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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유정과 그의 문학
-신명난 눈물 웃음
글 : 권 창 순
외로움도, 그리움도, 절망까지도
촛불로 태우며 밤새워 썼네
만무방도, 따라지도, 매팔자도
신명난 눈물 웃음으로 사랑했지
아- 그리운 사람 金裕貞
노란 동백꽃이네!
알싸하고 향긋한
한국 문학의 동백꽃이네
절망 속에서 오로지 文學 하나에 희망을 걸고 쓰고 또 쓰다 겸허하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깨끗하게 生을 마감한 1930년대 유명 作家 金裕貞, 그를 생각하며 쓴 筆者의 拙作 -한국 문학의 동백꽃, 金裕貞- 이다.
생각하니 우리 문학의 대선배 멱서리 金裕貞(1908-1937)作家가 세상을 떠난지도 벌써 67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와 그의 文學은 우리들 곁에서 노란 동백꽃으로 알싸하고 향긋하다.
한국 문학을 풍성하게한 作家들의 고향과 작품의 무대를 찾아가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아리 『文學紀行班』에서 제13차(1992년), 제37차(1996년), 제63차(2000년)로 金裕貞 文學紀行을 다녀왔고 이제 2004년 6월 6일, 제86차 文學紀行으로 金裕貞 作家를 또 찾아가니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筆者는 金裕貞 作家를 참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첫 文學紀行 作家였고 아주 게으른 筆者에게 책읽기의 맛을 들여 준 作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小說 속에서 만무방과 따라지들을 만나 신명나게 눈물 웃음을 웃게 해주었고 자신과 우리, 山河와 歷史에 애정과 긍지를 갖게 해주었기에 그렇다.
筆者는 「作家 金裕貞사랑회」를 만들고 카페(daum) 「동백꽃 봄봄」을 열어 그와 그의 文學을 여럿이 사랑해 오고있다. 이제 열두 번째로 찾아가는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비단병풍 금병산에 안긴 그 곳은 金裕貞 作家의 고향이며 그의 小說 <<동백꽃>>, <<봄.봄>>, <<산골 나그네>>, <<소낙비>> 등의 배경지다.
실레마을에는 金裕貞 文學村 (作家의 生家 및 기념관)이 문을 열어 그의 文學을 사랑하는 학생, 일반인, 그리고 문학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이젠 봄내[春川]의 명소가 되었다. 作家 金裕貞의 문학사적 업적을 알리고 그 문학정신을 이어 펼치고자 운영되는 "金裕貞 文學村"에는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 디딜방아간과 외양간 휴게정과 연못 등의 시설이 있으며 김유정 추모제, 학술대회 전시회 등 각종 문학행사가 연중 개최되고 있다.
꿈과 열정으로 일하며 문학 밭을 일구는 『文學紀行班』 후배들과 즐거운 文學紀行을 떠나면서 내미는 이 글은 金裕貞 作家에 대한 筆者의 애정 표현이다. 비록 얕고 누추한 글일지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허물을 덮어 주길 바란다.
이제 멱서리 金裕貞의 生涯와 그의 文學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金裕貞의 生涯를 詩의 형식을 빌어 알아보고자 한다. 이런 작업이 다소 낯설겠지만 여유를 갖고 金裕貞 作家를 만날 수 있으리라. 筆者의 拙作 -알싸한 동백꽃 향기로 남은 作家 金裕貞- 을 먼저 읽고 그를 만나자.
강원도 지방, 풍부한 토속어로
익살스러우면서도 재치있게
현실을 꼬집은 해학으로
민중들의 삶을 잘 그려 낸
1930년대 단편문학의 선구자, 金裕貞
방황과 가난, 병고와 실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은 作家, 金裕貞
만 스물 아홉의 짧은 生涯였지만
그의 삶과 文學은
실레마을과 우리들 가슴에
알싸한 동백꽃 향기로 남았다
그리움과 사랑으로
설레임과 기쁨으로 남았다
-<알싸한 동백꽃 향기로 남은 作家 金裕貞 >
(1) 詩로 만나는 作家 金裕貞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아버지 김춘식
어머니 심씨 사이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김유정
내리 딸만 다섯 낳다
얻은 아들이라
더없이 귀엽고 소중해
오래오래 살고
재산 많이 생기라고
멱서리라 불렀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金裕貞(1908-1937) : <<동백꽃>>,<<봄·봄>> 등으로 널리 알려진 1930년대 소설가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증리 427번지 (현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에서 태어남.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
앞뒤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옴팍한 떡시루처럼
묻힌 아늑한 마을
비단병풍 금병산
알싸하고 향긋한
동백꽃 향기 나는
정다운 마을
-<내고향, 실레마을>
*증리(甑里)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한두루, 삼포, 샛고개를 병합하여 증리라 함. 원래의 마을 이름인 실레의 뜻을 한자로 표기해서 증리라고 함.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굵찍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친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친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다 하야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씨러질듯한 초가요 그나마도 50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빈약한 촌락이다." -金裕貞 隨筆 <<五月의 산골짜기>에서
지푸라기로 촘촘히
날을 결어서 만든 그릇
멱서리
그 안에 곡식도
농악, 두레 이웃들의 정도
가득 담았다
金裕貞, 재산 많이 쌓이고
복이 많이 쌓이고
오래오래 살라고
가족의 사랑도 가득 담아
멱서리라 불렀다
-<멱서리>
*멱서리 : 유정의 집안에서는 멱서리라 불렀지만
유정의 두룸실(현, 동면 학곡리) 외가에서는 먹성이 좋다고 먹색이라 불렀다.
춘천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은
부유한 지주의 아들
그러나 세살박이 멱서리
횟배를 앓아
하루에도 몇 번씩
배 아프다고
몸을 마구
엎치락뒤치락 했네
-<횟배를 앓아>
횟배 앓는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는 병을 다스린다
담배를 가르치고
그 어린 손가락엔
칼표 궐련
콜록콜록, 말더듬이
멱서리 金裕貞
-<그 어린 손가락에>
*金裕貞의 아버지 김참봉은 어린 멱서리의 배앓이를 고쳐 주기 위해 담배를 가르쳤다.
