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고 싫은 분별만 없으면 통연히 밝으리라”
<5> 진소경 계임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①-2
[본문] 장경(章敬)화상이 말씀하였습니다. “지극한 이치는 말이 없으나 요즘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억지로 다른 일을 익혀서 공능(功能)으로 여긴다. 자성은 원래 육진경계가 아니고 미묘한 대해탈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다.”
[강설] 장경회휘(章敬懷暉, 754~815) 화상의 말씀을 길게 인용했다. 장경화상은 마조선사의 법을 얻고 제주 영암사와 정주 백암사와 장안 장경사 등에서 선법을 펴신 분이다. 대혜선사가 인용한 법문의 내용이 심요(心要)라고 할 만한 매우 요긴한 법문이라서 부연설명하고자 한다.
지극한 이치는 굳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진리 그대로 현전하여 있는 사실이다. 공연히 선악과 중생과 부처와 성인과 범부를 분별하여 특별한 공적과 재능으로 여긴다.
<신심명>의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다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하는 생각만 없으면 통연히 밝으리라”라는 표현 그대로다. 또한 우리들의 자성에는 육진경계가 없다. 육진경계 그대로가 사람 사람의 자성일 뿐이다. 자성과 경계는 둘이 아니다. 그것을 일러 미묘한 대해탈문이라고 한다.
육진경계 그대로 개개인의 자성
자성과 경계 둘 아닌 ‘대해탈문’
[본문] “이미 본래 지니고 있는 감각은 물들지도 아니하고 장애되지도 아니하여 이와 같은 광명이 일찍이 쇠퇴하지 않느니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진실로 변하지 않는 것이 마치 태양과 같아 모두 비추어서 비록 온갖 사물에 다 이르나 일체 사물과 섞이지 않느니라.”
[강설] 모든 사람들이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 능력과 그 작용은 설사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사건을 느끼고 알고 하더라도 그것에 물들거나 장애가 되지 않는다. 언제나 자유롭다. 하루 종일 견문각지(見聞覺知)하지만 그 능력 그 사실은 변역하지 않는다.
영원하다. 늙고 젊음의 차이도 없다.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다. 빈부귀천의 차별도 없이 대자유다. 마치 저 밝은 태양이 모든 세상을 다 비추어 사물과 함께하지만 결코 태양빛은 세상이 되지 않고 사물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본문] “신령스런 빛의 미묘한 광명은 단련으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물에서 취하느니라. 마치 멀쩡한 눈을 눌러서 공연히 헛꽃을 만드는 것과 같도다. 한갓 스스로 피로하게 오랜 세월을 잘못 보내느니라.
만약 능히 반조하면 거짓된 사람(第二人)은 없어서 손발을 들고 놓고 움직이는 데에 진실한 모습(實相)이 없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강설] “신령스런 빛의 미묘한 광명은 단련으로 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선게(禪偈)에 이런 시가 있다.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전개무일자 상방대광명(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나에게 한권의 경전이 있는데 종이나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다. 펼쳐보아야 글자 하나 없지만 항상 큰 광명을 놓고 있다”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경전을 다 가지고 있지만 공연히 사물을 취하고 부귀공명을 찾아 정신없이 다닌다. 마치 아무런 탈도 없는데 공연히 눈을 비비어 헛꽃을 보는 것과 같다. 본래로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해탈이었건만 오랜 세월 얼마나 힘들었고 피로에 지쳤는가. 지금 이대로 완전무결한 존재다. 달리 다른 사람은 없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 그대로가 진리며 실상의 현현이다.
장경화상의 이 법문은 불교의 궁극적 차원과 사람 사람의 궁극적 경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초기의 근본불교에서 비밀불교와 대승불교를 거쳐 선불교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인간 지혜의 최 극점과 최 완성에 이른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가 걸어오면서 창출한 온갖 종류의 사상들이 이와 같은 선불교 사상에 이르러 그 종지부를 찍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출처 : 불교신문 201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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