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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ire de la philosophie(철학사),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제11장 후기칸트주의의 여분: 괴테에서 쇼펜하우어까지 En marge des postkantiens: de Goethe à Schopenhauer 700
후기 칸트주의자들의 형이상학은 1800년부터 1850년까지 독일 사상의 전부는 아니다. 괴테(1749-1832)의 지혜는 이 철학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1788–1860)는 이 철학에 대한 열성적인 반대자이다. (700)
제1절 괴테 - Goethe 70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최근에 괴테와 후기칸트학파의 철학자들, 특히 헤겔과 사이에 깊은 근친성이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 양자(괴테와 헤겔), 이들은 칸트를 넘어서 헤르더(Herder 1744–1803)에 집착했다. 이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의 낭만주의를 극복했다. 이들은 자연주의자이든 크리스트교인이든 신비주의에 적대적이다. 독일 시인들인 티크(Tieck, 1773–1853)와 노발리스(Novalis, 1772–1801)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들은 예술 속에서 정신의 최고 표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행하는 관조 속에서 보다 유한하고 정해진 활동성 속에서(예를 들어 파우스트의 활동성, 즉 둘째 파우스트) 표현을 찾는다. 이들에게 있어서 최고 예술은 음악이 아니라 시(la poésie)이다. 시의 최고 형태는 그리스 비극, 즉 목가풍과 영웅시의 종합이다.이들은 18세기의 두 개의 거대한 운동, 수학적 물리학과 혁명적 이념들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 괴테가 경험에게 요구한 것, 그것은 뉴턴주의자처럼 법칙의 확정이 아니라, 자연의 연속성의 계시이다.괴테는 우리가 하나의 주제를 증명한다고 소위 주장하는, 다음 방법에 대해 경멸하여 말한다. “그 주제를 우리가 고립된 경험들(expériences isolées)을 수단으로 해서 제기하고, 그 고립된 경험들은 몇 종류에서 논증들로 쓰인다.” 그것은 인력 법칙의 증명 방법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반대로 “상위 질서의 관찰”이라 불리는 것을, 다시 말하면, 마치 개별 경우들처럼, 계열로 배열된 많은 수의 관찰들을 포함하는 관찰을, 찾는다. 그것은 그가 색깔 이론에서 시도해서 유명해진 그 경험들의 원리이다. (701)
이렇게 철학과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항상 철학자들과 거리를 유지했다. 1820년에 그가 쓰기를, “소위 말하는 철학을 위하여, 나는 기관(organe) [신체적 도구]를 가지지 않았다…순수이성 비판은 오래 전에 나왔고, 나의 지적 한계 밖에 있었다.” 철학의 중요한 문제, 즉 인식의 객관성의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사유는 대상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대상들의 요소들, 즉 직관들은 사유 안으로 들어가고, 그 사유에 의해서 직관들은 가장 내밀한 방식으로 침투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직관이 하나의 사유이고 또 나의 사유가 하나의 직관이라 할지라도.” 괴테는 철학을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주 말했듯이 지혜를, 베르틀로가 말했듯이(형이상학지(Revue de Métaphysique), 1928, p.12), “경험적 지혜”를 추구했다. 그 경험적 지혜는 처음에는 인간적 본능들에게 인간을 넘겨주었고, 그리고 이 경향들을 모든 가능한 방향에서 활짝 꽃피게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반성이 정확하고 제한된 활동성을 권장하고 정당화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서 사람들이 지혜의 구조와 지혜의 상당한 영향에 대해 어떤 관념(une idée)을, 심지어는 연약한 관념을 부여했다고 우길 수는 없다. (701) (47PNA)
제2절 크라우제 Krause 701
크라우제(Karl Christian Friedrich Krause, 1781-1832)는 예나에서 피히테와 셸링의 수강자였다. 그는 그의 삶에서도 그의 관념들에 의해서도 스승들과는 독특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는 예나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드레스덴에서도 정착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괴팅겐 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혁명적 음모 속에 포함되었기에 대학을 떠나야 했다. 1831년에 뮌헨 대학에 들어가고자 노력했다. 그는 셸링과 환원할 수 없는 대립이 그의 앞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쓴 저술가이고, 그중에 많은 작품은 유고로 남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지식의 근본진리에 대한 강의, 동시에 지식의 삶과의 관계: 지금까지의 철학 체계에서, 특히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의 최근 체계와 야코비의 학설에서, 간략한 서술과 평가와 함께, 모든 계급(신분)의 교양을 위하여(Vorlesungen über die Grundwahrheiten der Wissenschaft, zugleich in ihrer Beziehung zu dem Leben. Nebst einer kurzen Darstellung und Würdigung der bisherigen Systeme der Philosophie, vornehmlich der neuesten von Kant, Fichte, Schelling und Hegel, und der Lehre Jacobi's. Für Gebildete aus allen Ständen. 1829(1911년 3판)가 있으며, 프랑스어로 번역에는 뷔스(L. Buys, s.d.)가 철학 체계(Le système de la philosophie, 1892-1895)로 출판했다. (702)
크라우제의 깊은 감정은 그 자신을 헤겔과 심지어는 셸링과 생생하게 대립시켰다. 대체로 그는 개인적이고 인격적 숙명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두 철학자에게서 깊이 모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국가처럼 개인적 숙명을 그렇게 억누르고 무화하는 “구체적 보편들”의 어떠한 것도 없다. (702)
모든 체계를 침투하는 [그의] 이미지는 상호작용 속에 있는 ‘존재자들의 사회’(das Vereinwesen, une société d'êtres, 결사체, 조합체)로서 세계의 이미지이다. 그 결사체의 통일성은 상위 항목의 현존에 의해 보장된다. 이 항목은 다양한 의식 상태들이기 때문에, 각자에게서 온자아(le Moi)이다. 그것은 일체의 존재자들에서는 신(Dieu)이다. 사람들은 이 이미지로부터 라이프니츠의 채색[흐름]을 이어가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통일성(l'unité)[신]과 다양성(la diversité)[자아]의 연관인데, 이 연관이 크라우제의 범신내재주의(le panenthéisme)를 구성한다. 세계가 그렇게 현존하는 것은 선(le Bien)을 향한 무한한 경향성 덕분이며, 무한한 활동성 또는 무한한 힘 덕분이고, 신 그 자체인 성스런 의지 덕분이다. 신은 단지 유한한 존재자들과 합일에서만 살아있을 뿐이다. 따라서 합일이 가장 잘 실현되어 있는 합리적 인류성(l'humanité)[인간애]이 실재적인 것의 꼭데기(au sommet)에 있다. (702)
크라우제 작품의 가장 생생한 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사회이론이며, 이 이론은 그의 형이상학의 꽃과 같다. 크라우제는 피히테처럼 개인주의자도 아니고, 헤겔처럼 국가주의도 아니다. 크라우제에 있어서 권리는 규정된 집단성과 관련 있으며, 권리는 집단성의 목표들에 도달 가능하게 하는 일체의 조건을 스스로 규정한다. 가장 광범위한 일반성에서 권리는 따라서 신의 권리이며, 또는 “이성적 삶을 실현하기 위한 외적이고 내적인 모든 조건들의 총체성이다. 이런 정도에서 이 조건들이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 생성될 수 있다.”이처럼 크라우제는 권리를 도덕으로부터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권리를 개별적 자의성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했다. (702)
이제 남은 것은 연합체들 또는 합일체[공동체]들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전 인류는 어느 정도 연합체들의 피라미드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연합체[사회체]의 각각은 각자의 법률적 자치의 삶을 살며, 연합체들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우정[친애], 가족, 공동체, 국가와 같은 보편적 목표를 가진 연합체들이 있다. 교회, 직업협동체, 과학(학문) 연합체와 같은 다른 연합체들은 한정적 목표를 갖는다. 국가는 제한된 목표를 갖는 연합체들 중의 하나의 연합체이며, 즉 권리를 실현할 숙명을 지닌 하나의 연합체일 뿐이다. 국가(l'Etat)는 전체가 아닐뿐더러, 심지어는 사회적 삶의 중심도 아니다. 국가는 보편적 목표를 지닌 연합체에, 즉 단위 민족(la nation)에 해당한다. 국가[민족]의 전체성 속에서 사회(la société)는 연합체들의 연맹으로 이루어진다. 이 연맹은 위계적으로 연합체보다 상위가 아니다. 연맹은 연합체를 집합한 것이고, 연합체들 각각의 자치를 건드리지 않고 둔다.연맹은 마치 공동 정신과 같은 것일 뿐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최고의 권위를 만들지 않고서, 연맹체들은 인류성(Menschheitbund, l'Humanité)의 전지구적 연맹을 이르기 위해서는 그 자체들 서로 서로 연맹을 맺어야 한다.
