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호두까기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이야기-
환단고기의 세계 세 번째...반론 3.
글: 대수맥
원문: http://blog.daum.net/nero1003/172
마지막으로 소서노(召西弩)에 대한 부분인데 그녀에 대해 알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비인 <연타발 延佗勃>의 이력(履歷)과 활동상이고 둘은 소서노의
두 아들에 대한 출자와 배경이 되는 세력족단들이다.
1) 연타발(延佗勃)의 출자와 배경
예군 남려(濊君 南閭)와 이어지는 후손부족(後孫部族)으로 추정된다.
졸본인(卒本人)으로 계루부의 원족이며 해모수 시대에는 그를 도와 좌원을 지키는 장군으로 비류수의
서쪽에서 비류국 다음으로 큰 세력을 형성해 西奴國 혹은 西國이라 불리었다.
스스로 해모수와 同系로 자부하며 고두막한이 졸본에 있을 때에도 은밀히 도와주어 그 후광으로 세력을
길러 졸본지역에 있는 부여부족의 나라라는 뜻인 졸본부여라고도 자처했다.
남북갈사(南北曷思)를 왕래하며 재물을 모아 많은 富를 축적한 사람으로 주몽의 사람됨을 일찍이 알아보고
가만히 도와 나라의 기틀을 일으키고 도읍을 세우는데 공이 많았다.
후일 사람을 이끌고 구려하(九黎河-수수하秀水河 혹은 난하)로 옮겨가서 추모의 지원 아래 어업과 염업을
독점해 얻은 이득으로 추모가 북옥저를 칠 때 군량 千石을 바치는 등 도움을 준다.
이어 눌현(訥見)으로 도읍을 옮기자 스스로 자원해 유랑민을 구휼하며 거두어서 눌현을 중심으로 농사일
에 종사하게 하는 등 왕을 부지런히 도왔다.
이런 까닭으로 소서노가 두 아들을 이끌고 나와 처음 자립한 터전이 모두 그가 다스렸던 영역 안에 있었다.
2) 권력투쟁과 추종세력군
추모가 나라를 건국함에 번조선계와 舊 진조선계인 <연타발>의 도움이 컸다.
이에 따라 이들의 입김이 커져 <소서노>를 중심으로 나라 세울 때의 아낌없는 지원과 졸본부여라는
기득권을 주장하며 번조선계인 <비류>를 밀었다.
그에게 王業이 이어질 공산이 커지자 추모를 따르며 구사일생의 험(險)을 겪었던 북부여계의 중신(重臣)
들은 북부여의 후계를 이었음에도 비류를 택할 경우 이를 중대한 변고로 생각하고 家臣을 시켜 대왕이
동부여에 있을 때 취한 북부여계 부인과 아들 여달(閭達-난 유리로 보지 않는 입장인데 이는 추후 설명이
필요하다)이 아비를 찾는데 은연중에 도움을 주도록 공작을 꾸며 북부여계의 부족을 남하시킴으로서
소서노계의 견제에 힘을 기울인다.
<여달>과 <예씨부인>에게 밀려난 <소서노>는 두 번째 결혼도 부질없었음을 깨닫고 부족장들과 상의해
비류와 온조를 부추겨 왕위 계승에 뛰어들게 하였는데 결국 비류계와 여달계의 치열한 무력싸움이 있었고
그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추모가 죽으면서 결국 <여달>이 왕위를 잇자 추모를 죽이게 만든 것으로 몰아세우
는 노골적인 핍박과 여달계 측신(側臣)들의 반격이 시작되고 이에 명분과 힘을 잃은 소서노 세력은 보복이
두려워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근거지를 찾게 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 떠날 때 따랐던 백성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미루어 비류를 따른 부여계 비류국의 유민과 온조를 따른
소서노의 졸본부여계 계루부 유민도 같이 동행 한 듯 보이며 따라온 重臣 중에 부여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왕실의 성씨가 부여씨가 된 것 같다.