담배 연기가 뱃속에 있는 벌레를 죽인다는 속신 때문이었다.
筆者의 생각으론 일찍 배운 담배가 金裕貞의 폐를 나쁘게 하고 결국은 폐결핵으로
가게 하는 큰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핏기없는 멱서리
말 한 번 할려면
한동안 입 벌리고
"아 - 아- 아주머니--"
힘들여 말했네
횃배앓는
어린 가슴이지만
곱고 귀여운
그 어린 입술은
언제나 웃음꽃을 피웠네
-<말더듬이>
*金裕貞은 서울 휘문고보 2학년때 눌언교정소에서 치료를 받은 후에는
흥분하는 외에는 말을 더듬지 않음.
한양, 진골
지금의 서울 운니동에
아버지 김참봉
백여 칸이나 되는
큰집을 마련했네
여기저기 쫄쫄거리는
맑은 물과 머리 위에서
골골거리는 까치와
노란 꾀꼬리를 두고
여섯 살 난 金裕貞
한양, 진골로 갔네
어머니 손잡고 갔네
-<한양, 진골로 이사>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므로 土地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고
또 의병을 지원했다는 것 때문에 위협을 느낀 金裕貞의 아버지 참봉 김춘식은
서울에 큰집을 사들여 1914년 이사를 했다.
어머니,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
아버지, 아버지
그리운 내 아버지!
멱서리 金裕貞,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네
아버지 품에서
어머니가 그리워, 그리워 울었네
아홉 살 때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金裕貞, 외로워 울고 또 울었네
속으로
속으로만 울었네
어머니,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
*金裕貞이 일곱 살 되던 1915년 봄, 어머니 심씨는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 어머니를 잃었으므로 裕貞의 마음은
말 할 수 없는 그리움과 설움으로 가득 찼다.
2년 후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슬플 때, 고적할 때
눈물이 흐를 때 떠오르는
고롭지 못한
형과 아버지와의 분쟁
돈을 꼭 쥐고 놓지 않는 아버지
그 갈등으로 방탕해진 형 유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운니동에서 관철동으로 이사하고
본격적으로 난봉을 피운 형
술 취하면 부모 잃은 동생 가엾다
우리 유정이, 우리 유정이
그러나 난봉 또 난봉
유정은 무서웠네
유정은 너무나 외로웠네
-<우리 유정이>
*어린 유정에게 형과 아버지와의 고롭지 못한 분쟁은 늘 불안과 외로움과 무서움을 주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형 유근은 더욱더 난봉을 피우며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자전적 소설 <<형>>을 보면 그의 슬픈 가족사를 엿볼 수 있다.
관철동 집에서 가까운 글방
천자문, 통감 등
한학을 배우는 金裕貞
특히 붓글씨를
잘 쓴 金裕貞
외로운 저녁
우미관에서 손님을 부르는
나팔 소리가 들리면
어린 조카 영수를 데리고
영화 구경을 갔네
그 영화 속에서
잠시나마 슬픔과 걱정을 잊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네
희망을 발견했네
-<손님을 부르는 나팔소리>
*金裕貞은 1919년 봄까지 3년 동안 한문 공부와 붓글씨를 익혔다.
金裕貞 作品에 나타난 동양 고전 지식은 이 때 익힌 것이다.
1920년 열두 살에 입학한
재동공립보통학교
이듬해 3학년으로 진급하고
늘 우등으로 4학년을 졸업
제16회 졸업생
술 먹고 정신 못 차리는
형에게도 늘 자랑인 金裕貞
-<재동공립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金裕貞
동대문 밖 숭인동 80번지로 이사하고
이름을 김나이로 고쳐 불렀네
철봉을 하던 김나이
투포환을 가슴에 맞고도 멀쩡해
늘 불사신인양 대견했네
바이올린 배우기
야구, 축구, 유도, 소설읽기, 영화감상
일기 쓸 틈도 없이 바빴네
피부 색깔이 검은, 단짝
깜둥이 안회남과 어울리며
땅재주도 넘고
하모니카 모임도 이끌고
단성사에서 독주회도 했네
-<김나이>
*안회남 : 소설가. 신소설 작가 안국선의 아들
*金裕貞이 휘문고보에 입학한 것은 1923년 4월 9일, 주소는 경성부 숭인동 80번지다.
가족은 11인, 형제가 2인, 성질은 질박하고 기호와 지망은 의술이었다.
형의 낭비로
숭인동에서 관훈동, 또 청진동으로
살림을 줄이다가
金裕貞과 형의 아들 조카 영수는
봉익동 삼촌집에 맡겨지고
형 유근은 식솔을 거느리고
실레 마을로 내려갔네
이듬해인 1929년, 김유정 나이 21세
하기방학이 끝나 갈 늦여름
훗날 치명상이 된 치질수술을 받았네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을 마치고
제21회 졸업생이 된 金裕貞
그 후, 사직동에 있는
양복공장에 다니는
과부인 둘째 누님에게로 갔네
-<다시 실레 마을로>
*그러나 허약한 젊은 여자에게 공장살이란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공장에 다닌지 단 오년이 못되어 그는 완연히 사람이 변하였다. 눈매는 허황하게 되고 몸은 바짝 파랬다. 그리고 보통 사람이 본다면 대뜸 "저 사람 미쳤나?" 할만치 그렇게 그 언사와 행동이 해괴하였다. -<<생의 반려>>에서 金裕貞이 표현한 둘째 누님.