크라우제의 정신과 프루동(Proudhon, 1809-1865)의 무정부 정체 사이에 근친성을 쉽게 보게 된다. 프루동은 크라우제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크라우제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다. 1836년이래로 우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라우제의 직접 제자들로서는 독일 철학자 레온하르디(Hermann Freiherr von Leonhardi, 1809-1875)와 법철학자가 된 아렌스(Heinrich Ahrens 1808-1874) 등이 있다. 이들은 끊임없이 유고집들을 출간했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렌스는 크라우제의 철학을 벨기에에 심었는데, 그 중에서 벨기에 철학자인 띠베르기앙(Guillaume Tiberghien, 1819-1901)이 대표자로서 무한 이론에 관한 논문(Dissertation sur la théorie de l'infini, 1846), 인류애의 계명들(Les commandements de l'humanité 1872)을 썼다. 티베르기앙의 제자인 뵈크(J. de Boeck, s.d.)는 1910년에 크라우제의 범신내재주의에 기초한 결정론(Théorie de la détermination sur la base du panenthéisme de Krause 1910)를 출판했다. (703) (47QKC) (57RMG)
제3절 슐라이에르마허 - Schleiermacher 703
슐라이에르마흐(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는 철학자라기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설교자이다. 1797년에 베를린에 있으면서 그는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과 가깝게 지내고 낭만주의 그룹에 속한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했으며, 마지막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했다. 그의 학설은 종교에 관한 강론(Reden über die Religion. 1799(fr. Discours sur la religion 1799)과 독백록(Monologen. 1800(fr. Monologues, 1800) 속에 포함되어 있다. (703)
어떤 척도에서 보면, 이런 종교학설은 야코비(Jacobi, 1743-1819)의 것에 집착해있고 또한 칸트(Kant)의 요청들(les postulats)의 이론에 결부되어 있다. 이 학설은 강요된 독단들이 종교적 삶을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종교적 삶 자체는 우리가 직접적인 내적 감정에 의하여, 또는 다른 사람들의 증거에 의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 종교적 삶 자체는 그것의 조건으로써 독단의 지위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트교의 독단론은 크리스트교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최소의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적 삶은 두 가지 연결된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우리를 “하위 의식”으로부터 “상위 의식”으로 고양하는 감정과 그러한 고양이 우리들 자체로부터 올 수 없다는 감정이 그것들이다. 하나로 결합된 것에서 나온 충만과 결핍은, 내밀한 변화가 인격의 영속적 영향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믿도록 강요한다. 이 때 인격이란 마지막으로 의식의 상위 수준에 도달한 후에 그 수준을 더 이상 떠나지 않고, 우리에게 본보기(un modèle)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이렇게 우리의 영감은 크리스트의 역사적 인격 그 앞으로, 그리고 교회에 전수된 크리스트의 영향 그 앞으로 나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크리스트가 그리고 요한 복음서가 중요하다. “그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 아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아버지를 따라 행하기를 원한다.”그자가 말한다. “나를 보는[아는] 자 누구나, 나의 아버지를 본다[안다].”또는 “나의 것이 것은 너의 것이고, 너의 것인 것은 나의 것이다.”일단 야코비를 자신과 구별하는 슐라이에르마허의 고유한 관점은 따라서 우리의 내적 요구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자료(une donnée) 사이에 동일성의 확신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모든 종교적 삶은 역사적 비판의 많은 작업들에 의존할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로서는 그만큼 더 위험한 상황이어서, 그는 비판의 여러 타격들 때문에 경전(la Bible)과 공관 3복음서(Évangiles synoptiques)를 완전히 포기하고서, 그 중에서 단지 요한의 복음서만을 제외시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서의 진실성도 이 시기에 특히 의심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704)
이런 문제의 제기는 관념들[이념들]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제기는 내부적인 종교적 삶의 구축물을 세우고자 할지라도 역사적 비판에 초기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제기의 경향은 스트라우스(Strauss, 1808-1874)와 르낭(Renan, 1823-1892)의 작업들에게 그들의 의미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었다. (704)
슐라이에르마허에게는 아주 낯설지만 이러한 귀결로 이어진다. 슐라이에르마허의 크리스트학(la christologie)은 그의 신학과 매우 구별된다. 그에게 필요로 한 것은 크리스트의 인격성에 대한 것이다. 반대로 그것을 매개로 해서 우리 스스로 느끼는 최고 존재는 인격적 존재이든 아니든, 그에게서는 중요하지 않다. 또한 셸링과 헤겔의 학설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추상적인 방식으로만 신과 세계를 분리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리고 신과 세계는 “동일 사물에서 두 개의 가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로는 신은 모든 단위들(les unités)을 넘어서는 단위, 즉 다수성 없는 단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는 대립자들의 총체성이고 단위 없는 다수성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두 찰나를 떼어놓을 수 없다. 세계 없는 신은 공허한 이미지로 남는다. 신의 단위는 채워질 수 있지 않고, 자연적 힘들과 도덕적 법칙들로 풍부하게 될 뿐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는 인격적 신 없는 종교이다. 그 바탕에 있는 내적 감정은 그러한 것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 절대적 의존의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의존하는 존재를 신이라 이름 짓는다. 이 신은, 종교들에 따라서, 다수이거나 또는 하나이고, 자연적이거나 또는 초자연적이며, 인격적이거나 또는 아니거나 이다. (705) (47QKD)
제4절 빌헬름 폰 훔볼트 - [fr.] Guillaume de Humboldt 705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1767-1835)는 후기칸트주의자들의 변증법에 매료되지 않았던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인간적 문화의 이상을 가졌다. 이 이상이 그를 실러(Schiller, 1759-1805)와 괴테에 접근하게 했다. 1810년에 프러시아 공공교육을 조직화하는 임무를 맡았던 그는 고등학교(le gymnase, die Gymnasium)에서(동시대에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전개한 것처럼) 인류성의 교육을 전개했다. 그 자신에서 보아, 인간이란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보편적이고 감각적 인간이다. 그는 독일 문헌학자의 초기 원형이다. 나중에 르낭이 한 것처럼, 그는 문헌학속에서 온전한 문화 그 자체를 보았다. (705)
그는 헤겔과 모든 낭만주의자들처럼 진화의 문제들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을 고려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 공식에 의해서 그것들을 해결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진화의 내부에서는 예견할 수 없고 기대하지 않았던 실재성들과 진실한 효과인들의 개입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실재성들과 효과인들이 곧 개인들이라는 것이다. 역사에서 개체성들의 이론은, 사람들이 여러 관점에서 비추어서 그 독창성이 천재(le génie)에 관한 낭만주의적 생각들에 가깝게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훔볼트의 진실한 독창성을 구성한다. (705)
