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여요전쟁 이야기---귀주대첩과 동북아의 새로운 평화
여요전쟁(麗遼戰爭) 또는 고려-거란 전쟁(高麗-契丹戰爭)은
993년 (성종 12년)부터 1019년(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요가 고려를 침략한 전쟁을 가리킨다.
아들아, 고려 제8대 왕인 현종(顯宗)은 앞에서 한번 다룬바 있지만, 우리가 사는 진주의
이웃인 사천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단다.
현종은 사생아 출신에 이모에 의해 강제 출가하였다가 또 그녀가 보내온 자객 들 때문에
늘 불안한 삶을 살았고, 강조의 정변으로 어렵게 왕에 올라 곧바로 만난 전란과 그렇게
겪은 몽진길에서의 수난까지 그의 삶 자체가 극적이었던 분이다.
고려는 제2차 여요전쟁이란 사상 유래없는 위기를 만났음에도 무사히 버텨냈지만..
역시 고려의 피해는 엄청났기에 나라가 휘청일 지경이었지.
현종은 갈 길이 멀었고, 할 일이 산더미 같았어.
전란을 거치며 멀어져 간 민심을 어루어 만지고 다독여야 했고,
불타고 파괴된 왕도와 초토화된 서북면 일대를 재건해야 했으며,
현종 스스로도 친정(親政)을 하면서 무너진 왕의 권위를 세우고 나라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리고..아직 끝나지 않은, 또 예견된 요와의 전쟁에도 대비해서 나라의 힘을 모아야 했지.
그런데..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요와의 전쟁 피해 복구를 하며 엄청난 재정적자를 메우려고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영업전을 빼앗았는데..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여요전쟁에 공이 있었던 군인들에게 땅을 빼앗아서 그 땅에서 나온 것으로 문신들에게
급료를 준것인데..이는 이해가지 않는 불공정한 처사로 형평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어.
무신보다 나라의 최상위 계층을 이루는 문신계층에서 희생하는 것이 옳은 모습이지.
그러니 당연히 여요전쟁에 전공이 있었던 상장군 최질, 김훈 등이 주축이 된 무인세력이
반발했고, 현종은 이들의 반발에 놀라 무마했다가, 이듬해 이들을 계략으로 제압하여
숙청해 버렸어.
그리고 탁사정 등의 권신 강조 계열의 신하들도 숙청해서 현종의 왕권을 다지는 작업을
진행했으니..이랬으니 고려 정계는 여전히 시끄러웠지.
하지만, 어쨌든..현종의 왕권은 확립되고 안정화 되어 갔단다.
그런데..이 사건도 그냥 흘려 보낼 수 없는 것이, 요의 역사서인 요사(遼史)에 보면
요에서 현종의 무인세력 숙청사건을 인지하고, 고려 침공의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을 보면 예사로 볼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
1011년 연초 제2차 여요전쟁을 마무리 한 후..고려와 요의 사이는 여전히 험악했단다.
요는 끊임없이 고려에 강동육주 반환과 고려 왕의 친조를 요구하며 압박해왔고,
고려와 요의 국경지역에서는 요의 군사가 매년 압록강을 넘어 침입해오고 고려도
이에 맞서 싸우니 전투가 끊이지 않아 북방이 조용할 날이 없었어.
고려는 송에 사신을 보내어 요의 계속되는 고려 침공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송은 좋은 말로 국서 한 장만 써주고, 실제적으로 고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지.
송의 황제나 신하 모두 요와 전쟁을 결심할 만큼 결연한 의지도 없고 부실한 송의
군사력으로 비추어 감히 요를 공격할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단다.
거기에..여진이 상당히 애매한 입장을 보이는데
어떤 때는 경주, 포항 일대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요의 앞잡이가 되어 고려 공격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여진인이 고려에 귀부하고, 토산물 등을 바치기도 하는 등 배신과 친선을
수시로 오가니...고려에서도 여진을 신뢰하기 힘든 상황이었지.
아들아, 고려는 이런 국내외적인 상황에서도 나라를 안정시키고 힘을 비축하며
착실히 예견된 전쟁에 대비해왔어.
그리고 현종도 이젠 약관에 이제 막 임금이 되어 불안정하고 실권없는 애송이가 아닌
경험이 붙은 노련한 임금이 되었지.
또 하나 이전과 달라진 점은..
고려는 거란군이 싸우는 방법,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아는데,
요는 고려가 지난 경험에서 배워 대비책을 세웠을 것이란 생각은 안했는가봐.
