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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무산 조오현 대선사의 '염장이와 선사'
이른 새벽 평론가 반경환 선생이 보내주신 '반경환의 명시감상' 雪嶽 주인 霧山 조오현 대선사의 시 《염장이 와 선사》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2018년 雪嶽 주인 霧山 조오현 대선사 다비식 때 써 보낸 貧學의 추모시 한편과 무상을 노래한 短詩 한편 발췌해 첨부 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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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염장이와 선사
조오현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뚜껑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 염을 하신 지 몇 해나 되셨는지요?”
“서른 둘에 시작했으니 한 40년 되어 갑니더.”
“그러시면 많은 사람의 염을 하신 것 같으신데 다른 사람의 염도 오늘처럼 정성을 다 하십니까?”
“별 말씀을 다 하시니... 산 사람은 구별이 있지만 시신은 남녀노소 쇠붙이 다를 것이 없니더. 내 소시에는 돈 땜에 이 짓을 했지만 이 짓도 한 해에 몇백 명 하다 보니 남모를 정이 들었다 할까유. 정이...... 사람들은 시신을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외려 산 사람이 무섭지 시신을 대하면 내 가족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의 시신을 보는 듯해서......”
이쯤에서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갈 길을 그만 가야겠다는 표정이더니 대뜸,
“내 기왕 말씀이 나온 김이니 시님에게 한 말씀 물어 봅시더. 이 짓도 하다 보니 시님들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떤 시님은 사람 육신을 피고름을 담은 가죽 푸대니, 가죽 주머니니, 욕망 덩어리라 이것을 버렸으니 물에 잠긴 달그림자처럼 영가 靈駕는 걸림이 없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시님은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 했던가유? 그렇게 하고, 또 어떤 시님은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염불만 하시는 시님도 있고... 아무튼 시님들 법문도 각각인데 그것은 그만두시고요.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극락지옥이 있습니꺼?”
흔히 듣는 질문이요 신도들 앞에서 곧잘 해왔던 질문을 받았지만 이 무구한 염장이 물음 앞에는 그만 은산철벽을 만난 듯 동서불명東西不明이 되고 말았는데, 염장이는 오히려 공연한 말을 했다는 듯,
“염을 하다 보면 말씀인데유. 이 시신의 혼백은 극락을 갔겠다 저 혼백은 지옥에 갔겠다 이런 느낌이 들 때도 더러 있어 그냥 해본 소리니더. 이것도 넋빠진 소리입니더만 분명한 것은 처음 보는 시신이지만 그 시신을 대하면 이 사람은 청검하게 살다가 마 살았겠다 이 노인은 후덕하게 또는 남 못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이 시신은 고생만 하다가 또는 누명 같은 것을 못 벗고... 그 머라하지유? 느낌이랄까유? 그,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 같은 것이 시신에 남아 있거든요?”
하고는 더 말을 하지 않을 듯 딸막딸막하더니, 당신의 그 노기老氣로 상대가 더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읽었음인지,
“극락을 갔겠다는 느낌이 드는 시신은 대강대강해도 맘에 걸리지 않지만 그렇지않은 죄가 많아 보이는 시신을 대하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눈시울이 뜨뜻해지니더. 정이니더, 옛사람 말씀에 사람은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해지고 새도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다 했다니더. 죽을 때는 누구나 다 선해지니더......이렇게 갈 것을 그렇게 살았나?하고 한 번 물어보면 영감님 억천 년이나 살 것 같아서, 가족들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 번 잘 살아 보고 싶어서 그랬니더. 너무 사람 울리시면 내 화를 내고 울화통 터져 눈 못 감고 갑니더. 이런 대답을 들으니 아무리 인정머리 없는 염쟁이지만 정이 안 들겠니꺼? 그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는 아직...”