연희전문학교 입학 얼마 후
학칙에 의거 제적처분 당한, 金裕貞
더 배울 것이 없어 자퇴했다는, 金裕貞
짝사랑에 더 외롭네
집에 일로 봉익동을 다녀오던 지난 가을 날
수은동 근처 한 목욕탕
조그만 손대야를 들고 나오던 女人
판소리 명창 박녹주
화장 안한 창백한 얼굴, 수척한 몸
수심에 가득찬 눈, 무표정한 낯
흰 저고리에 흰 치마를 훑어 안고
찬찬히 걸어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집까지 따라가
안으로 놓쳐 버리고는
넋을 잃어버린 金裕貞
한참 멍하니 섰었네
그 날밤부터 답장도 없는
긴 편지를 쓰고 또 쓰며
어머니로, 동무로, 연인으로
막무가내 그리워 하며
외로워 했네
-<외로운 짝사랑>
"어머니가 난 보고 싶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부르짓었다. 나이 찬 기생을 그가 생각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는 그 속에서 여러 가지를 보았으리라. 즉 어머니로서 동무로서 그리고 연인으로서 *명주가 그에게 필요하였다. (*명주는 명창 박녹주 -필자) 小說 <<생의 반려>>에서
*金裕貞의 막무가내식 짝사랑은 그가 愛情에 너무 주렸기 때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난봉꾼 형 밑에서 시
달림을 당하며 자랐기 때문이리라.
가을은 농촌의 명절
그러나 위협과 역경의 계절
지주와 빗쟁이에게
수확물을 다 주고는
남은 건 또 빈 손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소리나 조금 배워
아이를 등에 업고
들병에 술을 담아
이 곳 저 곳 떠돌며
술도 팔고 몸도 팔고
술값으로 곡물도 받고
생활 필수품도 받아
봄이 오면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품도 팔고, 땅도 파며
또 유랑의 가을을 기다리네
-<들병이>
*"안해를 내놓고 그리고 먹는 것이다. 애교를 판다는 것도 근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노동화 되었다. 노동하여 생활하는 여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즉 들병이다."
소리나 조금 배워 "안해의 등에 자식을 업혀가지고 이렇게 남편이 데리고 나간다. 산을 넘어도 좋고 강을 몇씩 건너도 좋다. 밥 있는 곳이면 산골이고 버덩을 불구하고 발길 닿는대로 유랑하는 것이다."
-隨筆 <<조선의 집시>>에서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
짝사랑한 여인 박녹주
그러나 거절당한 사랑
팍팍한 현실
그 아픈 마음을 안고
실레로 돌아온 金裕貞
다시 듣는
꾀꼬리, 뻐꾸기 노래가
마음을 다독여 주었네
다시 보는
금병산과 신연강이
희망을 주었네
-<그 아픈 마음을 안고>
실레 마을에서
오리 쯤 떨어진 큰 들판, 한들
들 어귀에 보가 있고
깊은 늪이 있는 동네 목욕 터
그 옆에 봇도랑을 낀 오막살이
돌쇠네, 주막집
봉당에 걸터 앉아 담배를 피우는
도련님 裕貞에게
낮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들려주던 돌쇠 어멈의 이야기
아들과 들병이의
쌀쌀한 달빛 같은 사랑
裕貞의
하얀 담배 연기는
산골 나그네처럼
쓸쓸히 사라지고
사라지고
-<한들의 오막살이>
*한들의 오막살이는 小說 <<산골 나그네>>에서 덕돌이 모자가 고적한 생활을 한 곳.
병든 남편의 밥과 옷을 위해 덕돌이에게 잠시나마 정을 주고 몰래 도망치는 산골 나그네 (들병이)
물골의 굽이쳐 내려오는 개울바닥
온통 고자리 쑤시듯 파헤쳐져
파놓은 구덩이엔 두더지처럼
꾸물거리는 금쟁이들
그 금전판에서 술을 팔던
들병이들이 오고 가면
또 닭을 잡고 술상을 벌이고
강원도 아리랑을 목청껏 부르고
유정의 여름밤은 너무 짧아
산골의 여름밤은 금시로 밝아
-<산골의 여름밤은 금시로 밝아>
*김유정은 들병이들과 어울려 자주 몇 일씩 술을 마셨다고 한다.
*남편은 어청어청 등뒤로 걸어오는듯 하더니 아이를 번쩍 들어안는 모양이다. "이놈아, 왜 성가시게 굴어?" 이렇게 아들을 꾸짖고 "어여들 편히 자게유!" 하여 쾌히 선심을 쓰고 웃목으로 도로 내려간다.
-小說 <<솥>>에서. (裕貞의 모습을 보는 듯)
늑막염 큰 병을 앓아 우울한 金裕貞
1931년 4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그러나 명단에만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고
둘째 누나와 동거하던 매형의 충동으로
재산분배 때문에 형 유근과 법정소송
형의 달램으로 소송을 취하하고
실레로 다시 내려온 金裕貞
쇠약해진 몸 고치려고
닭도 먹고 뱀도 먹고
그러나 술을 더 먹고
-<늑막염, 큰 병을 앓아>
조카 영수가 마을 사랑방을 얻어
20여명의 아동을 모아 시작한 야학
교재는 동아일보사 브나로드 팜플렛
그러나 며칠 후 집주인이 사랑방 쓴다 하여
동짓달 부랴부랴 움막을 짓고
裕貞은 그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름을 잊곤 했네
이듬해 이른 봄 움막에 불이 나고
그 아찔한 순간을 잘 이겨 낸 金裕貞
마을 청년을 모아 농우회를 만들고
또 노인회와 부인회를 조직하고
농우회가를 불르며
농촌계몽운동에 전력했네
그리고 많은 재목을 제공
모두가 땀 흘려 낙성한
배움의 터 간이학교
금병의숙
동리 아이들 글 읽는 소리
창가 배우는 소리, 다정도 하네
-<금병의숙>
*"금병의숙" : 金裕貞이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간이학교.