특히 언어에 관한 그의 연구들에서 1818년부터 그는 거의 독보적으로 연구들에 전념하여, 주제들을 내어 놓는다.점진적 진보가 있으며, 그 진보는 “새롭고 계산할 수 없는 힘들의 작용에 의해 교차되어있다.” 따라서 언어는 국민[민족]들의 발명이 아니다. “언어는 자발적 활동성(une activité)을, 게다가 그 본질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활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언어는 활동성의 산물이아니라, 오히려 정신의 비의지적 분출(une émanation)이다. 그것은 민족들의 작품이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내적 구조에 의해 그들에게 굴러 들어온(늦게서야 찾아온) 선물(le don)이다. 민족들은 어떻게 민족들이 그것을 만들었는지를 알지 못하고서 그것을 사용한다.” 언어는 전적으로 한꺼번에 주어진 것이지, 부분들에[결합 또는 종합에] 의해 제작된 것이 아니다. 언어들의 다양성은 장애물들 또는 지지물들로부터 나오는데, 언어의 보편적 힘이 민족들 각각에게 내재하는 정신적 힘들 속에서 장애와 지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불가사의하고 감춰진 힘은 연쇄 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게 원인들과 결과들을 표출한다. 언어란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관념들 대신에, 주어져 있는 그대로 사실들로 대체한다고 훔볼트가 주장을 내세웠을 때,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아마도 헤겔이었다. 그에게서는 설명할 수 없는단어(le mot inexplicable)가 자주 등장한다. “자연 속에서 모든 생성은, 특히 유기적이고 생명적 생성은 우리의 관찰에서 벗어나 있었다. 만일 정확하게 우리가 생성을 준비하는 상태들을 탐구할 수 있다하더라도, 생성[최초 생성]과 그 상태들 중의 마지막 사이에는 여전히 빠진 것(공백)이, 즉 어떤 것을 무로부터 분리하는 공백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훔볼트에게서 유일한 개념으로 관통할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 진화(d'évolution créatrice)라는 관념이(그는 이 단어를 발설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태어나고 있음을 본다. (706) (47QKE) (57RMH)
제5장 헤르바르트 - Herbart 706
헤르바르트(Johann Friedrich Herbart, 1776–1841)는 1805년에는 괴팅겐 대학의 교수였다. 그리고 1833년까지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1797년에서 1800까지 스위스에서 교사였을 때 페스탈로찌(Pestalozzi, 1746-1827)를 방문한 이후로 그는 교육학에도 취향을 갖기 시작했다. (706)
그의 자연적 취향에 의해, 그 당시 지배적인 형이상학들로부터 보다 멀리 떨어진 한 정신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그는 칸트, 피히테, 셸링의 학설들에서 관념론의 몰락에 이르는 단순한 에피소드(일화)를 본다(전집(Sämmtliche Werke. 1851), 3권, 341쪽). 철학사는 다른 모든 역사보다 훨씬 더 적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필연성을 인정한다. 철학사는 과학이 생산할 수도 없었고 지배할 수도 없었던 사건에, 뒤처지거나 앞서가거나 하면서, 의존한다. (706)
헤르바르트는 오성(l'entendement, der Verstand)의 학설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같은 책, 4권 7). “시기가 가까이 오자, 사람들은 이해하다(Verstehen)의 근본적 조건에서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이해하다’는 경험의 형식들에서 주어진 모순들에 대한 인정한다 이다” 헤르바르트의 출발점은 이러하다. 경험의 자료들은 모순들이다. 그러므로(donc) 자료들은 실재성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철학들은 현상[겉보기]들이 이끌려가는 진실한 실재성을 탐구하는데 있으며, 이때는 사람들은 현상들을 모순으로부터 순화했을 때이다. 헤르바르트는 스스로 자기가 사유하는 방식을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Ἠράκλειτος)에서 레우키포스(Leucippe, Λεύκιππος)에 이르는 그리스 철학을 이끈 방식과 비교한다. 전자(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의 내적 모순을 선언하고, 후자(레우키포스)는 원자론에, 즉 모든 모순으로부터 순수 실재적인 것의 이론에 도달한다. 마찬가지로 로크(Locke, 1632–1704)는 실체의 단위(l'unité)와 그 실체에 속하는 독립된 성질의 다양성과 사이에 모순을 파악하고서, 사물들을 표상들일 뿐인 특성들의 집결체(모음덩어리)로 해결했다(같은 책, 3권 394). (707)
그러므로 철학은 특히 근본적 개념들에 관한 회의주의에서 시작한다. 각 사물은 하나이어야만 하고,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많은 성질들만을 지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건들 사이에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주장하고, 계속만을 지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아의 통일성(l'unité, 단위)을 주장하며, 많은 표상들만을 파악한다. 따라서 헤르바르트의 모순은 주어진 것과 마치 실재적인 것처럼 사유된 것 사이에 있다. (707)
방법론은 마치 원리로부터 그 원리의 귀결로 이행처럼, 자료(le donné)에서 실재적인 것으로 이행하기 위하여 엄격한 절차의 발명을 가르친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 절차는 모순적인 자료(la donnée)인 다수의 통일성(l'unité multiple)[여럿을 포함한 단위] 또는 하나인 다양체(l’multiplicité une)[단위 속에서 다수성: 집합 단위] 대신에 항들의 집단 또는 집합으로 대체하는데 있는데,이 항들의 각각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단순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존재들의 공현존(la coexistence)이며, 이 공현존은 다수의 통일성[여럿을 포함하는 단위]의 현상을 생겨나게 한다. 이리하여, 실체에 내속하는 성질의 개념 대신에, 즉 모순개념 대신에, 헤르바르트는 단순한 존재와 단순한 다른 존재들 사이에 우발적 연관의 개념을 대체 했다. 단순한 다른 존재들과 단순한 존재 사이의 공현존에는 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단순한 다른 존재들은 소위 주장하는 성질들을 가지고 우발 사건들을 만든다. 또 다시 자아가 자기의 표상들의 다양성과 함께 이렇게 설명될 수 있다. 만일 이 표상들이, 피히테가 이미 말했듯이, 자아에 내속하였다면, 자아에게 고유한 것일 수 있는 어떤 한계 덕분에, 자아는 다수의 통일성(l'unité multiple)일 터이다. 실재로 주체는 단순한 존재이다. 작동들의 계열에 의해 주체가 대상들로부터 제기한 그 작동들은 주체자체의 보존 작동들의 계열이다. 이 자기보존작동의 계열은 주체를 파괴하려는 다른 존재들의 노력들에 대항한다. 따라서 이 자기보존 작동들은 다른 존재들과 우발적 연관으로부터 태어났다. (708)
이 절차는 “연관들의 방법”(la méthode des rapports)을 구성하는 데, 헤르바르트가 이 방법을 그 당시 널리 유행하는 철학 정신과 대립시킨다. 만일 사람들이 수들, 변화들, 새로운 속성들의 생성 등이 연관들 속에서는 이것들의 토대이라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은 관념들과 수들을 절대적인 것들과 사물들의 원리들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그만 둘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 이후 가지적 세계 또는 가능의 세계를 상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현존을 가능성의 완전함으로서 정의(定義)하는 모든 사람들이 만든 그 무엇이다. 이 마지막 관점에 관하여, 헤르바르트의 견해에 따르면, 칸트는 정당하게 보았던 첫째 철학자이다. 그래서 그는 현존이 어째거나 본질로부터 연역될 수 없고, 단지 절대적 지위만 있을 수 있다고 선언했다. (708)
