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2.수바시사원·쿰트라석굴·키질가석굴
황량한 사막에 핀 ‘불교문화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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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바시 사원 유적> |
사진설명: 초르타크산을 배경삼아 서있는 수바시 사원유적은 쿠차불교유적을 대표하는 곳 가운데 하나다. 쿠차강을 가운데 두고 동·서 언덕에 유적이 흩어져 있다. |
서역북도의 카슈가르와 투르판 중간지점에 자리 잡은 쿠차의 풍광(風光)은 멋졌다. 천산산맥의 거대한 준령이 북쪽에 솟아있고, 주변의 들판은 넓었고, 거리엔 사람들로 붐볐다. 거리를 오가는 위구르인들 모두가 미남미녀였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사이 ‘쿠차의 역사’가 궁금했다. 서역에 위치한 다른 오아시스 도시들처럼 쿠차의 역사도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한서〉등에 의하면 쿠차는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역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중국 전한(前漢)왕조는 쿠차 동쪽 50~60km 정도 떨어진 오루성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고, 쿠차 등 서역제국을 통치했다. 물론 쿠차가 순순히 전한에 귀속된 것은 아니었다. 흉노와의 지난한 투쟁 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서역을 놓고 패권을 다퉜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한나라는 온갖 수단을 강구했고, 이런 과정 속에서 실크로드도 열렸다.
이렇게 시작된 쿠차의 역사는 기원전 65년 전기를 맞는다. 오손으로 시집간 한나라 공주와 결혼한 쿠차왕 강빈이 1년 동안 장안(현재의 서안)에 체류하며 문물과 제도를 수용한 것. 전한이 멸망하자 쿠차는 다시 흉노와 제휴, 카슈가르까지 속국으로 만들 만큼 세력을 떨쳤다. 그것도 잠시. 후한 명제(73년)때 반초(班超. 33~102)장군이 쿠차를 점령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하면서 한나라 속국이 됐다. 반초가 죽은 지 4년 뒤인 107년 쿠차는 다시금 독립왕국으로 일어선다.
한나라가 망하고 위·촉·오의 삼국시대가 시작될 때도 쿠차는 여전히 독립왕국을 견지했다. 대륙이 서진(西晉) 사마염에 의해 통일됐어도 쿠차엔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팔왕의 난’(291~306)과 갈·강·저·흉노·선비족 등 ‘오호난입’(五胡亂入)을 거치며 십육국시대가 시작되자, 쿠차에도 서서히 영향이 밀려들었다. 특히 전진왕(前秦王) 부견은 장군 여광(呂光)을 파견해 쿠차를 정복하고, 일대의 명승 구마라집을 데려오게 했다. 이때 쿠차는 70만 대군을 모아 7만 대군의 전진군대에 대항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석굴 속 벽화 보고 감탄 연발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당(唐)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자, 쿠차는 다시금 속국이 된다. 쿠차를 정복한 당나라는 이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고 서역 전역을 호령했다. 고구려 유장 고선지 장군이 서역 전체를 쥐락펴락 한 것도 당나라 때였으며, 특히 747년 길기트 원정을 떠나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귀국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안록산·황소의 난 등을 거치며 당나라가 쇠락한 830년대, 키르기스족에 패한 위구르인들이 쿠차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후 위구르인들을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를 장악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상념을 접고 쿠차고성에서 ‘수바시 사원’(조호리 불교유적지)으로 이동했다. 이 때가 2002년 9월20일. 쿠차 동북쪽 20km 지점에 유적지가 있는데, 시내를 벗어나자 사막에서 시작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먼지로 뒤 덮였고, 천지는 뿌옇게 변했다. 먼지 사이로 난 길은 그런대로 좋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자 중국 정부가 먼저 포장했기 때문”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도로 주변엔 전부 평야였다. 공동묘지와 옥수수가 심어진 밭 등이 펼쳐져 있었다.
40분 정도 달려 유적지에 도착했다. 멀리 북쪽으로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산이 보였다. 천산산맥 남쪽의 초르타크 산이었다. ‘초르’는 ‘황량하다’는 의미고, ‘타크’는 ‘산’을 뜻한다. 따라서 ‘초르타크’는 ‘황량한 산’으로 풀이된다. 말 그대로 산은 황량했다. 그곳에 자리 잡은 수바시(Subashi)사원 주변에도 풀 한 포기 없었다. 모래만 가득했다. 유적지는 쿠차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 양편에 흩어져 있었다.
천지에 가득한 먼지 속에, 황량한 산을 배경삼아 서있는 유적지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천천히 유적지 사이를 돌았다. 흙으로 만든 유적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찬란한 영광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는 수바시 유적지 역시 서역불교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대당서역기〉엔 이렇게 나온다. “황폐한 성의 북쪽으로 40여 리를 가면 산기슭에 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가람이 있다. 똑같이 조호리라고 이름 하지만 동서에 위치하여 동·서 조호리라고 불린다. 불상의 장엄은 사람의 솜씨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승도들은 청정하며 실로 부지런히 정진한다. 동조호리 불당에는 옥석이 있는데, 면적은 2척쯤 되며 황백색을 띠고 있어 마치 대합조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위에는 부처님 발바닥이 새겨져 있는데, 길이는 8촌이고 너비는 약 6촌이다. 재일에는 등불을 밝히기도 한다.”
