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동영상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얼굴 표정, 몸짓 하나까지 매력이 철철 넘치지 않습니까?”
이것은 위 동영상의 주인공 박칼린에 대한 나의 평가가 아니라 그녀의 광팬 대학선배의 예찬론입니다. 선배가 좋아하는 박칼린의 노래는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만은 보기 참 좋습니다.
몇 년 전 그 선배가 내게 말했습니다.
“이제 장사익이 아니라 박칼린을 좋아하기로 했다..”
장사익이라 하면 껌뻑 죽던 선배가 장사익을 배반하고 박칼린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박칼린은 ‘남자의 자격’이라는 방송 프로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프로의 영향을 받은 선배가 지조 없이 장사익에서 박칼린으로 광적인 팬의 배를 갈아 탄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지요.
필경 박칼린의 미모와 젊음에 뿅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선배의 경박한 처신이 지극히 못마땅했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바뀌기를 바라지만 평생 바뀌기지 않고 남자는 여자가 평생 바뀌지 않기를 바라지만 결국 바뀌고 만다더니 선배의 배신행위는 바뀌기를 바라는 모든 여자의 열망까지도 냉정하게 내팽게치는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늙으막에 주책 좀 작작 부리시라’고 농담치고는 좀 쎄게 선배를 몰아붙혔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자신의 심정을 몰라주는 후배의 무식함에 대해 못내 안타까워하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도 종심(從心)의 나이가 되어봐라. 좋아하고 싶은 데도 좋아하지 못한 삶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뼈저리게 절감할 것이다.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가 무엇이냐. 마음가는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 아니냐. 너는 아직 종심이 되지 못했으니 나를 이해하지 못함에 틀림 없으렸다,..”
대학선배의 배신 행위는 이번만이 아닙니다. 2000년 초까지만 해도 박동진 명창에 흠뻑 빠져서 판소리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고 다니던 선배였습니다. 그러던 중 애석하게도 박동진 명창이 운명하자 곧 바로 공옥진 여사의 병신춤의 광팬이 되어서 전통 한국무용의 독특한 해학에 대하여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 시작했지요.
그 공옥진 여사에서 어느 날부터 명창 안숙선으로 안숙선에서 장사익으로 선배의 광팬 대상은 바뀌었는데 드디어 선배가 좋아하는 우상이 박칼린으로 갑자기 바뀐 것입니다. 필경 그것은 박칼린의 뛰어난 미모와 젊음 때문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 밖에 없어 나는 선배를 사정없이 타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대학교수씩이나 되는 분이 그래도 되느냐고 묻자 선배는 변명하듯 박칼린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박칼린 말이다. 보통여자가 아니다. 다만 젊고 예쁘기만 한 게 아니다. 뮤지컬 가수에, 연출자에, 연극배우에다 음대교수...등 공연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최고의 재주꾼이다...그야말로 ‘끼와 열정과 재주’의 삼박자를 갖춘 대단한 예술가다.”
“요즘 KBS 남자의 자격 ‘하모니’ 편에 나오는데 박칼린의 리더싶이 장안의 관심사가 되었단다. ‘리더싶이란 아래 위 수직이 아닌 수평이다’라고 말하는 박칼린에게서 결코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를 볼 수 있다. 서로 똑같은 중요성을 지니고 진실되게 서로에게 장단점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발전이 있다고 주장하며 어떠한 변화라도 두려워 하지 않는것이 리더라고 웅변하는 그녀의 매력에 너도 금방 빠질 수 밖에 없을 게다...”
박칼린은 원래 미국에서 첼로를 전공했으나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 입학해 박동진 명창에게 발탁되어 판소리까지 사사했다고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박칼린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선배가 한 때 미치게 좋아했던 박동진의 제자이기까지 하다는 선배의 운명론에 이르러서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선배의 로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선배따라 장사익 공연에도 간적이 있었는지라 머지 않아 박칼린이 연출한 뮤지칼을 보러 가게 될 것 같은 예감도 들었습니다.
(최근의 박칼린 공연 '미스터 쇼')
선배의 간절한 설득에 나도 박칼린이라는 여자에게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그 즈음 인터넷 위키백과에서 얻은 박칼린 부모에 대한 러브스토리가 나의 눈에 들어 왔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박칼린의 아버지는 195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인텔리였다. 미국에 대한민국 유학생이 스무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유학생이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이던 이승만이 크리스마스 때 미국 유학생들에게 친필로 카드를 보낼정도였다....”
“...박칼린의 어머니는 5살 때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44년 고향 리투아니아가 구 소련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대학 2학년이던 시절 어머니가 신입생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성악 공부를 한적이 있었고 각 나라의 전통 노래를 배웠는데 그 중에 아리랑이 끼어있었다. 1950년대였던 당시에도 180cm가 넘을 정도로 키가 컸던 아버지는 동양 학생들 사이에서 금방 눈에 띄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놀리기 위해 배워온 아리랑을 불렀고 이후 둘의 연애가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
“둘다 전쟁을 겪었던 아픔과, 비슷한 크기에 멀리 있던 조국이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박칼린은 그리하여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박칼린은 어머니에 대해 ‘생활력이 강하고 삶과 인간을 사랑하고 사람과의 대화를 중시했다’고 말했다. 반면에 그녀의 아버지는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필요할 때 만 말을 건네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국제 결혼이 흔치 않던 시절 아버지는 부모님한테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을 해 세 명의 딸을 낳은 상태였고 가족사진을 사촌형님한테 보내 ‘부모님한테 잘 말해달라’ 고 일방적으로 통보해버렸다. 어머니는 당시 부산 수영국제공항을 통해 세 딸을 끌어안고 먼저 한국에 와 시부모님한테 먼저 인사를 드렸다. 이를 본 친할머니는 두 달을 드러눕고 말았다. 일이 남아있던 아버지는 2~3달 뒤에나 한국에 왔다....”
마치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계 미국인과 결혼했던 나의 사촌 여동생의 러브스토리와 비슷한 것 같아 나는 박칼린이 내 여동생의 딸이나 된 것처럼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내 여동생도 나이 많은 지도교수와 결혼하겠다고 김포공항까지 왔으나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내가 미국 뉴욕으로 발령이 나서 매제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간곡히 설득한 끝에 정식으로 결혼 승낙을 받게 되었지요. 그런 파란만장한 로브스토리를 박칼린의 부모에게서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어느덧 나도 박칼린의 팬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박칼린을 좋아했던 그 선배는 별로 관심조차 없었던 나에게 박칼린을 물려주고 지금은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요즘 박칼린은 뮤지컬 "미스터 쇼"로 장안을 떠들석하게 하고 있다지요. 이렇듯 그녀는 지금도 더욱 활발하게 일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당연히 행복하게 바라보아야 할 선배는 병마와 싸우며 회한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선배를 대신하여 박칼린을 좋아하게 된 이 후배만이 부질없는 ‘종심’의 나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박칼린이 부른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의 가사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 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때론 지루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때론 즐거움에 웃음 짓는 나날이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건
그대와 함께 있는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문득 박칼린의 노래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을 들으며 어쩌면 그녀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 바로 선배와 내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출처 ; 유튜브)
Text and Photo from Internet : Webpage by Dalmasan, Apr.10,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