이 방법으로부터 우주의 표상이 뒤따라온다. 완전히 단순한 존재들의 집단은 그것들 자체에서는 어떠한 다양성도, 심지어는 다양성의 원리도 갖지 못하고 있다. 이 존재들 사이에는 다른 것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떠한 원인성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각각은 그 각각이 있는 바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들 안에는 어떠한 내재적 원인성도 없다. 왜냐하면 한 존재가 그 자체로 보존되게 하는 작동(l'acte)은 다른 존재에 의해서 자기 속에 부추겨지기 때문이다. 그 존재 속에서 경향성도 없다. 왜냐하면 단순한 존재의 성질은 필요도 결함도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각 존재가 규정된 성질을 갖고 있어서 원인성이, 스스로를 파괴시키려고 애쓰면서도 자기보존의 작동들이 일어나는, 대립된 성질들의 합병으로 귀착되게 하는 것이다. (708)
따라서 연속성은 단순한 존재들로 이루어진 실재적인 것에 속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상상적 형식에 속한다. 시간과 공간은 주어진 것들(des données, 자료들)이 아니다. 칸트의 대체적인 잘못은 연속성을 경험적 대상들의 법칙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위 책, 3권 417). “지성적 공간”은 병치되어있는 단순 존재들의 환경들(des lieux)로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 환경학”(La synécologie)이 어떻게 연속적 공간의 관념을 태어나게 하는지를 설명한다. (708)
심리학은 헤르바르트의 형이상학의 응용일 뿐이다. 물론 그는 [인식]역량들의 이론에 대해 환원불가능을 주장하는 반대자, 단순 존재 속에서 내재적 원인의 다수성에 대한 반대자이다. 단순 존재에게는 표상들만이 있으며, 이 표상들은 [그의] 심리학에서는 섬유들(fibres, 신경섬유?)처럼 있으며, 이 섬유들을 가지고 심리학자들은 신체를 구성한다. 이 표상들이 동일한 본성으로 되어 있을 때, 이것들은 서로 상호 대립되고, 또 서로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단맛과 쓴맛, 붉은색과 푸른색이 그러하다. 하나의 표상이 다른 강력한 표상을 만났을 때, 그 표상은 점진적으로 흐려지고, 점점 더 의식적으로 약해져서, 완전히 억제되는 데까지 이르고, 그리고 그 표상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완전히 억제되어 변형된다. 그런데, 그 표상은 여전히 현존하며, 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그 표상은 그때에는 의식의 문턱 그 아래 있다. 헤르바르트의 심리학은 표상들의 역동적 충돌에 대한 수학적 법칙들의 탐구였다. 그는 어떻게 이 충돌이 그 결과로서 동질적 표상들의 섞임(die Verschmelung, la fusion 융합)과 이 표상들의 재생산을 갖는지를 보여주었다. 감화적 현상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종류들이 아니고 오히려 표상들의 충돌로부터 태어난다. 예를 들어, 고통[과 같은 표상]은 하나의 표상(예를 들어 친구를 잃은 고통과 같은)이 끌어들이기도 했고 (예를 들어 우리가 그를 만났었던 장소들의 표상에 의해), 동시에 억제하기도 했던 (그의 죽음의 표상에 의해) 그 무엇으로부터 나온다. (709)
그러므로 헤르바르트는 결국 선비판적 실재론을 유지했다. 실재성 자체는 우리에게 무매개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우리는 그것의 현상을 통해서만 어떤 일반적 특성들을 인식한다. “우리는 관계들 가운데 살아가고, 게다가 다른 사물들(사정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위 책, 2권, 319) (709)
헤르바르트 학파는 그 세기의 후반부에 거창한 형이상학이 몰락한 후에 많은 동조자를 얻었다. 예를 들면 철학사가인 보니쯔(Hermann Bonitz, 1814-1888), 심리학자인 드로비쉬(Moritz Wilhelm Drobisch, 1802-1896), 1859년에 민속학 협회지(Zeitschrift des Vereins für Volkskunde)를 창간했던 헤르바르 저술의 편집지인 라자루스(Moritz, (본이름 Moses) Lazarus, 1824-1903)와 문헌학자인 쉬타인탈(Chajim Heymann Steinthal, 1823-1899) 등이 있다. (709) (47QKI) (57RMH)
제6절 프리스 - Fries 709
프리스(Jakob Friedrich Fries, 1773-1843)는 1805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를 거쳐서 1816년부터 예나 대학에 교수로 지냈다. 새로운 즉 인류학적 이성비판(Neue oder anthropologische Kritik der Vernunft 1807)에서 보이듯이, 그가 칸트주의의 영향아래 있었다는 의미는 프랑스에서 꾸장(Cousin, 1792-1867)의 절충주의가 취했던 방향과 아주 유사하다는 점이다. 원리[원칙]들을 입증한다는 것, 그것은 칸트에게서 원칙들이 경험적 대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며, 프리스에게서는 원칙들이 우리에게 내적 반성을 통하여 원리들에 도달하는 것이다. “철학적 지식은 상식적 지식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철학적 기술(l'art)은 상식을 원리로부터 추출하는 것이다. 모든 철학은 우리들 자신의 내적 관찰이다.” 여기에는 근본적 세 가지 [인식]역량들이 있다. 인식, 심장(le coeur, die Gemüt, 가슴), 활동성이다. 이 셋은 각각 진리, 아름다움, 선을 목적으로 삼는다. 오성(l'entendement, der Verstand)은 특별한 역량이 아니라, 근본적 세 역량들의 발전의 어떤 정도이며, 반성에서 합리적 인식이 발견되는 정도이다. (710)
이러한 이유에서 프리스는 그의 시대의 모든 구축적 철학들에 적대적이다. 그는 이철학들 중에 뉴턴 역학에 머물러서, 심지어는 유기체적 목적성에 관한 칸트의 판단력 비판의 여러 고찰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이다. 그는 프러시아정부에 의해 예나대학의 교수직이 중지되었다. 그는 이렇게 쓰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권리는 부자들의 주먹의 권리이다.” 그런데 그의 역사철학은 인류의 발전에서 모든 목표와 모든 목적성을 마찬가지로 부정한다. 인류의 발전에서 힘과 재능(habilité)만이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710)
프리스를 가장 최근까지 계승자들이 이어갔다. 그 가운데 프리스학파 학회지(Abhandlungen der Fries'schen Schule)가 이 생각들을 이어갔다. 아펠트(Ernst Friedrich Apelt, 1812-1859) 다음으로는 철학 입문(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1913)에서 심리학에 관한 철학을 기초한 코르넬리우스(Hans Cornelius, 1863-1947)를 이 시대에 보게 된다. 넬손(Leonard Nelson, 1882-1927)은 인식이론의 불가능성(Die Uumöglichkeit der Erkenntnisstheorie)(프리스학파 학회지(3권)에서 프리스에 의해 암시된 관념을 발전시키며, 인식은 문제가 아니라 사실이며, 사실만이 내적 관찰을 인식할 수 있다. (710)
후기칸트학파의 형이상학은 독일에서 아직도 다른 많은 모순자들을 발견한다. 특히 수학자로서 또 논리학자로서 알려진 볼짜노(Bernard Bolzano, 1781-1848)는 논리적 실재성을 심리학적 전과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이해했다. 그는 지식학(Wissenschaftslehre, 1837)(4권)에서 진리들, 표상들, 명제들을 마치 이것들을 생각하는 정신과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실재성들 자체처럼 생각했다. (710)
베네케(Eduard Beneke, 1798–1854)같은 철학자들은 영국 철학의 사상들, 특히 도덕론자인 샤프츠버리(Anthony Ashley Cooper, Third Earl of Shaftesbury, 1671–1713)와 스코틀랜드 철학자인 브라운(Thomas Brown 1778–1820)의 사상과 접촉했다. (710) (47QKJ) (57RMI)
제7절 쇼펜하우어 - Schopenhauer 711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자유 부르주아지 가정출신으로 1788년에 단찌히(Danzig)에서 태어났다. 박사학위 논문 충분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대하여(Ue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1813)을 발표한 이후에, 그는 괴테 다음으로 색깔이론에 전념하여 시각과 색깔에 대하여(Über das Sehn und die Farben, 1816)을 썼다. 1818년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을 썼는데, 이 책은 어떠한 성공도 거두지 못했으며, 1820년에 베를린에 사강사(privat-docent)로서 행한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런 찰나로부터 1833년까지 안락하고 한가한 독신자로서 삶을 지냈다. 1833년에서 죽는 해인 1860년까지 그는 프랑크푸르트로 은퇴하였다. 그 시기에 그는 주요저술을 냈는데 다음과 같다. 본성에서 의지에 대하여(Über den Willen in der Natur, 1836),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 문제: 인간의지의 자유와 도덕의 토대(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thik: Ueber die Freiheit des menschlichen Willens, Ueber das Fundament der Moral. 1841), 부차적인 것과 증보(Parerga und Paralipomena, 1851)가 있다. (711)
