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만성(統萬城)! 그 이름만 들어도 나의 가슴은 이렇게 설렌다. 왜냐고? 통만성에 관심을 가진 지 이미 10여년이 넘었고, 내가 드디어 만난 통만성은 환상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통만성!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대부분은 물론,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이 통만성이 언제 만들어졌고,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는 이들이 별로 없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는 몇 년 전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미국 디즈니가 만든 만화영화 “뮬란”(MULAN)의 주인공 목란(木蘭)이 나서 성장했던 곳이 통만성이었다고 고증한 바 있다. 중국문학이나 역사에 대해 웬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통만성은 몰라도 목란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쯤은 잘 알 것이다. 물론 만화영화만 본 독자는 목란이 중국여인인지조차 잘 모를 테지만….
통만성은 오호십육국(AD 304~436) 중 하나로 흉노와 선비의 혼혈족 출신인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운 하(夏)라는 조그마한 왕조의 수도였다. 오호십육국이 뭐냐고 묻는다면 여기서 그것까지 설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나 뒤져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禹)임금이 세운 삼대(三代)의 하(夏)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오호십육국 시대의 하나라를 통상 ‘혁련하’(赫連夏)라고 지칭한다.
선조들은 원래 유씨(劉氏)라 칭했지만, 이 나라를 건국한 혁련발발이 ‘아름답고 빛나는(徽赫) 하늘(天連)’이란 뜻의 혁련으로 성을 바꾸었다. 통만성은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축조한 혁련하의 도성이었다. 혁련하는 26년간 존속했던 단명의 왕조였고, 따라서 역사상 영향력이 그다지 큰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간 세인들은 물론 역사가들의 주목마저 받지 못하고 있었다.
통만성에 대한 나의 관심은 위에서 썼듯이 ‘목란시’(木蘭詩)가 어느 시대 작품이며, 목란이라는 처녀가 어느 전투에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했나 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지금도 내가 논증한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학계에서는 논란이 많다. 내가 그곳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은 통만성이 목란의 고향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최근 연구관심이 유목민족과 성곽의 관계에 미치다 보니 순수 유목민족이 쌓은 성곽 가운데 그 형체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이 바로 통만성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통만성을 답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지가 이렇게 오래 되었기 때문에 거의 갈망에 가까운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만성은 중국의 여느 유적지를 찾듯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항로 교통의 사각지대, 그것도 인적이 드문 사막 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통만성을 찾은 것은 1999년 7월7일의 일이었다. 한국위진수당사학회(韓國魏晉隋唐史學會) 회원이 중심이 된 답사반 38명의 일원으로 유적 답사에 나선 것이다. 당초 답사 코스를 짤 때 다른 곳은 몰라도 통만성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행사에서는 그곳이 미개방 지구라면서 난색을 표했다. 그래서 이미 일본과 중국 학자로 구성된 중국서북로영하섬북조사단(中國西北路寧夏陝北調査團)이 1996년 여름 그곳을 1차 답사했다는 사실을 대면서 다시 강력히 밀어붙였다.
사실 상당히 자세한 중국 지도를 보아도 통만성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통만성이란 1,600여년 전의 이름이지 현재의 지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는 그 유적지 옆에 위치한 백성자(白城子)라는 작은 촌마을이 이 지역의 지명을 나타낼 뿐이다. 우리나라의 50배나 되는 면적을 가진 중국의 지도에 이런 촌마을까지 표기할 여유가 없고, 또 그 주위에 도시라고 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답사를 다녀온 지금도 독자들에게 지도상 어디에 위치해 있다고 정확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곳을 안내해 본 적이 없는 여행사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도로에서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 곳과 먹을 곳이 특히 문제였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일정표에 통만성이 들어가게 됐지만, 그것은 순전히 나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
통만성 유지에 대한 나의 지식은 이렇게 초보적인 것이었다. 답사 출발 전 중국에서 발행되는 “고고문물”(考古文物) 잡지에 게재된 답사보고서를 통해 내가 얻어 모은 지식에 의하면 통만성은 대개 이러했다. 우리에게 하투(河套)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오르도스(鄂爾多斯·ordos) 내에 광활하게 펼쳐진 모오소(毛烏素)사막 동남쪽 끝부분에 위치해 있다.
