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마태복음 제31강
말씀 / 마태복음 20:17-34
요절 / 마태복음 20:28
도리어 섬기려 하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늦었지만 복음수양회를 마음으로 섬겨주신 동역자님들, 강사님들, 찬양팀, 특송팀, 서빙과 실무자들, 한 분 한분 생각할 때 감사하고 소중한 분들입니다. 혜인님은 청소년인데도 며칠밤을 연구하고 준비했을 정도로 진심을 다했습니다. 아마 섬기는 모든 종들이 다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수양회 끝나고 어마어마한 피곤이 몰려왔는데도 감사했습니다. 섬기는 삶이 피곤하고 희생이 많지만 기쁨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자로 살 수 있는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말씀하십니다. 18,19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만 벌써 세 번째입니다. 상황묘사 또한 이전보다 점점 구체적입니다. ‘결의, 넘겨짐, 조롱, 채찍질, 십자가에 못박힘, 삼일 후 부활...’, 영접할 때까지 반복하여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든지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심어야겠다고 작정하신 모습입니다. 마음준비 없이 고난을 만나면, 때로는 하나님의 연단을 받는 쪽으로 가지 아니하고 마귀의 시험을 받는 쪽으로 흘러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6장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십자가 예고 말씀에 제자들의 반응은 점점 달라집니다. 첫 번째는 심하게 반발합니다.(16장) 두 번째는 매우 근심했습니다.(18장) 그런데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지금, 반발이나 근심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제는 피해갈 수 없는 사건으로까지는 영접한 것 같습니다.
그럴지라도 고난의 영적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동원하여 청탁하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좌우편의 자리가 무엇이길래 엄마 찬스까지 사용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을 만큼, 항상 곁에서 보고 배우고 싶다는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었을까요? 혹은 좌우편의 자리가 있어야 예수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명감이었을까요? 세상에서의 자리의 의미는 지위 혹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자리가 있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자리가 있어야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월급도 오르고 더 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고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업무를 주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은택님이 진급에 진급을 거듭하여 서울시 교통국장이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최국장님과 친해지려고 최베드로 목자에게 밥 사주고 선물 주겠다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최국장님 마음에 들기 위해 주일예배에 참석할 사람이 있을 수도 모릅니다. 자리가 주는 매력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자리가 은인의 위치에 서게 할 수도 있고 원수를 대신 갚아줄 수 있는 능력을 주기도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리가 가진 파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 보시기에, 야고보와 요한은 ‘자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리의 의미는 ‘남을 주관하고 자기를 빛나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헷갈릴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자리가 계급처럼 보여질 수 있을 때입니다. 평신도 위에 사제, 사제위에 주교, 주교 위에 추기경..., 자리가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모습처럼 다가올 때입니다. 자리가 신앙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야고보와 요한은 모르고 있습니다. 신앙의 수준은 자리가 아니라 잔에 있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잔을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마시겠습니다. 저희도 거저 먹을 생각 없습니다. 고생할 각오, 충분히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허풍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자로 살기 위해 배와 부친을 버리는 아픔도 견디었고 밀이삭을 잘라 먹어야 할 만큼 배고픔의 설움도 견디었습니다. 불안한 미래와 세상의 핍박에도 버티었습니다. 그렇게 견디며 여기까지 온 것처럼, 앞으로도 어떤 고난과 시련도 견딜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잔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인데, 두 제자는 마시겠다는 잔은 자기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잔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까지 내려가는 고난인데, 두 제자의 잔은 남들보다 높아지기 위한 고난의 잔입니다. 무엇을 위한 잔이냐, 거기에 따라 ‘내 잔’이 될 수 있고 ‘예수님의 잔’이 될 수 있습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내 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고난을 받으면 예수님의 잔입니다. 자기 잔은 아무리 쓰고 고통스러워도 기꺼이 마시면서도 예수님의 잔에 대해서는 조금만 쓰다 싶으면 내뱉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채찍에 맞고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견디기 힘든 고난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잔을 마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의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제자가 성장한다는 것은 영광만 좇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잔을 마시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단 고난을 견디면서 시작합니다. 자리를 위한 고난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든, 고난을 견디며 연단받고 성장해갑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잔과 자리의 함수관계를 끊어버리셨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합리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리 = 신앙의 등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이든지, 낮은 자리이든지, 각각의 자리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경민 목자는 26년 진급 대상에 올라가지 못해 잠시 마음이 서운했습니다. 하지만 진급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중한 동역자와 가족들, 양들과 복음역사에 마음을 쓰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을 깨닫고 27년 방향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리 싸움에서 잔을 마시는 싸움으로 이동해가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제자들이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야고보와 요한이 은밀하게 청탁했을 것 같은데..., 제자 세계에서는 비밀이 없습니다. 순식간에 열 제자에게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두 제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깊이 생각해 본다면, 분노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헛짓했네. 아직도 자리 타령이야? 밑바닥 드러냈네 쯔쯧’, 이런 분위기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열 제자들은 모두 분노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맘충이다, 모든 보직에서 해임하고 서열 조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스승은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자리를 놓고 물밑 경쟁을 벌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제자들도 다른 제자들을 주관하고 권세를 부려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26,27절을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야고보와 요한은 크고 싶은 마음, 으뜸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자리를 요구했는데, 예수님의 답은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대한 남편이 되기를 원하면 아내를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 되는 아내가 되기를 원하면 남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섬김은 무엇이며, 종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섬김이란 상대방의 필요를 살피고 채워주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종이 되는 것은 나보다 상대방을 높게 여기며 상대방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종은 때마다 필요한 것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섬기는 종이 되려면 내면이 강건해야 합니다. 