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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동 성당 - 첫 외국인 선교사가 첫 미사 봉헌하다 |
가회동 성당의 소재지는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7(가회동 30-3). 이른바 북촌 일대이다 지금은 서울을 한강을 기준으로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지만, 그때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촌'과 '남촌'이 갈렸다.
당시 북촌은 궁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왕족이나 권문세도가(權門勢道家),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 자연스레 여러 관아도 북촌에 몰려 있어 조선의 정치나 경제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양반이나 궁녀 왕실 친척이 천주교 입교한 사례가 많은 것도 이런 연유다.
반면 남촌은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처럼 주로 하급 관리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가난한 선비들, 몰락한 양반 가문이 모여 살았다. 엄격한 신분 질서가 있는 조선 사회에서는 북촌과 남촌 중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나뉘었다. 오늘날 강남과 강북과 같다.
주문모 신부의 선교 활동 무대였던 북촌
가회동 성당이 위치한 북촌 일대는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해 1795년 4월 5일 부활 대축일에 복자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서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따라서 북촌의 가회동 성당은 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천주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외국 선교사 없이 자생한 유일한 교회이다. 성리학이 더욱 공고해지던 당시 일부 조선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중국에서 천주교 서적을 구해 연구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교회법에도 없는 가성직 제도까지 시행했으나, 교리 지식이 쌓이면서 가성직 제도에 대한 의문이 생겨 북경교구청에 자문을 구했다. 북경 주교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조선 신자들의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교황청에 이를 전하며 동시에 가성직 제도가 효력이 없음을 알리고, 정식 성사 집전을 위해 성직자를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한국 사람과 외모가 비슷한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기로 했다. 쇄국 정책 때문에 서양인은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지황(池璜, 사바) 등은 1794년 12월 압록강이 얼 때를 기다려 주문모 신부를 밀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계동(현 서울 종로구 계동 지역)에 있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그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나서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도운 조선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과 지황(池璜), 그리고 집주인 최인길 등은 그날로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모두 순교하고 말았다. 이것이 1895년 을묘박해였다.
수배 중인 주문모 신부는 가회동 본당 관할 지역에 있는 초대 여회장 강완숙의 집에 피신해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했다. 당시 혼자 사는 여인의 집에 외간남자가 같이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기에 피신이 가능한 일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고,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고 교리서도 집필했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 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 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는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았다. 박해가 일어나자 연이어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를 받고 거부하면 죽임을 당했다. 주문모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했다가 ‘나의 양 떼’와 함께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수를 결심했다. 그리하여 1801년 5월 31일(음력 4월 19일) 한강 근처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가회동 성당의 설립과 발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면서 명동 본당에 소속된 북촌의 가회동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되기로 계획되었다. 당시 이 구역을 맡고 있던 임병팔(林秉八) 회장을 중심으로 방 하나를 빌려 공동체 모임을 했는데, 지금의 본당 터에 살고 있던 전길헌(全吉憲) 마리아가 1949년 4월 자신이 살던 집과 땅을 성당 건립을 위해 내놓음으로써 첫 본당 부지가 확보되었다. 같은 해 6월 명동성당의 장금구(莊金龜) 주임신부가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교구의 결정에 따라 드디어 1949년 9월 하순 본당 설립이 이루어졌다. 이는 회장은 물론 전 마리아, 배수산나, 이 요안나, 이 우술라 등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준 교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본당의 신자 수는 40여 명으로 전 가족이 신자인 가정은 5세대이고, 외짝 교우 세대를 합쳐 30세대 정도에 불과했다
초대 주임으로 임명된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는 거처가 없어 명동에서 통근하며 미사를 집전하면서 본당을 운영했고, 뒤이어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립한 방유룡(方有龍) 레오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신자들이 흩어지고 본당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성당으로 사용하던 한옥은 전쟁 중 인민일보 사옥으로 전용되면서 재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후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고, 당시 보좌 신부였던 백민관(白敏寬, 테오도로) 신부가 미8군을 통해 주한미군 민간 원조단(AFAK)의 원조를 받아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54년 12월 3일 본당 주보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대축일에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주교 집전으로 축성 미사를 봉헌했다. 성전은 남부 유럽식과 고딕 양식이 조화로운 모습이며 아름다운 종소리로 더욱 유명했다고 한다.
성당 신축으로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 신자들은 이후 주일학교를 개설하고 신심 단체를 설립해 나갔다.
제8대 최익철(崔益喆) 베네딕토 신부 재임기인 1968년에 사제관을 준공하고, 이듬해에 유치원을 개원하고,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에 본당 묘지를 마련했다.
제9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 재임기인 1970년에 성당 지붕을 교체하고 외벽에 화강암을 붙이는 대대적 수리를 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해 수녀원 분원을 마련했다.
제13대 김형식(金亨植) 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84년에는 원아 감소로 유치원을 폐쇄하고,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분원을 설치했다.
제15대 소원석(邵元碩) 가브리엘 신부가 성당 진입로 대지를 매입해 현 성당 부지를 확정한 후, 1999년 4월 제16대 이문주(李文柱)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해 사무실 겸 교육관 건물을 준공하고 11월에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제17대 최승정(崔昇晶) 베네딕토 신부는 2006년 4월 노후화된 성당 구조물에 대한 정밀안전진단 용역을 실시해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 성전 재건축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2010년 2월 제18대 주임으로 부임한 송차선(宋次善) 세례자 요한 신부는 성당 재건축을 추진해 2013년 11월 21일 새 성당을 준공했다. 새 성당은 한국에서 선교사에 의한 첫 미사가 봉헌된 사적지로서의 위상을 반영하면서 북촌한옥마을에 어울리는 독특한 외관으로 건립되었다. 마치 한복을 차려입은 선비(한옥)와 외국인 사제(양옥)가 어깨동무하는 듯 정겨우면서도 독특한 외관을 자랑한다. 2014년 4월 20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염수정(廉洙政) 안드레아 추기경 집전으로 새 성당 봉헌미사를 거행했다.