▶비류는 나이 어린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동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왔을때 우리
어머니는 가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데 그 힘을 보탬과 공로가 매우 컸음에도 대왕이 염세해
나라를 유리에게 맡기니 우리가 공연히 이곳에 있으면서 혹처럼 붙어서 쓸데없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새로이 살 곳을 찾아 나라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드디어 망명길에 올랐다. <삼국사기>
▶그 世系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서 성씨를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
▶백제의 王姓은 부여씨인데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건길지(建吉支)라고 불렀다.
<周書 백제전>
어떤 이유에선지 추모왕은 시신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으로 죽었다는 냄새가
짙으며 여달이 오자 곧 태자로 삼고 5개월 후에 죽었다는 것은 중신들인 오이 등이 왕의 후사
(後嗣)가 나라에 없어 비류와 소서노의 세력에 밀릴 것을 알고 동부여에 몰래 사람을 넣어
공작을 꾸민 냄새가 짙다.
▶가을 9월에 왕은 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시자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아오게 하였다. 왕이 흘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머리를 잡고 승천하여 하늘에 오르고 배려오지 않으
시니 이 때 나이가 40세였으며 태자인 여달이 왕이 남기신 옥째찍을 시신 대신 용산에 장사하였다.
[소서노召西弩] 용맹하고 지혜로와 서노국(西奴國)의 작은 족장이라는 뜻인 이름을 얻었으며 후에
세운 <어라하국>은 진번지역인 발해만의 복주하(復州河)와 벽류하(碧流河) 지역이 초기 정착지로 비정된다.
소서노계는 처음 북부여의 거수국인 졸본부여의 한 부족으로서 비류국의 우대(優台)에게 시집가서 비류를
낳고 남편이 죽자 친정인 졸본지역의 서노국(西奴國)에 와서 살았으며 북부여의 명을 받은 계루부 대인인
<연타발>이 주몽을 도와주다 아비의 주선으로 시집간 것이다.
소서노가 아들 비류를 낳았다는 것은 곧 비류국으로 시집간 것을 말하니 이때 비류계 국왕인 송양왕은 기준
의 후예로 진조선=북부여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류수 지역에 정착하면서 당시 연나부가 왕위를 잇던
졸본부여(구려국)의 原住 구성부족인 계루부 연타발 부족과 아들을 통한 혼인으로 연합을 이룬 것으로
보여진다. (비류의 성씨가 優台系이고 온조는 추모계인 解氏임).
▶비류의 아비는 해부루의 서손이며 어머니 소서노는 졸본인 연타발의 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3) 이동과 정착
백제는 舊 황하하류의 요서군(遼西郡)에 속한 하북성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옛 진번계
(眞番系)의 부족을 흡수하면서 일어나 하북성의 패수(浿水)와 대방의 대수(帶水)를 건너
마침내 나라를 세웠다.
여기에서 한수漢水=하수河水=구 황하黃河로 첫 도읍지인 하남(河南)은 하수 남쪽인 산동성
지역을 의미하는데 그곳을 근거로 삼아 후일 백제가 개척한 산동지역의 백제군과 하북성과
발해만 지역의 진평군이란 이름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서 주의 할 것은 기록을 작성한 북위 때의 대방은 현 요하근처로 옮겨졌으므로
<옮겨지기 전의 대방지역> 즉 帶方故地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대방고지가 유성과 노룡사이에 있다함은 노룡(盧龍)이 난하에 있고 유성(柳城)은
황하어구(노황하老黃河)로서 곧 신하(新河)유역의 옛 대방지역을 가리킨 것이며 바로 이
무렵 나타나는 구대(仇台)란 이름은 망명세력을 이끌었던 비류를 아비인 우태(于台)계열
로 비유해 칭한 존칭으로 보여진다.
- 비류가 진번계의 후예이며 해부루 부족의 방계인 송양왕의 아들인 우태(優台)의 핏줄이므로
진번계를 이용해 난하 동부의 거점 확보에 도움을 받고 후에 그 세력을 흡수한 것이다.
