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육의 과제
에베소서4:21-24
오늘은 기독교교육진흥주일입니다. 기독교교육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진흥책을 모색하기 위해
제정된 주일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기독교육 진흥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29년 가을입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주최한
제3회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을 때에, 주일학교 배가운동의 안건으로 4년 간 주일학교
진흥 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 기독교교육 진흥 운동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1년 차에는 주일학교 교사의 성경숙달에 초점을 두고, 양성 공과 중에서 성경과를 이수케 했으며,
성경통신과를 신설했습니다. 2년 차에는 주일학교 교사의 헌신에 초점을 두고, 교사 헌신 회를 열게 했으
며, 회원마다 1원을 헌금하게 했습니다. 3년 차에는 주일학교 교사의 배가양성에 초점을 두고, 전국강습
회의 세부 조직 활동을 강화했으며, 교사양성통신과를 신설했습니다. 4년 차에는 주일학교 학생 배가모집
운동을 벌였습니다. 각 교회마다 통계표를 작성하여, 매 3개월씩 진흥상황을 보고 하게 했으며, 지방총무
와 대표자가 모여 진흥방침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신학교와 성경학교의 후원을 요청하여 지원을 받았고, 월간지 종교교육을 1930년
1월부터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1933년에 8월 29일을 주일학교진흥주일로 제정했습니다.
그 후 9월 셋째 주일로 날짜를 옮기고, 주일 이름도 기독교교육진흥주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9월
첫째 주일부터 셋째주일까지 3주간을 진흥운동기간으로 정하여, 온 교회에 종교교육의 의의와 필요성을
재인식하게 하고, 출석 장려와 학생모집을 하였으며, 주일학교 교사의 신앙심과 헌신적 생활을 권장했습
니다.이런 방향에서 가맹교단별로 행사를 추진하였는데, 그 당시 우리 감리교 총리원 교육국 주일학교부
에서는 “주일학교는 교회의 기초다. 교회마다 주일학교를 세우자. 교인마다 학생이 되자.”라는 표어를
세우고, 진흥운동을 전개했으며, 1전의 헌금을 의무로 납입하도록 권장했습니다. 또한 진흥주일노래도
만들어서 부르도록 보급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교육 진흥주일을 정하고 해마다 지키는 이유는,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기독교 교육 진흥주일이 갖는 의미를 잘 살리기 위해서는, 교육이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육은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간을 변화시키거나 길들이려는 모든 계획적인 과정입니다.
오래 전에 상영된 영화 가운데에 ‘아름다운 비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학교 가기를 아주 싫어하는 에이미라는 14살 캐나다 소녀가 있었습니다. 에이미는 부모의 불화로, 아빠와
고향을 떠나서, 어머니와 함께 뉴질랜드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맙니다.
아빠를 따라 다시 캐나다에 돌아와 슬픔과 외로움을 달래던 에이미는, 개발업자들에 의해 파괴된 기러기
들의 둥지에서, 엄마 잃은 기러기 알 16개를 품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알들은 헛간에서 백열등의 열기
로 부화되었습니다.
부화된 기러기들은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 자기들을 경의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에이미를 엄마로
알고 따르게 됩니다. 기러기들은 처음 본 존재를 자기의 엄마로 알기 때문입니다.
에이미는 자신을 엄마로 알고 따르는 기러기들을 정성껏 돌보아 길렀습니다. 하지만 엄마인 에이미가 날지
못했기 때문에, 기러기들은 나는 것에 대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러기들은 거위처럼 걸어
다녔습니다.
에이미의 아빠는 사랑하는 딸을 위하여, 기러기들에게 날기를 가르쳐 줄 경비행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러기들에게 나는 교육 훈련을 시켰습니다.
에이미와 그의 아빠의 헌신적인 교육 훈련을 통해서, 거위가 되어 버린 기러기들은 다시 날아오르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엄마 기러기가 된 에이미의 선도 비행을 따라서, 미국의 플로리다까지 이동
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들과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감동 깊은 이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96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좀 앞서서, 1993년에 빌 리시먼이라는 캐나다의 한 발명가가, 자신이
직접 만든 경비행기로 캐나다 기러기를 미국의 버지니아로 이동시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환경운동으로서 철새이동 프로젝트가 다큐멘터리와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환경운동가들의 이러한 철새이동 프로젝트나 영상 예술가들의 영화 이야기는, 부서진 꿈들을 다시 살려
내고, 꿈과 함께 다시 날아올라야 할 인간의 미래에 관한 영감을 주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기러기들은 당연히 날아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철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날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나 개발의 기계들에 밀려서, 부서진 둥지와 상처 입은 어미들과 알들은 꿈을 상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점에서 소녀 에이미와 그의 아빠가 엄마 기러기와 아빠 기러기가 되어서, 기러기들을 다시 날아오르게
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교육입니다. 기러기들을 날아오르게 하려는 계획적인 의도로 기러기들을 변화시
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교육은 어떤 의도로 행해지는 것이겠습니까? 미국의 기독교 교육학자인 죤 웨스터호프 3세
는 기독교 교육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개인들이나 그룹들을 기독교적 삶의 스타일로 발전시키기 위한 신앙 공동체의 계획적이
고, 조직적이며, 지속적인 노력이다.”