19세기 초에 거대한 체계들이 신속하게 붕괴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그 체계들이 다시 세워졌던 같은 시기에, 18세기의 전통들을 유지해온 많은 적대적인 힘들이 있었고, 즉 낭만주의적인 것들의 허풍들에 반대하여 인간과 자연에 대한 분석적이고, 실재론적이며 건조한 관점도 있었다. 이 힘들을 구현하는 자들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스탕달(Stendhal, 1783-1842)은 1880년 독자를 위하여 현명하게 썼다. 쇼펜하우어도 또한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관념들이 나의 동시대인들에게 수다꾼(le verbiage)보다 더 한 것으로 나타나났다고는 할 수 없다.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내가 나의 시대의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만일 이 세기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하더라도, 곧 이어서 나중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템포 에 갈란투오모(tempo è galant-uomo)!” 그의 볼테르적 정신은 그에게 괴물 같은, 즉 그 당시 지적 양식을 지배하는 반인반마의 켄타루로스(centaure, Κένταυρος)같은, 크리스트교의 철학 또는 종교철학을 혐오하여 거부하게 했다(쇼펜하우어 전집 제4권, 169). 모든 사람들에게 그 정식들[교리들]을 분명한(명석한) 직관으로 직접 번역하고자하였던 그의 욕망은 그에게 거대한 체계들에 대해 혐오감을 주었다. 거대한 체계들은 정확하게 반대 주장을 하고 있었고, 즉 무매개적 자료(le donné)인 자연적 도덕적 사회적 실재성을 모호하고 암시적인 사변적 언어로 번역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상(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의 초판본 첫줄에서부터, 쇼펜하우어는 대조를 했다. “사유들의 체계(un système de pensées)는 항상 건축학적인 연결(une liason)을 가져야만 한다. 마치 한부분이 다른 부분을 지탱해주는 것처럼 그러나 반대로는 안 된다. 거기서 토대는 그 나머지에 의해서 지지[지원, 후원]받지 않고서도 그 나머지를 지탱해주고, 꼭대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지탱해주지 않으면서도 [모든 부분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유일한 사유(une pensée unique)는, 그것이 아무리 광대하다할지라도 가장 완전한 단위(l'unité, 통일성)를 보존해야만 한다. 만일, 그 유일한 사유와 소통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그것을[나머지(le reste) 또는 체계를] 부분들로 나눌 수 있다면, 이 부분들의 연결은 유기체적 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마치 각 부분은 전체에 의해 유지되는 만큼이나 전체를 유지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유기체적 이어야 한다. 어떤 각 부분도 첫째부분이 아니듯이 마지막 부분도 아니다. 그 만큼이나 각 부분에 의해서, 전체가 보다 분명하게 되고, 또 그만큼 부분들 중에 가장 작은 부분은, 전체가 처음부터 포함되었던 만큼이나 충만하게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은 아직도 신랄하고 조롱 섞인 문체(le style)는 아니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문체를 “강단(대학) 철학자”에 반대하여 사용할 것이다. 그 때[사용할 때]는 그가 자기 시대에 지성인 영역에서 성공할 모든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가 그들과 전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계적인 자는 항상 그 목적을 후퇴시키면서 목적을 목적 없이도 기다리는 약간 위험한 재능을 가진 인간이다. 이것은 마치 그 동시대의 소설가가 끊임없이 새로운 일화들(les épisodes, 삽화들)을 개입시키면서, 욕망을 분발시키기 위하여 미완성인체로 남겨두는 것과 같다. 그런데 “유일한 사유”의 인간은, 모든 관찰과 모든 반성이 마치 고정된 중심에로 가는 것처럼 자기 생각에로 귀착시키는 자이다. 쇼펜하우어의 주제들보다 더 변화무쌍하고 이질적이고 분산적인 것은 없다. 주제들, 즉 예술, 문체, 여성들, 놀이(le jeu, 경기), 제2시각, 텔레파시, 음악 등, 이 모든 것은 그에게는 좋은 것이다[마음에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 주제들 각각을 파고들어가 보면 “유일한 사유”를 발견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에게 있어서 추론은 약간 간략하다[짧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사람들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든지 간에, 사람들은 거의 무매개적으로 학설의 중심에 인도된다는 인상을 얻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즉 가장 추상적 관념들처럼 각양각색의 최소한 사실도 그에게는 암시이고 계시이다. (712)
“유일한 관념(cette idée unique)”은 어떤 관념인가? 쇼펜하우어의 학설은 마치 마술적인 폭넓은 불러옴(환기, une vaste évocation magique)과 같다. 마술은 지상의 정령들을 지배하고 이들을 환기하면서도 이들을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그때까지는 정령들이 더욱더 감춰져 있는 만큼이나 그만큼 더 모호하고 미숙한 권능들(des puissances, 잠세력들)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에 의해서 세계의 본질은, 즉 세계를 지탱하는 무엇(l'x)은 마치 의지처럼 벗겨진다.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괴테의 파우스트 3섹션 참조)와 비교할 수 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계속되는 과학적인 공격들로 인하여 거대한 기둥처럼 자라난 개(le chien)로부터 생겨났는데, 그는 그것의 본질이다” 일단 벗겨지면(폭로되면), 이 의지는 그때까지는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고통들의 원인이었지만, 해코지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713).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과학적 공격들의” 집합이다. 첫째 공격은 칸트의 관념론이었다. 그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의 세계가 우리의 표상일 뿐이며, 실재성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세계는 “우리 두뇌의 꿈”(une rêve de notre cerveau), 사실상 잘 연결된 하나의 꿈일 뿐이다. 그 꿈은 실체적인 실재성이 더 이상 아니듯이, 잠 속의 꿈들도 마찬가지로 실재성이 아니다. 잠으로부터 밤샘[각성]을 구별해 내는 연결(la liaison)은 우리 예지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이 예지(l'intellect)은 인과성의 법칙에 따라서 감각적 인상들을, 오성의 논리적 법칙들에 따라 개념을, 공간과 시간의 질서에 따라 직관의 부분들을, 결국에는 동기화의 법칙들에 따라 의지들의 작용들을, 연쇄 고리로 묶는다. 그러한 것이 “충분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이며, 이것은 표상들의 네 가지 분명한 질서들의 이유를, 즉 감각적 생성, 판단, 직관의 대상으로서 존재, 의지의 이유를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이 물질이라 부르는 것은 순수 원인성일 뿐이며, 오성의 법칙은 우리 표상들에게 우리와 연결하기를 강요하다. 따라서 이 현상주의(ce phénoménisme)는 어떤 의미에서 칸트의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그 현상주의는 감성을 오성으로부터 더 이상 구별하지 않고, 자료(le donné)를 구축물(le construit)로부터도 구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범주들을 마치 대상 일반의 개념처럼이 아니라, 마치 오성의 내재적 구조처럼 생각한다. (713)