- 백제 시조가 구대(仇台)라는 기록이 <주서 이역열전周書 異域列傳 과 수서 동이열전隋書 東夷
列傳>에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의 관직인 [우태]로 추모가 소서노의 나라를 [어하라]로 책봉하
면서 내린 우태라는 관직(갈사국의 도두왕이 투항해 오자 태조왕은 그를 우태로 봉하였던 기록
도 보인다)이며 우태(優台)의 음차<우優와 같은 음音 우优의 오기인 구仇>이며 부여계통의
언어로 <우치>로 읽히는데 원래 <태台는 치=디> 로 발음하기 때문이다.
- 仇台(優台)가 해부루의 서손이라 하나 <구 삼국사*삼국유사>는 <노무자老無子>로 기록되었고
졸본부여(구대仇台)*동부여(위구대慰仇台) 등 부여 계에서 <구대>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비류
의 생부(生父)인 우태(優台)는 부여계가 확실하다. 따라서 초기에는 비류의 아비=어미도
<우태>로 봉해졌으며 이를 호(號)로 삼아 <우태>로 통했고 그 職을 이어 비류도 우태로서
구태(구이)=우태(우이)=소서노=비류가 같이 사용된 것으로 구대묘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 기록에 보이는 대방고지(帶方古地)는 3地域이 있다.
1) 남만주 금주지방(후한서 지리지 낙랑군 대방현)
2) 발해만에 함몰한 대방(위서 한전韓傳 대방황지帶方荒地)
3) 북경과 발해만 지대의 대방(삼국지 위서 왜인전)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위치를 비정할 때 [대방]의 의미를 함께 새겨야 한다. 두 가닥의 강이 평야를 끌어안고 흐르는
모양이 마치 “허리띠와 같다”하여 <대방>이라 했다 하였으니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류와 온조가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은 대방고지(帶方古地)이다.<수서 백제전*백제본기 서설>
▶백제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가 천 여리에 있으며 작은 바다의
남쪽에 처해 있다. <위서>
▶그 나라의 동쪽 끝에 신라가 있으며 북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다.
서남쪽으로 큰 바다에 닿았고 작은 바다의 남쪽에 처해 있다. <북사>
작은 바다는 발해(勃海)를 말하고 바다의 南에 百齊가 있다는 것은 발해의 남부인 대륙 동해안쪽
에 백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방고지는 난하 이북의 옛 번조선 고지(古地)이며 이때에
도 진번계 유민이 해상활동을 활발히 하며 富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인물은 소서노와 우태의 핏줄인 비류일 수 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백제는 장안에서 곧바로 동으로 6천리에 있는 영(瀛)과 빈(濱)의 바다 남쪽에 있다.
서는 월주(越州)와 경계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왜가 있고 북엔 고구려가 있다.
모두 바다를 건너야 이를 수 있으며 동으로는 신라가 있다.
王은 東西의 두 성(城)에 거처한다. <신당서>
영瀛=영현瀛縣=영주瀛州는 황하 북의 하북성 하간(河間-수서지리지隋書地理志) 혹은 산동성
태산(泰山)에 있는 지명이고 빈濱=빈현濱縣=빈주濱州는 황하 북쪽의 산동성(중국고지도)에
있으니 앞서 대방현帶方縣*작은 바다의 남쪽 등의 기록과 대조할 때 百濟는 초기에 영현(瀛縣)
과 빈현(濱縣)의 바닷가 남쪽 즉 현 산동성과 그 남부 지역인 양자강 일대까지였으며 이때 백제는
대륙과 반도 양쪽에 도성(都城)이 있었음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 1次 비류(沸流)의 근거지 십제(十齊 미추홀=메주골)
<삼국유사>에 <온조가 졸본부여에서 내려와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라고 기록했는데 분명히
[바다를 건너 하남 위례성에 이르렀다] 라는 말이 없으니 졸본부여와 위례성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河南 위례성>이란 지명기록은 한반도 내에 없으므로(삼국사기에 한강 남쪽에는 위례성이 건립된
적이 없다 라는 기록) 문맥을 살펴보면 <河南=강의 남쪽>이니 발해만의 난하*서쪽의 백하 중 하나일 것이며
(난하와 백하는 북쪽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지나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또 <한서지리지>에 <북쪽으로 대수와
한수가 흐르고 있다> 는 구절로 추정할진대 [난하*백하*대능하] 중 어느 강을 가리킨 것 같다.
