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家의 가족 묘역 (C 11~12, B 37)
1, "헨리 거하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2.6~1902.6.11)(假墓 : 기념비)
2, 아들 "헨리 닫지 아펜젤러"( Henry Dodge Appenzeller. 1889.11.06~1953.12.1)
3, 며느리 "루스 노블 아펜젤러"(Ruth Noble Appenzeller. 1894.6.14~1986.11,25)
4,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B-37. Alice Rebecca Appenseller 1885.11.9~1950.2)
1, "헨리 거하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2.6 ~1902.6.11)
펜실바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프랭크 앤 마셜 칼리지"를 졸업한 후,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를 수학하고, 미 감리교 선교사로 결혼 두달 만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장로교 선교사인 "H.G 언드우드"와 함께 제물포 항에 첫발을 딛었다.
조선에 첫 발을 내딛고 "아펜젤러"와 "언드우드"가 드린 첫 기도가 묘비에 쓰여있다.
그는 신학문에 뜻을 두고 교육사업을 시작하여 고종황제가 친히 이름과 현판을 하사하여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1886.6.8)과 한국 최초의 감리 교회인 정동 제일교회(1887.10.9)를 설립하였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
"아펜젤러"는 출판 분야와 성서번역 분야에서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그는 배재학당 안에 "삼문 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기독교 소 책자들과 독립 신문등 일반 신문도 인쇄하였으며 ,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 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 성경 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언더우드 게일"과 함께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였다.
또한 조선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2년 44세때에 성서 번역 위원회 참석차 배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목포로 가던 중,
서해 해청도 군산 부근에서 해상 충돌사고를 당하여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하여
바다에서 시신을 찾지 못하여 현재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는 가묘(假墓)이다.
(한국 활동기간 1885.04.05~1902.06.11)
같이 성서 번역일을 하던 "게일"(James Scarth Gale)선교사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H.G 아펜젤러"의 자녀들도 교육 출판 성경번역의 선구자였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교육과 선교에 헌신했다.
"헨리 거하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가 제물포에 상륙하여 올린 첫 기도문.(1989.01.10)
묘비의 뒷면.
*아들 "헨리 닫지 아펜젤러"( Henry Dodge Appenzeller 1889.11~1953.12.1)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으며 1911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915년 "Drew" 신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뉴욕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917년 9월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감리교 선교사인 부인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
인천지방서 3년간 활동하다가 1920년부터 20년간 아버지가 설립한 배재학당 교장으로 헌신했으나,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강조하여 한때 일제로부터 교장 인가를 취소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1919년 11.6일 미 감리회 한국 연회 서기로 피선되어 1924년까지 연임하였다.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 찬송가 개정 작업에도 동참하여 1931년 신정 찬송가 발행에도 공헌했다.
1953년 12.1 백혈구 부족으로 인한 건강이 악화로 미국에서 치료중 죽음에 이르렀는데,
임종 전
“나를 한국 땅에 묻어주고 아버지께서 조선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남겨
1954년 10.18일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정동교회서 사회장으로 거행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H.D 아펜젤러 부인 "루스 로블 아펜젤러"(Ruth Noble Appenzeller 1894~1986.11.25)
"루스"는 1892년 미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과 평양지방 감리사로 1943년까지 활동했던
"노블" 선교사(Nobel Wiliam Arthur)의 딸로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양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미국서 중,고, 대학을 공부하고 "H.D 아펜젤러"와 미국서 결혼했다.
1917년 남편과 함께 내한하여 같이 감리교 선교사로 봉직하다가 일제에 의해 1941년 강제 출국당했다.
1950년 세계 봉사회 한국 지부 대표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다시 한국으로 와서
1962년까지 정동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게스트 하우스 책임자로 봉사하였다.
정년 후 미국에서 살다가 1986년 사망하여 1987년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정동 교회서 장례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의 앞면.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신명기 33장 27절.
"UNDER NEATH ARE THE EVERLASTING AR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