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릉"(徽陵)에서 "원릉"(元陵)으로 가는 길.
"영조"(英祖)는 원래 달성 서씨 서종제 (徐宗悌)의 딸인 "정성왕후"(貞聖王后)와 가례를 치렀다.
"정성왕후"(貞聖王后)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고양(高陽)에 있는 "서오릉"(西五陵)에
"정성왕후"(貞聖王后)의 능지(陵地)를 마련하고 봉분(封墳) 두 자리를 만든 다음 우측을 비워두었다.
이를 "홍릉"(弘陵)이라 이름하며 자신이 죽으면 비워둔 우측 자리에 함께 묻혀 쌍릉(雙陵)으로 조성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죽은 다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영조(英祖)는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장례가 끝난 후 중전의 자리를 비워두면 안 된다는 의견에 따라
1759년 66세의 고령임에도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인 15세의 "정순왕후"(貞純王后)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리고 1776년 4월 22일 향년 81세로 승하한다.
그런데 다음 왕인 "정조"(正祖)는 더 좋은 자리가 있는지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했고,
신하들은 "동구릉"에 있는 옛 "영릉"이 길지(吉地)라며 적극 추천했다.
한마디로 "건원릉"에 버금가는 자리라는 것이다.
"정조"(正祖)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구릉 내의 현재 자리를 "영조"(英祖)의 능지(陵地)를 정했다.
아버지가 "조강지처"와 한곳에 묻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왕실의 번영에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릉"의 자리는 "효종"의 "능침"(陵寢)으로 한 번 썼던 자리였다.
왕의 능을 같은 자리에 쓴다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지만,
풍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영조"(英祖)의 "능침"(陵寢)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1805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사망하자 신하들은 "원릉"(元陵)의 능 좌측이 대길지라며 적극 추천했고
"순조"(純祖)는 그들의 말대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능침을 "영조"(英祖)옆 자리로 정했다.
결국 "정비"(正妃)이자 영조(英祖)와 오래 살았던 "정성왕후"(貞聖王后)는
서오릉(西五陵)에 한쪽으로 치우친 기이한 형태로 혼자 묻히고,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남편과 같이 묻힌 것이다.
"영조"(英祖)는 정비(正妃)인 "정성왕후"(貞聖王后)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英祖)가 "연잉군"(延礽君)때인 15세에 "정성왕후"(貞聖王后)와 혼인을 했다.
첫날 밤.
"연잉군"이 "정성왕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손이 참으로 곱구려."
"정성왕후"가 수줍어하며,
"고생을 안해서 그렇습니다." 했다고 한다.
이말에 "연잉군"은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무수리의 아들인 그에게는 어머니를 모욕하는 말로 들린 것이였다.
결국 "연잉군"은 합방은 커녕 상종도 안했다고 한다.
그를 싫어 하던 "영조"는 "정성왕후"의 사후(死後)에 말했다고 한다.
"궁궐 생활 43년동안 항상 웃으며 게으른 빛이 없으며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의 육상궁 제사에 정성을 다한 것을 고맙게 생각하노라."
그래서 죽어서라도 같이 묻히기를 원했는지 모르겠다.
동구릉 주변에는 옛날 능의 석물(石物)을 다듬다가 버린 돌들이 여러곳에 흩어져 있다.
이 돌은 아마도 "죽석"(竹石)을 받치는 "동자석주"(童子石柱)를 만들다 만 것으로 보인다.
원릉 입구의 금천교.
2017년에 왔을 때 찍은 사진이다.
분명 사진에는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水剌間)이 있는데 설명에는 없다.
복원을 해 놓고도 설명문을 고치지 못한듯 했다.
올 11월에 찍은 사진에는 올바로 고쳐져 있었다.
2017년 "원릉" 설명판.
2024년 "원릉" 설명판.
자료사진.
원릉(元陵)은 문인석(文人石) 공간인 중계와 무인석(武人石) 공간인 하계를 통합하고
높낮이의 등급을 두지 않았으며 장대석(長臺石)으로 경계도 하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 시대 통틀어 문인 공간과 무인 공간의 높낮이를 두지 않은 최초의 능원인 것이다.