비교의식이나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섬기다가 상처 입고 분노에 빠집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이나 탐욕 혹은 정욕 같은 욕망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섬기는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섬기는 종으로 헌신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누군가를 비추려면 내 안에 빛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받는 자임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방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돕고자 애를 쓰면서 내 안에 빚이 비추기도 합니다. 가끔씩 목자들이 양들에게 내리는 처방이 있습니다. “양을 섬겨보면 다 알텐데...”, 섬김은 사람안에 있는 것들을 드러냅니다. 교만과 열등감, 상처와 불신, 긍휼과 소망...,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앞에 자기발견의 통로가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세계에 눈을 뜨게 하기도 합니다. 오해받고 상처받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눈을 뜨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연단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깨어져야만 자기중심성에서 나오고 불의 시험을 통과해야 천박한 영혼이 업그레이드됩니다. 부지런히 근육을 움직이며 강건한 육체가 만들어지듯이, 부지런히 섬김으로 강건한 영혼이 만들어져갑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섬기는 종의 완전한 모델입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래 자리를 생각하면, 예수님은 섬김 받으셔야 마땅한 분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습니다. 출발부터 자리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서 출발했습니다. 자리에 걸맞는 대우를 받고 싶은 마음을 부인해야 섬기는 종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영광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기보다 사람들과 함께 하며 사람들을 돕고 구원할 사람의 아들로 보냄 받았음을 붙드셨습니다. 여러 모양의 허물과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정죄하지 아니하고 도와주신 비밀입니다.
교만한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 거듭남의 비밀을 깨우치시며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상처 많은 사마리아 여자가 왔을 때, 아쉬운 사람의 모습으로 물 좀 주시겠습니까 요청하며 대화의 문을 여셨습니다. 문둥병자, 세리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더럽다 하지 않고 손을 대고 함께 식사하며 몸과 마음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비교의식과 경쟁의 굴레에 갇힌 제자들을 인내하며 가르치고 또 가르쳤습니다. 영적으로 둔감한 베드로 한 사람이 깨어나기까지 참고 또 참았습니다. 세 번 부인했는데도, 부활을 목격하고 물고기 잡으러 갔는데도 심방하고 먹이며 목자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 섬기셨습니까!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반면 죄는 구역질날 정도로 불쾌하고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하고 끔찍한 일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불합리한, 가장 끔찍한 섬김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해 도망치고 무리들은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까지 버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심지어 영적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그 몸으로 담당했습니다. 세상의 누가 예수님의 섬김보다 높은 섬김을 할 수 있고 세상의 누가 예수님보다 깊은 섬김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 앞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의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며 그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참된 복은 예수님의 섬김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자리에서 섬김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올해 저는 큰 지부 목자가 맡아야 선교사도 좋고 맡은 목자도 좋다는 의견과 함께 중남미 코디네이터 자리를 여러 번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드러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멀었습니다. 유럽이나 오세아니아처럼 지구 건너편도 아닌 지구 반대편까지, 가는 시간만 30시간이 넘었습니다. 올해 들어 허리상태까지 좋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선교지 심방이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남아공 수양회에는 비행기 타는 순간부터 6페이지 영어 인생소감을 쓰면서 가기도 했습니다. 어느 CIS 지부장 수양회에서는 가는 중간에 메신저로 뽑혀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되돌아보니 그때는 쓰임 받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좋아보이는 점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지난 멕시코 국제 수양회에서는 주로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몸도 피곤하고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도 없고 선교지도 알만큼 알았습니다. 대표의 강권에 순종하여 다시 맡으면서, 나이를 먹을수록 각오와 결단이 새롭게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좋아서 섬기는 것도 좋지만, 필요하기에 섬기는 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섬김의 도리를 배우는 목자, 섬김의 도리를 배워가는 교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빛나는 교회이며 영광의 백성입니다. 섬김의 세계에 날이 갈수록 눈이 뜨기를 기도합니다.
29-34절은 섬김의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큰 무리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였습니다.(29)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30)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31절을 보면, 무리들은 불쌍히 여기기보다 귀찮게 여겼습니다. “잠잠하라. 너희들같이 하찮은 자들이 끼여들 자리가 아니다”, 아마 그들은 예수님의 격에 맞는 합당한 의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을 불러 물으십니다. 3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영화에 비유하면 복선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좌우편의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으면서도 당연히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많은 사람을 대속하고자 생명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에 대해 눈이 감겨 있는데도 눈을 뜨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맹인들은 입을 열어 간구합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져주십니다. 곧 있으면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죽으실 분입니다. ‘내가 더 힘든 사람이야!’,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피해의식에 붙잡히지 아니하고 도움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맹인들이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와 같이 제자들도 예수님에 세계를 눈 뜨기를 원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고 소원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눈을 뜨고 밝히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섬기는 종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손길이 우리 인생에도 찾아와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고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종으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그 일을 이루셨고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