불상의 장엄은 사람의 솜씨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적혀있는데, 불상은커녕 흙덩이만 보였다. 강 건너 동소호리를 바라보니, 황혼의 석양빛에 벌겋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쉬움만 가득안고 쿠차 시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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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쿰트라석굴 전경. 모두 112개의 석굴이 있지만 훼손이 심하다. |
다음날인 2002년 9월21일. 쿠차 시내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쿰트라 석굴로 갔다. 강에 면한 바위 절벽에 석굴이 뚫려있는 곳. 차에서 내려 1시간 정도 강을 끼고 거슬러 걸어갔다. 올라갈수록 절경이었다. 강 저편에는 소들이 모여 풀을 뜯고 있었다. 석굴은 모두 112개,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굴은 기껏해야 10개였다. 관리인은 “그나마 보여주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보라”는 식이었다.
굴 입구에 채워진 자물쇠는 기본이 2개였다. 하나는 현지 관리인이 갖고 있고, 다른 하나는 키질석굴 앞에 있는 쿠차석굴연구소 직원이 관리한단다. 들어가는 굴마다 두 사람이 열쇠로 열고 들어가야만 했다. 들어가는 과정은 짜증스러웠지만, 막상 들어가니 별천지였다. 천장과 벽면에 가득 그려진 부처님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당한 모든 ‘짜증’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게도 훼손이 심했다. 불에 그을린 것, 누가 파갔는지 군데군데 벽화가 없기도 했다. 남아있는 부처님 상호는 사정없이 파괴됐고, 특히 눈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누가 왜 훼손했을까.
‘유적으로만 남은 불교’에 비애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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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키질가석굴 전경. 황량한 산에 핀 꽃으로 보였다. |
현지 관리인에게 이유를 물었다.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기 전, 이슬람을 믿는 위구르인들이 이곳에 살았다. 그들은 그림이나 조각을 ‘우상’이라며 매우 싫어한다. 이슬람을 믿는 위구르인들이 석굴 안의 많은 유물들을 훼손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굴을 보면 볼수록 안타까운 마음만 점점 들었다. “한 때 서역을 정신적으로 지배했던 불교는 이제 현지인들에겐 전혀 쓸모없는 종교로 변하고 말았다”는 차가운 현실만 보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렇다고 울 수도 없고, 현지에 이민 와 살기도 힘들고, 이민을 가 살아봐야 불교를 흥륭(興隆)케 할 방법도 없는데…. 애만 태우다 쿰트라 석굴을 걸어 나왔다. 강변에 드리워진 수양버들 가지를 꺾어 입에 씹으며 아픈 마음을 달랬다.
쿠차 시내로 돌아와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염수계곡 방향으로 차를 달렸다. 초르타크 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황폐한 석굴, 키질가(Kizilgaha) 석굴에 가기 위해서였다. 시내를 빠져나와 북서쪽 방향으로 달리자 울창한 백양나무 숲이 나왔다. 숲을 지나니 곧바로 사막이 펼쳐졌다. 사막 입구에서 10km 쯤 더 들어가니 말라버린 강바닥이 나왔다. 염수계곡의 지류라고 했다. 소금물이 흐르는 강. 그러나 비가 많이 올 경우에만 물이 흐른다고 했다. 강 언덕엔 한나라 시대 만들어진 봉화대가 서 있었다. 2000년 전에 만들어진 봉화대가 아직도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막상 가서 보니 보존 상태는 양호했고, 지금도 여전히 봉화대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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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한나라 때 만들어진 봉화대. |
차를 타고 키질가 석굴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황량한 언덕에 만들어진 석굴, 그 석굴을 막고 있는 문들만 보였다. 물이 흐른 흔적이 있는 강엔 먼지만 가득했다. 걸을 때마다 달라붙는 먼지와 함께 석굴 입구로 올라갔다. “현재 106개가 확인되고 있지만 너무나 황폐해 옛날의 장관은 찾아볼 수 없다”고 안내인이 말했다.
겉은 볼품없이 변했지만, 석굴 안은 그야말로 극락이었다. 화려한 서역불화의 진수를 볼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천(飛天), 정좌한 부처님, 부처님 주변에 몰려있는 제자들, 주변의 나무와 짐승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어울린 멋진 벽화들이 석굴 안에 가득했다.
벽화를 보는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황홀했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희미해졌지만, ‘역사와 유적으로서의 불교’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 현장에 서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돌아오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쿰트라 석굴에서 느낀 비애감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다만 “제대로 보존됐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은 남았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옮겨 억지로 나왔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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