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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자유로운 사람이 죽음보다 적게 숙고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1944)는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명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사람들은(철학자를 포함하여) 생명에 대해서보다 죽음에 대해서 더욱 사색하고 고뇌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생명에 대한 관심은 가파르게 증가해왔다. 가장 큰 이유는 분자생물학을 비롯한 생명과학의 발달이 생명의 주제에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까지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생명에 관해 통합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기폭제가 된 것이 슈뢰딩거의 이 '작은 책'이다. 비전문가들을 위해 강연한 원고를 바탕으로 쓴 이 책이 분자생물학의 발달과 DNA 구조 발견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지난 60여 년 동안 슈뢰딩거의 이론이 여러 가지 오류가 있음을 지적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생물학이 큰 틀에서 여전히 슈뢰딩거의 업적을 이어받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은 1990년대 중반에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는 슈뢰딩거 책의 제목과 정신을 재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 생물학계가 "생명을 분명히 정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결국 생명은 물리.화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 슈뢰딩거의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인정한다.
생명과 물질 사이
우리의 관심은 슈뢰딩거의 과학적 탐구가 남긴 철학적 물음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의혹'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이란 생명체도 물질로 환원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그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도 물질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다. 책의 부제 '살아 있는 세포의 물리적 측면'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슈뢰딩거는 "살아 있는 유기체, 곧 생명체라는 공간적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상의 사건들'을 물리.화학 법칙으로 설명하려" 했다. 또한 "현재의 물리학이나 화학이 생물학적 사건들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앞으로 이들 과학이 그 문제들을 언젠가 해명할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될 수는 결코 없다"라고 주장한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때 설명할 수 없던 문제가 꾸준히 해명되어 왔다는 사실"이 또한 이를 입증한다고 한다. 슈뢰딩거는, 당시까지 생물학 이론과 과학적 탐구의 모델로부터 얻은 한 가지 중요한 결론 때문에 물리학자인 자신이 생명에 관한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물질은 지금가지 확립된 '물리법칙들'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다른 물리법칙들'도 포함할 것 같다"라는 학문적 견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체에 있는 새로운 유형의 물리법칙을 발견할 준비를 해야" 하며, 그 새로운 원리들 역시 초물리적이거나 비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물리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그 원리란 양자론의 원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론은 자연계에서 실제로 발견되는 모든 종류의 원자 집합체를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최초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 차원에서는 "분자, 고체, 결정이 실제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고" 한다. 슈뢰딩거가 생각한 생명체는 유전자처럼 비주기적(주기성을 갖기 않는)으로 자라면서 자신의 구조를 복제하는 물질, 곧 '비주기적 고체 또는 결정체' 이다[그의 이런 가설은 케언스-스미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에게 "우리의 선조인 최초의 자기 복제자가 유기분자가 아닌 금속이나 점토의 작은 조각 같은 무기결정체가 아니었을까"하는 흥미로운 추측을 하게 했다]. 그는 비주기적 결정체인 생물인 '주기적 결정체'인 그 어떤 광물보다 매혹적이며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둘 사이의 구조적 차이를, 라파엘의 태피스트리(벽걸이 융단)처럼 지루한 반복 없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의미 있는 도안을 보여주는 대가의 자수 걸작품과 동일한 무늬가 주기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보통 벽지의 차이와 같다고도 본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의 이면에는 그가 이들을 모두 물질이라고 보는 전제가 깔려 있다. 태피스트리와 벽지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물질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미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체의 비밀을, 물질을 탐구하는 방법으로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이런 입장을 좀 더 밀고 나가면, 결국 인간도 물질처럼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이는 자연계에서 인간이 '별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에 이르게 한다. 