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전 추석날 저녁이었다. 추억에 남을 만한 기획(企劃)을 애들에게 맡겼다. 서울 사는 딸애가 집 떠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마을 뒷산 넘어 숲속, 옥상에 캠핑카 2대가 있는 호텔을 빌렸다.
집에서 차로 2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 동네 마실 가는 차림으로 가볍게 나설 수가 있는 곳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았다고 했다. 세상이 그렇게까지 된 것이다.
그리고는 각자 냉장고를 뒤져 미처 안 먹고 쳐진 것들을 챙기고, 가지고 있는 야외 캠핑용품들을 싣고 와, 희망자는 캠핑카를 이용하고, 아니면 예약한 호텔룸을 이용하기로 했다.
탁 트인 옥상에서 훤한 보름달을 조명 삼아 각자 솜씨껏 요리들을 했다. 아들, 딸, 사위, 손자들 모두 제 나름의 좋아 하고, 하고 싶었던 메뉴들을 손수 굽고 지지고 볶고 삶는 것들이 예전과 달라 쉬웠다. 참 좋은 세월이라 처음 보는 도구나 연장들도 가지가지다.
옛날 우리가 어렸을 적, 집안에 큰일이 있으면 마당에 임시로 만든 화덕에 큼직한 솥뚜껑을 뒤엎어 걸어놓고 장작불에 나무 주걱 하나면 전(煎) 붙이는 것은 모두 가능했는데, 지금은 전의 종류에 따라 연장이 다르고, 하는 일에 따라 기구가 따로 있으니 신기하기까지 했다.
두 늙은이는 뒷전 쇼파에 앉아 맛보라고 가져온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럭우물럭하다 “오냐 맛있다” 하고 고개만 끄덕여 주는 것이 유일한 일거리였다.
맘껏 먹고 마시고는 배부르고 걱정 없어지자 자연히 노랫소리가 나왔다. 사위 녀석이 키타를 치고 아들 넘은 노래를 부르고 딸년들이 좋다고 박수를 치며 따라 하기도 하고 손주들도 한 몫이다. 나와 할멈도 흥이나 오랜만에 어슬픈 양춤도 한 곡 추었다. 달밤에 체조하는 격이었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내려다 보는 보름달도 틀림없이 빙긋이 웃는 듯 했다.
누구보다도 내 자식은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고정 관념이 사그리 무너졌다. 그게 아니었다. 평소 가르침이라는 생각으로 얘기한 것들은 말짱 헛것이었다. 제 나름대로의 세상을 따로 배우며 자랐던 것을….
그것을 노자(老子)는 자화(自化)라고 했었다. 노래라고는 아예 벽을 쌓은 줄 알았던 딸년들이 더 큰소리로 했다.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하는 줄 알았다.
이튿날 아침 느지막이 준비들을 마치고 호텔 안마당에서 서로서로 한 번씩 껴안아 주고 악수를 나누고는 각자 갈 길로 떠났다. 모든 경비는 ‘뿐빠이’ 한다니까 두 노인네도 당당히 제 몫을 지불하고 나니 마음도 홀가분 했다.
이 얘기를 친구들 모임에서 얘기했더니 두 가지 반응이 나왔다.
“역시 석암(石庵 : 필자의 아호) 생각이 앞 선다”는 것과,
“그 너무 집구석은 콩가루 집안이다”는 의견이었다.
“??” 아무래도 ‘콩가루 집안’ 쪽이 맞겠다는 생각이었다. 헐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