둘째 공격: 칸트의 관념론은 우리를 세계로부터 기만당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그 관념론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자문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 세계는 표상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닌지? 그 경우에 세계는 우리 앞에 실체 없는 공상(un songe)으로서, 또는 가치를 담보하지 않는 공중의 환영(un fantôme)으로서 지나가게 할 터인데 말이다. 또는 이 세계는 아직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지?” 실재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필요”(le besoin métaphysique)와 현존 앞에서 놀람(l'étonnement)은 우리를 밀고 나가게 하여 이 세계 속에서 해독해야할 수수께끼를 보게 한다. 이것이 내부적 경험인데, 이 경험은 우리를 밝히기 시작한다. 이 내부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하나의 개체로서 인식하게 한다. 이 개체는 경향들, 필요들, 열망들을,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내적 경험은 신체적 운동을 통하여 무매개적으로 번역되어있는 모든 경향 또는 모든 욕망보다, 우리의 신체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의지를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보게 한다. 좀 전에 말한 신체는 다른 신체들 가운데 한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그 신체는 이제 마치 의지의 표현처럼, 게다가 마치 나의 의지 그 자체처럼 나타난다. 그 신체는 표상처럼 외부로부터 인식된 의지이다. “의지는 신체의 선천적(a priori) 인식이고, 신체는 의지의 후천적(a poeteriori) 인식이다;…나의 신체(mon corps)는 나의 의지의 객관성(l'objectivité)이다” 이 특이한 경험은 “탁월한 철학적 진리이다”(쇼펜하우어 전집, 제1권, 153-154). (714)
이제 단지 이 경험을 일반화하거나 넓힐 필요가 있다. 인간적 존재들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우리의 의지는 일반적으로 동기들을 동반한다. 이 의지는 예지에 의해 밝혀진다. 그러나 의지는 제자기로서(그 자체로서) 순수하고 단순한 경향성이며 완전히 맹목적이고 비추리적 경향성이다. 의지에 속하는 본질적인 그 무엇, 그것은 칸트가 지적인 특성이라 불렀던 그 무엇이고, 우리들 속에 있는 토대적이고 영속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예지는 자기의 동기들에 기여한다. 그 동기는 곧장 시간과 장소의 특별한 상황들을 규정하고, 여기에서 합리적인 한 존재의 의지가 실행된다. 그러나 “이 존재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것을, 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이런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제1권, 228) 따라서 각각의 신체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완전히 닮은 의지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이 가능성을 쇼펜하우어는 실재성으로 변형시키려 애쓴다. 자연(본성)에서 의지에 대하여(Über den Willen in der Natur, 1836)라는 그의 책은 모든 경험들을 모으는데, 이 경험들은 의지를, 유기체적 이면서도 비유기체적인 자연 속에서 마치 활동의 첫 근원처럼 드러나게[표출하게] 한다. 그리고 의지의 단순한 바깥인 신체와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게 한다. “각 존재는 존재 자신의 작품이다.” 자신의 작품이란 중심으로 향하는 힘, 무게, 탄력성, 식물적 힘, 동물적 본능 등 그 만큼 많은 경향성들이다. 이 경향성들의 긍정주장이, 예지를 통해서만 알려지는데, 자연의 물체들을 구성한다. 그 힘들은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비의적 성질들(des qualités occultes)로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물의 운동을 돌의 낙하운동보다 더 잘 이해하지 못한다.(제1권, 181) (714)
우리는 표상을 통해 매우 잡다한 대상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다수성은 표상에게만 속한다. 왜냐하면 표상의 공간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공간은 스콜라 학파들에 의해 탐구되었던 개별화의 진실한 원리이다. “왜냐하면 부분과 전체의 연관은 공간에만 속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이 직관의 형식을 포기하자마자 그 연관은 어떠한 의지도 더 이상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의지 속에 다수성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의지는 하나이다. 그런데, 돌 안에는 연관의 더 작은 한 부분이 없듯이, 인간 속에는 연관[의지]의 더 큰 한 부분도 없다. (714)
표상된 대상들은 단지 다수들로 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다. 개별자들이, 돌에서 식물과 동물을 거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계열로 등급이 이뤄진 일련의 전형들(types, 형식들)로 분류된다. 이 전형들은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방식에 따라 영원하다. 이것들은 다양한 개별자들 가운데에서 고정되어 있으며 영속적이다. 그리고 개별자들이 이 전형들을 표상한다. (쇼펜하우어는 변형론자가 전혀 아니며, 그는 형식적으로 라마르크를 비판한다.)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또한 표상의 세계에, 즉 볼 수 있으며 개관적인 그 어떤 것에 속한다. 각 전형 또는 자연의 힘은 객관화로 규정되는 정도에 따른 의지 자체이다. 세계는 마치 플라톤[칸트가 아닐까]이 믿었던 것처럼 사물 자체는 아니다.사물 자체, 그것은 하나의, 맹목적이고, 자유롭고, 비추리적 의지이다. 이 의지는 충분이유율의 어떤 형식들에도 속하지 않는다. (715)
자, 저기서는 사물의 본질이 불러내었다면, 그러면 부조리한(absurde) 의지로부터 생산된 착각적인 지각작용이 있다. 자, 여기서는 동시에 현존에 내속하는 잘못 내린 뿌리[근거]가 파악되었다면, 그것은 이유도 목적도 없이 항상 새로운 요구들(des besoins) 생산하고, 이 요구들과 더불어 새로운 고통들을(de nouvelles doueurs) 생산하는, 부조리한 생의 의지가 있다. [이로서] 모든 인간적 경험은 밝혀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희망과 동시에 허영을, 노력과 동시에 그의 필연적 좌절을 이해한다. 자기의 분노와 질투와 함께 하며, 또 [게다가] 모든 근거를 무시하는 자기 과신과 자기의 심각한 비극을 함께 하는, 성적 사랑은 새로운 고뇌들(de nouvelles souffrance 번민들) 때문에 항상 새로운 존재들을 생겨나게 한다. “ 종의 재치꾼”의 피해가, 즉 재능 있는 중계인의 손해가, 결코 멈춘 적이 없다. (부차적인 것과 증보(Parerga und Paralipomena, 1851), 44장) 이로부터 여성들에 대한 유명한 비판이 쏟아진다. 소위 말하는 여성들의 아름다움이란 이 ‘종의 재치꾼’이 우리에게 보여준 낚시 바늘이다. 결국 인간[남자]은 자기 욕망을 만족했는가? 이때에 지겨움(l'ennui, 권태)이, 즉 고뇌와 동등하게 자기에게 두려움을 주고 또한 자신을 절망에로 이끌 수 있는 악(le mal)이 시작된다. 또한 그는 모든 방식으로 그것을 회피하려고 애쓴다. “지겨움이란 이런 것, 즉 존재들이 자기들 사이에서도 인간들만큼이나 서로 거의 사랑하지 않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 찾게 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사회성의 근원이 있다.” 즉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가 있다. 지겨움의 치료는 기근에 대한 치료만큼이나 중요하다. 어떠한 진보도, 같은 잘못들, 질병, 범죄, 전쟁들이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거기에서 인류를 위해 희망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사물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eadem sed aliter)문예를 모르는 속물만이, 사람들이 “안락한 국가, 선한 경찰, 도구를 잘 이용하는 산업”(제2권, 519)과 더불어 모든 것을 [미래에]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현존하는 쾌락을 비관주의에 대립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산다는 의지로부터 생겨나는 고통은 유일한 실증적 실재성이며, 쾌락은 고통이 그치고 달아나는 찰나에서만 느껴질 뿐이다. (716)