이 말은 성도를 기독교적인 삶의 형태로 살아가도록 하는 모든 계획적인 과정이 기독교 교육이라는 뜻입
니다. 기독교 교육은 기독교적인 삶의 형태로 살아가도록 하는 의도로 행해지는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을 이렇게 이해할 때, 성서는 당연히 기독교 교육의 내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형태를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하여, 기독교적인 삶의 형태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기독교
교육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회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로 영광을 돌림과 동시에, 기독교적인
삶의 형태로 변화되어 살기로 결단하는 성도를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모든 활동을 교육과 연결시켰습니다. 성만찬, 설교, 봉사, 교제가 바로 말씀을 가르치
고 배우는 것과 연계되어 행해졌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기록된 ‘둘이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
를 가르쳤고’라는 구절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교회에서 일 년 간 활동한 일에
대해 ‘큰 무리를 가르쳤고’라고 표현한 것을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가 교회의 모든 활동을 교육과 연계
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래지 않아 교회와 교육의 이러한 관계는 무너져 버렸습니다. 교회가 교육을 ‘교리
문답교육’으로 전환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교육은 교회의 핵심이 아닌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고, 예배나 설교 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
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전통이 되어, 기독교 교육은 교회의 핵심이 아닌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 교육이 교회의 일부가 아닌 핵심이 되도록 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서적인
근거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그렇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새롭게 교회를 찾아오는 새 신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손을
잡고 교회에 발을 디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을 통한 양육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아울러 양적 성장이 둔화된 한국교회는 이제 질적 성장으로 사회 앞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교육은 교회의 핵심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교육은 지금 극복해야 할 몇 가지 문제에 부딪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잘 극복해야만
기독교 교육이 교회의 핵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이 극복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기독교 교육이 교회 안에 한정되어 행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예수님 당시까지 중요한 종교교육의 장은 회당과 가정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형성되면서
회당 교육은 교회교육으로 대치되었지만, 가정에서의 교육은 여전히 중요했습니다. 때로는 구전으로 가르
치기도 했고, 행동을 통제함으로 가르치기도 했으며, 예배와 종교의식의 참여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 교육의 장이었습니다.
1780년 로버트레이크스가 영국의 글로우체스터에서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시작한 것은, 길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들을 거리 한 곳에 모아서 글 읽기와 철자법을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물론 후에는 예배와
성서연구, 그리고 문답교육 등이 포함 되었지만, 시작은 문맹퇴치를 위한 사회교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도 역시 기독교교육의 중요한 장이었습니다.
미션스쿨(mission school)을 통한 학교에서의 기독교 교육도 역시 잘 알려진 영역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모두가 옛 이야기입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기독교 교육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 교육이 모든 영역에서 행해지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별히 한 개인의 인격
형성이나 신앙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인 가정에서의 기독교 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이 연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서 온 가족이 함께 기독교적 삶의 형태로 살아 갈 수 있도
록 하여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이 교회 안에서 한정되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은 분명히 극복되어져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이 극복해야 할 두 번째 문제는 기독교 교육이 어린 세대들에게 한정되어 행해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교회 안에서 기독교 교육을 이야기하면, 항상 교회학교 아동부와 중고등부, 그리고 청년부에만 적용시키려
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물론 아동부와 중고등부, 그리고 청년부는 교회학교의 부서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교회학교 밖에 있는 모든 교우들도
기독교 교육의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비록 어린이들을 영접하시고,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
하시며, 위해서 축복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천국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그들의 귀중함을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 높이신 예수님이시지만,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그들이 아니라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성인들은 예배를 통해 설교를 듣고, 어린이들이나 젊은이들 또는 새 신자들은 교육
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성인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냈다는 것으로, 성도로서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교육은 교회학교 아동부와 중고등부, 그리고 청년부를 위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고쳐야 합니다. 모든 성인도 교육 과정에 동참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배워가면서 기독
교적인 삶의 형태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설교도 이러한 역할을 합니다. 설교도 교육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성서 속의
단편적인 말씀에 대한 해석과 삶에의 적응에 대한 선포입니다. 체계적인 성서의 가르침을 알려주지는 못합
니다. 그러므로 설교와 교육은 상호보완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흡사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숲만 보고, 나무를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설교와 교육을 통해,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인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기독교 교육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정을 새롭게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 교육에는 결코 졸업이 없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성서를 한 번 읽었을 때와 두 번 읽었을 때, 그리고 열 번 읽었을 때의 깨달음은 다릅니다. 고고학적 발굴
에 따른 성서의 새로운 이해가 계속 나옵니다. 사회 변화에 따른 기독교 윤리의 새로운 정립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배워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은 모든 세대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어린 세대에 한정되어 행해지고 있는 현실은
분명히 극복되어져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이 극복해야 할 세 번째 문제는 앎과 삶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육에는 언제나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전해지는 내용들은
단순한 지식에 머물고, 삶 속에 잘 실천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 교육을 통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기독교적인 삶의 형태로 살아가도록
하는 의도로 행해지는 교육인데, 그 의도대로 결과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심하게 말을
하면, 기독교 교육을 받는 사람이나 받지 않는 사람이나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말을 다시 한 번 살펴 봅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
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의 이 말은 교육을 통한 변화를 강조한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대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기독교 교육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기독교적 삶의 형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앎을 삶으로 실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앎과 삶이 분리되어 있는 현실은 분명히 극복
되어져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핵심인 기독교 교육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모두의 관심과 협조가 필요합니다. 교육의 장을 넓히는 일뿐만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가 학생의
자리에서 평생토록 힘써 배우고, 배운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교육
을 진흥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기독교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며,
기독교교육을 진흥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4:21-24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