순교의 역사를 기억하고 죽음으로써 신앙의 진리를 지켜낸 신앙 선조들을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가회동 본당은 새 성당을 신축하면서 1층 내부에 상설 역사전시실을 마련했다. 전시실에는 한국교회 첫 부활 대축일 미사 봉헌과 조선의 마지막 왕족의 세례 사실에 관한 역사적 배경을 각종 유물과 사료 전시를 통해 알리고 있다. 이로써 북촌에 위치해 이곳을 찾는 많은 외국인과 관광객, 지역 주민을 위한 선교 본당으로서뿐 아니라 순교 선조들의 정신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순례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가회동 성당 홈페이지에서)
왕실 선교의 열매
천주교의 박해는 왕실과 집권층에서 주도하였다. 영조의 계비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천주교 신자를 사학죄인으로 몰아 가혹한 탄압을 했다.
이런 모진 박해가 계속되면서 무수한 순교자들이 탄생했다. 박해를 주도했던 황실은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간주하고 그 씨를 말리고자 했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패배자의 모습으로 죽어갔고, 황실은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이곳 북촌지역은 왕실과 가까운 지역이라 왕족과 궁녀들도 입교했으나 그들도 일반 교우들과 같이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양제궁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 동생이며 훗날 철종의 조부인 은언군(恩彦君)이 살던 집이었다. 그런데 은언군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귀양을 가고 그의 아들은 죽었다. 양제궁은 폐궁이 되어 남은 송 마리아(은언군의 처)와 신 마리아(은언군의 며느리)를 위시한 궁녀들이 살았는데 강완숙의 여회장의 용기 있는 전교로 두 고부(姑婦)는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신유박해시에 탄로가 나서 송 마리아와 신마리아는 다른 궁녀 강경복 수산나와 함께 순교했다.
이후 약 150년 뒤 조선의 마지막 왕자였던 의친왕 이강(고종의 둘째 아들)은 가회동 본당 관할 구역인 안국동 별관에서 1955년 8월9일 박병윤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8월 14일에는 의친왕비 김숙도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했다. 의친왕의 세례 동기는 아래와 같은 신문 기사로 알 수가 있다.
고종황제 둘째 아드님인 이강(李堈) 의친왕(義親王)은 1955년 8월 16일 안국동 175번지 별장에서 불우한 평생을 마치었다. 풍문여고 교사(校舍) 뒷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고풍스러운 별궁에서 파란 많은 일흔아홉 해의 생애를 끝마친 것이다. 한국에 살아남아 있는 이 왕가(李 王家)로서는 오직 한 분인 의친왕이 서거한 날 아침 이렇다 할 조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망자를 위한 연도의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영전(靈前) 앞에 모신 사진을 확대 복사하는 데도 당황해야 하는 가운(家運)이기도 했다. 섬돌 밑이 도는 낡은 마루 위에 가마니가 깔려있고 그 앞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포(屍布) 앞에 조그마한 상이 마련되어 있고 상위에는 가톨릭식 대로 십자가와 촛불이 안치되어 있었다. 말없이 누워있는 의친왕 앞에서는 8인의 천주교 신자들이 “주는 탕자(蕩子) 비오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면서 기도를 할 뿐 12시까지 별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중략)
그는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부를 청해 영세받기를 원했다. 그는 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선조(先祖)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 최근사(最近史)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조상의 천주교 탄압의 보속이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 후 날로 천주교 세력은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였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 그가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 비(妃) 김숙(金淑, 77세) 여사도 시내 가회동(嘉會洞) 성당에서 ‘마리아’란 영명(靈名)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의친왕의 영결 미사는 20일 오전 10시 명동 천주교성당에서 거행되었다. <京鄕新聞, 1955년 8월 18일>
이처럼 박해가 끝나고 마지막 왕실의 주역들이 모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마침내 신앙이 승리했음이 입증되었다. 어두운 역사를 걷어내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어 얻은 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성전의 안과 밖
가회동 성당은 인접 도로에 바싹 붙어 있다. 왼쪽에는 한옥, 오른쪽에는 양옥 건물이 나란히 있고 그 사이에 성모 마리아 모자상이 자리하고 있다 꽤 높은 계단을 오르니 1층에는 역사관, 2층에는 대성전이 있다는 안내 표지판이 붙었고 2014년 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는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다.
2층에 오르자 성전 문에는 4복음사가의 상징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마태오는 천사, 마르코는 사자, 루카는 숫소, 요한은 독수리다.
성전 내부는 비교적 단순하다. 제대 뒤에는 커다란 흰색 사각형 벽면에 십자고상이 있고 제대 양쪽에는 독서대가 있다. 오른쪽 독서대 뒤와 측면에는 감실과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다. 좌우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고 뒤편 2층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역사 전시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역사전시실로 들어갔다. 전시실에는 주문모 신부의 첫 부활 대축일 미사 봉헌 등 선교 활약상과 조선의 마지막 왕족의 세례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된 각종 유물과 자료를 전시를 하고 있다. 이 역사전시관은 본당 교우들이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느끼고 배울 수 있고 이곳을 찾는 많은 외국 방문객들에게도 성지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다.
▲합송미사 - 1960년대 2차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는 중 발간된 것으로 라틴어와 우리말이 혼용된 상태이다. 성가와 미사경본을 합했기에 합송미사라 하였다.
▲ 나의 주일미사 - 공의회가 시작되던 1962년 가회동 성당에서 제작한 미사본으로 제헌가(祭獻歌, 성찬의 전례 성가)의 악보가 나오며 미사에 사용되는 라틴어 용어를 쉽게 발음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계 - 노미누스 보비스꿈
●또한 사제와 함께 - 엣꿈 스삐리 뚜 뚜오
▲ 공과(工課) - 매일의 기도라는 뜻으로 축일과 주일 등 모든 기도문을 수록한 기도서이다. 1859년 이후 140여 년간 한국교회 공식기도서 목판 인쇄본으로 4권4책 중 제3권을 제외한 세 권만 남아있는 소중한 책이다.