*피었네, 피었네, 연꽃이 피었네. 피었다구 하였더니 볼동안에 옴쳤네. 대체 이걸 어디서 배웠을까? 얘 이년 참 나보담 수단이 좋구나, 하고 나는 퍽 감탄하였다. 그랬더니 나중 알고보니까 년이 어느 틈에 야학엘 가서 배우질 않았겠나. 야학이란 요 산뒤에 있는 조그만 움인데 농군아이들에게 한겨울 동안 국문을 가르친다. 창가를 할 때쯤해서 년이 추운 줄도 모르고 거길 찾아간다. 아이를 없고 문밖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엿듣다가 저도 가만가만히 흉내를 내보고 내보고 하는 것이다. -小說 <<안해>>에서. (금병의숙을 짓기 전 움에서 야학할 때 한 모습을 보는 듯)
형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적은 돈
추방당하듯 서울로 온 裕貞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빈 손이 되고
누군가를 늘 들볶아야 마음이 편한
공장에 다니는 누이의 신세를 졌네
곤궁에 빠진 金裕貞
몸은 점점 더 쇠약해 지고
드디어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진단
裕貞은 절망했네
누나는 사직동 집을 팔고 혜화동 개천가에
방 한 칸과 헛간 한 칸 얻어 밥장사를 했네
식객인 매형 정씨, 늘 누나와 다투고
裕貞은 갈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고
그러나 裕貞은 탈출구를 찾아
끈기있게 글을 썼네
친구 안회남의 주선으로
이미 작품도 발표한 金裕貞
절망 속에서도 부지런히 글을 썼네
-<혜화동 개천가에서>
1933년 쓴 "흙을 등지고"
"따라지 목숨"로 개작하여
신춘문예에 응모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일등으로 당선
신문사와 합의하여
당선작 제목을 고쳐 "소낙비"
"노다지"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
아-문단에 혜성처럼 떠오른
金裕貞
멱서리 金裕貞
-<문단에 떠오른 혜성>
형이 온 집안식구를
서울에 헤쳐 놓자
형수는 아들 영수와 딸 진수를 데리고
신당동에 셋방을 얻어 살고
裕貞은 민망했지만
그 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약을 산다고 부지런히
원고를 썼지만
그러나 원고료를 손에 쥐면
병든 몸, 아픈 마음 달래려 술을 마셨네
취하면 서러워 슬피 울고
또 밤새워 원고를 쓰고
벽에 부친 "겸허"를
보고 또 보며
-<겸허>
순수한 예술을 주장한
아홉 명의 작가 모임
여러 작가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그래도 늘 아홉 명
후기 동인으로 참가한 金裕貞
시 "오감도" 연재로 각계의 항의와
비난을 받았던 이상과 친밀하게 지내
이상도 폐결핵
나중에 한 달여 차이를 두고
둘은 세상을 떠나지만
-<구인회>
악화된 병도 고치고
술도 피하려
정릉에서 오리쯤 떨어진
한 암자로 요양하러 간 金裕貞
규칙적인 생활로 열이 덜하고
기침도 덜해져
형수와 두 조카는 기뻐하고
유정은 산골 물에 목욕도 하고
너럭바위에서 일광욕도 하고
그러나 이 일광욕이
병만 더 악화 시켜
예전에 수술했던 치질도 심해지고
폐결핵은 말할 것도 없고
裕貞은 광주 매형 유씨와 조카 영수의
등에 업혀 형수의 셋방으로 돌아왔네
-<정릉 골짜기>
방 웃목에 작은 책상 하나
들여 놓을 만큼 포장을 치고
촛불을 켜고 글을 쓴 金裕貞
벽은
검은 종이로 바르고
암자 갈 때 깎은 머리는 길게 자라고
움직이기 힘들어 요강으로 받아내고
그래도 쓰고 또 쓰고
고통으로 몸부림쳤네
-<포장을 치고 촛불을 켜고>
병고작가 金裕貞
구제운동이 문단에서 벌어지고
가을엔 이상 부부가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나고
자란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수염은 퇴색하고 얼굴은 누렇고
우울과 고통에 찌들고
그러나 글쓰기를
멈출 수 없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선지
현덕의 부인에게
초상화를 그렸네
-<金裕貞 초상화>
날로 몸이 꺼져 가는 金裕貞
경기도 광주, 매형 유세준 집으로
조카 진수와 함께 요양을 가
1937년 3월 18일
친구 안회남에게 편지를 썼네
이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다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무언가 방법을 찾지 않으면
몸을 일으키기가 어렵겠다고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고
돈이 시급하다고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니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와 달라고
탐정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으니
흥미있는 걸로 두 권 정도 보내 주면
50일 이내로 번역 원고를 줄 테니
돈으로 바꿔 달라고
무리하면 병을 더치는 줄 잘 알지만
그 병을 위해 무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돈이 되면 닭 30마리를 고아 먹고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야 살겠다고
너의 팔에 의해 광명을 찾고 싶다고
친구에게 구원을 청하며
수발드는 조카 모르게 신음을 삼키며
눈물을 흘렸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초저녁에도 멀쩡하던 金裕貞
한밤중부터 고통을 못 이겨 신음하다가
1937년 3월 29일 새벽 매형과 누님
그리고 진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짧은 삶을 거두었네
너무 짧고 한스러운 일생을 마감했네
그러나 누구 보다 깨끗한 生涯였네
문학을 향한 그 정열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네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지고
그리움은 잔물결 되어
바람따라 신연강으로
팔미천으로 밀려 가고 밀려 가네
-<짧은 삶, 깨끗한 생애>
(2)金裕貞의 文學
金裕貞 作品에는 小說, 隨筆 등 50여 편이 있는데 그 중 小說은 31편이다. <<솥>>의 초고인 <<정분>>을 포함해서다. "김유정기념사업회"에서 펴낸 「金裕貞全集」에는 <<정분>>이 빠져 있지만 전신재의 「원본 金裕貞 全集」에는 <<정분>>이 수록되어 있다. 隨筆은 <<五月의 산골작이>>를 포함 12편이고 나머지는 편지와 일기 그리고 설문 좌담 기타이며 번역소설 두 편이 있다.
이제 金裕貞 小說을 읽으며 체험할 수 있는 "신명난 눈물 웃음"에 대한 의미를 각 작품을 통해 알아보고, 그의 자전적인 작품들 통해 그의 삶을 간략히 엿보자.
金裕貞의 小說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바보들-" 하고. 그러나 그들이 주는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다. 실로 눈물이 촉촉하게 배인 웃음이다. 한참을 웃고 나면 가슴 가득 눈물이 고인다. 한 걸음이라도 걸을라치면 두 눈으로 콧구멍으로 줄줄 흘러나올 그런 눈물인 것이다. 그 눈물은 그러나 신명난 웃음이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야하므로, 피할 수 없는 궁핍과 가난의 슬픔조차 즐겨야 될 줄을 알기에 그렇다. 그건 인간의 아름다운 지혜다.