- 그러나 대방지역은 시종일관 낙랑의 간섭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비류 일행은 압력에
시달리게 되어 온조와 상의하여 근거지를 떠나 낙랑의 압력이 덜 미치는 남쪽으로 다시 이동
하게 된다.
▶소서노가 사람들로부터 패대(浿帶)의 땅이 비옥하고 물자가 많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
사이의 바닷가 가까운 벽지에 이르러 10여 년간 살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재산을 모아 북쪽으로는 대수
*서쪽은 큰 바다에 임하여 500여리를 차지하였는데 추모에게 사신을 보내자 그가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
-백제의 기원)에 책봉하였다.
재위 13년에 소서노가 죽자 장자인 비류가 뒤를 잇고......이에 온조가 마여*오간 등을 이끌고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처음 대방의 땅에 도착한 기록과는 달리 분명히 배를 타고 이동한 것으로 기록함)
마한의 미추홀에 다다라......<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따라서 이곳은 분명히 발해만과 패수라고 불린 난하 또는 백하의 하류 지역이며 번조선의 경계
지역이었던 곳으로 백제 小國이 소서노에 의해 기틀이 닦여져 13년 만에 나라를 세우고 비류가
뒤를 이었음을 보게 된다
- 소서노가 아비와 함께 등장할 정도이면 그녀 집안은 졸본부여를 장악한 막강한 가문이고 부여의 왕이
제가회의라는 부족장 회의에서 선출될 당시에 <연타발>은 졸본부여의 왕족이나 실력자였을 것이며 집안
재물을 동원하여 고구려 성립을 도왔다는 것은 해상중계무역으로 큰 재물을 모아 그 재력을 바탕으로
졸본부여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기반을 더 넓히기 위해 당시에 중앙 권력자 출신으로서 송양왕의 아들 우태와 소서노를 결합 시켰으나
일찍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소서노는 浿帶의 땅으로 내려와 대대로 해상중계무역을 한 집안의 내력으로 뛰어난 재능이 있어 무역선단
을 거느리고 발해만과 압록강 水系와 반도 황해안 지역의 商圈을 장악하며 소금생산과 교환을 독점하여 재부
(財富)를 축적했다.
당시는 後漢 말기로 흉노의 침입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한 後漢은 이를 제어하지 못해 이 공백기를 이용하여
패수와 대수를 넘나들며 무역권을 장악하며 반도의 황해도(교역 통로이며 중심지였던 평남 영유현永柔縣
미추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교두보(미두산성米豆山城*자모산성慈母山城과 청룡산성靑龍山城 등)로 확보
하였다. 이를 근거지로 반도 서해 연안과 그것과 연결된 내륙수로를 오르내리며 반도 중남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듯 하다.
□ 2次 하남 위례성(河南 慰禮城-온조溫祚의 근거지)
위례성은 <위의 성 즉 우 성=上城=王城>의 뜻으로 우리말 왕인 어라가 살고 있는 곳 <어라>의 변형인
<위례>라는 해석도 있다. 이 때의 이도지(移都地)를 1차 도읍지인 위례성에 대해 하남 위례성으로
불렀기 때문에 하북 위례성(河北 慰禮城)이라는 말이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반도로 이동해서는 정도처
(定都處)를 한성(漢城)으로 불러 하북 한성(河北 漢城)과 하남 한성(河南 漢城)의 명칭이 교차하여 나타나
는 것이다. (아무튼 온조는 반도로 이동해서도 이 무렵을 건국 기년으로 삼아 계산했으므로 이 때의 기간
을 산입해서 기록을 검토해야만 풀려진다.)