이 차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곧 지켜보기로 하자.
1018년 5월, 고려 현종 9년 5월에..현종은 나이 70을 넘긴 강감찬(姜邯瓚, 948~1031)
장군을 치하하며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에 삼아 중용했어.
현종은 이미 지난 2차 전쟁 때 강감찬 장군의 능력을 봐서 확신을 가졌던 것이야.
그리고 요의 침공 직전인 그 해 10월에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삼아 그 직을 더했다.
1018년 12월 요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 침공을 개시했다.
고려사절요에선 요의 대군을 이끄는 자를 소손녕이라 기록했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거란군을 이끄는 수장은 소배압(蕭排押, ?~1023)이었어.
소배압은 1차 전쟁 때 거란군 수장이었던 소손녕의 형이면서,
요 성종의 장인이면서 또 매제이기도 한..한마디로 요의 외척이자 실세였으며
그때까지 수많은 전공을 세운 요의 대표적인 명장 중 한명으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현종은 평장사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上元帥), 대장군 강민첨 장군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고 군사 20만 8천 3백을 주어 맞서게 했지.
8년전 30만의 주력군이 패배하여 사실상 붕괴했던 고려가 이 때에 군사력을 20만 이상
동원하는 수준까지 회복한 것을 보면..
고려는 확실히 그 8년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요의 대군은 역시 거란이 자랑하는 강력하고 기동력 좋은 기병이 중심이야.
거기에 10만이란 군세로 고려의 수많은 성을 다 공략하기엔 한계가 있는 상황,
또 거란군은 고질적인 약점이 있으니 보급문제가 있고, 시간을 끌면 보급과 함께
후방의 위협에 노출될 것이 유력한 상황이기 때문에..
거란의 선택은 무조건 단시간 내에 전속력으로 돌파해서 고려의 왕도인 개경을
점령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야.
그런데..이건 이미 여러번 써먹었던 전술이라 고려가 훤히 다 알고, 읽고 있었지.
또 고려는 거란군과의 풍부한 전투 경험을 통해 거란이 자랑하는 기병전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으며 기병의 진격을 제한하고 맞서 싸우는 방법 연구도 많이 했어.
이미 2차 전쟁 때 등장했던 검차라는 무기가 보병이 기병을 잡는 방법이었다.
강감찬 장군은 군사 1만2천을 최전방인 흥화진 인근에 매복시켜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성 동쪽 개울(삼교천)을 막아 두었다가 , 거란군이 이르자 둑을 터뜨려
수공(水攻)을 감행하고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공격하여 적을 깨뜨렸지.
거란군은 서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역시나 예상했던대로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우회하여 개경을 향해 남하했어.
거란군은 서경 외곽의 자주(慈州) 내구산에서 부원수 강민첨 장군이 이끄는 군사의
매복에 걸려 또 참패했고..
대동강 지류의 마탄(馬灘)에서 시랑 조원(趙元)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의 공격을 받고
이 전투에서만 1만 여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지.
거란군은 남하하면서 사방에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고
패전을 거듭했지만..소배압은 우직하게 개경(開京)만 보고 남하했다.
거란군이 개경에 가까이 접근하자..강감찬 장군은 병마판관 김종현 장군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개경의 방비를 지원하라 했고,
동북면의 정예군사 3천 3백이 개경 왕도에 합류하여 개경의 수비를 굳혔지.
여기서 고려 현종을 칭찬하고 싶은 것은..
거란군이 왕도에서 1백리 지점까지 접근 했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몽진은 없으며
끝까지 왕도를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나라의 국왕이 이런 결기를 보인다면..
신료부터 백성까지 안심하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아들아, 아빠는 이 순간 현종이 드디어 대왕(大王)이라 불릴 만한 자격을
보여주었다 생각한다 .
1019년 1월 드디어 거란군이 왕도인 개경에서 1백리 거리 신은현(황해도 신계)에
도착했으나 강감찬 장군은 이미 주변 백성들을 소개하고 모든 식량과 물자를 없애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치고 있어..거란은 얻은 것이 없었다.
힘들게 겨우 왕도 1백리 밖까지 왔는데 군사는 피곤에 지치고 식량도 모자라 사기도
떨어지니 소배압도 아주 난감했겠지?
아들아, 그런데 소배압도 인정할 만한건 아주 끈질긴 것이 근성이 있는 사람인가봐.