춘호는 왜? 안해의 머리를 얼레빗으로 곱게 빗겨 주는가. <<소낙비>>
근식이는 왜? 목숨 같은 "솥"을 빼내었는가. <<솥>>
데릴사위는 왜? 점순이와 혼례를 못하고 있는가. <<봄·봄>>
소작인 아들 "나"는 왜? 점순이를 사랑하지 못하는가. <<동백꽃>>
응오는 왜? 자기의 벼를 몰래 훔쳐야만 하는가. <<만무방>>
덕만이는 왜? "이나마 없으면 먹을 게 있어야지!" 하였는가. <<총각과 맹꽁이>>
덕돌이는 왜? 나그네를 사랑하고 울어야 하는가. <<산골 나그네>
영식이는 왜? 콩밭을 파헤쳤는가. <<금따는 콩밭>>
덕순이는 왜? 자기 발을 돌로 내려쳐야만 했는가. <<금>>
똘똘이 아빠는 왜? 안해에게 소리를 가르치는가 <<안해>>
복만이가 안해를 팔 때 나는 왜? 병든 어머니라도 팔고 싶어했나. <<가을>>
행랑어멈은 왜? 정조를 팔았는가. <<정조>>
덕순이는 왜? 병원에서 돌아오며 실망하나. <<땡볕>>
위 물음의 답을 찾다 보면 바보형 등장인물들이 선사하는, 웃음 속에 있는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으리라. 위 작품들 중 몇 편을 골라 살펴보자.
먼저 <<소낙비>>부터 간략히 살펴보자. 오직 돈 이원을 실수없이 받고자 안해의 머리를 곱게 빗겨 모양을 내는 춘호의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춘호가 받고자 하는 돈 이원은 안해가 동리의 부자 이주사에게 매춘을 하고 받아 올 대가다. 춘호는 그 돈 이원으로 놀음 밑천을 삼아 노름판의 돈을 깡그리 모집어 와 서울로 떠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고향인 인제를 등진 지 벌써 삼년이 되었다. 해를 이어 흉작에 농작물은 말 못되고 따라 빚장이들의 위협과 악다구니는 날로 심하였다. 마침내 하릴없이 집 세간살이를 그대로 내버리고 알몸으로 밤도주 하였던 것이다. 살기 좋은 곳을 찾는다고 나어린 안해의 손목을 끌고 이산 저산을 넘어 표랑하였다. 그러나 우정 찾아들은 곳이 고작 이 마을이나, 산속은 역시 일반이다. 어느 산골엘 가 호미를 잡아 보아도 정은 조그만치도 안 붙었고, 거기에는 오직 쌀쌀한 불안과 굶주림이 품을 벌려 그를 맞을 뿐이다. 터무니 없다 하여 농토를 안 준다. 일구멍이 없으매 품을 못 판다. 밥이 없다. 결국에 그는 피폐하여가는 농민 사이를 감도는 엉뚱한 투기심에 몸이 달떴다.
-<<소낙비>> (김유정기념사업회 간행)『김유정 전집(上) 113쪽』
이처럼 피폐하여 가는 농민들은 야반도주 표랑하고 엉뚱한 투기심에 몸이 달 떨 수 밖에 없으리라. 이런 원인은 농민들에게 자기 땅이 없기 때문일 터, 이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화 정책 때문에 자작농이던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빚도 못 가리고, 말로 하기 어려운 그 궁핍함을 견뎌야 하는 그들의 처참한 삶. 춘호가 주는 웃음 속에 그 삶이 눈물로 녹아 있다
<<봄·봄>>의 데릴사위는 왜 점순이와 혼례를 못하고 있는가? 점순이의 아버지 봉필이를 詩 형식으로 만나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으리라.
춘천읍의 배참봉댁 마름, 봉필영감
동리에서 그에게 욕을 안 먹은 사람없어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욕필이, 욕필이
원래 마름이란 지주의 대리인으로
욕 잘하고 사람 잘치고
생김 생기길 호박개 같지
닭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 해 가을에는 땅이 뚝 떨어지니
미리미리 돈도 먹이고 술도 먹이지
때문에 또 빚지는 건 소작인들뿐
봉필영감 외양간엔
황소 한 마리가 절로 기어들고
동리 사람들은 그 욕을
다 먹어 가며 굽신굽신 하지
살기 위해서
봉필영감, 욕필이
일 해주면 딸을 준다고 데릴사위를 들여
머슴처럼 부려 먹기만 하지
머슴을 두면 돈이 드니까
일 잘하는 놈으로
연방 바꿔 드려 일만 시키지
점순이 키가 자라야만
성례를 시켜 준다고
그러니까 헷손질을 하며 솔개미에 챈
닭의 소리를 연해 지르지
데릴사위에게 그 곳을 잡혀 가지고
고소하다! 정말.
점순이의 아버지 봉필은 머슴을 두면 돈이 드니까 데릴사위를 연방 바꿔 들이며 노동력을 착취한다. 마름인 그의 뒤에는 악덕 지주와 일제와의 야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장인과 데릴사위의 우스꽝스러운 싸움에 저절로 웃음이 터지지만 웃고 나면 운 것처럼 시원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동백꽃>>의 소작인 아들 "나"는 왜 점순이를 사랑하지 못하는가. 詩 형식을 통해 알아보자.
너는 바보야, 정말 바보야
왜 내 맘을 몰라주니
이놈의 닭! 죽어라, 죽어라!
네가 얄미우니까
지게 막대기로 네집 울타리를 후려쳤지만
점순아, 왜 네 맘을 모르겠니
넌 마름의 딸, 난 소작인의 아들
내 어머니의 다짐처럼 너와 붙어 다니면
집도 내쫓기고 땅도 떨어지는 걸
미안해, 정말
난 몰라, 난 몰라
왜 내 사랑을 눈치채지 못해
우리 수탉아, 쪼아라! 쪼아라!
닭의 횃소리!
청승맞은 호드기 소리!