하고는 잠시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시님도 다 아시는 일을 말했니더. 나도 어릴 때 뒷절 노시님이 중될 팔자라 했는데 시님들 말씀과 같이 업業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서... 이제 나도 갈 일만 남은 시신입니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오현의 [염장이와 선사]({아득한 성자}, 시학, 2007년) 전문
조오현 시인은 1932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고, 1939년 소머슴으로 절간에 입산을 하여 큰스님이 된 시인이다. 필명은 조오현曺五鉉이고 법명은 무산霧山이다. 법호는 만악萬嶽이고 자호는 설악雪嶽이다. 그는 [아득한 성자]라는 시를 통해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으며, ‘최고의 선서禪書’인 {벽암록}과 {무문관}을 ‘역해’로 펴낸 바가 있다. 조오현 시인이 연출해낸 ‘백담사 만해마을’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학관이며, 이제는 ‘만해축전’이 ‘만해사상’을 선양하는 최고의 축제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도 있고, ‘행동은 이미 하나의 지식의 형태이며, 또, 지식은 행동을 포함하고 있다’라는 말도 있다. 전자는 공자의 말이고, 후자는 하이데거의 말이다. 안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며, 행동한다는 것은 앎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앎이란 무엇이며, 도대체 그 앎을 어떻게 실천해야 된다는 말인가? 앎(지식)이란 사물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판단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 앎의 종류와 그 범주는 머나 먼 밤하늘의 별들처럼, 아니, 사하라 사막의 모래알갱이들처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다종 다양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덕에 대한 앎도 있고, 정치에 대한 앎도 있다. 사회에 대한 앎도 있고, 문화에 대한 앎도 있다. 역사에 대한 앎도 있고, 철학에 대한 앎도 있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앎도 있고, 온갖 자연과 사물들에 대한 앎도 있다. 우리 인간들의 앎은 그의 교육과정과 삶의 환경에 의한 매우 제한적인 앎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그 앎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문제는 단순하게 정리하고, 단순한 문제는 더욱 더 정교하고 복잡하게 풀어나가야 하듯이, 나는 앎의 문제를 더욱 더 단순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앎이란 이 세상의 삶의 이치와 그 삶의 이치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연출해내기 위한 방법적인 수단일 뿐인 것이다. 앎이 우리 인간들의 행복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지, 우리 인간들이 그 앎(지식)에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 나의 행복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의 행복이란 말인가? 나의 행복은 이기적인 행복이고, 우리 인간들의 행복은 이타적인 행복이다. 이기적인 행복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이타적인 행복은 찬양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동물들은 무리를 짓는데서 최선의 삶의 수단을 발견하였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모든 일들은 도덕과 법률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이 충돌할 때는 개인의 이익을 버려야 하고, 충忠과 효孝의 다툼이 있을 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효孝를 버려야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공동체 사회의 도덕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앎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인간들의 행복을 연출해내는 것이며, 그 앎의 실천은 철두철미하게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앎을 어떻게 습득할 수가 있는 것이며, 또한, 그 앎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것일까? 부유한 자, 힘 있는 자, 지배하는 자는 착하고 선량하며 천당에 간다는 것이 지배계급의 종교, 즉, 힌두교와 유태교의 근본사상이라면,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지배당하는 자는 착하고 선량하며 천당에 간다는 것이 피지배계급의 종교, 즉,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와 예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창시자로서 그 지배계급의 사상에 맞서서 피지배계급의 사상을 연출해냈고, 그 앎(민중사상)을 습득하고 실천하는 데, 그들의 생명과 그 모든 것을 다 걸었던 것이다. 봉건귀족들의 온갖 특전과 특권에 맞서서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역설했던 초기의 자본가 계급들도 마찬가지였고, 또한 자본가 계급들의 수많은 착취와 억압에 맞서서 만인평등과 공정한 부의 분배를 역설했던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앎은 기존의 앎을 짓밟아버리려고 하고, 기존의 앎은 새로운 앎의 씨앗마저도, 아예 발본색원해내려고 한다. 앎은 습득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그 앎을 실천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도덕,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선과 악, 천동설, 지동설, 상대성 이론, 세계화 등은 그 투쟁의 산물들이며, 그 개념들에는 무서운 피비린내가 각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앎은 절대로 가치중립적인 앎이 아니며, 도덕 역시도 절대로 가치중립적인 도덕이 아니다. 