▲ 미사경본(彌撒經本) - 미사때 바칠 기도문과 전례 순서를 수록한 책으로 1955년 발간되었으며 삽화와 구성이 뛰어나다
▲ 천주실의 - 하느님에 대한 참된 논의라는 뜻의 한문책으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지은 책. 천주교 창립당시 남인 학자들이 필독의 책으로 1868년 발간되었다.
▲ 척사윤음(斥邪綸音) - 사학을 배척하라는 내용으로 왕이 팔도에 내린 교서이다. 기해박해가 있던 1839년(헌종 5년)에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순조비 순원왕후)가 내렸다.
▲ 강완숙 골롬바 상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양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가서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홍 필립보를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남편의 배척을 받아 시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상경하였고 1794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첫 여신도회장이 되어 헌신적 선교활동을 하면서 6년간이나 주 신부를 자기 집에서 보호하였다. 나중 탄로가 나서 체포되어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녀의 나이 40세였다.
▲ 주문모 신부의 첫 부활축일 미사
▲ 강완숙 여회장과 첫 여성 공동체 모임
강완숙 여회장의 집에서 여성공동체의 모임을 재현한 모형이다. 윤정혜 아가다(동정녀), 김연이 율리아나, 정순매 바르바라(동정녀), 문영인 비비안나(궁녀), 송마리아(은언군 처), 신마리아(은언군 며느리), 강경복 수산나(궁녀), 홍순희 루시아(강완숙 딸) 등이 참여하고 있다.
▲ 복자 정광수 바르나바와 윤운혜 루치아 부부
정광수 바르바나는 경기도 여주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교우인 윤운혜 루치아와 혼인하였으나 집안에서 배척을 받아 한양 백동(현 가회성당 지역)에 이주하여 상본과 성물 제각하고 성서를 필사하여 보급하면서 자기 집을 반상의 구분이 없는 믿음의 장소로 제공하였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둘 다 순교하였다.
벌써 1시 50분 2시가 다 되간다. 일단 점심을 먹기로 했다. 계획은 종로 성당까지가 오전 일과였는데 너무 늦은 까닭이다. 가까운 식당 담미온에 들어가서 수육정식을 시켜 안내하는 친구가 준비해온 와인을 한 잔씩 곁들여서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식사비는 친구가 기어코 자기가 내겠다고 우겨서 할 수 없이 ‘고마운 마음’만을 대가로 지불하고 식당 문을 나섰다. 지하철을 몇 코스 타고 종로성당에 이르니 3시가 조금 넘었다.
종로 성당 - 고통과 영광의 포도청 순례지 성당 |
오후 3시 경 도착. 종로성당은 대로변에 위치한 붉은 벽돌로 된 단일 건물이다.
건물 외벽 전면에는 포도청 순례지 성당 청동 부조물 ‘수난과 영광’(김일영 교수 작)걸려는데 순교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계단 위 출입문 입구에는 아기 예수를 양손으로 잡은 성모상이 서 계신다.
건물 왼쪽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입구 지붕 위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칼을 쓴 채 고통을 받고 있는 청동상이 있다. 이는 종로 성당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종로성당 연혁
서울시 종로구 인의동 167 (종로구 동순라길 8)에 소재한 종로성당은 원래는 명동성당에 소속된 공소였다. 1951년 당시 명동성당의 주임이었던 장금구(요한 크리토스트모) 신부가 공소를 꾸며 미사를 봉헌하였다. 1955년 4월 10일 초대 주임으로 이계중 세례자 요한 신부가 임명되면서 서울 대교구에서 19번째 성당이 설립되었다. 주보는 성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최초의 성전은 2층으로 건립되었는데 1층은 성전, 2층은 관리실 및 교리실이었으며 사제관이 없어서 인접한 조그만 한옥을 구입하여 임시로 사용하였다. 1957년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에서 두 명의 수녀를 파견하여 종로 분원이 설립되었다.
1961년 8월 230평의 대지위에 철근 벽돌 성전이 완공하여 10월에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1968년 3대 주임 류영도(디오니시오) 신부는 파주에 성당 소속 묘지 나자렛 공원묘원을 조성하였으며, 1972년에는 4대 주임신부 백일성(도미니꼬) 신부에 의해 동대문 성당이 분가되었다.
1982년 도시 계획으로 성당이 헐리고 6대 주임 장대익(루도비꼬) 신부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새 성당 건립이 추진되어 1987년 5월 김수환 대교구장은 세 번째 성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1,2층은 성당으로 3,4층은 노동사목회관으로 5층은 사제관과 수녀원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성당이다.
2011년 15대 홍근표(바오로)신부가 부임하여 성당 관할 지역 안에 전옥서를 포함한 좌, 우 포도청이 있어 수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된 곳임을 인식하여 성지 개발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13년 2월 28일 염수정 대주교는 종로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에는 순교자 현양관 및 수난과 영광의 부조물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순교자현양관에서는 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 22위, 전옥서에서 순교한 성인 2위, 순교복자 5위와 관련한 기록들과 다른 처형지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에 관한 증거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성전
1층에 바로 성전이 있다. 성전 내부는 예상과 달리 그리 크지 않다. 신자석도 두 줄뿐이다. 정면에는 흰색 사각형 벽에 고상이 위치하고 그 앞에 제대가 있으며 제대 왼쪽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배치되어 있을 뿐 별 특징은 없다. 파이프 오르간 맞은편 오른쪽 벽에는 103위 성인화가 걸렸다. 벽면에 김대건 신부 사진과 그 밑에 유해를 모신 표지판이 있다.
순교자 현양관
순교자 현양관에서는 박해시기별 성인, 복자, 하느님의 종의 명단과 세부 내약을 약술하는 내용, 그리고 순교 형식을 패널 위주로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앵베르, 모방, 다블뤼 등 외국인 선교사와 여러 순교자의 기록과 말을 요약하여 역시 패널로 전시하고 있는데 이들 내용은 생락한다. 아마 해당 성지에 가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순교자 현양관을 나오니 3시 40분. 이제부터는 종로성당이 관할하고 있는 터만 남은 성지들을 순례할 차례다.