대뜸 달려들어 네 수탉을 때려 엎었지만
점순아, 용서해다오
네 홉뜬 눈이 정말정말 무서워
이젠 땅도 떨어지고 집도 쫓겨나겠지
엉-
괜찮으니까, 울지마
요담부턴 그러지 마
내가 못살게 굴 테니까
안 이를 테니
이리와
넌 내 어깨를 짚은 채 퍽 쓰러졌지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아!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
난 땅이 꺼지는 듯
온 정신이 고만 아찔했네
너 말 마라
금병산 기슭에 널려 있는
굵은 바윗돌 틈에 소보록하니 깔린
노란 동백꽃 속 우리 둘 만의 사랑을
그래, 그래!
점순이가 화풀이로 닭싸움을 시켜 소작인의 아들 "나"를 골려 주는 장면은 상쾌한 웃음을 준다. 독자들은 소작인의 아들 "나"가 우둔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소작인의 아들 "나"가 점순이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다. 마름의 딸(점순이)과 붙어 다니면 집도 내 쫓기고 땅도 떨어진다는 어머니의 다짐이 있었기에 모른 척 하는 것이다. 결국은 점순네 수탉을 때려 엎고 점순이가 자기 어머니에게 고자잘 하면 이젠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길 것이기에 그는 엉- 하고 울음을 놓고, 점순이는 이때다 싶어 그와 노란 동백꽃 속으로 쓰러진다.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다. 점순이는 마름의 딸이기에 그렇다. 마름의 딸이기에!
<<만무방>>의 응오는 왜? 자기의 벼를 몰래 훔쳐야만 했는가. 먼저 소설의 한 대목을 보자.
한 식경쯤 지났을까, 도적은 다시 나타난다. 논둑에 머리만 내놓고 사면을 두리번거리더니 그제서 기어 나온다. 얼굴에는 눈만 내놓고 수건인지 뭔지 헝겊이 가리었다. 봇짐을 등에 짊어메고는 허리를 구붓이 뺑손을 놓는다. 그러자 응칠이가 날쌔게 달려들며 "이자식, 남의 벼를 훔쳐가니!"하고 대포처럼 고함을 지르니 논둑으로 고대로 데굴데굴 굴러서 떨어진다. 얼결에 호되게 놀란 모양이다.
응칠이는 덤벼들어 우선 허리께를 내려조겼다. 어이쿠쿠, 쿠 하고 처참한 비명이다. 이 소리에 귀가 번쩍 띄어서 그 고개를 들고 팔부터 벗겨 보았다. 그리고 너무나 어이가 없음인지 시선을 치걷으며 그 자리에 우두망절한다. 그것은 무서운 침묵이었다. 살뚱맞은 바람만 공중에서 북새를 논다. 한참을 신음하다 도적은 일어나더니 "성님까지 이렇게 못 살게 굴기유?" 제법 눈을 부라리며 몸을 홱 돌린다. 그리고 느끼며 울음이 복받친다. 봇짐도 내버린 채 "내것 내가 먹는데 누가 뭐래?" 하고 데퉁스러이 내뱉고는 비틀비틀 논 저쪽으로 없어진다.
-<<만무방>> 『김유정 전집(上) 100-101쪽』
자기가 애써 키운 벼를 추수도 못한 채 그 벼를 훔쳐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모범청년) 응오. 그런 동생을 도둑으로 몰아 폭력을 휘두른 매팔자요 만무방인 주인공 형 응칠이.
응오가 지주와 그에게 장리를 놓은 김찬판이 뻔질 찾아와 독촉을 해도 벼를 털지 못하는 건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쌀을 제하고, 색초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 땀이 있을 따름이며 그것은 슬프다 하기보다 끝없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남은 건 오히려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 땀 뿐이라니!
그래서 일찌감치 응칠이는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이 막되어 먹은 만무방이 되었고 동리의 모범청년 응오가 "내 것을 내 먹는데 누가 뭐래?" 하고 절규하는 게 아닌가. 형제의 눈물! 그 근본 원인은 소작농을 양산해 농촌을 절단 낸 일제의 수탈 때문이 아닌가.
<<안해>>의 똘똘이 아빠는 왜? 안해에게 노래를 가르치는가. 너무도 궁핍한 생활이라 부화가 끓어오를 적이나 똘똘이가 배가고파 킹얼거릴 때 남편은 트죽 태죽 꼬집어가지고 안해를 한바탕 후들겨 패고 담배를 물어야 살 것 같고 안해는 또 그래야 살 것 같고. 너무도 살림이 쪼들리기에 그러리라.
"들병이가 얼굴만 이뻐서 되는게 아니라든데 얼굴은 박색이라도 수단이 있어야지!" "그래 너는 그거 할 수단 있겠니?" "그럼 하면 하지 못할게 뭐야." 년이 이렇게 아주 번죽 좋게 장담을 하는 것이 아니냐. 들병이로 나가서 식성대로 밥좀 한바탕 먹어보자는 속이겠지. 몇번 다져물어도 제가 꼭 될 수 있다니까 아따 그러면 한번 해보자꾸나. 밑천이 뭐 드는 것도 아니고 소리나 몇 마디 반반히 가르쳐서 데리고 나서면 고만이니까.
-<<안해>> 『김유정 전집(上) 196쪽』
쥐었다 놓은 개떡같은 안해를 데리고 소리를 가르치는 모습이나 부부가 주고 받는 대화에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밥이나 식성대로 먹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 그 소망이 웃음 속에 눈물로 녹아 있다.
<<금따는 콩밭>>의 영식이는 왜? 콩밭을 파헤쳤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콩밭에서 금을 따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짓이다.
"왜 또 파, 이것들이 미쳤나 그래!" 산에서 내려오는 마름과 맞닥드렸다. 정신이 떠름하여 그대로 벙벙히 섰다. 오늘은 또 무슨 포악을 들으려는가. "말라니까 왜 또 파는 게야." 하고 영식이의 바지게 뒤를 지팽이로 콱 찌르더니 "갈아 먹으라는 밭이지 흙 쓰고 들어 가라는 거야, 이 미친 것들아. 콩밭에서 웬 금이 나온다구 이 지랄들이야 그래." 하고 목에 핏대를 올렸다.