앎과 도덕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모하며, 모든 인간들의 사고와 취향과 출신성분과 그 이해관계에 따라서, 저마다의 해석과 그 실천이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국가와 공동체 사회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고, 또한, 그 구성원들의 삶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면 전체의 이익이 훼손되고, 전체의 이익을 앞세우면 개인의 이익이 훼손된다. 아무튼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철두철미하게 ‘나’를 버리고 공동체 사회의 행복을 위하여 봉사를 하는 인간----, 바로 이러한 인간들을 우리는 ‘성자’라고 부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오현 시인의 [염장이와 선사]는 앎의 실천의 정점에서 꽃 피어난 시이며, ‘성자의 미학’의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염장이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선사는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염장이란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수의를 입히는 사람을 말하고, 선사란 불도를 닦으며 그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염장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싫어하는 더러운 시체를 만지는 사람을 말하고, 선사란 그 망인의 모든 때와 죄를 씻어주고 그의 영혼을 구제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염장이는 비천하고 하찮은 사람이고, 선사는 고귀하고 거룩한 성자이다. 때는 어느 신도님이 죽었을 때이고, 바로 그 장례식장에서 염장이와 선사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에, 염장이는 선사가 되고, 선사는 염장이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염장이의 이타적인 행위가 바로 그 선사의 경지에까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40여 년 동안이나 염장이 생활을 하고 제 아무리 시체를 만지는 행위가 그의 직업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다 늙고 병들어 죽어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도 정성스럽게 닦아주는 염장이가 어디 있을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듯이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뚜껑을 덮는” 염장이가 어디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선사는 그런 염장이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상제와 복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염장이를 붙들고, 선문답을 나누어 본 것이 이 [염장이와 선사]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조오현 시인의 [염장이와 선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문답’ 중의 하나이며, 누구나 다같이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될 수 있다는 선불교의 사상이 가장 깊이 있고 중후하게 배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 염장이는 시충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들여 닦았던 것이며, 왜, 또한 염장이는 마지막 포옹이라도 하고 싶다는 듯이 시취까지 맡아보고서야 관뚜껑을 덮었던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산 사람은 구별이 있지만”, 죽은 사람은 남녀노소는 물론, 그 어떠한 구별도 없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극락의 세계로 가야 되기 때문이다. 극락의 세계는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세계이며, 모든 걱정과 근심이 다 사라진 세계이다. 극락의 세계가 머나 먼 내세에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려고 하고, 극락의 세계를 이 지구상에다가 건설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나쁜 짓을 하려고 한다. 전자는 종교인이 되기가 십상이고, 후자는 세속인이 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이 선과 악, 성과 속의 이분법은 종교상의 구별일 뿐, 대부분의 종교인들마저도 머나 먼 극락의 세계를 믿지 않고, 이 지구상에다가 극락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한다.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장인과 장모의 재산을 가로채 가려는 사위, 정부情夫와 짜고 남편을 살해하고 그 재산을 가로채 가려는 아내, 나이 어린 소녀를 유괴하고 돈을 요구하는 청년, 법률에 대한 지식을 악용하여 타인들의 재산을 가로채 가는 법조인, 인간의 나약함을 이용하여 내세의 천국을 약속하고 소위 합법적으로 그 재산을 가로채 가는 목사, 소위,
“내 기왕 말씀이 나온 김이니 시님에게 한 말씀 물어 봅시더. 이 짓도 하다 보니 시님들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떤 시님은 사람 육신을 피고름을 담은 가죽 푸대니, 가죽 주머니니, 욕망 덩어리라 이것을 버렸으니 물에 잠긴 달그림자처럼 영가 靈駕는 걸림이 없어 좋겠다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시님은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 했던가유? 그렇게 하고, 또 어떤 시님은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염불만 하시는 시님도 있고... 아무튼 시님들 법문도 각각인데 그것은 그만두시고요. 참말로 사람이 죽으면 극락지옥이 있습니꺼?”