바로 인근에 있는 좌포도청 터를 시작으로 의금부 터, 전옥서 터, 우포도청 터, 형조 터, 한국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경기감영 터 순으로 도보로 순례한다.
좌포도청 터 - 한국 천주교 최대의 신앙 증거 성지 |
포도청(捕盜廳)
포도청(捕盜廳)은 조선 시대 한성부(漢城府)의 치안을 담당하던 관서로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 양청으로 조직되어 있다. 좌포청은 당시 중부(中部) 정선방(貞善坊) 파자교(把子橋) 동북쪽(현 서울 종로구 수은동 단성사 일대)에, 우포청은 서부(西部) 서린방(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남쪽(현 종로구 종로 1가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책임자는 포도대장으로 종2품관이며 오늘날의 서울 경찰청장에 해된다.
포도청은 상급 기관인 형조, 의금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관할 지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범죄에 대해 일차적으로 조사하고 죄인을 체포, 국문하였으며, 이후 사안에 따라 단순한 중죄인은 형조로 이관하고, 역모 · 사학 죄인 등과 강상(綱常) 죄인은 의금부로 이관하였다.
포도청에서의 대표적인 고문과 형벌
○ 장형 - 곤(棍, 즉 곤장)이나 장(杖), 치도곤 등으로 때리는 형벌
○ 주뢰(주리)
① 가위 주뢰 : 두 무릎과 발목을 동시에 묶고 두 개의 나무막대로 정강이를 활처럼 휘게 하는 형벌
② 줄 주뢰 : 발목을 묶고 굵은 밧줄로 넓적다리를 엇갈리게 묶은 다음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형벌
③ 팔 주뢰(황새 주뢰) : 두 팔을 어깨가 맞닿도록 뒤로 묶은 다음 나무를 엇 갈리게 집어넣고 팔이 활처럼 취게 하는 형벌
○ 학춤 - 죄인의 옷을 벗긴 다음, 두 손을 등 뒤로 잡아매고, 대들보 장대에 매단 후,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형벌
○ 주장질 - 팔과 머리털을 뒤로 엇갈리게 묶고 사금파리 위에 무릎을 꿇게 한 뒤, 다리나 허벅지 등을 붉은 색 몽둥이[주장]로 짓이기는 형벌
○ 압슬 - 죄인으로 하여금 가부좌를 틀게 하여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은 다음, 무릎위에 목판이나 무거운 돌을 올려놓아 뼈를 부수는 형벌
○ 톱질 - 죄인을 형틀 의자에 묶은 다음, 털로 꼰 줄로 다리를 돌려 감고 톱질하듯이 양쪽에서 당겼다 놓았다 하는 형벌
포도청에서의 순교자들
좌포도청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 28. 종로3가 치안센터 앞 우리나라 첫 영화관이었던 구 단성사 앞 인도에 있다. 도착하니 시멘트로 짜 올린 벽에 ‘단성사 터의 역사’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그 아래 천주교 박해 등을 기록한 판넬들이 가득 붙어 있다. 표지석이 둘이 있는 데 왼쪽은 좌포도청 터이고 오른쪽은 최시형 순교터이다. 최시형은 동학의 2대 교주이다.
포도청은 죄인을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나, 1795년 북산사건(北山事件, 을묘박해)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에 직접 관여하여 법 이외의 과도한 남형(濫刑)을 자행하였다.
신자들의 처형은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교수형이나 백지사형(白紙死刑)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따르면,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공식적으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1839년 의 기해박해 때는 다시 한번 많은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된다.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터노) 등은 포도청의 모진 형벌을 이겨내야만 하였다. 특히 정국보(프로타시오), 장성집(요셉), 최경환(프란치스코) 등은 포도청의 매질 아래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고, 13세의 어린 성인 유대철(베드로), 민극가(스테파노), 정화경(안드레아)등은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밭아 순교하였다.
포도청에서 옥사한 순교자는 한국 성인 103위 중 23명, 124위 복자 중 5명, 하느님의 종 133명 중 33명이나 되었다.
의금부 터 - 천주교 신앙이 반국가 반인륜 범죄라니? |
좌포도청 터에서 의금부 터까지 10여분을 걸었다. 도중에 심일문(三一門)이 나타나는데 심일문은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의 정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내 공원이기도 한 탑골공원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으로도 이름이 나있다.
제야의 종을 타종하는 보신각 건너 SC제일은행 본점 앞, 소나무 정원 가에 표지석 하나가 나타난다. 의금부 터 표지석이었다.
의금부는 왕명으로 직접 선고를 내리던 최고 재판소로 오늘날의 대법원에 해당된다. 이에 따라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외국인 선교사나 국내지도자급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간주하여 엄하게 다스렸다. 주교, 신부, 그리고 유명한 평신도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금부옥(義禁府獄)은 의금부 구내에 함께 설치하였으며, 의금부옥에서 추국을 받은 천주교인으로는 1801년 신유박해 때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비롯하여 이승훈(베드로), 이가환, 이기양, 강이천, 황사영(알렉시오) 등과 1839년 기해박해 때의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및 앵베르 주교(Imbert, 范世亨),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 鄭) 신부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의 남종삼(요한), 홍봉주(토마스) 등이 있다.
전옥서 터 - 사형수들의 형 집행 대기소 |
다음은 전옥서 터다. 전옥서 터는 종로구 종로1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화단에 있다. 이곳에는 동학혁명의 선봉에 섰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도 있다.
전옥서(典獄署)는 형조 아래에서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던 관서였다. 박해시대 많은 천주교도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지만 때에 따라 의금부나 육조(六曹),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종부시(宗簿寺), 사헌부 등의 죄인인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다.