-<<금따는 콩밭>> 『김유정 전집(上) 147쪽』
"콩이 바로 금"임을 농군인 영식이가 왜 모르랴! 그러나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남는 건 가난과 구차스런 삶이기에 횡재를 꿈꾸나 마름의 말대로 그건 미친 짓. 그러나 그렇게 미치지 않으면 현실을 배겨 낼 수가 없지 않는가. 웃음 속에 쓴 눈물이 고인다.
<<땡볕>>덕순이는 왜? 병원에서 실망하며 돌아오나.
"병원서 월급을 주고 고쳐 준다는 게 정말인가요?" "그럼, 노인이 설마 거짓말을 헐라구. 그래 시방두 대학병원의 이등 박산가 뭐가 열네살 된 조선 아이가 어른보다도 더 부대한 걸 보구 하두 이상한 병이라구 붙잡아 들여서 한달에 십원씩 월급을 주고, 그 뿐인가 먹이구 입히구 이래가며 지금 연구하고 있대지 않어?" "그럼 나도 허구 헌날 늘 병원에만 있게 되겠구려." "인제 가봐야 알지, 어떻게 될른지."
-<<땡볕>> 『김유정 전집(上) 317쪽』
주인공 덕순이는 살길을 찾아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흘러 온 유랑민이다. 한 대학병원에서 이상한 병에 걸린 사람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그 대가로 돈을 준다는 말에 병든 안해를 지게에 지고 찾아간다. 그러나 안해의 병은 뱃속의 어린애가 죽어서 생긴, 이상한 병도 아니다. 해서 간호사의 핀잔만 듣고 수술도 포기한 채 안해를 짊어지고 집으로 온다. 안해의 병으로 팔자를 고치려던 덕순이의 어리석음에 쓴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살아야만 하는 현실인 걸 어쩌랴.
위에서 몇 작품을 통해 등장인물들이 선사하는, 웃음 속에 있는 눈물의 의미를 살펴 보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金裕貞 小說에 있는 "신명난 눈물 웃음"을 찾아 보기를 권한다.
우리는 金裕貞 作品에 녹아 있는 "신명난 눈물 웃음"의 의미를 통해 그가 풍자와 해학의 작가라는 것을 쉬이 이해할 수 있으리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해학이 풍부한 토속어를 사용, 우리 정조를 잇고 있다는 것도 알았으리라. 어떤 이는 金裕貞의 作品이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웃음만 보고 그 웃음 속의 눈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 웃음 속 눈물의 원인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전적인 작품들 통해 金裕貞의 삶을 간략히 엿보자. 金裕貞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난봉꾼 형 밑에서 자라며 우울한 성격을 갖게 되었고 또 경제적인 궁핍에다 병을 얻어 사람을 심하게 기피하는 염인증에 시달린다.
먼저 <<형>>을 살펴 보면
아버지가 형님에게 칼을 던진 것이 정통을 때렸다면 그 자리에 엎떠질 것을 요행 뜻밖에 몸을 비켜서 땅에 떨어질제 나는 다르르 떨었다. 이것이 십오성상을 지난 묵은 기억이다. 마는 그 인상은 언제나 나의 가슴에 새로웠다. 내가 슬플 때, 고적할 때, 눈물이 흐를 때, 혹은 내가 자란 그 가정을 저주할 때, 제일 처음 나의 몸을 쏘아드는 화살이 이것이다. 이제로는 과거의 일이나 열살이 채 못되어 어린 몸으로 목도하였을제 나는 그 얼마나 간담을 조렸던가. -<<형>> 『金裕貞 전집(上) 337쪽』
형 유근과 아버지와의 고롭지 못한 분쟁으로 金裕貞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우울하고 공포스러웠으리라. 형 유근은 새 장가를 들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아버지는 이를 용납할 수 없을 뿐더러 뚝뚝한 수전노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유정의 형 유근은 고삐풀린 무엇처럼 방탕으로 세월을 보내며 가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다 여의었다. 그리고 제풀로 돌아다니며 눈치밥에 자라난 소년이었다. 그러면 그의 염인증도 여기에 뿌리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형님 한분 있었다. 주색에 잠기어 밤낮을 모르고 난봉꾼이었다. 그리고 자기 일신을 위하여 열사람의 가족이 희생을 하라는 무지한 폭군이었다. 그는 아무 교양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다. 다만 그의 앞에는 수십만의 철량이 있어 그 폭행을 조장할 뿐이었다. 부모가 물려주는 거만의 유산은 무릇 불행을 낳기 쉽다. -<<생의 반려>> 『金裕貞 전집(下) 35-36쪽』
裕貞을 비롯한 가족들은 일 년이 열두 달이면 열한 달 잔인무도한 이 주정꾼(형 유근)의 주정받이로 태어난 일종의 장난감이었다. 이런 상황이라 裕貞은 말이 없고 말도 더듬고 고보 때 출석일수가 삼분지 이가 못될 만큼 의욕을 잃게 되었다. 형이 유산을 물려 받은 지 채 십 년도 못되어 가산을 탕진하고 얼마의 땅이 있는 실레마을로 내려가자 유정은 삼촌집과 누이집을 전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과부인 둘째 누님은 열 네 살에 시집을 가서 십 년 넘어 살다가 쫓기어 왔고 고단한 공장 생활에 몸이 바짝 파랬다. 그녀는 성질이 급해 제 성미를 제가 걷잡지 못하였다.
그런 속에서 그래도 살아가려는 의욕으로, 주린 애정을 채우려고 기생 박녹주를 짝사랑하게 된다. 유정은 막무가내로 어머니로서 동무로서 연인으로써 그를 필요로 하였다.
