 완전히 성숙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특권을 가졌다. 15-20년 동안 누군가를 신앙적으로 양육한 후에,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 것처럼 보람 있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목사님, 당신은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목사님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경험한다. 동료 목회자들과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나눌 때가 있다. 우리는 가끔씩 만날 때마다, 마치 전혀 떨어져 살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삶과 사역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모임에서는 삶의 회환도 함께 나누는데,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파경을 맞은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는 그처럼 깊은 대화를 통해 심오한 기쁨과 즐거움을 나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음을 깨달을 때에만 느끼게 되는 의미 있는 기쁨이다.
3부. 목자와 양, 푸른 초장에 살다.
9) 관계를 통해 일어나는 성장.
현대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능력과 열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관계적인 측면이 강화된 모델 위에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프로그램과 직무에 의해 이끌리는 기업형모델을 선택해왔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신 이유는 그분은 교회를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공동체로 세우려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서로서로 격려하고 자극하며 도와줄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 교계와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들은 대게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목회를 강조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관계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다른 사람, 형통이 다른 여러 종족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목자 모델은 이러한 관계성을 중시하는 목회 유형에 잘 어울린다. 하지만 지도자 모델은 그렇지 않다. 사실 많은 지도자들이 억지로라도 관계성을 중시하려 하는데, 그들의 사고방식과 정체성이 살아 있는 관계성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살핌 없는 목자의 사역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보살핌이 없더라도 끌고나갈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해 성경에서 사용하신 거의 모든 용어는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영적 성장과 발전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관계성과 연관된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서로’라는 표현이 담긴 구절을 무수히 만나게 된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서로 문안하라”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등등. 이와 같은 모든 명령들은 관계적인 측면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관계성 속에서 힘을 얻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우리는 하나님-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상 안에서 피조 되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라면 교회 속에 진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조사에 조사를 거듭해본 결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은 진정한 관계를 갈망하고 있다. 그들은 그런 욕구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표출하고 있지만, 모두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을 갖고 싶어 한다.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회를 공공 단체로 만들고 프로그램화 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증하고 의도하신 교회 모델- 하나님의 양떼, 하나님의 가족-은 관계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우리는 그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관계적인 측면을 제거하거나 방해했다. 지도자 모델은 우리가 가기를 원하고 가야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수 없다. 그러나 목자 모델은 그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고 데려다줄 것이다.
10) 여섯 목자에게 듣는다.
글렌 와그너 질문: 목회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1) 글렌 블라섬: 목사는 양들의 목자다. 양들의 목자로서 그는 자신이 돌보는 영혼들을 두루 살피며 그들을 세밀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양 우리의 문에 앉아 있는 자다. 자기 양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하는 것이 목자의 소명이다. 이것은 목자가 행하는 사역의 모든 영역에 해당된다. 그는 분명히 지도자이지만 동시에 양육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보호자다. 그는 ‘돌보는 자’이며 ‘제자 삼는 자’다. (2) 데이비드 피셔: 목자는 영혼의 치료와 보살핌을 책임진 자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영혼을 나의 보호 아래 맡기셨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나는 그들을 어떻게 보살폈는지 설명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이루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하며, 그 은혜를 서로 나누고, 서로의 영혼을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목회자들은 으뜸가는 ‘영혼의 보호자’다. (3) 존 파이퍼: 목회자가 행하는 사역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과 복잡한 세상, 다양한 문화와 불신자들, 그리고 다양한 사역만큼이나 많은 목회자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목회자는 하나님의 양을 먹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목회자는 교인들 앞에 서서 그들이 나아갈 길을 가르쳐줄 뿐 아니라 삶의 모습을 통해 교인들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목회자의 삶에서 부딪히는 위험들, 살아가는 생활 방식, 금전을 다루는 모습, 가정을 돌보는 모습 등등.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교인들은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한다. 목회자는 삶의 모든 문제에서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4) 러스 로저: 다양한 인종이 모이며 유동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도 목자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신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목회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5) 조 스토웰: 목회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치려는 사람이다. 그는 교인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주 안에서 성장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목회는 능력이 아니라 관계에 관한 일이다. 설교하는 강단보다 보살피는 일이 더 중요하다. 목회는 다른 사람들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지친 삶을 어루만지는 일이다. 질문: 당신이 교인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어떻게 알리겠는가? (1) 글렌 블라섬: 내가 양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이 언제든지 나를 만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다. 교인들은 왠지 나를 매우 바쁜 사람으로 여긴다. 