행정적으로 섬서성(陝西省) 정변현(靖邊縣)에 속하지만,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와 섬서성의 교계(交界)지역에 위치해 남쪽의 정변으로부터 110리, 동쪽의 유림(楡林)으로부터 240리, 북쪽의 내몽고자치구 이극소맹(伊克昭盟) 오심기(烏審旗)로부터 180리 떨어져 있다.
황하의 지류로 오르도스를 가로질러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무정하(無定河) 동북안의 표고(標高) 1,150m 정도의 높이에, 서북이 높은 경사면에 통만성 유지가 있다. 지도상에 나타나는 오르도스 지역을 얼굴로 본다면 그 대부분이 주근깨처럼 점들을 찍어놓고 있으니, 이것은 이 지역이 사막이란 표시이다.
사막이라고 하면 우리는 초등학교 때 배운 바대로 끝없는 모래밭과 신기루를 예상하겠지만, 모오소 사막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땅은 모래이되 간간이 이름 모를 풀들이 덮여 있었고 차창 밖으로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이 지역에는 현재 170여 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사막화를 방지하기 위해 식수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모습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지질시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호수가 있었고, 혁련하가 존속했던 5세기 초엽에는 농경과 목축이 가능한 기름진 땅이었다. 사막화가 뚜렷이 나타난 시기는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당대(唐代)였다고 하니 지금의 풍경으로 당시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실 여행사에서 안내하는 여행이란 경치가 아름답든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 아니면 안된다. 사실 통만성 근방 100km 이내에는 단체손님이 묵을 만한 여관시설이 갖춰진 도시가 없다. 아침 일찍 전세버스로 철강도시 포두(包頭)를 출발해 오르도스 고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하루 종일 달려 저녁 무렵에 도착한 곳이 오심기였다.
내몽고자치주의 행정단위는 중국 본토와 달리 현(縣)에 해당하는 것을 맹(盟)이라 하고, 향(鄕)에 해당하는 것을 기(旗)라 한다. 이 지방제도는 청대의 몽고족 통치단위에서 연원한다. 오심기는 이극소맹의 행서(行署) 소재지인 동승(東勝)시로부터 남쪽으로 220km 떨어진, 내몽고자치주의 행정구역 가운데 위도상 가장 남쪽에 위치하는 기(旗)다. 총면적 11,645 ㎢에 인구 9만1,000명, 그 가운데 몽고족이 약 3만명 살고 있다. 마침 우리 여행단의 안내를 맡았던 내몽고청년여행사의 총경리(사장)가 이곳 오심기 출신 몽고족이었고, 그가 고향 방문 겸 안내를 맡아 지프를 타고 우리 답사반의 버스를 선도했다.
사장이 오심기 당국에 우리가 갈 것이라는 전갈을 미리 해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뜻밖에 성대하고(?) 재미있는 환영의식을 거쳐야 했다. 몽고 풍속에는 귀한 손님이 오면, 마을 어귀 10리 밖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이런 관례에 따라 기장(旗長)이 우리를 출영하기 위해 그곳까지 나왔고, 양 한마리를 잡아 이미 상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곧바로 환영의식이 진행되었다. 나이 순으로 우리 대표 4명이 양고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6~7명의 몽고 여자가 몽고노래를 하며 춤을 추면서 고량주 한사발을 권한다. 우리는 몽고 습속에 따라 왼손으로 술잔을 건네받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세번 술잔에 담갔다가 하늘과 땅 그리고 자기의 이마를 향해 술 묻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술을 단숨에 마셔야 했다. 권한 술을 거절하거나 뱉어내는 것은 커다란 실례다. 소주 한잔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였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 마셔야 했다. 대표들의 복잡한 의식이 끝나자 답사반원 모두가 다 술 한사발씩을 마셔야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가장 큰 호텔인 오심빈관(烏審賓館)으로 이동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자 답사반을 위한 성대한 무도회가 또 열렸다. ‘가해무향’(歌海舞鄕)으로 이름난 오심기는 하루 종일 버스로 사막길을 달려온 우리를 그냥 휴식을 취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오심기의 몽고인들과 하나가 되어 밤늦도록 놀았다. 무도회 마지막에 나는 우리측 대표로 급조돼 답사를 하게 되었다. 별 할 말이 없어 “오심기민의 따뜻한 환대를 한국에 돌아가거든 반드시 신문 등 대중매체에 알리겠노라”고 평소 나답지 않게 큰소리쳤다.