제에게 지금 단 하나의 원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그러나 그는 이 땅에 이미 없노니 어찌 하오리까. *선생이시어, 당신은 슬픔을 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한쪽을 저에게 나누어 주소서. 그리고 거기 따르는 길을 지시하여 주소서. (*선생 -박녹주 (筆者) -<<생의 반려>> 『金裕貞 전집(下) 49쪽』
유정의 박녹주에 대한 짝사랑을 <<두꺼비>>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裕貞은 명창 박녹주 외에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를 짝사랑하여 많은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으며, 고향에서 들병이들과의 어울리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으나 실연과 악화되어 가는 병(치질, 폐결핵) 그리고 궁핍!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글쓰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운명 앞에 겸허했으며 깨끗하게 생을 마감했다. 간략히 자전적인 작품으로 金裕貞의 삶을 엿보았다.
김유정의 문학은 우리들에게 "신명난 눈물 웃음"을 준다. 그의 작품을 읽으며 웃음 속에 눈물의 의미를 체험해 보길 바란다. 오늘 가난한 이웃들이 그들처럼 웃는 웃음을, 그 웃음 속의 눈물을 기억하자.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잇는 징검다리다.
筆者는 여러 번 金裕貞 作家의 전 作品을 읽었다. 그것만 믿고 비평지식이 전무한 채로 이 글을 내놓음이 낯 뜨겁다. 내용 중 편협한 곳이 많겠지만 사랑으로 이해를 바라며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글을 내 놓으리라 다짐한다.
지금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언제까지나 연구가들의 글로 「紀行文學」을 가득 채울 것인가. 한 作家의 文學紀行을 몇 번씩 갔고 또 갈 터인데 그 공부와 경험은 실종되고 전부 남의 글인가. 깊이가 얕으면 어떤가. 한갓 감상문이면 또 어떤가. 처음은 다 그렇게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런 시작은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부끄러움에 불을 질러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할 것이니 시작하자. 우리가 硏究한 글도 「紀行文學」에서 자주, 쉽게 볼 수 있게 하자. 동아리의 밝은 미래를 생각하자. 한국 문학을 풍요롭게 하는 동아리를 만들자. 우리들의 작은 결심, 당찬 실천이 우리 문학을 더욱더 아름답게 꽃 피리니 筆者가 이렇게 졸렬한 글을 내미는 것 바로 이 뜻이다.
끝으로 文學紀行을 함에 있어 한 마디 하려 한다. 文學紀行을 떠나서 작품 속 등장 인물들과 친교를 나눠 보자. 작가의 고향이나 작품의 배경지에 가서 책을 읽고 마음 속에 그려 온 등장인물과 산책을 하며 속삭이듯 대화를 하여 보자. 이 방법도 꽤 유익한 文學紀行을 할 수 있게 하리라. 자기 삶을 넉넉하게 하리라.
아래는 한 예다. 필자가 "나 홀로 文學紀行" 때 실레마을 수어릿골에서 <<솥>>의 근식이를 만나 술 잔을 주고 받으며 나눈 이야기다.
<<근식이를 만나다>>
"근식이, 현재로 오느라 욕봤네. 춥구먼 어여 한잔하게. 순대도 여기있네."
"고마워유! 산천은 그대론데 요 방죽까지 오는 것도 머네유."
"아들 덕이도, 덕이 어머니도 잘있지?"
"잘들 있어유."
"그래-- (솥)은 바루 샀는가?"
"솥요? 말도 말아유. 그 솥 때문에 안해가 얼마를 발악 했는지 몰라유. 다 나 때문이지유. 동리 창피해서 말도 못해유-"
"나 때문이라니?"
"선상님도 알다시피 들병이 계숙이를 따라 나서면 굶주리지 않고 맘 편히 살 수가 있다고 생각했지유. 그 생각은 잠도 안올만치 가슴을 들렁들렁하게 했지유. 누구든 밥 먹듯 굶어봐유."
"하긴 굶주림이 고통 중에 고통이지, 근데 왜 혼자만 편할려 했지?"
"눈이 뒤짚혔지유. 배만 곯지 않는다면 뭐든지 다 버릴 수도 있다고 독한 맘 먹었지유. 생명이 소중한지 누가 모르겠어유. 더구나 가족인디유. 그러나 굶고 또 굶고 해봐유. 일제 식민지치하의 1930년대는 절망뿐이였지유. 괜히 안해에게 그 탓을 돌렸지유. 아리랑타령도 한 마디 못하는 병신-- 돈 한 푼 못 버는 천지-- 하구유. 뭇사람 품에서 에쓱거리는 들병이가 천하다고들 하지만 지는 힘 안 들이고 먹고 호강하는 그네가 너무 부러웠지유."
"들병장수도 제 가족의 목숨보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건데."
"맞아유. 그 당시에 중요한 건 살아야 하는 거지유. 목숨을 부지하는 거지유. 그게 전부지유."
"(솥)을 빼낸 이유로군."
"창피스러워유! 어떻게든 가족을 챙겨야지유."
"한잔 더하게. 어, 저기 아랫말 사는 (총각과 맹꽁이)의 덕만이가 오네. 어이, 덕만이 이리와 한잔하게."
"쥐--뿔도 모르는 게!"
"덕만이 왜 그러나?"
"좃-도 모르는 게!"
"아니, 이 사람 왜 그래?"
"누가 지 뿌리(근본)도 모르고, 누가 지 조상도 모른단 말인가?"
"몰라유! 장가나 보내줘유!"
"또 뚝건달 뭉태한테 당했구먼."
"몰라유! 재미 좀 보고 살게유, 장가 좀 보내줘유!!"
"자네도 낭종에 (솥) 빼낼려구!"
"하하하!! 창피스럽게!!! 선상님, 다음에는 1930년대로 놀러오게유. 코다리찌게 해 놓고 한잔 하게유. "작가 김유정 사랑회"의 현철씨도 전상국 강원대 교수이신 촌장님도 함께 와유, 안부전해 주게유."
"그럼 담에 또 만나세. 덕만이도!"
"몰라유, 장가나 보내줘유----!!"
" - 하하하하!!!!"
나는 수어릿골 방죽 둑에 앉아서 술병을 비웠다. 근식이도 덕만이도 돌아가고 나는 또 서울로 간다. 서울 가서 솥! 솥을 사야지.
<2004년 5월, 향초문방에서>
첫댓글 김유정을 너무 좋아하는 점순이 아저씨-- 좋아해요..나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