원래 무능한 사람이 바쁜 척하는 법이지만, 나는 교인들에게 바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다. 그들이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목회자가 되고 싶다. 데이비드 피셔: 나는 일주일 가운데 하루, 오후 시간을 병원에서 보낸다. 모든 환자들을 돌아보지는 못하지만 입원한 교인들을 심방한다. 교인 가운데 약 20여 명의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양로원에는 성탄절과 사순절에 반드시 찾아가 성경 공부를 인도한다. 1년에 약 100명 정도의 노인들을 심방한다. 릭 캥햄: 우리 교회에는 매주일 5천 명 정도가 출석하지만, 예배를 마친 후 아내와 나는 교회 문 앞에 서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눈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도 나는 예배당을 둘러보며 고인들과 악수를 나눈다. 존 파이퍼: 목회자가 교인들을 돌보는 일은 주일 아침마다 설교를 통해 규칙적으로 이루어진다. 교인들은 목회자의 말 속에서 진정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그들은 설교 시간의 예화를 통해 목회자가 자신들의 고통을 알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러스 로저: 나는 교인들이 언제라도 나를 만날 수 있게 함으로써 내가 그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목회적 보살핌은 집이나 아파트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도심에 사는 사람들의 환경이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교인들은 부교역자들이나 나를 너무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놀란다. 조 스토웰: 나는 목회자가 동정적이고 섬세한 마음으로 설교하는 가운데 교인들ㅇ에게 자신의 관심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의 애정을 교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목회 기도다. 나는 나의 부친으로부터 목회 기도로써 많은 사랑을 받았던 훌륭한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교인들은 그가 팔을 펴서 중보 기도를 할 때면 마치 모든 교인들을 감싸안고 하나님 보좌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질문: 당신은 교회를 신앙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가? 글렌 블라섬: 우리는 공동체의 필요를 여러 경로를 통해 교인들 앞에 제시한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방법은 주일 예배 시간에 어려움에 처한 교인들의 이름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시하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다. 매주일 교인들은 기도 제목을 알게 된다. 릭 캥햄: 우리 교회는 사도 바울이 즐겨 썼던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을 항상 강조한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가족 안에서의 생활’이라 부르는 활동에 참여 할 것을 권한다. 존 파이퍼: 몇 년 전에 우리 교역자들은 잠시 물러서서 자문해보았다. “정말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 됨을 중요하게 다루었는가?” 우리는 성도 간의 하나 됨이 참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 서약을 채택했다. 진지한 자세로 서약에 참석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나는 약속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5주 동안 연속해서 설교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될 것을 서약했고 그것은 신실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이었다. 로스 로저: 소그룹 활동을 위해 모든 교인들을 가르치고 준비시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교인들이 모임을 통해 자신의 고통과 삶의 이야기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게 함으로써, 서로를 보살펴주기 시작하는 단계에 접어들게 한다. 우리 교회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아가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그들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양처럼 보살핌을 받고 보호를 받으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위기에 처한 교인들이 쉽게 다른 교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질문: 자신의 리더십 유형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릭 캥햄: 나는 관계를 중시하는 편이다. 전략적인 비전을 가지고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며 부교역자들이 자시 분야에서 발전하는 것들을 돕기 원하며, 또한 교인들이 교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아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싶다. 로스 로저: 나는 도시 교회를 이끄는 목사로서, 다양한 인종들이 지도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기대들을 자 조화시켜야 한다. 도시 지역의 목회자는 교인들의 입장에서 시작하고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며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자신의 리더십 유형을 언제든지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조 스토웰: 나는 관계를 중심으로 교회를 이끌어간다. 따라서 내가 지도하는 사람들과 긴밀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나와 교인들 사이의 관계가 위협받거나 관계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을 때, 그들을 이끌어나가려 하기 전에 먼저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나는 교인들을 다음 단계와 장소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전에, 먼저 그 단계에서 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자 노력한다. 질문: 목회자로서 당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리고 그 정체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릭 킹햄: 나는 나 자신을 목자로 여긴다. 목회자가 자신을 양들의 목자로 간주하면, 하나님께서 목자장이시며 자신은 하나님의 양을 치는 목자라는 사실을 어떤 일이 있어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존 파이퍼: 나의 소명 의식은 온 우주와 그의 피조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나의 인식에 근본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시각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견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고 온전히 간직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머리로만 이해되는 관념적인 교리의 요소와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기쁨과 경배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질문: 어떻게 현재의 목회 철학에 도달하게 되었는가? 데이비드 피셔: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범하지만, 끊임없이 신학을 연구하고 삶의 문제에 부딪히며 깨달아가는 과정이 목회가 아닐까? 질문: 당신은 목사로서 수행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의무 또는 책임으로 꼽는 것은 무엇인가? 글렌 블라섬: 양들에게는 좋은 먹이를 바르게 먹여야 한다. 즉 그들에게는 적절히 준비된 먹이가 필요하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오는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 나는 교인들과 함께 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릭 캥햄: 목회자의 우선적인 의무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또한 교인들이 봉사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교회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그 분께로 향하는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자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견고하게 붙어 있을 때에만 교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목자인 그의 보호 아래 솔직하게 내어놓을 수 있다.