왠만하면 이번 원정은 실패다 인정하고 군사를 돌이킬 법도 한데..
개경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돌이킨다고 말해 놓고, 은밀히 척후군 3백을 금교역에
보냈어. 하지만 고려는 이미 훤히 읽고 이 척후군을 야습해서 전멸시켜 버렸단다.
소배압도 이때에 이르러서야 그의 원정이 완벽하게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철군(撤軍)을 결심했지만..이미 때는 늦었다.
고려군의 추격과 섬멸전이 개시된 것이니까.
거란군은 철군하는 길에 연주(延州,평남 개천)와 위주(渭州,평북 영변)에서
고려군의 공격으로 또 큰 피해를 봤어.
1019년 2월 초하루, 구주성(龜州城, 평북 구성) 밖 동쪽 들판에서..
드디어 제3차 여요전쟁 최대 규모의 그리고 최후의 대회전(大會戰)이 펼쳐졌다.
구주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감찬 장군의 20만 대군과 소배압의 10만 패잔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데 전투가 아주 치열하고 팽팽하게 이어졌어.
아들아, 그런데 그 팽팽하게 이어지던 전세가 한번에 뒤집어진 계기가 있었으니..
첫째 변수는 바람(風)이었다.
겨울에는 통상 북서풍이 부는데 이상현상이라 할까..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 한번씩 발생해. 겨울에 부는 남풍이었지.
그리고 이 거센 바람의 방향이 거란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며..거란군을 혼란에
빠뜨렸단다.
두번째 변수는 거란군이 생각하지 못한 또 하나의 고려군의 존재였지.
전투가 한참 치열하게 펼쳐지며 절정을 향할 때..
거란군의 후방이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그것은 강감찬 장군이 왕도인 개경의 방비를 위해 급파했던 병마판관 김종현 장군이
이끄는 1만의 군사였는데, 이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거란의 후방을 친 것이란다.
훗날 프랑스의 황제이자 전설적인 명장이었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몰락을 이끈
워털루 전투(1815년)를 떠올리게 한다.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을 몰아붙이던 프랑스군을 패배로 이끈 결정타를 가한건
후방에서 나타난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의 존재였지.
1019년 2월 초하루, 구주의 벌판에서 벌어진 대회전..이 전투가 그 날의 워털루라면,
이날의 프로이센군 원수 블뤼허는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장군이었던 셈이야.
아들아, 너도 알듯이 이날 구주벌판에서의 전투는 고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우리는 이 전투를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한민족의 3대 대첩에 드는 중요한 일전이었단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은 10만 병력 중 겨우 수천에 지나지 않았어.
고려의 완벽한 승리였으며, 요의 역사상 이런 패배는 일찍이 없었다.
제3차 여요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헌공 강감찬 장군의 치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매복기습전, 청야전술, 대회전과 포위섬멸전까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전술을
다 구사하면서 일관되게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019년 2월 초하루, 귀주대첩은 30년 동안 세차례 벌어진 여요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쟁 후..고려와 요 사이에 화의가 성립하고, 고려는 요의 연호를 쓰면서 형식적인
사대관계를 맺고, 전쟁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고 그쯤에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요는 그 명분을 얻고, 더이상 고려에 왕의 친조와 강동육주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요는 고려의 존재가 신경쓰여 송을 공격할 수 없었고,
또 만주지역에서 영향력이 약해지며..그 틈을 타고 여진이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지.
이는 훗날 요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하여간 여요전쟁의 결과로 동북아의 주요 3국인 고려, 요, 송 간에는 새로운 세력균형이
형성되어 평화를 유지했다.
고려는 이후 약 150년간 이어지는 평화의 시대, 전성기를 맞았고..
강대국인 요와 싸워 이겼지만, 역시 피해도 컸던 고려는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고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함으로써
훗날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오랜 전란으로 고려가 역사의 교훈을 받아들여 행한 결과일 것이다.
아들아 생각해보면 고려는 30년에 걸쳐 3차례 전쟁을 치르며 많은 것을 잃고 고되었으나
그럼에도 고려는 잃은 것보다 배우고 얻은 것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
고려가 여요전쟁으로 얻은 150년의 평화와 번영은 고난의 역사에 맞서 용감히 싸우고
결국은 승리를 얻어낸 승자에게 주어졌던 선물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려에 의한 평화..이것도 팍스 코리아나(Pax Coreana)의 한 모습이었을거야.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