오심기는 엄청난 천연가스 매장량에, 천연소금, 무공해 농산품, 그리고 목축업으로 사막 속의 진주라고 자랑이 대단하다. 내 옆에 앉아 있던 기 간부 한사람은 내가 역사공부를 하는 사람인 점을 고려해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구석기 문화를 꽃피웠던 소위 ‘하투인’(河套人)의 후예라는 점을 강조한다. 내 급조된 연설을 들은 오심기 여유국(旅游局)에 근무하는 설씨(薛氏)가 신문에 당신 글이 실리거든 보내달라고 주소를 적어 준다. 줄곧 같은 방을 썼던 N교수가 이 순수한 사람들을 박선생이 속여서는 안된다고 걱정 겸 압력을 가한다.
오심기는 역시 사막 속의 도시다웠다. 가장 난처하고 인상깊었던 일은 각 방에 설치된 좌변기에 좌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묵은 방뿐만 아니라 모든 방이 다 그랬다. 사기 변기 위에 엉덩이를 갖다대니 촉감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먹고 싸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 문제는 급하면 형편에 따르게 마련이었다. 모든 변기가 왜 그 모양인지 그리고 대체 어떤 방법으로 용변을 보는 것인지 물어 보고 싶었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사람이라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그 점이 못내 궁금하다.
오심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우리는 아침 일찍 통만성으로 향했다. 거의 미지에 가까운 통만성을 처음 찾는 나로서는 설레임과 함께 불안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기대와 실망 어느 쪽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막 사이로 난 작은 길을 45인승 일본제 히노(日野)버스가 달리자니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길을 확장하고 있는 곳 중간중간에는 어김없이 긴 막대기를 가로질러 놓고 통행세를 받고서야 통과시킨다. 현대판 이금세(釐金稅) 징수인 것이다.
앞에서 지프로 우리를 인도하던 여행사 사장이 먼저 교섭했지만, 그런 곳을 만나면 30분은 족히 지체되기 일쑤였다. 세금의 액수를 합의하는 데 이 정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좁은 길이라 높낮이가 조금만 차이가 나도 버스 밑바닥이 땅에 닿기 때문에 통과가 불가능하였다. 그때마다 모두 내려 교대해 삽으로 높은 곳의 흙을 파내어 낮은 곳을 메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안내를 맡았던 조선족 김양도 걱정이 태산같다.
소심한 성격에 걱정되어 점심 먹을 곳을 예약해 두었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도시락을 준비하려 했는데 일회용 식기가 없어 준비하지 못했다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가다가 어디선가 먹을 곳이 있겠지 한다. 그녀 역시 대책없이 가는 것이다. 40여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 사막 한가운데 어디서 배를 채운다는 말인가? 중국이란 원래 이런 곳이다. 통만성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곡절도 많았다.
오심기 구역 가운데 제일 남쪽 마을인 파도만(巴圖灣)에 가까워지자 길 옆으로 파란 호수가 우리를 맞이한다. 사막 속의 파란 호수. 그런 대로 정취가 있다. 수력발전과 수리를 위해 황하의 지류 무정하(無定河) 상류인 홍류하(紅柳河)를 막아 댐을 쌓은 것이다. 우리는 한가롭게 그 경치를 구경할 계제가 아니었다. 다시 그 호수를 옆으로 하고 또 걸어야만 했다.
보수중인 흙길은 빈 버스도 겨우 통과할까 말까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야 겨우 파도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급조한 점심을 먹고 다시 통만성을 찾아 나섰다. 말이 길이지 통상 차가 다니는 길 같지 않았다. 길은 우리를 더욱 피곤하게 했고, 간혹 우리의 머리를 차 천장에 부딪치게 했다. 앞서 가던 지프가 길가에서 놀던 동네 아이 두명을 차에 태우고 떠난다. 급조한 현지가이드였다.
왼편 창문 밖 멀리 언덕 위에 잉카 유적 같은 것이 보였지만, 그것이 통만성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강력히 우겨 이 많은 인원을 데려온 것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오늘 하루 답사코스는 통만성 하나밖에 없는데 말이다. ‘차가 중간에서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만약 통만성 출입이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어떡하지? 또 사람들이 고작 이런 곳을 보려고 이 먼길을 왔나! 하고 실망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입이 탄다.