이후 조선의 모든 능은 중계와 하계를 같은 공간에 통합했다고 하는데,,,
"원릉"(元陵)의 "능침"(陵寢)을 꼭 가보고 싶은데 갈 수는 없다.
능(陵)의 중계(中階)와 하계(下階)의 경계가 없어진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다.
자료사진을 보면 경계석은 분명 있는데 높낮이를 없앴다는 이야기인지,,,
"원릉"(元陵)의 능침(陵寢)은 비교적 낮아 윗부분이 조금은 보인다.
영조(英祖)의 왕위 등극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는데
그가 경종(景宗)의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도 노론(老論),소론(少論)간의 싸움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결국 경종(景宗)이 일찍 세상을 떠나 영조(英祖)가 왕에 올랐지만 당파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남인(南人)과 노론(老論)틈에서 미약한 권력을 유지해오던 소론(少論)은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노론(老論)측은 이를 지나치지 않고 "장헌세자"의 비행(非行)과 난행을 고발해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둬 죽였다.
영조 자신은 붕당 정치의 폐해(弊害)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들은 붕당 정치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당파 싸움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영조는 모든 당파를 없애겠다고 표방하면서 본격적인 탕평(蕩平)을 시도했다.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영조4년(1728년)의 무신란(戊申亂 : 이인좌 李麟佐의 난)을 겪고 부터였다.
영조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모두에 명분상 하자가 있으며,
각기 충신과 역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붕당보다는 인물의 현명함을 기준으로 인사를 단행하고,
국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재상의 권한을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강화했다.
그는 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朋黨)의 근거지였던 서원(書院)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했다.
또한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 간 결혼을 금지하고자 각각 대문에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를 걸게 하는 등 철저한 탕평 정책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예감"(瘞坎)
"瘞"는 "묻을 예"로 잘 쓰지 않는 글자다.
"坎"은 "구덩이 감"으로 역시 잘쓰지 않는 글자다.
"정자각" 서쪽(왼쪽)에 설치된 네모난 구덩이로 제(祭)를 지낸 후 축문을 불태우는 곳이다.
반대편에는 산신석(山神石)이 있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꾀한 후 제도 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 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압슬"(壓膝)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신문고"(申聞鼓)제도를 부활하기도 했다.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 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균역법"(均役法)으로,
군역(均役)의 의무를 대신해 바치는 베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양역(良役)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크게 줄이는 것이었다.
반면 감필로 인한 재정 부족을 보충하는 방안으로
결작전(結作錢)을 토지세에 덧붙여 양반 위주인 지주층이 부담하도록 했다.
또한 신분에 따른 차별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천인(賤人)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해
양처(良妻) 소생은 모두 모역(母役)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한 후,다음 해에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을 따르게 해 양역(良役)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했다.
영조 시대에 특이한 것은 사회 참여의 불균등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이었다.
그는 "서자"(庶子)의 관리 등용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해 "서얼"(庶孼)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는 등
조선 왕조의 고질병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 조선 왕조를 번영의 시대로 이끌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원릉의 "어계"(御階)는 비교적 문양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영조"는 "숙종"(肅宗)의 아들이며 "경종"(景宗)의 동생이지만,
"영조"의 생모는 "숙빈 최 씨"로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 출신, 즉 천인(賤人) 계층이었다.
어느 날 밤 "숙종"(肅宗)은 궁궐 안을 거닐다가 불이 켜져 있는 궁녀의 방을 보았다.
다가가서 청문으로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는 한 나인(內人)이 성찬을 차려놓고 상앞에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숙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까닭을 물었다.
깜짝 놀란 "나인"이 부복(俯伏)하고 대답했다.
“저는 중전마마(仁顯王后)의 시녀였는데 평소 분에 넘친 총애를 받았습니다.
내일이 그분의 탄신일인데 서궁에 유폐된 처지라 수라는 커녕 조석으로 거친 음식이 고작일 것입니다.
생신날인 내일은 또 누가 그분을 대접하겠습니까.
그 일을 생각하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당신께서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했지만 바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녀의 방에 진설하고 정성이라도 전해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숙종"은 비로소 폐비 민씨(仁顯王后)의 생일이 내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궁에서 쫓겨난지 4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다.