라고, 백가쟁명百家爭鳴식의 불법佛法을 역설하며, 극락과 지옥이라는 양날의 칼을 이용하여 신도들의 면종복배와 재산의 헌납을 강요하는 선사, 자기 자신이 업무상 알게된 기밀을 이용하여 부동산 투기를 일삼는 고위공직자들,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수많은 영세상인들을 파산상태로 몰아 넣는 악덕 재벌들----, 바로 이러한 인간들이야 말로 머나 먼 극락의 세계를 믿지 않고 이 지구상에다가 자기 자신들만의 극락의 세계를 건설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사나운 야수가 되고, 모든 앎(진리, 지혜)은 그 야수들의 그토록 사납고 잔인한 무기가 된다. 따라서 염장이는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이 무섭지는 않다고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토록 사납고 잔인했던 사람들마저도 이 세상의 임종을 맞이해서는 그 “울음이 애처롭고” 누구나가 다같이 선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선설性善說이란 무엇이며, 성악설性惡說이란 무엇인가? 성선설이란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다는 것을 말하고, 성악설이란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말한다. 전자는 순자의 말이고, 후자는 맹자의 말이다. 하지만, 그러나,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한 것도 아니고, 또한, 악한 것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악 이전의 본성이며, 그 본성이 선과 악으로 갈라지는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선한 것이고, 타인의 욕망은 악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똑같은 욕망을 두고 그토록 사납고 잔인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며, 그 욕망을 제어하는 도덕과 법률이 없으면 그 어떠한 사회도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 왜, 그토록 사납고 잔인하게 악독을 떨었던 사람들마저도 죽음 앞에서는 선해지는 것이며, 또한 그들은 진정으로 내세의 지옥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근면 성실하게 살다가 가고, 왜, 어떤 사람은 한 평생 못할 짓만 하다가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다 사회에 환원하고 가고, 왜, 어떤 사람은 한 평생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 선과 악, 상과 벌은 그가 개인의 이익(욕망)을 버리고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살아 왔는가,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개인의 이익(욕망)을 위하여 전체의 이익을 훼손하여 왔는가에 달려 있다고 나는 믿고 있으면, 따라서 이 세상의 임종의 무대인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다같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최후의 판관 노릇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의 후회는 그의 도덕적 양심이 낳은 괴로운 감정이며, 죽음 앞에서의 떳떳함은 그의 도덕적 양심이 낳은 즐겁고 기쁜 감정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후회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죽음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될 것인가? 여기에는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극락의 세계도 없고, 아귀지옥의 세계도 없다. 다만, 있다면, 모든 인간들이 다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이라는 삶의 무대’를 아귀지옥으로 연출해낸 사람들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지극히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이라는 삶의 무대’가 아귀지옥이 되지 않은 것은,
“극락을 갔겠다는 느낌이 드는 시신은 대강대강해도 맘에 걸리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죄가 많아 보이는 시신을 대하면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눈시울이 뜨뜻해지니더. 정이니더, 옛사람 말씀에 사람은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해지고 새도 죽을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다 했다니더. 죽을 때는 누구나 다 선해지니더......이렇게 갈 것을 그렇게 살았나?하고 한 번 물어보면 영감님 억천 년이나 살 것 같아서, 가족들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한 번 잘 살아 보고 싶어서 그랬니더. 너무 사람 울리시면 내 화를 내고 울화통 터져 눈 못 감고 갑니더. 이런 대답을 들으니 아무리 인정머리 없는 염쟁이지만 정이 안 들겠니꺼? 그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는 아직...”