프로이트는 인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 다음으로 인간의 순진한 자존심에 상처를 준 과학자로 찰스 다윈을 꼽았다. 다윈이 "인간의 우울한 지위를 박탈하고 인간도 동물의 후손일 뿐"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는 이를 다윈이 다른 생명체들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을 깨고 연속선상에서 인식한 것이라고 재정의했다. 이 개념을 좀 더 연장해서 생각해보면, 슈뢰딩거는 유기체와 무기물 또는 생명과 물질을 연속선상에 놓고 탐구했다는 점에서, 본격적으로 '근원적인 불연속'을 깨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윈이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연속성을 밝혔다면, 슈뢰딩거는 생명체와 물질 사이의 연속성을 전제하는 과학적 탐구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과 물질이 연속성상에 놓임으로써, 인간은 별난 존재라는 아우라를 벗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타자들
인간이 별난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은 자칫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대상이 될 수 있다. 사실 슈뢰딩거의 환원론은 이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을 씀에, '도덕적'이라는 말에서 벗어나고 또한 그 뒤에 붙는 '의무'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한 것은 이를 미리 의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철학적 사유의 힘을 다시금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과학적 입장을 뒤집어보면, 그 이면에서 의외로 윤리적 성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같은 선상에서 인식하는 태도는 사람들이 다른 생명체들을 자신만큼이나 존중할 줄 아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체와 물질을 연속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다른 생명체들뿐만 아니라 '하찮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만물 모두에 대한 존중심을 싹트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물질의 존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다시 역설적으로 '별난 존재'가 된다. 이와 함께, 인류의 세계관과 그것을 구성하는 개념들은 또 한 번 역전극을 펼칠 수 있다. 이 역전극은 두 가지 새로운 길을 펼쳐놓을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전통적인 생물과 무생물의 분류를 넘어서 새로운 생명 개념이 탄생하는 것이다. 생명을 물질로 환원해서 인식하는 시도를 뒤집으면, 모든 물질을 포함하는 우주가 거대한 생명체라는 인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생명의 개념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개념의 씨앗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에도 영혼과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물활론이 그 좋은 예이다. 근대 초기에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의 타원 궤도를 계산해낸 케플러는 지구를 숨쉬고 기억하며 여러 습관을 지닌 괴물로 상상하기도 했다. 오늘날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도 또 다른 물활론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물질의 개념으로 생명을 탐구하는 것을 역전시켜 생명의 개념으로 물질을 탐구하는 것이 된다. 다른 하나는, 무기물과 유기체의 관계가 방법론적이고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 '실체적 변환'의 차원을 가질 수 있다는 가설이다. 이것은 유기체를 무기물로 환원하는 과학적 인식을 실체적 차원에서 역전시켜 보는 것이다. 이는 무기물로 만들어진 인공 생명체(인조인간을 포함하여)가 결국은 자생력을 지닌 유기체로 '진화'할 수 있을지로 모른다는 오랜 의혹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체의 진화 및 삶의 환경 등과 연관한 복잡한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이런 진화의 가능성을 '미리' 배제할 수는 없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다윈, 슈뢰딩거를 거치면서 인간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는 기회들을 만나고 있다. 이는 또한 과학이 발달함으로써 우리 삶에 등장하는 '새로운 타자'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겨준다. 슈뢰딩거가 문제를 제기한 뒤로 분자생물학을 비롯한 과학의 여러 분야는 우주 만물에 대해 종합적으로 인식해나가는 과정에서 아직 수많은 물음표를 남기고 있다. 많은 문제에 대해 답을 찾아내는 만큼 또 다른 물음표들이 고개를 든다. 더구나 새로운 타자들 앞에서 그 물음표는 굵게 찍힌다. 그 타자들은 다른 생명체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으며, 우리들이 인공으로 만들어낸 피조물일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철학은 인간 외의 다른 존재들과 '타자 연계적' 사유를 지속해왔다. 바로 이 타자 연계적 사유로 인간은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 삶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또한 이것이 첨단과학의 시대에 철학이 갖는 힘인지도 모른다.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철학정원>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