전옥서의 옥사(獄舍)는 남옥과 여옥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각각 담장이 둘러져 있고 담장에 출입문이 있었다. 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분리 수용하도록 하였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다. 성녀 김 바르바나도 전옥서에서 3개월 동안 고문, 굶주림, 목마름과 질병 속에도 신앙을 지키다가 장티푸스로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형조에 속한 감옥 전옥서는 1785년 명례방 사건시 김범우 토마스가 형조에 끌려와서 신앙을 증언한 이래 많은 신자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장소이다.
우포도청 터 - 죽음을 오히려 부러워한 감옥 생활의 참상 |
우포도청에서 이루어진 박해의 성격은 좌포도청과 다름이 없다. 다만 위치상 좌포도청에 비해 우포도청은 서부(西部) 서린방(瑞麟坊) 혜정교(惠政橋) 남쪽(현 종로구 종로 1가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관할 구역 내의 천주교 신자들의 수가 좌포도청보다 적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조정에서는 양 포도청에 명하여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지도층 신자들은 형조와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남은 신자들 대부분은 좌·우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현석문(가롤로)이 우포도청에서 신앙을 증거하였고, 남경문(베드로)과 임치백(요셉)은 좌포도청에서, 한이형(라우렌시오)과 우술임(수산나) 등은 우포도청에서 각각 형벌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 다블뤼(안토니오) 주교등 프랑스 선교사들은 물론 황석두(루카) 회장, 장주기(요셉) 회장 등이 포도청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증거하였다. 또한 1868년에서 1871년 사이에는 이유일(안토니오), 한용호(베네딕토), 최사관(예로니모)등 수많은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1873년에 흥선대원군이 하야하면서 공식적인 박해가 끝난 뒤에도 포도청의 순교사는 계속되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년 5월 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빅토르)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은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월 29일 서울 우포도청으로 이송하였다. 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참고로 당시 우포도청 감옥 생활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기해박해(1839) 때 순교자인 김효임, 김혜주 자매는 갖은 혹독한 고문에도 배교를 하지 않자,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굶주린 늑대들이 우글대는 강도뢰(强盜牢)에 이감시키는 고문을 가했다. 감방이 만원일 경우는 복판에 새끼줄을 쳐놓고 양쪽에 나란히 누워 발을 새끼줄에 얹어 입체적 잠을 자게 했다. 그러면 발을 뻗는 공간이 절약되기 때문이다. 갇혀 있으면서도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육신을 구속받는 옥구(獄具)도 다양했다. 그 옥구에는 목에 거는 칼(枷)과, 나무 수갑이라고 할 수 있는 추(杻), 그리고 나무 족갑이랄 수 있는 차꼬(足枷), 그리고 목을 매어 두는 수쇄(首鎖), 손을 매어 두는 수쇄(手鎖), 발을 매어 두는 족쇄(足鎖)가 있고, 그 쇠사슬 끝에 매어 두는 쇳덩이를 요라고 했다. (중략)
서린옥(우포도청) 감방의 동쪽 끝에 사형 집행실인 교수방이 맞붙어 있었는데, 대들보에 걸려있는 목조임 끈이 교수방의 판문(板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늘어져 있었다. 교수방에서 죄수의 목을 걸어 놓고 판문 밖에서 그 끈을 끌어당김으로써 처형했던 것이다. ‘4명의 옥졸이 교수 끈을 마치 뱃사람들이 돛을 감아올리는 시늉으로 시시덕거리며 잡아끈다. 처형이 끝 난지 두어 시간쯤 후에 옥졸이 판문 틈으로 속을 들여다보고 아직 발끝이 꿈틀거린다하고 비죽비죽 웃으며 빈정댔다. (리델의 ‘옥중기’에서)
우포도청 터는 종로구 종로 6번지 광화문 우체국 앞 화단에 있다.
형조 터 - 서릿발 치는 형벌의 현장 |
다음은 형조 터다. 형조 터는 광화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는 분수가 물을 뿜고 비가 오락가락하여 바닥이 미끄럽다. 우산 쓰며 가는 사람도 있다.
도심지에 뜻밖에 아름다운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이름이 記念碑殿(기념비전)이다. 건물이 매우 호사스럽고 이름에 ‘殿’자가 붙어 왕과 관계가 있나보다 했는데 해설판을 보니 1902년 고종이 재위 40년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로소는 왕이 원로대신을 예우하여 만든 관청이다. 정2품 이상의 고관만 들어갈 수 있는 명예로운 곳이다.
조선 시대 법을 다루는 사법 기관은 일반적으로 삼법사(三法司)라고 하여 형조, 한성부, 사헌부를 가리킨다. 그중 형조는 법률, 사송(詞訟), 형옥(刑獄), 노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육조 중의 하나인 중앙 관청이다. 수재, 화재, 간음, 도적, 투살(鬪殺), 소송 등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따로 형조도관을 두어 노비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형조는 사법의 감독 기관인 동시에 복심(覆審)의 재판 기관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고등법원이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형조의 예하에 전옥서를 두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禁吏)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형조(刑曹)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에 있으며, 현재의 종로구 세종로 81번지 3호 (세종문화회관자리)에 있었다. 형조는 광화문 앞 우측으로 병조(兵曹)의 남쪽, 공조(工曹)의 북쪽에 있었다. 형조의 문 밖에는 우물이 있었고, 청사(廳舍) 뒤에는 연당(蓮塘)이 있었다. 형조를 추조(秋曹)로도 부르는데 그것은 1년 4계절 중에서 바람이 차고 서리가 내리는 가을을 엄한 호령 냉정한 마음으로 죄인을 다스리는 형관(刑官)에 비하기 때문인 것이었다.
형조 터 표시는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문화회관 앞 벽에 표지판이 서 있다. 바닥에 형조 터를 나타내는 바닥 표지석이 있다고 하는데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잦은 바닥 공사 관계 때문일 것이다.
바로 앞 대로가 세종대로이고 세종대로의 상징인 세종대왕 상이 있고 그 뒤로 멀리 광화문이 보인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터는 바로 광화문 앞 광장 바닥에 표지판이 깔려 있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터 - 복되어라 복자여! |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광장 북쪽에 바닥 표지석이 놓여있다.