이라고,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버리고, 만인들의 때를 씻어주고, 그들의 최후를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수많은 ‘염장이와 선사들’----비록, 아주, 적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지만----이 있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맡은 일----그것이 염장이든, 선사이든, 상인이든, 예술가이든, 쓰레기 청소부이든, 정치인이든, 그 무엇이든지 간에----에 최선을 다할 때, 도덕과 윤리의 근본이 바로 서는 것이며, 그 근본이 바로 서야 진정한 장인 정신이 생겨난다. 인생은 예술이고,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같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연주하는 예술가이기도 한 것이다. 돈과 명예는 같은 무대에 설 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임무를 아는 자이고, 그 임무를 좋아하는 자이고, 또, 그 임무를 언제, 어느 때나 즐겁고 기쁘게 완수하는 자이다. 자기 자신의 임무가 제 아무리 좋고 훌륭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즐겁고 기쁘게 하지 않으면 그 일에 하자瑕疵가 생기거나 타인들과의 다툼이 생겨나게 되고, 이와는 정반대방향에서, 자기가 맡은 일이 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자기 자신의 이익과 손해, 또는 생과 사를 떠나서 진정으로 즐겁고 기쁘게 하게 되면, 제일급의 명시인 [염장이와 선사]가 탄생하게 되고,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지상낙원, 즉, 극락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게 한다는 시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 즉, 다종 다양한 시신들과도 정을 나누고, 그 시신들의 때를 닦아주며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염장이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 돌쟁이도 먹 놓고 징 먹일 때는 자기의 혼을 넣고... 땜쟁이도 그렇다 하는데 오늘 아침 숨을 같이 쉬고 했던 사람이 마지막 가는데유...... 아무런들 이 짓도 정이 없으면 못해 먹을 것인데 그렇듯 시신과 정을 나누다가 보면 어느 사이 그 시신 언저리에 남아 있던 삶의 때라 할까유? 뭐 그런 것이 걷히고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결국은 내 마음 편안할려고 하는 짓이면서도 남 눈에는 시신을 위하는 것이 풍기니 나는 아직...
참다운 사랑은 영혼이 육체를 감싸고, 또한, 참다운 사랑은 육체가 영혼을 꽃 피워낸다. 아름다움은 선의 상징이며, 선은 모든 미학의 최종심급이기도 한 것이다. 선만이 아름답고 선만이 고귀하고 위대하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건강과, 인간의 행복과, 극락의 세계를 연출해내지만, 추함은 인간의 쇠약과, 인간의 불행과, 아귀지옥을 연출해내게 된다.
성자는 아름다움의 화신化身이며, 또한 선한 인간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다.
가능하면 어렵고, 힘들고, 더럽고, 그 어느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는 것, 그 무슨 일이든지 간에 즐겁고 기쁘게 하는 것----.
아름답고 멋진 삶과 아름답고 멋진 죽음을 완성하는 것----.
나는 예술적인 삶과 예술적인 죽음을 옹호하는 낙천주의 사상가이다. 예술적인 삶과 예술적인 죽음이란 언제, 어느 때나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삶과 죽음을 말하고, 또한, 언제, 어느 때나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의 한 평생을 단 하루처럼 살아가는 삶과 죽음을 말한다. 새로운 지혜를 배우는 데에도 그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지혜를 실천하는 데에도 그의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조오현 시인의 ‘염장이’와 ‘선사’는 그가 탄생시킨 인물들이며,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들의 장인정신에 의하여, 그들의 예술적인 삶과 예술적인 죽음을 완성해낸 인물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염장이가 선사가 되고 선사가 염장이가 된다.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을 즐겁고 기쁘게 완성하는 데에는 어떠한 인간차별과 계급차별도 있을 수가 없고, 다만, 있다면, 오직, 그 그 주체자의 뜨겁디 뜨거운 열정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조오현 큰스님은 오늘도 새로운 염장이로 태어나면서, 그 염장이의 뜨거운 열정을 통하여, 내일도, 모레도, 천년을 하루같이 고귀하고 거룩한 성자(선사)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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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관(生死觀)
(2018.5.31)
인묵 김형식
설악(雪嶽) 주인
무산(霧山)대종사 적멸에 드시니
산은 슬퍼하고 골짜구니 메아리는 그치지 않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시조시인 오현스님
걸망 놓고 떠나가신 길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 살다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열반송 던져놓고
떠나 가시는 님이시여 언제 오시렵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게
생(生)과 사(死)가 아닌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연화대 꽃비 내리니
무지개 하늘과 땅을 이었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사진:2018년 5월 30일 강원도 고성 건봉사 雪嶽霧山 대종사 다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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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인묵 김형식
한줌의 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