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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즐겨 부르던 복음 성가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 나의 보배가 되신 주 / 주 나의 모든 것 / 주 나의 모든 보물을 /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세상에서는 약한 것을 능력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고, 더 크고, 더 능력이 있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최고가 되려고 서로 경쟁하고 노력합니다. 그리이스의 현인이요,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에게 당시의 거부 아지미테가 찾아와 자기가 소유한 넓은 땅을 자랑하였습니다. 그 자랑을 듣고 난 소크라테스는,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당신이 자랑하는 땅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아지미테는 “제 토지가 아무리 크고 넓다 해도 세계 지도에서 찾을 정도는 못 됩니다”라며,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 때, 소크라테스는 “아! 그런가요? 지도의 일부도 못된다면, 크다고 자랑 할 정도가 못되죠!”라고 했습니다. 이건, 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자랑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며,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어떻게 약한 것을 자랑하고, 약한 데서 능력이 온전해집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강함은, 절대자 앞에서 우리의 약함을 깨닫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약해도 약한 줄 모르고 교만하면, 더 큰 문제가 되지만, 강한 자라도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당 시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뛰어나고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언급한 빌 3: 5 - 6을 보시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단했던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약함을 깨달은 후, 자신의 약한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5절을 보시면,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또, 10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은,
본문 7절을 보시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사도바울이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육체에 가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죄의 시작입니다. 잠 18: 12을 보시면,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간혹 우리의 믿음을 “자신감”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할 때 보면, 자신감이 넘칩니다. 반면, 믿음이 없다고 할 때는, 자신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죠? 자신감이라는 믿음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극히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믿음이 있다고 한 것은, 그가 가진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100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할 때, 바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경우를 봐서도 결코, 자신감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 믿음의 사람이 여럿 있지만, 모세와 여호수아를 다음으로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맡길 때, 자신은 입이 둔한 자니, 맡길 만한 자에게 맡기라고 했습니다. 또, 여호수아에게는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교만을 볼까요? 창 10: 8과 대상 1: 10을 보시면, 니므롯은 세상의 첫 영걸이라고 합니다. 이 “영걸”은 국어사전으로는, “재지(才智)가 뛰어난 사람. 영웅호걸”이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기보르”라 하여, “힘 센자” 또는, “폭군”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창 10: 9을 보시면, “여호와 앞에 니므롯과 같은 용감한 사냥꾼이로다”하는데, 이를 현대인의 성경역으로 보면, “그는 여호와를 무시하는 힘센 사냥꾼이었으므로 니므롯처럼 여호와를 무시하는 힘 센 사냥꾼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기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역으로 보면, 그 의미가 강하고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의 시대에 바벨탑 사건이 있었습니다. 유대 고대사 1권을 보시면, “그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모욕적이고 경멸적으로 격동시킨 자는 니므롯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또 다시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할 마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 물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탑을 쌓고 조상들을 죽인 하나님에게 자기가 직접 복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탑을 세운 곳을 지금도 바벨론이라고 부른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교만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사 14: 12 - 13을 보시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계명성”을 사탄으로 비유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학문적으로 보면, “계명성”은 새벽별이고, 이것은, 교만했던 바벨론을 가르킵니다. 결국, 교만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등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말하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심은, 자신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교만해 질까하여 가시를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약함의 비밀이고, 약함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사고로는,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신의 병도 치료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참으로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했습니다. 그의 믿음의 자랑은, 자신감에 따른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합니다. 둘째는, 자신의 약함을 깨달을 때 기도의 능력을 받게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앞 구절인 1 - 4을 보시면,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다녀왔음을 말합니다. 이 셋째 하늘을 “삼층천”이라고도 하는 데, 이것은, 유대인의 개념으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 식으로 하면, “천국”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외에도 믿음의 체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고, 또, 많은 병자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큰 믿음의 능력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의 믿음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몸에 있는 육신의 가시였습니다. 죽은 사람까지 살려주었던 그가,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마, 바울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어떤 병도 고치셨기에, 자신의 병도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세 번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 번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든지 자신의 병도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서 그의 병만은 고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사도바울에게 육신의 가시를 주셨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 안에 머물게 하려 함이며, 자신이 강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별이 더욱 빛나기 위해서는 어둠이 깊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에게 있던 육신의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도바울은, 그 가시로 인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또, 자신의 약함을 기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육체의 가시로 인해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합니다. 