여기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방문하시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식을 거행한 제단을 차렸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여 2015년 8월 23일 시복 1주년을 맞아 시복식 관련 내용을 광장 바닥에 한글과 영문, 한문, 스페인어로 새겨 놓은 것이다.
◆ 복자 124위의 순교 시기별 분류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1년 12월 8일 한국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참수된 윤지충 바오로, 그 뒤를 이은 권상연 야고보는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 원시장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 3위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매를 맞으며 자신들의 목숨을 주님께 바쳤다.
▲1797년 정사박해 8위
이도기 바오로는 1798년에 충청도 정산에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1799년에 홍주에서, 정산필 베드로는 같은 해 덕산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1799년에 원시보 야고보, 1800년에는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하였다.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1800년에 해미에서 순교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 53위
124위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박해는 역시 신유박해이다. 이해 3월에 조용삼 베드로는 경기도 감영에서 옥사한다. 4월에는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필공 토마스, 홍낙민 루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게 된다. 같은 날 처형된 이승훈 베드로는 아직 순교 사실에 대한 이론이 있으며, 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가 끝나지 않아 현재 시복 대상에 빠져 있다.
같은 해 4월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는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하며, 윤유오 야고보는 경기도 양근에서 순교한다. 5월에는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복혜 칸디다, 정인혁 타데오, 정철상 가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음력 4월 초에는 심아기 바르바라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한다. 1801년 5월 31일 조선의 선교사로서 첫 번째로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한다.
같은 해 7월 강완숙 골롬바, 강경복 수산나, 김현우 마태오, 문영인 비비안나, 김연이 율리아나, 이현 안토니오, 최인철 이냐시오, 한신애 아가타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윤점혜 아가타와 정순매 바르바라는 그해 7월 양근과 여주에서 각각 순교한다. 음력 5월에는 김이우 바르나바가 서울 포도청에서, 이국승 바오로가 공주에서 순교한다. 8월에는 김광옥 안드레아가 예산에서, 김정득 베드로가 대흥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가 김제에서, 김천애 안드레아는 전주에서, 최여겸 마티아는 전라도 무장에서 순교한다.
같은 해 10월 김종교 프란치스코와 홍필주 필립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전주에서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순교한다. 11월에는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이 전주에서 순교하고, 12월에는 현계흠 바오로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1802년 1월(음력 1801년 12월)에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손경윤 제르바시오, 이경도 가롤로, 김계완 시몬, 홍익만 안토니오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정광수 바르나바는 여주에서, 한덕운 토마스는 남한산성에서, 황일광 시몬은 홍주에서, 홍인 레오는 포천에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에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성 마태오는 전주에서 순교한다.
▲1815년 을해 박해 12위
을해박해 직전인 1814년 12월 해미에서는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옥사한다.
음력 4월에 김윤덕 아가타막달레나가, 음력 5월에 김시우 알렉시오와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그해 말엽에는 서석봉 안드레아가 대구에서 순교한다. 김강이 시몬은 12월에 원주에서 순교한다. 김희성 프란치스코와 구성열 바르바라, 이시임 안나, 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 김종한 안드레아와 김화춘 야고보가 대구에서 12월에 순교한다.
1819년 8월에는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서울에서 참수되어 순교한다.
▲1827년 정해박해 4위
6월에 전주에서 이경언 바오로가 순교하고, 11월에는 박경화 바오로가 12월에는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한다. 1835년에는 안군심 리카르도가 대구에서 옥사한다 .
▲1839년 기해박해 18위
5월에 대구에서 이재행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가 순교한다. 같은 달 전주에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이태권 베드로, 정태봉 바오로, 김대권 베드로가 순교한다. 9월에는 최해성 요한이 원주에서 순교한다. 10월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1월에 심조이 바르바라가 전주에서 옥사한다. 12월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김조이의 어린 딸로 교수되어 순교한다. 같은 달 원주에서 최 비르지타가 교수되어 순교한다.
1840년 1월 홍재영 프로타시오, 최조이 바르바라, 이조이 막달레나, 오종례 야고보가 전주에서 순교한다.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는 같은 달 당고개에서 순교한다 .
▲1866년 병인박해 19위
3월에 청주에서 오반지 바오로가, 대구에서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한다. 12월에는 공주에서 김원중 스테파노가 순교한다. 청주에서 순교한 장 토마스와 경상도 함안에서 순교한 구한선 타데오는 1866년 어느 달에 순교하였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병인박해는 가장 혹독한 박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1867년 1월에는 진주에서 정찬문 안토니오가, 통영에서 김기량 펠릭스베드로가, 상주에서 박상근 마티아가 순교한다. 같은 해 서울에서 순교한 송 베네딕토와 베드로, 이 안나 가족 순교자 역시 어느 달에 순교하였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1868년 여름에 동래에서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가 순교한다. 9월에는 이양등 베드로와 김종륜 루카, 허인백 야고보가 울산에서 순교한다. 같은 달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순교자가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한다. 10월에는 박대식 빅토리노가 대구에서 순교한다 .
1888년 4월에는 신앙의 자유가 생겼지만 지방의 인식 부족으로 진주에서 윤봉문 요셉이 순교하게 된다 .
이제 종로성당 관할 터만 남은 성지 중 마지막인 경기감영 터 차례다. 여기 가기 위해서는 이곳 광화문 역에서 서대문 역까지 지하철을 한 코스 타야한다.
경기 감영 터-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있을 수 없다” |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9 적십자병원 정문 옆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 현재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도로변에 표지석이 서 있다.
감영(監營)은 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관청을 말한다. 1784년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경기 지역에는 신자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박해로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음에도, 점점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잡혀 온 경기 지역의 신자들은 한성 서대문 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경기감영으로 이송된 신자들은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용삼 베드로가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배교를 강요 받았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형벌을 받다가 순교했다.