"희빈 장씨"(禧嬪 張氏)에 대한 총애와 서인에 대한 반감이 어우러지면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니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문득 "숙종"은 인현왕후(仁顯王后)가 그리워졌다.
또 잊지 않고 옛 주인을 섬기는 나인의 정성이 가상했다.
그날 "숙종"은 그녀를 가까이했다.
기실 이런 상황이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최씨가 궁궐 안에서
"폐비 민씨"를 위해 정성을 드린 행위는 지극히 순진하고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이었다.
그런데 전화위복으로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입게 되었으니,
행운도 이만저만한 행운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여 출생한 자식이 "영조"(英祖)인 것이다.
원릉(元陵)의 비각(碑閣).
이곳의 비각(碑閣)은 무척 크고 문이 세개 있다.
문이 셋이라는 것은 그 안의 비(碑)가 셋이라는 것이다
제일 좌측의 비(碑)에는 "영종대왕 원릉"(英宗大王 元陵)이라 씌어 있다.
"조"(祖)가 아니고 "종"(宗)이라 함은 선왕(先王)의 정통 직계임을 말한다.
중앙의 비에는 "영조대왕 영릉"(英祖大王 元陵)이라 했다.
중앙의 비석 뒷면.
비문(碑文)의 해설은 7년전의 것과 현재의 것을 모두 올렸다.
내용이 조금씩 달라 모두 보면 좋을 듯하다.
오른쪽은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의 비(碑)다.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은 후 영조는 새 왕비를 맞이하게 된다.
1759년(영조 35년) 당시 66세인 영조는 15세인 "정순왕후"를 새 왕비로 맞이한다.
"영조"는 고령(高齡)을 이유로 재혼을 사양했지만 하루라도 국모(國母)가 없으면 안 된다는
신하들의 강권에 마지못해 재혼을 한 것이다.
어른들과 최종 선택된 세 명의 규수(閨秀)가 마주하였다.
관례에 따르면 당사자인 신랑은 간택(揀擇)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영조"가 왕실의 제일 웃어른 자격으로 자신의 신부를 고르는 행사에 직접 참여했다.
당시 "규수"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규수" 아버지의 함자(銜字)를 써놓은 방석을 놓고 규수를 앉게 했다.
두 규수는 아버지 이름을 찾아 방석에 앉았으나 한 "규수"는 앉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왜 앉지 않느냐?"
영조가 물었다.
"아버님의 이름위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
부친 이름이 적혀 있는 방석에 차마 앉을 수 없다고 대답하여
"영조"로부터 큰 호감을 끌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더냐?"
"영조"가 규수들에게 물었다.
"예, 산이 깊습니다."
"예, 물이 깊습니다."
"규수"들이 대답했다.
그런데 아버지 이름위에 앉지 못하겠다던 "규수"는
"예,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 또 다시 "영조"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이어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 예쁘더냐?" 라고 물었다.
두 "규수"는 저마다 각기 자신이 좋아하는 꽃의 이름을 댔다.
그러나 문제의 "규수"는
"예, 목화꽃이 제일 예쁩니다." 라고 답한다.
"어찌하여 목화꽃이 예쁘더냐?" 하고 그 이유를 묻자,
"목화는 꽃도 예쁘지만 솜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
마침 그날은 비가 주룩 주룩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영조는 "규수"들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 "통명전"의 지붕 기와가 몇 줄인지 알겠느냐?"
모두들 당황하여 궁궐 지붕을 쳐다 봤지만 "통명전"(通明殿)안에서
"통명전"(通明殿)의 지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의 "규수"는 잠시 밖을 내다 보더니 침묵하고 있다.
"영조"가 재차 물었다.
“너는 그 수를 알겠느냐”
그 규수는 기왓장이 몇줄인지를 대답하였다.
영조가 놀라 다시 물었다.
"어떻게 그 수를 알았더냐?"
규수가 말했다.
“예,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헤아려보면 그 수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1759년(영조 35년) 당시 66세인 "영조"는 15세의 그 규수를 새 왕비 "정순왕후"로 맞이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다.
"통명전"을 가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안에 앉아서 통명전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모두 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