- 河南은 河水 南으로 황하 남쪽이니 비류일행은 일차 근거지를 출발하여 하남지역인 산동반도에
도착한 듯 하다. 왜냐하면 1차 근거지는 당시 위만과의 접경지로서 힘의 공백이 되어 있는 땅이었
지만 서로는 위만*동으로는 낙랑*북으로는 말갈에 둘러싸여 困하게 되자 나라의 자립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다시 이주를 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원래 요동과 요서는 영정하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있던 군이었는데 이 하북성 북부지역인 요서군을
백제가 차지하여 4세기인 진나라 때까지 점유하였다. <송서 백제전>
▶백제는 하북성 북동에서 일어나서 진-송-제 시대까지 중토지역은 양자강의 좌우인 강북과 강남의
양쪽 해안을 차지하고 만주와 반도에서는 서해안 남단까지 차지하였다. <북사>
□ 반도지역(半島地域)으로의 進出
낙랑의 계속되는 압력에 시달린 <비류>는 자구책으로 온조와 어미인 소서노와 같이 상의한다.
원래부터 상인집안으로 뼈가 굵은 어미는 지난날 막조선*낙랑국 등과 교역을 하면서 아직 살만한
땅이 많은 반도의 중계 무역 핵심지역(황해도 지방)을 거점으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온조는 재종숙부 을음(乙音)을 비롯한 중신들과 바다를 건너 반도의 황해도 지역(재령
강載寧江 유역인 평남 강서군 함종현咸從縣의 북쪽인 영유현永柔縣 미추홀인 태조산太祖山 위
미두산성米豆山城과 산 하나를 넘어 해발 559M의 청룡산靑龍山의 미추홀인 청룡산성靑龍山城)을
통해 상륙한다.
이 때의 이동로는 산동반도-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요동반도 대련시 용담산성-평남 평원군 영유현
미두산성을 짓고 체류-산 넘어 평성시 청룡산 청룡산성을 위례성으로 삼아 정착-말갈의 잦은 침입
으로 황해도 평산의 둘레 7225척의 석성(石城)인 태백산성(太白山城-일명 성황산성城隍山城)으로
이동-다시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미추홀]로 내려가 정착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미두산성米豆山城은 성*성읍을 뜻하는 우리말 미지의 이사형異寫形인 미두*미추로 읽힌다)
※ 태백산성은 반도로 이주한 진번한의 근거지인 재령(載寧) 장수산성(長壽山城)으로부터
100여리로서 그 앞을 흐르는 예성강을 <위 례성강>으로 이름 짓고 대륙의 도읍인 위례성을 본
땄는데 강 상류인 수안군 위라천(遂安郡 位羅川)도 <위례천>의 변음화이다.
- 이로 말미암아 대동강을 한 때 한수(漢水)로 불렀으며 이 지역은 후에 곧바로 반도로 이동한 변한족단에
의해 점유되어 황해변한의 근거지가 되었으나 <다루왕>의 반도 진입으로 다시 백제령으로 되었다.
반도로 이동한 온조 일행은 [미추홀]에 도착하게 되고 비류와 상의해 비류는 미추홀을
중토와 연결하는 거점지대로 만들기로 하면서 온조는 마한의 배려로 마한의 가장 북단에
위치한 동북방지역 백리를 얻어 새로운 터전을 잡게 되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때에 마려 등이 온조에게 <마한의 쇠패가 끝이 왔으니 곧 가서 도읍을 세우고 패업을 이룰 시기
입니다.>고 말하자 온조가 이에 배를 편성하여 바다를 건너 비로소 마한 미추홀이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들판이 텅텅 비어 있고 사람들이 살지 않은지 오래된 곳이었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바로 이 때에 비로소 바다를 건너 하남 위지성(河南 慰支城)에 이르렀다는 말이 나오는데
원래는 <하남 위지성>도 발해만의 산동성 지역에 있던 <하남 위례성>을 그대로 옮겨 이름 한
것으로 보이며 <나라 이름도 그 이전 것을 그대로 써서 백제라 했다> 했으니 백제의 초기 위치
는 발해만 지역(태풍의 눈인 대륙백제의 단초가 여기에서 잡힌다)에 있었음을 추정하게 된다.