쇼펜하우어의 작품의 초기 두 부분들(우리가 초기 두 공격들이라고 불렀던 것, 즉 칸트의 관념론과 물자체로서 의지의 발견)과 후기 두 부분들 사이에는 예술과 연민의 도덕이 관여하는데, 거기에는 주목할 만한 대조가 이루어진다. 이 초기 두 부분들은 기술적 철학의 작품들이며, 후기의 두 부분들은 그의 고뇌들을 끝내기 위하여 모든 철학적 사색의 바깥에서 인류가 발견했던 수단들에 관한 것이다. 이 후기 부분들 중에서 첫째의 것은 예술이다. 예술은 순수 관조에 의해서 우리를 행동에 묶인 고뇌들로부터 해방이다. 둘째의 것은 연민의 도덕인데, 그 도덕은 산다는 의지의 부정에 도달하며, 그 부정과 더불어, 고뇌의 폐기에 이른다. 온예술(l'Art)과 온도덕(la Moral)은 사물들의 본질의 직접적 계시이며, 철학의 회로를 통하여 통과하려 애쓰지 않고서도, 의지에 관한 고요한 결과들을 자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얻는 진실한 신지적 직관들의 계시이다. 이제 그 철학자는 예술가들의 경험들과 도덕적 가치의 실행들에 관해 반성해야만 한다. 그는 천재와 금욕자(고행자)에게서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 인식을 발견할 것이나, 그러나 동시에(둘째 부분의 철학적 단순한 인식이 부여하지 못했던 것을) 온의지(la Volonté)의 해로운 행동으로부터 해방을 발견할 것이다. 이 셋째와 넷째의 “공격”에 의해,온의지는 폭로되는(벗겨지는) 것과 동시에 무해한 것이 된다. 이(셋째와 넷째) 두 부분들의 거대한 영향은, 니체의 말에 따르면, 쇼펜하우어를 다음세대의 “교육자”로 만들었다. (716)
쇼펜하우어는 예술에 관하여 아주 분명한 주제를 가졌다. 그 주제는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이론에 또는 의지의 객관화의 정도들[정도차]의 이론에 결부되어 있다. 예술들의 각각의 임무는 이 정도들 또는 이데아들 중의 하나를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이고, 예술들은 이데아들 자체들처럼 위계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밑바탕에서 건축(l'architecte)은 열등한 정도들에 대해 즉 무게, 응집, 저항 등의 분명한 직관을 자랑한다. 그 때문에 건축은 다양한 수단들에 의해서 땅을 향한 질량의 충력을 멈춘다. 기둥머리는 기둥들에 의해 땅 위에다가 무게로 누르고, 천정은 기둥머리받침과 아치형버팀벽에 의해 지탱한다. 이 무게와 저항 사이의 충돌은 물질에 내재하는 힘을 표시한다. 이 건축 그 위에 조형 예술(les arts plastiques)이 나온다. 조각은 인간 형태의 역동적 구조를 표출한다. 온의지는 개체들 속에서 객관화되면서, 의지자체와 하부표출들을, 즉 자연의 힘들인 하부표출들을 대립시킨 장애물들에게 승리한다. 물체는 부분들의 배치이며, 부분들의 각각은 목적에 꼭 맞게 정확하게 전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 이 조건들은 다소 완전하게 실현된다. 예술가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모방을 따라서 창조한다.조각은 그것의 일반성 속에서 인간을 밝히지만, 반면에 회화(la peinture)는 특성을, 다시 말하면 여러 다른 상황들에서 인류의 다양한 측면들을, 재현(표상)한다. 회화는 네덜란드 화가들에서처럼 가끔은 매우 미세 부분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사건들의 세부사항들에, 즉 얼굴 생김새에, 몸짓에 응용된다. 역사회화(la peinture d'histoire)의 목적은 과거의 사건들의 실재적 연결성(일관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부터 인류의 특별한 면을 드러냈던(폭로했던) 그 무엇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과 회화는 이데아들(les Idées)을 직관을 통해서 보게 하는 것이다. 시인(le poète)은 단어들에 의해 지시된 개념들(les concepts)을 수단으로 이데아들을 암시한다. 여기서는 개념들을 통해서 직관적 표상에 도달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데아들을 결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시의 각 장르는 다양한 측면으로 인류성을 표현한다. 목가적 시(la poésie lyrique)는 인류의 고뇌를, 장애물들에 의해 멈춰버린 온의지(la Volonté)를 보게 한다. 그리고 이와 대비해서 자연의 무고뇌(l'impassibilité, 무표정, 냉담)를 보게 한다. 보다 높은 형식에서 비극 시(la poésie tragique)는 어떤 우발사고들의 경우에서 특성들[인격성들]의 대립으로 일어나는 드라마를 보여준다. 결국 공간적 이미지로부터 독립되고, 전적으로 추상적 사유인 음악(la musique)은 마치 우리들의 내부 사유와 같은 예술로서, 그 예술의 형식은 시간이다. 그리고 음악은, 감정이 지니는 보다 추상적인 그 무엇 속에서 감정 자체를 표현한다. 음악은 이러 저러한 환희도 이러저러한 고통도 아니고, 그것(환희 또는 고통)을 생산하는 동기들 없는 환희 자체, 고통 자체이다. 우리 자체에 보다 근본적인 그 무엇과 함께하는 친근성을 통해서, 음악은 현상의 이미지가 더 이상 아니고, 의지 자체의 이미지이다. “세계는 구현된 온의지 만큼이나 완전히 구현된 음악이다.” (717)
천부적 재능(la génie, 천재)이란 이데아들을 직관하는 [인식] 역량의 발전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관객과 소통하는 이 직관 속에서 주체(le sujet)는 순수 관조의 상태 속에 있다. 이 순수 관조 상태는 주체에게 자기의 개별성과 망각하게 하고, 그 개별성을 고뇌에서 뽑아내게[해탈하게] 한다. 그 주체는 더 이상 개인이 아니며, “세계의 유일한 눈이다.” 그러면 예술에 의해 표상[재현]된 대상들은 더 이상 의지에 연관하지 않고, 오히려 순수 인식에 연관한다. (717)
예술은 온의지의 덧없는 진정제일 뿐이다. 그런데 결정적 “공격”즉 우리를 해방시키는 공격, 그것은 도덕적 삶 속에서 표현되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절대적 동일성의 인식이다. 유일한 온의지는 스스로 개별자들로 조각나고, 이것들의 각각은 자기의 현존을 보존하는 절대적 의지, 비조건적 의지이다. 이기주의는 그것의 본질 자체에 기인한다. 존재의 욕망은 어떤 한계도 어떤 제한도 인식하지 않는다. 이에 대립[상반]되는 모든 것은 화, 증오, 불편 등을 자극할 것이고, 만일 두려움이라는 제한이 없다면 - 이 두려움은 이기주의의 다른 한 형태인데 - 쉽게 범죄나 살인으로 나아 갈 것이다. 이 에고이즘에 대해 투쟁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도덕적 본능들을, 즉 대부분에 있어서 근심들, 편견들, 허영들로 이루어진 도덕적 본능들을 고려할 수 없다. 범주(정언)명법의 도덕은, 그 편에서 보면, 그것은 어떠한 근거들[이유들]도 주어지지 않는 일종의 프러시아의 훈육일 뿐이다. 그 도덕은 명령하고 복종하기를 원하는 신 없이 지낼 수 없다. [진솔한] 도덕은 마치 나머지의 모든 철학처럼, 지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성을 알게 해야 한다. (718)
각각의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들의 이기주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애쓴다. 여기서부터 공포와 처벌에 의해 범죄를 예방하는 정의의 도덕이 나온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국가는 불의를 모방하는 것 이외 다른 임무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는 이기주의로부터 생겨 나와, 교육의 임무와 더불어 볼 필요가 아무것도 없다. (718)
그러므로 정의의 도덕은 이기주의를 토대로 하는 착각(l'illusion)을 건드리지 않는 체 간직한다. 이 착각은 다수의 존재들의 착각이다.개인들의 정체성(동일성)에 대한 인식이 이 착각을 파괴한다. [그 이유는] 이 정체성이 이기주의로 하여금 부조리[불합리]하고 가증스러운 어떤 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그 자체적으로 갉아먹는 의지이다. 이 인식은 연민(la pitié)을 동반한다. 연민은 복음 속에서,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성스러움 속에서 매우 완전한 자기표현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 교리는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 각자에게 개인적 안녕을 설교하고, 또 신에게 세계를 구출할 업무를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것과 다른 것으로 힌두교의 금욕주의가 있다. 특히 자비와 고행으로 번역되는 완전한 헌신(l'abnégation)에서 이 인식은 주권적인 치료제(remède souverain)가 된다. ‘산다는 의지’는 체념하고, 스스로 제거된다. 이것이 ‘산다는 의지’의 부정이라는 니르바나(Nirvana)의 상태이다. 이것의 긍정적 측면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개인적 창도력들에 의해서만 세계의 안녕을 기대한다. 사람들이 그래도 대충 말할 수 있는 것은, 금욕자란 가장 극한적인 그의 정도에서 개인이며, “그 이유로 해서, 온의지의 제거에 의해서 종의 특성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까지 가는 자”라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활동으로 개화하는 전체로서 서구의 인류성의 개념에 대해서, 자기 속에 인류성을 제거하는 힌두교 현자의 자기 소멸(la rétraction en soi, 열반)을 대립시킨다. (719) (47QLG) (57RMJ)
제8장 보스트룀 Boström 719