기도는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약하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때, 자신을 포기할 때 비로소, 기도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를 보면,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첩에게 조롱을 받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한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한나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께 나가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엘리를 통해 응답을 받았고, 사무엘을 잉태하게 됩니다. 또, 요나를 보면, 자신이 강하고 의롭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반대편인 다시스로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큰 풍랑을 일으켜, 요나가 탄 배를 위협합니다. 이 때,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으로 고기뱃속에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기도합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는 우리는, 이러한 고난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 기도의 능력을 아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지혜와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며, 그런 지혜와 용기를 가진 성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노르웨이에서 목회를 했던 “오 할레스비”는 그의 저서 “기도”에서 “인간의 무능이 기도의 본질이다”고 말합니다. 또, “기도는 말보다 깊은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마음의 태도다”라고 하며, 또, “기도는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벌어지는 씨름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능과 약함을 보여주는 문제로 낙심되고 실망되는 일이 있다면, 그 일로 실망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기도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더욱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렘 29: 12을 보시면,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능력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나약함을 진실로 깨닫는 믿음의 지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끝으로, 자신의 약함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고, 오히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 사단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그들을 죽이는 데, 앞장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은 후, 딤전 1: 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주님만 의지함으로 주님의 능력이 그에게 얼마나 크게 임하셨는지, 바울의 옷자락만 만져도 귀신이 떠나고 병이 고쳐졌음을 행 19: 12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던 사도바울의 병을 왜 고쳐주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바울이 다른 사람의 병도 다 고쳐주고, 자신의 모든 병도 고침을 받았다면, 믿음으로 행한 그 일이 바울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부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함으로, 바울이 행했던 모든 능력은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최고의 설교자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는 스펄전 목사님은 말년에, 심한 풍치로 고생하다가 소천했습니다. 또, 옥한흠 목사님도 말년에 폐병으로 고생하시다가 소천하셨습니다. 별세목회를 부르짖었던 이중표 목사님도 담낭암으로 고생하시가다 소천하셨습니다. 이런 목사님들께서 좀 더 건강하셔서 이 땅에 더 계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 개인적으로는 본 교회인 송정교회의 문홍지 목사님도 은퇴하시고, 고향인 제주도로 가셔서 3년 정도 지내시다가 위암으로 소천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이 분들의 설교가 그 분들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온 것임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뽑아 달라하는 것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달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몸에 있는 가시를 뽑아가지 않으신다. 단지, 그 가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가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신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약하다는 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약함을 아는 것은 축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약함을 깨닫는 것이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까? 그 가시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순풍보다는 강풍 속에서 배가 더 빨리 가듯이, 우리의 약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항구에 더 빨리 도착하게 합니다.
세계적인 명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자였습니다. 18세에 교향악단 단원이 되었는데 시력이 나빠 연주 때마다 앞에 놓인 악보를 볼 수 없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악보를 외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 특성상 조화를 이뤄야겠기에, 다른 파트의 악보까지 다 외웠습니다. 한번은 연주를 앞두고 지휘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부득이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지휘를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논 끝에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는 토스카니니에게 지휘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모든 곡을 잘 소화하고, 연주를 마쳤습니다. 이 일이 바로 토스카니니가 세계적인 지휘자로 발돋음 할 수 있게 된 계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한 근시라는 가시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토스카니니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토스카니니는 음악적인 천재성으로 자신이 성공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근시라는 가시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었다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성도는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이 주인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자신이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더욱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내가 강해지는 것이지, 내 능력 때문에 내가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강함은, 불신이요, 배역이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약함은, 그 분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모르는 자가 불신자요, 아는 자가 신실한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서 더욱 약한 자가 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세상에서 강한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