어라하국( 於羅瑕國 - 주서 백제전 어라於羅는 왕을 의미하고 하瑕는 존칭어이다)은 沸流의 나라이며
召西弩가 세운 나라이기에 후에 백제에 연합된 후 그 나라 백성은 비류계 말로 왕을 따로 어라하於羅瑕*
건길지라 불렀다.
또한 백제는 초기부터 4仲之月(2*5*8*11월)에 남단南壇*남교南郊 등 도성의 남쪽에 단壇을 만들고 天地에
왕이 친히 제사(祭祀)를 지내며 희생을 바쳤는데 이는 대륙의 비류계 왕조에서 거행했고 시조묘에 행하는
묘사(廟祠)는 비류계에서는 구대(仇台)에게 년 4회와*동명에게 대한 제사를 온조계는 동명에게만 하였
으나 진지왕 이후에는 모두 사라지고 만다.
[百濟에 대한 小考]
백제에 대한 기록은 정리되지 않은데다가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많아 참으로 정론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만큼 나라의 성립과정과 국가발전이 축소 왜곡되거나 고의적으로 산란(散亂)시켜 놓은
느낌이 강하게 배어나온다.
이는 우리가 언젠가는 꼭 명확하게 밝혀놓아야 할 핵심과제이다.
그 대표적인 의문점들은 이렇다.
1) 왕 계보(王 系譜)의 탈락 가능성(脫落 可能性)
<제왕운기 백제기>에 “돌아보니 6백하고 78년이라 34王이 천복을 누리셨네”라고 하여 삼국사기
의 31왕보다 3명이 많고 475년 존속한 고려왕조도 34왕인데 678년 지속한 백제가 31왕이라는 것은
의문이 생긴다.
2) 낙랑*대방과 백제(樂浪*帶方과 百濟)
초기 백제사에서 낙랑과 대방은(말갈도 포함) 백제가 국가로 발돋음 하는 상황에서 적지 않게 반작용을
했는데 건국 시에는 낙랑과 말갈이 고이왕 이후부터는 대방이 주로 백제와 가장 많이 접촉한 것으로 나타나
백제의 건국지가 반도가 아님을 은연중에 역설해 주고 있다.
3) 두 개의 百濟에 대한 의미심장한 考察
<남사>와 <북사>는 동일 인물인 <이연수>에 의해 편찬되었음에도 전혀 다른 두 개의 백제 건국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南朝와 北朝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두 개의 백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남사>는 南朝의 역사로 이들이 접촉한 백제는 반도에서 馬韓의 小國이었다가 점차 三韓의 일부를 잠식
하여 결국은 대륙에 진출한 것으로 보았고 <북사>는 北朝의 역사로 이들과 관련된 백제는 원래 대방고지
(帶方古地)에서 시작하여 東夷의 强國으로 성장했다고 본다.