드디어 통만성 입구에 도착했다. 거기에서도 어김없이 긴 막대기가 길을 막고 있다. 통행세를 지불한 후 차가 언덕을 기어오른다. 저 멀리 펼쳐진 폐성(廢城)의 흔적. 그러나 아직 마음에 차지 않는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통만성은 외(곽)성, 동성(東城), 서성(西城) 등 세구역으로 나뉜다고 되어 있다. 차에서 내린 지역이 동성(東城)구역 입구였다. 동성은 서성에 비해 많이 파괴되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서성 동북우(東北隅) 적루(敵樓·墩臺)에 올라섰을 때 펼쳐진 서성의 웅장한 모습을 대하고는 같이 간 동료들의 얼굴이 달라진다. 7월의 태양은 그렇게 따가울 수가 없었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아무리 눈을 돌려보아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광활한 사막, 그리고 폐성. 이런 모든 것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조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서북우 적루를 지나 서남우 적루 앞에 섰을 때 ‘아!’라는 소리 외에는 우리 모두 말을 잃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이곳 통만성에 왔다는 자부심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1996년에 답사했던 토로번(吐魯番)의 교하고성(交河故城)이나 고창고성(高昌故城)과는 또 다른 충격에 우리는 이 감탄사 외에는 딴 수식어를 찾지 못했다. 팔 다리 할것없이 햇볕에 노출된 부분이 검게 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것이다.
6박17일 동안의 답사를 마친 후 북경에 돌아와 이번 답사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곳이 어디였느냐는 질문에, 통만성이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표현력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사실 독자들에게 그저 ‘통만성을 보고 온 자만이 통만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다. 다만 여기서 이 통만성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나의 임무이리라.
통만성은 1,600년 전에 건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모습이 양호하게 남아있어 위진남북조 시대, 특히 오호십육국·북조 시대의 도시·건축사 연구에 큰 의미를 지니는 유적이다. 지표조사만 했을 뿐, 발굴은 아직 엄두조차 못내고 있다고 한다. 우리 여행단원 중 한사람이 한·중 합작으로 그곳을 발굴하자는 제안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혁련하는 중국인에게 별로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 나라였다. 26년간 오르도스 지방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동방의 선비 탁발족이 세운 대(代) 혹은 북위(北魏)세력과 섬북(陝北) 내몽고 산서(山西) 북부 황토지역의 패권을 다투다 결국 패배자가 되어 사라진 왕조였다. 그러나 한때는 북위의 전신인 대국(代國)을 멸망시키는 데 일역을 담당했고, 장안에 수도를 두었던 후진(後秦)의 요씨(姚氏)정권을 멸망시킨 남조 유송(劉宋)의 창업자 유유(劉裕)의 세력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는 등 창성하던 시절도 있었던 왕조였다.
혁련하의 탄생 이후 선비 탁발씨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었다. 이들 두 세력이 근거했던 지역은 지역적 단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연적인 경계로 두 지역으로 나뉠 수 없었던 동일 성격의 지역단위였다. 따라서 두 왕조가 공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일종의 서바이벌게임(survival game)을 벌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숙적관계였던 것이다.
이 두 왕조는 오호십육국의 다른 왕조들과 달리 초원지역에서 가장 늦게 중원지역으로 진출한 왕조였다. 그런 만큼 유목적인 성격을 진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유목민족이란 성곽을 지어 정주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수초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 특징이므로, 두 왕조 모두 처음에는 주 근거지인 도읍을 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고심했다.
그러나 새내(塞內)로 진출함에 따라 그 밑에 새롭게 편입된 정주 농경민의 수도 늘어나게 되고, 그들도 점차 정주민의 인민 지배방법을 배우게 됨에 따라 정치형태도 바뀌어 갔다. 축성은 이제 그들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불가피한 국가경영의 과정이었다. 유목민이 정주민화된다는 것은 ‘치고 빠지는’ 그들만이 가진 장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원래 기마병 위주여서 공성(攻城)보다 야전(野戰)에 능하다. 유목민의 공격을 유효하게 방어하는 방법은 바로 성을 쌓고 수비하는 것(築城自守)인데 유목민 출신이 이렇게 성곽을 쌓는다는 것은 이율배반이요, 자기모순이다.
창업자 혁련발발은 나라를 세웠지만 바로 수도를 정하려 하지 않았다. 황토고원의 하나뿐인 패자 자리를 두고 탁발부와의 숙명적인 대결이 시작된 것은 그의 증조부 때였다. 그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결국 그의 아버지 유위진(劉衛辰)은 북위 태조 도무제(道武帝)에게 패사하고 그의 형은 포로가 돼 참수당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친 혁련발발은 이웃 부락인 질간부(叱干部)에 몸을 의탁했다.