스웨덴 철학자 보스트룀(Christopher Jacob Boström, 1797−1866)의 관념론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정의 될 수 있으리라. 그의 관념론은 후기칸트주의자들의 자연주의적 낭만주의를 벗어나는데 있다. 즉 “모든 근대 관념론자들은, 셸링과 헤겔을 포함하여, 상대적 관념론자들일 뿐이다. 셸링과 헤겔은 실체성을 소위 말하는 자연이 되기를 원했고. 이에 비해 칸트와 피히테는 거기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당하고 질서 속에 있었던 것이지만, 셸링과 헤겔이 그렇게 했던 방식은 부정확하다. 이 두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대로 자연과 그에 대립되는 지성이 모든 실재성을 이 두 가지[자연과 지성] 자체들에게서 퍼냈다고 찬양했다…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자연(본성)은 우리 제자기(en nous)로서 그리고 우리 맞자기(pour nous)로서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제시했다면,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무한한 합리적 존재들의 필연성을 인정하더라도, 사람들은 다양하게 닮은 자연(본성)들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자연(본성)들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신과 그의 영원한 관념들뿐일 수 있다. 이 모든 자연(본성)들은 이것들의 현상들이다” (독일어판 철학 서재(Philosophischer Bibliothek, 1923)의 제30권 속에서 보스트룀에 대한 독일어 번역에서 프랑스어로 번역). 최고 꼭대기에 신을 둔 인격들의 위계질서, 모든 실재성과 모든 완전함을 선물로 받은 존재, 하부 삶에서 상부 삶을 거쳐 영원한 삶에까지 올라가는 인격들의 발전, 이러한 것은 총체적으로 보아 보스트룀의 세계의 직관이다. 그는 라이프니츠와 버클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719) (16:11, 47QLH) (18:04, 57R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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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1767-1835) 독일 철학자, 프러시아 정부요인, 후기칸트주의자
1768 슐라이에르마흐(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목사, 고전문헌학자, 철학자, 교회정치가, 교육학자. 종교에 관한 강론(Reden über die Religion. 1799(fr. Discours sur la religion 1799), 앞의 작품과 다른데 제목이 비슷한 것인지? Über die Religion. 1799, fr. De la Religion. Discours aux personnes cultivées d'entre ses mépriseurs, 1799), Monologen. 1800(fr. Monologues, 1800).
1773 프리스(Jakob Friedrich Fries, 1773-1843), 독일 철학자. Neue Kritik der Vernunft. Mohr & Zimmer, Heidelberg 1807.
1776 헤르바르트(Johann Friedrich Herbart, 1776–1841), 독일 철학자, 심리학자, 교육자. 페스탈로찌의 생각: 직관의 ABC에서(Pestalozzi's Idee eines ABC der Anschauung, 1804(Göttingen 1804), 전집(Sämmtliche Werke. 1851)(éd. Kehrbach, 19 vol., 1887-1912. [케르바흐(Karl Kehrbach, 1846-1905) 독일 교육학자. 헤르바르트 전집 편집자.]
1788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 철학자. 충분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대하여(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1813)(fr. De la quadruple racine du principe de raison suffisante), 시각과 색깔에 대하여(Über das Sehn und die Farben, 1816)(Sur la vue et les couleurs),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상(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fr. Le monde comme volonté et comme représentation), 본성에서 의지에 대하여(Über den Willen in der Natur, 1836)(De la volonté dans la nature), 윤리학의 두가지 근본 문제: 인간의지의 자유, 도덕의 토대(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thik: Ueber die Freiheit des menschlichen Willens, Ueber das Fundament der Moral. 1841)(Les Deux Problèmes fondamentaux de l'éthique : La liberté de la volonté ; Le fondement de la morale (1840), 부차적인 것과 증보(Parerga und Paralipomena, 1851)(Parerga et Paralipomena)
1809 폰 레온하르디(Hermann von Leonhardi, 1809-1875) 독일 철학자. 식물학자. 크라우제의 생애와 학설(Krause's Leben und Lehre, 1902).
1833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 독일 역사가 심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
1839 떼오뒬 리보(Théodule Ribot, 1839-1916), 프랑스 심리학자 철학자. 동시대 독일 심리학(La Psychologie allemande contemporaine, 1879).
[1851 뷔르도(Auguste Burdeau, 1851-1894) 프랑스 작가, 철학교수, / 루스(R. Roos, s.d.), 쇼펜하우어 프랑스어로 번역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상(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fr. Le monde comme volonté et comme représentation), trad. A. Burdeau 1880-1890, nouv. éd. R. Ross,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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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 이탈리아 관념론 철학자. 정치가. Nuovi saggi sul Goethe(괴테에 관한 새로운 사상), Bari, 1934.
1868 뤼상(Théodore Ruyssen, 1868-1967), 프랑스 철학자, 평화운동가. Th. Ruyssen, Schopenhauer,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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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르후/르루(Robert Leroux, 1885-1961)프랑스인 독일 연구자, 특히 훔볼트연구자이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수. 게르만 연구학회 회장. Guillaume de Humboldt, la Formation de sa pensée jusqu'en 1794, 1932)
1887 호발트(Ernst Howald, 1887-1967) 스위스 고전 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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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셰-뤼(Jules Chaix-Ruy, 1896-1986) 프랑스 정치철학자. Chaix-Ruy, Actualité de Schopenhauer, Les Etudes de Philosophiques, 1961.
1898 린텔렌(Fritz-Joachim Paul von Rintelen, 1898-1979), 독일 철학자, 고교교사. Goethe als abendländischer Mensch. Kupferberg Verlag, Mainz 1946.
[1913 골드만(Lucien Goldmann, 1913-1970) 유대계 루마니아 출신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 Frank, s.d.]
1913 후앙 로페즈-모릴라스(Juan López-Morillas, 1913-1997) 스페인문학 전공자. 스페인태생 1935년 미국으로 대학교수.
[1917 뢰나이젠(Hans-Wolfgang Freiherr von Löhneysen, 1917-2004) 독일 예술사가. 쇼펜하우어 전집 발간자.] (참고재정리, 57RMG)
(17:27, 47QLI) (20:24, 57R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