두 기록을 모두 존중한다면 백제는 帶方의 옛 땅에서도 나라를 세웠고 馬韓의 지역에서
도 건국했다는 얘기가 성립되며 따라서 백제는 대방의 옛 땅과 마한의 한 소국에서 동시에
나라 세움이 진행되었거나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南朝의 기록에서는 전혀 대방의 옛 땅과 백제를 관련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아 대방 옛 땅에서
의 건국이 마한에서의 건국보다 먼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당시 대방 땅은 北朝
에 가까우며 北朝에 속했으므로 북에서 내려온 백제의 건국을 먼저 그리고 정확하게 알았을
터이며 이를 南朝에서는 전혀 모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東明의 후손으로 구대(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신의와 믿음이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고지에(책을 쓴 시대에는 옛날에 대방이었던 땅으로 인식하여 그렇게 기록함.)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여식(女息)을 그에게 시집보내니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북사>
▶백제는 그 선조가 동이의 삼한국이 있었는데 그 첫째를 마한이라 하고 둘째를 진한이라 하며 셋째를
변한이라 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열두 나라이며 마한에는 쉰 네 나라가 있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구이며 작은 가구는 수천으로서 총 10만여 호이니 백제는 곧 그 중에 하나이다.
후에 점차 강대해져서 모든 작은 나라를 어울렀다. 그리고 그 나라는 본디 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일천여리에 있었다가 진나라 시기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가졌을 때 백제는 요서와 진평
두 군의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남사>
4) 국호(國號)의 이중성
비류와 온조가 떠날 때 오간(烏干)과 마려(馬黎)등 [열 명의 신하]가 그들을 받들고 함께 남하했으며
온조가 도읍을 정할 때도 그들의 의견을 중시하여 받아들였고 또한 이들로 보익(輔翼)을 삼았다 하여 처음
에는 나라이름을 십제(十濟)로 할 정도로 건국 초부터 이들 일족은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으로 군림한 것 같다.
이들은 철기문화에 익숙한 유이민 집단으로서 무사단 성격을 강하게 갖는 일정한 세력기반을 가진 씨성족단으로서
河南으로 이주하기 전의 본래 지역에서는 온조를 도와 작은 나라를 형성할 수 있는 일정한 읍락을 이끈 우두머리 층
이었을 걸로 보여진다.
그 가운데 진(眞)씨와 해(解)씨가 주도권을 쥔 세력이며 이 문벌들은 백제의 성장과 함께 家臣
그룹으로 발전한 10臣의 세력이 되어 姓을 부여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8姓 大族
沙씨(조이계 徐族)*燕씨(졸본계)*협劦씨(가야계)*解씨(환족계)*眞씨(진번계)*
國씨(낙랑계)*木씨(가야계)*묘苗씨(우양계)
5) 王姓과 血統 문제
백제는
① 왕실의 씨성이 부여씨를 주로 해씨*모씨 등이 있는 점
② 부여의 건국시조를 나타내는 동명묘를 설치했다는 점
③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조서에 저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고 한 점
④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한 점 등이 일관되게 씨족의 기원을 부여에 두었던 세력이 왕권을
유지한 것을 말하고 있으니 추모가 북부여를 이을 때 이를 싫어한 일부 부여부족들이 비류계
에 포함된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어미인 소서노는 우대에게 시집갔다가 추모에게 재가한 여인으로
이설에는 형제가 모두 우대의 生子로 백제본기엔 주몽의 生子로 대립되어 있는데 비류는 우대의
아들로 부여씨이며 온조는 추모의 아들로 해씨가 된다. 따라서 비류의 혈통이 부여계였으므로
부여의 전통이 강조될 때에는 부여계 이름인 <구대>가 백제의 기원이 강조되면 <비류>가 사용
되어 망명 전에는 <구대>로 사용하다 나라를 세운 후 <비류>라는 이름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그 선조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었는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으로 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 또 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周書>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
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이 부분은 후대 책계왕 때의 일이
삽입된 것임.) <북사>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괄지지에서 말하기를 백제성에서는
그 조상인 구태묘를 세우고 해마다 4차례 그곳에 제사한다. <한원 백제조>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하여 처음으로 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다......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을 국성에 세웠는데 해마다 4차례 그곳에 제사한다.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 가운데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濟海)고 해서 나라 이름을 百濟(비류의 국호)라 불렀다.