승승장구하던 북위의 문책을 두려워한 질간부의 부락장이 그를 북위로 송환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무슨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는지 재조(再造)의 기회를 부여한다. 부락장의 조카인 질간아리(叱干阿利)가 국파가망(國破家亡)하여 떠돌아다니는 자(流離漂虜)가 그 목숨을 애타게 구하고 있는데, 도리어 적지로 송환하는 것은 인자(仁者)의 길이 아니라는 명분을 내세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역사 속의 사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인 경우가 간혹 있다.
그 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질간아리는 북위로 송환되던 그를 납치해 관중지역을 근거로 하는 후진(後秦)으로 함께 도망쳐, 후진의 한 지방관인 몰혁우(沒奕于)에게 의탁했다.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몰혁우는 그에게 딸을 주어 결혼시킨다. 혁련발발은 그의 보호자이자, 장인이기도 한 몰혁우를 끝내 살해한다. 그 병력을 수습해 그것을 밑천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탄생한 나라가 혁련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권력을 향한 비정한 선택인지, 아니면 숙적 북위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필자는 후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수하에 들어와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그가 나가야 할 방향은 우선 남방 관중에 있는 후진을 멸망시켜 그 세력을 흡수함으로써 다시 동방의 큰 나라인 북위 세력과 대결하는 길밖에 없었다. 적은 병력뿐인 그들이 큰 나라와 대결하는 방법은 일정한 공격의 목표점을 두지 않는 것이다.
수도란 바로 공격의 표적이 된다. 혁련발발은 일정한 기간 동안 수도를 두지 않고 유격전술로 주위의 군소세력을 병합함으로써 그 병력을 증강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10년 내에 힘을 길러 강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한 후 같이 떠돌아다니면서 유목생활을 계속할 것을 제의했다. 이곳 통만성에 수도를 정한 것은 건국 후 10여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가 이 수도에 쏟은 정력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10여년간 찬 이슬과 혹한, 그리고 눈보라를 맞으면서 신고의 세월을 보낸 혁련발발이 ‘이곳이다!’하고 무릎을 치면서 보금자리로 정한 곳이 바로 통만성이었다. 통만이란 명칭에서부터 그의 비원이 담겨져 있다. ‘천하를 통일하여 만방에 군림하겠다’(統一天下 君臨萬邦)는 것이 그 의미다.
통만성의 성문 명칭에서도 우리는 그의 야망이 어떤 것이었는지 읽을 수 있다. 남문은 송나라의 조공을 받는 문(朝宋門)이고, 동문은 (북)위를 초납하는 문(招魏門)이고, 서문은 양나라를 복속시키는 문(服敭門)이고, 북문은 삭방을 평정하는 문(平朔門)이다. 413년부터 연인원 10만명을 동원해 철옹성을 지었다. 중국의 궁성은 남향이지만 그의 궁성은 동쪽을 항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유목민족의 동쪽 숭배(尙東)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눈만 뜨면 숙적 북위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한 것은 아닐까? 통만성을 짓는 총감독은 그를 죽음에서 건져낸, 소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은 질간아리에게 맡겼다. 성이라고는 하나 통상적인 성이 아니었다. 모두 그가 발명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 성은 중국 성곽사상 의미있는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성벽의 견고성이다. 역사서에는 이 성벽을 만들 때 ‘땅을 쪄 성을 쌓았다’(蒸土築城)고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 고대국가에 보이는 일반적인 축성방법인 판축법(版築法)을 채용하기는 했지만, 이 성은 통상의 그것과는 달랐다. 통만성 옆에 있는 마을명이 ‘백성자’(白城子)인데, 이 성벽은 황토색의 토성이 아니라 고대판 콘크리트성이라 그 빛이 하얗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화학감정에 의하면 그 성토의 주성분은 모래(石英), 점토, 그리고 탄산칼슘(石灰)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세가지가 합쳐졌을 때 증기를 내면서 갑자기 체적이 팽창됨으로써 모래와 진흙이 압축되는 공법이다. 그 궁성의 성벽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그 벽을 숫돌삼아 칼과 도끼를 갈았다고 한다.