11) 회복과 부흥에 이르는 길.
양을 제대로 보살피는 목자가 이끄는 교회는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만족시키는 비전을 제시해준다. 따라서 아무리 세속화되고 분열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라도 그 속으로 들어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돌보는 목회로 돌아가기 전에는 회복이나 부흥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자들이 돌아온다면 목자들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양떼를 돌아보고 인도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복종하는 겸손의 모습에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적어도 4가지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첫째, 양들이 따른다. 목자는 양들을 편히 쉬게 하여 재충전의 시간을 주고,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안전함과 애정 넘치는 교제와 친밀함을 심어준다. 양은 자기를 잘 보살펴주는 목자에게 언제나 좋은 반응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둘째, 참된 기독교 신앙이 회복된다. 많은 비크리스천들이 목회자들의 설교를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의 신앙 고백이 공허하게 들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데, 왜 그들이 우리와 같이 되려 하겠는가? 그들은 교회가 신앙의 공동체라는 말은 듣지만, 그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한다. 교회가 회복기에 접어들어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 공동체로서 살아가기 시작하면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게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외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게 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을 제시하게 된다. 순수함과 확실함은 언제나 갈급한 마음을 가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셋째, 자발적인 선행이 이루어진다. “무차별적인 친절과 무의식적인 선행을 실천하라”는 내용의 스티커를 본 적이 있는가? 이 문구는 진정한 부흥이 일어날 때 교회가 행하는 일들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기도 모임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믿는 자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넷째, 외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무시하지 못한다.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면, 비크리스천들은 그런 모습에 반발하기도 하고 끌리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무시하지는 못한다. 보잘 것 없는 소수의 무리가 그들의 신앙 열정과 강력한 유대 관계로 인해 강대하고 난폭한 제국에서 전혀 무시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면 관계적인 역동성이 신앙 공동체에 가득하게 되어 교회는 절대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다. 부흥을 위한 기도 무수한 사람들이 부흥을 소망하며 계획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확고히 세우시고, 더욱 많은 크리스천들이 정계에 진출하며, 아이들이 공립학교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을 심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드물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진정한 부흥은 언제나 핍박을 불러온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15:20). 바울은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더 남은 것이 있는가?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출발점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고방식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 교회를 하나님의 양떼로 새롭게 이해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을 좀 더 완전히 알아가려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을 나타내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 그분은 교회로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고 받아들여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하신다. 진정한 신앙 공동체, 진정한 한 가족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강한 힘을 가지며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그 속에는 함부로 거절하지 못할 무언가가 들어 있다. 목회자라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3가지 반응을 보일 것 이라고 생각한다. 기뻐하고, 회개하며, 지금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기뻐하라.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고 인도하고 먹이며 돌보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시고 당신에게 소명으로 주신 목자의 본분을 기쁨으로 수행하라. 기뻐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양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라. 회개하라. 기업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목자가 아니라 최고경영자처럼 행동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돌아오라. 그 자리를 떠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회 사역으로 부르시지 않으셨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부디 목회 사역을 그만두고 빨리 그 자리를 떠나라. 자신과 가정,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 자리에서 떠나라. 교회에는 목자의 심정을 지닌 목회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라에는 진정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세계는 빨리 회복되어야 할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양떼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할 수 있는 목자들이 이끌어나가지 않는 한, 교회는 회복과 부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깨닫지 못할 것이다.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목회자들이 더 이상 교인들을 가축 떼처럼 여기지 않으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부름 받은 한 가족으로,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양떼로 바라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자들을 위해 능력을 베풀어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마치는 글)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할 때
어제 교회가 이제까지와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많은 목회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최고경영자 모델은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코 “왕의 홀을 잡아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여기 지팡이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왕의 홀은 화려하고 멋지게 장식되어 있으며 인상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팡이를 잡고 따라오라고 부르신다. 목회자는 왕족이 아니라 종이다. 목자장의 명령을 따라 봉사하는 목자다. 왕이나 선지자처럼 행동하려는 목회자도 있고, 사회적인 교제와 사업과 권력의 묘미를 즐기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최상의 선택은 목자 모델이었다. 목자 모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회 모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 인간은 지혜나 능력이나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하나라도 자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고, 예수님에 의해 예증되며, 선지자들에 의해 예견되었던 목자의 직분은 믿는 자들이 ‘신령한 자’(고전3:1)로서 살아가며 호흡하도록 하기 위해 거룩하게 선택된 모델이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들을 목자로 부르셨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며, 목회자가 되기 위한 초보 단계에서만 암기해야 하는 내용도 아니다. 그 소명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능력과 준비하심을 경험하게 하고, 양들을 온전히 사랑하고 돌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그 소명을 따르는 길은 험난하다. 육신을 거스려야 하는 일이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과 헌신을 요구한다.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지시하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