◆ 복자 조용삼 베드로 ( ? - 1801)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조용삼 베드로는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서른 살이 되도록 혼인할 여성을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 후 부친과 함께 여주에 사는 임희영의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예비 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갖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비록 예비 신자에 불과했을지라도 조용삼 베드로의 용기는 체포되는 즉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친을 끌어내다가 배교하지 않는다면 부친을 당장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베드로는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는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 무렵 그는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였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큰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서 약해진 그의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받아낼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음력 2월 14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지역에서 탄생한 신유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1800년 5월에는 양근 지역에서도 천주교를 배척하는 무리들이 신자들을 밀고함으로써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유한숙(兪汗淑) 등 7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된 양근과 여주의 신자들은 그곳의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감사 앞에서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다음해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크나큰 시련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1816~1867, )도 이곳에서 문초를 받은 적이 있었다. 뱃사람인 그가 중국에 표류하게 된 상황을 조사받았다. 표류 후 1858년 1월에 귀국한 뒤 그는 의주와 경기 감영, 강진 등에서 표류 전말에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의심할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어서 즉시 석방되었다.
오후 4시 50분. 아직 두 곳이 남았다. 하나는 서소문 밖 네거리와 중림동 약현성당이다. 두 곳은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다. 먼저 서소문 밖 사거리 성지 역사박물관에 갔더니 이미 마치는 시간이 다 되어 입장이 안 된다고 한다. 조금 전 전화를 할 때는 짧은 시간이나마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는데 하릴 없이 되었다. 그래서 바깥에 있는 몇 군데 시설을 돌아본 후 약현성당에 전화를 했더니 관람이 가능하다고 하여 급하게 약현성당으로 갔다.
중림동 약현 성당 -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 |
서울시 중구 청파로 447-1 에 있는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그리고 박해시대에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서소문 성지를 내려다보는 약현 언덕 위에 있다.
성전 건물의 터는 길이가 약 32m, 너비 12m의 십자형 평면 구조이며 비교적 소규모의 성당이다.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약현성당은 외관부터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묘한 빛이 멋스럽다. 성당 외부에는 높이 26m의 뾰족한 종탑이 있어 시간마다 청아한 종소리를 들려준다. 종탑 아래에는 아치형 창과 둥근 원형 창이 있다. 둥근 아치가 주요 모티브로 쓰이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뾰족한 지붕의 고딕 양식을 절충시킨 독특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성당 마당 한쪽에는 건물 앞에 조그만 성모동산을 만들어 성모상을 모셨다. 그리고 성전 뒤에는 주보 성인 성요셉 부자상이 있다.
약현 성당 발전 과정
중림동 약현 성당은 본래 1887년 수렛골(현 순화동)에서 한옥공소로 출발하였다.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래 무수한 박해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던 교우들이 도성 문밖만 해도 수백을 헤아렸다. 이에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1887년 지금의 중구 순화동 지역인 남대문 밖 수렛골에 집 한 채를 마련해 교리 강습을 위한 강당을 차렸는데, 이것이 약현본당의 시작인 약현공소이다.
공소가 설립된 뒤 신자가 나날이 늘어나자, 종현본당(현 명동성당)의 두세 신부는 뮈텔 주교의 허락을 얻어 1891년 약초가 많아 약초고개, 즉 약현(藥峴)이라고 불리던 언덕을 매입해 성당 건립의 터전을 마련했다.
1891년 10월 27일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설립 기념일에 성당 정초식이 거행되고, 같은 해 11월 9일 두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약현본당이 정식으로 설정되었다. 종현본당에서 분리되어 서울에서 2번째, 전국에서 9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당시 약현본당의 관할구역은 서울 도성의 외곽 지역뿐 아니라 경기도와 멀리 황해도 백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는 명동성당의 설계의 핵심을 담아 1891년 10월 건축을 시작, 착공 1년만인 1892년 약현성당을 건축하였다. 1898년 종현에 세워진 명동성당 보다 6년 먼저 세워진 약현성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이유로 1977년 사적 제252호 지정되었다.
견고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좋은 흙이 필요했다. 당시에 가장 좋은 흙은 왕궁의 기와를 굽던 와서현(지금의 국군 중앙성당)의 흙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해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하신 남종삼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의 시신이 약 43년간 묻혀있던 곳이다. 교구장 뮈텔 주교는 그곳의 흙으로 구운 벽돌로 약현성당을 세웠다. 따라서 약현성당은 바로 순교성인의 살과 피로 세워진 성당이며, 서소문 형장을 내려다보는 서소문 성지 기념 성당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건축되는 벽돌식 성당의 원형(prototype)이 되었다.
완공된 지 3년 뒤인 1896년 4월 26일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 두 차례 거행되어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학생 3명이 사제로 서품되고, 1년 뒤인 1897년 12월 18일에는 두 번째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어 한기근 바오로, 김성학 알렉시오, 이내수 아우구스티노가 사제로 서품되었다.
종현(명동)성당은 4대문 안 선교를 담당했다면, 약현성당은 4대문 밖, 경기도부터 멀리는 황해도까지의 선교를 담당하면서 넓게 퍼져있는 신자들을 돌보았다. 이런 이유로 약현성당을 일명 성밖성당, 성 요셉 성당이라고도 한다.
이후 교회의 발전 속에서 약현성당은 약 90여개 성당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초대 주임인 두세 신부는 남달리 교육열이 높아 1895년 약현서당을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쳤고, 이후에도 교육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1901년에는 성당 구내에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가명학교(可明學校, 가명은 두세 신부의 본명인 가밀로를 한자로 표기한 것)를 세우고, 1906년에 건물을 신축해 남자 어린이를 위한 약명학교(藥明學校)를 설립했다.
1909년에는 교사를 증축하고 남녀 학교를 통합한 가명학교를 만들었다. 두세 신부의 후임 비예모 신부는 성당 내부의 남녀 칸막이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대체하는 등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했으며 1920년 9월 30일에는 최종철 마르코가 본당 출신 첫 번째 사제로 탄생했다.