혁련발발을 기록한 역사서에는 그를 매우 잔인한 통치자로 표현하고 있다. 바로 축성 과정에서 그가 백성들을 혹사하고,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쌓은 성벽에 송곳이 한치(寸)만 들어가도 그곳을 축조한 자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그 성벽 속에 같이 넣어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소위 마면(馬面)이라는 구조다. 마면이 성벽 구조의 하나로 이용된 것은 이로부터 600년이 지난 송대부터라고 하지만 이미 혁련발발은 이것을 실용화했다. 마면은 성벽 밖으로 말 얼굴처럼 튀어나온 방어용 시설이다. 현재 측정해도 16m나 나와 있다. 마면 사이의 평균거리가 50m였으니 성벽에 근접해 공격해 오는 적들을 화살의 사정권 안에 넣어 공격할 수 있는 것이어서 살상률을 매우 높이는 장치였다.
그 마면 아래에는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 통만성에는 동성과 연결된 동벽을 제외하고 서·남·북벽에 마면이 설치되어 있다. 약간 뒷시대인 북위의 도성 낙양성의 경우 마면이 북서부 최후 군사거점인 금룡성(金墉城) 일부에만 설치되었고, 통만성의 그것과 비교할 때 그 정교함에서 차이가 큰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마면 구조는 중국 성곽 방어시설상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라는 평가다.
또 다른 특징은 옹성(甕城)의 설치다. 서성에 네 개의 문이 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지만, 문마다 도가니처럼 반원형의 성벽을 겹으로 둘러쳐 적의 공격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성문의 방어에 완벽을 기했다.
이런 철옹성을 만들었지만, 혁련발발의 천하통일의 원망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혁련발발은 425년 통만성 영안전(永安殿)에서 그토록 바라던 북위에 대한 설욕의 꿈을 접은 채, ‘벌써의 나이’인 45세에 병사한다. 그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정벌이 있었을 뿐 전쟁은 없었다’(有征無戰)는 지적처럼 그의 전략은 한나라의 창업주 유방(劉邦)이나 위나라의 조조(曹操)보다 뛰어났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윗사람을 섬김에는 태만하고 아랫사람을 부리는 데는 잔인하고 탐욕스럽고 행동이 가볍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사실 그의 행동들을 보면, 그 두가지 평가 어느 쪽도 합당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보호자이자 장인인 몰혁우를 죽인 비정한 일면이 있는가 하면, 그를 사지에서 구해 준 질간아리를 끝까지 믿고 중용하기도 했다.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혁련발발은 무척 열심히 살았던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조정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먹는 것도 잊었다는 기록에서처럼 그는 선대가 못 이룬 통일과업, 아니 숙적 북위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사람이다. 그가 사람을 부림에서는 혹독 잔인했다고 하지만, 혼군(昏君)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황음(荒淫)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그의 삶의 태도를 말해 준다.
실제로 혁련하를 패망시킨 것은 주위의 적대세력인 북위나 토욕혼(吐谷渾)이 아니라 바로 그의 후계자들이었다. 그는 미덥지 않았던 장자 괴(瀾)를 폐하고 대신 3자 창(昌)을 태자로 삼았다. 그가 죽자 남조 유송(劉宋)세력을 몰아낸 후 관중지역을 통치하던 괴가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다른 자식들도 이 후계싸움에 밖의 적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이 혼란을 틈타 숙적 북위의 3대 황제 태무제(太武帝)가 침략해 온 것이다. 아무리 철옹성같은 통만성도 결코 내부의 균열을 막아낼 재주는 없는 것이었다. 새로운 황제로 등장한 창이 전과를 세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성 밖 멀리까지 나가 싸우다 패하여 성으로 돌아가다 성문을 채 닫지 못한 상황에서 들이닥친 적군에게 성을 빼앗긴 것이 혁련하의 도성 통만성 최후의 모습이었다.
역사의 신은 잔인하다. 승자에게는 무한한 영광을, 패자에게는 철저하리만큼 비정한 망각을 준비해 두고 있다. 승자 북위 왕조는 중국 정사 ‘24사’ 가운데 “위서”(魏書)를 준비하였고, 그것은 “사기”(史記)의 분량에 육박할 정도로 크게 다루어지고 있지만, 패자 혁련하는 별로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다.
