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포근하리라던 기상청의 예보를 비웃기나 하듯 사나흘
전국적인 한파와 폭설이 온 산야를 꽁꽁 얼어붙게 했다.
동지섣달 긴긴 밤이 아니더라도 칼바람 살을 에이는 겨울은 지루한 인고의
계절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순환과 섭리에 근거하자면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진통과 다스림의 시간이다. 그런 까닭에 겨울이 주는 의미가 겉으로는 우울한
회색 빛깔일 수도 있겠으나 그 내면은 충일한 내용물의 부화과정이라 해도 좋으리라.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선문법어(禪門法語)나 지나친 부정은
긍정이라는 학설에 연유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비우면 세상은 비운만큼 넓어지는
법이다. 이 또한 다스림의 미학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목전의 욕심에
목말라하고 미움과 증오에 익숙해져 있다.
옳음을 실천하려는 의지는 고사하고 인륜과 도의마저 저당 잡힌 세태가
한심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다만 올곧은 신념으로 불의에 대적하는 소수의 절규와 몸부림이 희망의 끈을
부여잡는 한 톨의 유일한 씨앗이라고나 할까,
요즘 SBS 드라마 '야인시대'가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익히 알다시피 장군(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담은 것인데 이는
일찍이 영화나 브라운관을 통해서 재탕, 삼탕 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전례 없는 인기특수에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상실의 시대에 한 줄기 샘솟는 빛과도 같은
의리와 양심의 복원이다.
임권택의 '서편제'가 눈먼 송화가 동녀의 죽장(竹杖)에 이끌려 겨울의 소실점으로
사라져 가는 한(恨)의 미학(美學)을 완성했다면 '야인시대'는 양심의 미학을
창출한 걸출한 수작임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폄하하자면 비록 오늘날의 조폭과 다를 게 없는 건달 세계의 사랑과 야망으로
비쳐질 수 있으나 그 내면의 양심과 의리, 옳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결단력과
참된 열망에의 희구(希求)는 정체성마저 상실한 작금의 세태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미와와 가미소리의 불의에 대적하는 마루오까와 시바루, 하야시의 양심과
깨끗한 승복은 비록 적일지라도 아름다움 그 자체다.
여기에 김두한의 민족적 자존과 결합된 불굴의 의지는 시청자로 하여금 통쾌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독재와 억압이 맹위를 떨치던 박정희정권 시절 정경유착의 표본이었던 삼성의
사카리 밀수사건이 터지자 국회의원 김두한은 의사당에서 비리정치인에게
오물세례를 퍼부었다.
방법 면에서 다소의 아쉬움은 있었으나 '장군의 아들'다운 의로운 행동이다.
지금 우리에게, 아니 이 땅에 그럴만한 의인이 있는가, 과연 정치인 다운
정치인은 있는가,
대선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저마다 자신이 적임자라며 정치공세와 파격적인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부정부패의 척결, 동서화합, 서민이 잘사는 사회건설 등 화려한 공약제시가
잔칫상을 풍요롭게 하는 듯도 하지만 대부분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 뿐 정작
발등에 떨어진 불끄기나 실현 가능한 공약은 그리 많지 않은 느낌이다.
그들 말대로 내건 공약들이 모두 지켜질 수만 있다면 지구촌의 한반도는
유일한 꿈의 패러다이스가 될 법도 하다.
하지만 우린 이들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누누이 주권을 진상해 왔다.
분명 국가는 국민의 보호벽이며 안전막이다. 주권이 없는 국민과 약소국의
설움을 강요하는 국가는 존재가치가 없다. 미군의 장갑차에 꽃다운 생명을
짓밟힌 미선 양과 효선 양의 죽음 앞에서 애도는 고사하고 눈칫살만 키우던
정치인들이 시민단체의 연이은 시위와 국민들의 분노에 마지못해 팔을 걷어
부치는 듯 했지만 미온적인 대처는 아직 그대로다.
NATO나 일본과 비해 기울기가 심한 한미행정법(SOFA)이 대체 무엇인가,
미군의 치외법권과 제왕적 군림은 인정하고 한국민의 주권은 말살해도 좋다는
것이 우방이요, 혈맹관계에 있다는 한미의 바람직한 자세인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북핵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적어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이 문제들에 대한 확고한 입장과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마련하고 민족적 자존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이번만큼은 역사와 민족 앞에 죄를 짓고 누를 범하는 불행한 대통령이 나와서는
결코 안된다.
의(義)와 양심(良心)을 바탕으로 낮은 자세로 5년 임기를 한결같이 국민과 함께
호흡하면서 국정을 훌륭히 마무리하고 퇴임 후 고향에 돌아가 텃밭을 가꿀 수 있는
그런 서민적인 대통령을 우리는 열망한다.
[choikwangli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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