1938년 11월 3일에는 언구비(현 논현동)에 있던 약현 묘지에 순교비를 건립했다. 한국 전쟁 후 1954년 3월 19일 서울대목구와 가톨릭자선회의 지원으로 본당 구내 가명학교 자리에 병상 62개 규모의 성 요셉의원을 개원했고, 5월에는 성 요셉 간호고등기술학교를 세워 전문 인력 양성과 극빈자 진료에 힘썼다. 이후 이 학교는 1955년 가톨릭대 의학부와 부속병원인 성모병원이 되었다.
1968년 2월 24일에는 서울시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잠실에 있던 언구비 본당 묘지가 폐쇄되고,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에 임야 43,050평(142,314㎡)을 매입해 이듬해 6월 분묘 이장을 완료했다. 1979년 5월 주일학교 교실을 이용해 평일 야간에 고등학교 과정과 타자 교육을 실시하는 성이냐시오 학교를 개설해 환경이 어려워 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고, 1982년 5월에는‘우리 신학생은 우리 힘으로 키운다’는 신자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약현장학회를 설립했다.
1984년 12월 22일 순교 성인 44인의 명단과 순교 역사를 수록한 7개의 조각물을 세운 높이 18m의 순교자 현양비 제막식이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거행되었으며 1986년에는 전례음악을 역사적으로 수집하고 보호, 발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가톨릭종교 음악연구소를 본당 구내에 이전하였다. 1989년에는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해 100주년이 되는 1991년까지 기념사업과 성역화 사업을 전개하기로 했고, 1990년 4월 22일 서소문 순교자기념관 기공식을 거행했다.
1997년에는 서소문공원 재개발로 순교자 현양탑을 본당 내 14처 기도동산으로 옮겨 왔다. 1998년 2월 11일 본당 건물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훼손된 것을 복원하여 2000년 9월 17일 정진석 대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2000년 10월에는 ‘정하상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2007년 7월 19일 중림동성당의 명칭이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변경되었다. 2009년 9월 13일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을 개관했고, 2010년 3월 5일부터는 서소문 순교성지 현양탑에서 매주 금요일 성지 미사를 거행하고 있다.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
서소문순교자기념관(西小門殉敎者記念館)은 1991년 약현성당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는데, 약현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에는 서소문 순교자들의 유품과 천주교 관련 고서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2009년 서소문 순교전시관에 이관했다.
순교자기념관 성당의 제대(祭臺) 중앙에는 성인(聖人) 유해(遺骸) 16위(位), 오른쪽 벽면에는 서소문에서 순교한 성인 위패(位牌) 44위, 왼쪽 벽면에는 서소문에서 순교한 순교자 위패 54위가 모셔져 있다.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2008년 7월 설계에 들어가 1년 2개월 만에 완공된 순교성지 전시관은 562㎡ 면적의 2개 층(상·하층) 규모로 ‘박해(迫害)시대와 서소문 순교성지’, ‘약현본당 역사’ 그리고 ‘한국초대교회 닥종이 인형’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과 미디어 룸, 강당, 수장고(收藏庫), 사무실 등을 갖추고 있다.
전시관 안에 들어가니 옛날에 사용하던 제의(祭衣)와 풍금(風琴), 제병(祭餠)을 굽는 틀과 종을 치던 장치 등이 전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1865년 1월부터 1866년 3월까지 천주교 신자들의 의무축일(義務祝日)을 표기한 목판 인쇄본 을축년(乙丑年) 첨례표와 주교요지(主敎要旨), 기해일기(己亥日記) 등의 서적은 전시관의 자랑거리이다.
사진의오른쪽 현양탑은 1984년에 서소문 성지에 조성된 옛 현양탑으로 지금은 약현성당 성모동산에 옮겨가고 그 자리에 1997년에 새로 건축된 현양탑이 있다. 화강석 3개의 탑은 형구 칼의 형상으로 박해와 순교자의 죽음을 상징하며 탑에 새겨진 7개의 줄은 7성사를 상징한다. 오른쪽 탑 서소문 순교자 44명의 이름을 새긴 판이 있고 왼쪽에는 복자 27위와 하느님의 종 6위를 포함한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98년 화재가 나서 성당이 전소되어 2000년에 복원되었다. 당시 이 성모상은 성당 좌편 회랑 소제대 위에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을리기만 하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고상은 서울대교구 교회사학자 최승룡 신부의 고조부께서 구입하신 것으로 병인박해 즈음의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가 상하좌우에는 12사도가 각각 세 분씩 그려져 있고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유다 대신 성 바오로가 들어있다.
상(上) - 이분께서 승리하시고(성 베드로, 성 안드레아, 성 바오로)
좌(左) - 이분께서 다스리시고(성 야고보, 성 요한, 성 빌립보)
우(右) - 이분께서 명령하시며(성 야고보, 성 바르톨로메오, 성 마태오)
하(下) - 이분께서 위로하신다(성 시몬, 성 다대오, 성 토마스)
순교기념 전시관 내 성당
올라올 때 큰길로 오다가 갈라지는 산책길을 택하여 오르면 입구의 정하상 상이 있고 바로 십자가의 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예전의 현양탑이 있는 기도동산, 그리고 약산 전망대에 이른다. 역으로 큰길로 올라왔다가 내려갈 때 갈 수도 있다.
순례 일과를 마쳤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성전의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 내부 성당 참배로 만족해야만 했다.
오후 5시 50분. 이제 순례를 마치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바쁘고 힘든 하루였다. 경주행 돌아가는 KTX 시간이 오후 7시 19분이라 시간상으로는 서소문 성지 순례도 가능했는데 박물관 문 닫는 시간으로 인해 들어가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로서 서울 북부 지역의 순례는 마쳤다. 서소문 성지는 다음, 남부 지역 순례 때를 기약하기로 한다.
신경주역 도착 밤 9시 20분.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넘었다. 남는 것은.성지 순례의 감동과 차질 없이 친절하게 안내해 준 친구 신 모세 형제에 대한 고마움이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