역사의 신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연도 패자에게는 관대하지 않았다. 11세기초 현재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지역을 중심으로 웅거했던 탕구트(黨項)족의 서하(西夏)가 통만성을 일시 관리했지만, 몽고족이 서하를 멸망시킨 후부터 이곳은 역사의 현장에서 절연되어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오로지 사막의 풍화작용에 송두리째 맡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1845년 이곳의 지방관으로 부임한 한 역사지리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답사단이 파견되었고, 그 폐성이 바로 잊혀진 고도 통만성이라는 것으로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누구도 이 폐성에 대해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다. 통만성이 확인된 후 100여년이 지난 1957년에 최초의 조사단이 결성되어 초보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진 후, 그 실상이 간단한 보고서 형식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을 뿐이다.
그 답사보고서에 의하면 그곳 성벽에는 주민들이 요동(窯洞·건조지대의 혈거가옥)을 파서 살고 있고, 성터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고 있다는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통만성에 대한, 아니 혁련하에 대한 제대로 된 논문 한편도 아직 없다.
1999년 7월 한국에서 멋모르고 찾아온 답사반이 이곳 통만성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 성벽 위에 난 길을 따라 정신없이 걸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정도였다. 서성 서북우에 세워진 적루는 갈길 바쁜 우리 모두를 한참이나 잡아두었다. 33m 높이의 우람한 콘크리트(?) 포대 위에 10명 정도가 들어갈 만한 큰 구멍이 나 있다. 그곳에 올라가면 몇십리 밖에 있는 작은 물체의 움직임까지 관측할 만큼 훤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전 혁련하의 병사들이 올라가 저 멀리 지평선 밖에서 몰려오는 적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측했을 만했다. 천몇백년간 서북에서 불어오는 모진 황토 바람에도 불구하고 적루는 한점 흐트러짐 없이 솟아 있었다. 혁련발발이 못다 푼 한을 대변이라도 하려는 듯이…. 적루 위로 수많은 제비들이 날아다니지만, 그 견고한 콘크리트 벽은 그들에게도 집 지을 한치의 틈도 내 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나를 무시할 것이냐?’하는 혁련발발의 항변처럼….
혁련발발은 성벽만 그렇게 지었던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드는 데에도 완벽을 기했다. 화살이 갑옷을 뚫고 들어가면 갑옷을 만드는 기술자를 죽였다. 화살이 갑옷을 뚫지 못하면 화살을 만드는 자를 죽였다. 성벽을 만들고, 무기를 만드는 데 그렇게 철저함을 보였던 그가 백성을 보살피는 데도 그같은 신경을 썼더라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잃는 것이 인간살이의 법칙이 아니던가? 한 사람의 인생은 불과 100년도 채우지 못한다는데 이다지 견고한 성벽이 무슨 소용이람! 일찍이 맹자는 전쟁에서 지리(地利)보다 인화(人和)의 중요성을 갈파하지 않았던가? 모진 사막바람, 보호는커녕 혈거를 위해 곳곳에 파괴를 거듭해도 옛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그런 성벽을 백성의 희생 위에 만든 혁련발발의 생각이 과연 현명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제 그를 탓하여 무엇하리…. 혁련발발! 그대의 아픈 한을 기억해 주리라. 그리고 내 귀국하거든 시간을 쪼개 그대를 위해 제대로 된 논문 한편을 써서 그대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갔는지 후세에 알리리라. 그러니 이제 이 세상에 쌓아두었던 한을 거두고 서방 정토에서 편히 잠드시기를….
서성 남벽에 건설된 마면 위에서 주인 잃은 양 한마리가 우리를 쳐다본다. 양이여! 너도 혁련발발의 한을 알고 이곳을 서성이고 있는가? 서성과 동성이 잇닿아 있는 동남우에 이르니 섬서성 정변(靖邊)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나온 여자 아나운서와 촬영기사가 ‘자연보호’를 위한 프로를 제작하기 위해 촬영에 분주하다.
어디서 왔느냐고?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왜 한국에서 이런 곳까지 찾아 오느냐?”고 되묻는다. “이런 곳을 왜 이렇게 버려 두고 있느냐”고 했더니, “그래서 자연보호 프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렇다. 인간이 만든 것도 오래 되면 자연이다.
우리도 언젠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자연 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혁련발발을 우리가 와서 괜스레 깨운 것은 아닌지….
아! 통만성이여. 내 살아있는 동안 언제 너를 다시 한번 찾아올 날이 있을까? 다시 만났을 때에는 도대체 인간이 산다는, 그리고 살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지 그대와 같이 깊이 생각해 보고 싶네.
그래 잘 있게! 갈 길이 바빠 나는 이제 가야만 하네…. 다시 조용히 너를 찾아올 때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