<수서 동이열전 백제전>
▶왕의 성은 부여씨인데 於羅瑕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鞬吉支라고 부르는데 중국말로는 왕이라는
뜻이다. 처는 於陸이라고 일컫는데 중국말에서 왕비이다. <주서 백제전>
※ [어라하]는 대왕이라는 뜻의 부여에서 유래한 王號로 보이며 부여의 王名 중 의려*의라는
바로 어라(大)를 뜻하는 보통명사이었을 것임.
6) 國家의 성격(정복국가적 성향)
이들이 남진할 때 고구려에서는 이미 기마전이 보편적인 수단이었고 당시의 지배방식이 거점지배
방식을 주로 했으며 세력집단이 떠나올 때 이미 여달족단과 주도권을 다툴 정도로 대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행한 오간*마려 등 10臣과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는 것은 대규모 기마전사 집단 세력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고구려의 선진 문화를 체험하고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과 이미 국가조직을 편성한 경험과
기마와 철제무기 등우수한 군사적 능력을 지니고 있어 외부 세력의 위협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처가
가능하였다.
때문에 영역의 확대 과정에서 새로 편입된 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통치를 위해 部 체제를 초기부터 도입
하여 내부적인 토착 세력과의 연합으로 반발을 무마하며 그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기가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놓쳐서는 않된다.
이주초기에 영역을 남*북 2부를 시작으로 동*서 2부로 다시 나누었는데 당시 강역설정과 밀접한 관련성
이 있으며 처음부터 王都 이외의 지역을 중앙에 편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영역을 지역적으로 분할책정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방위명 部가 성립되었다.(특정인물의 출신 部 소속 표기가 초기부터 나타나는 점)
부족적 성격의 지방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4方 部가 생겼고 초기는 王都를 中部로 하지 않고(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사비 때에도 中部는 왕도가 아닌 고사성古沙城이었음) 4부로 운영하고 있음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7) 비류와 온조 기록의 이상한 산란散亂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도읍지를 정하려 자리를 살펴보았다.
10신하는 강남이 자리가 좋으니 이곳으로 정하라 하였다.
비류는 따르지 않고 강북의 위례성(彌鄒忽-난하*백하 지역)에 정착하니 온조는 (계속)강남에
내려와 위례성(慰禮城-황하 이남 지역)에 자리를 정하고 10신하도 따라와 살았으므로 처음에는
십제(온조의 국호)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저습하고 짜서 농사가 잘 되지 않아 그곳에 살지 못하고 위례성에
가보니 잘 살고 있어 후회의 세월을 보내다 사망하자 그 백성들이 위례로 내려와 나라가
드디어 크게 되었으므로 백제라 하였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삼국사기>
원래 [비류족단]은 첫 남편을 따르는 부여의 토착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추모와의 사이에 태어난 [온조족단]은 추모를 추종했던 세력으로 두 세력간의 이질성
으로 인한 주도권 다툼이 남하를 하면서 계속 이어져 결국 주력에서 갈라진 온조족단과
10臣 세력이 분리되는 과정임으로 추정된다.
[沸流세력]은 백제의 초기 대륙 동부 정착 시부터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한 부족으로 일찍부터
[溫祚세력]과 연맹관계를 맺어 후일엔 백제국내에서 西部집단으로 성장하게 된 듯 하다.
이에 따라 [대방고지인 신하新河유역]에서 성장한 백제는 왕성했을 때는 强國이 되어 주변을
압도했고 漢族과 고구려와의 투쟁에서 밀려 반도에 진출해 가야를 밀어내고 세력을 확장해
나라를 운영했으나 대방고지에 계속 잔류해 비류계의 맥을 이은 백제를 광개토왕비에서는
백잔(百殘)이라 했던 것이다.
▶백제의 立國地가 옥저와 접해있다. <후한서 동옥저 집해>
▶한때 백제는 신라와 가야를 부용국으로 삼았다. <수서 신라전>
백제가 대방고지에서 일어날 때 난하 부근에 있던 옥저(신라계)를 말하며 이를 백제가 정복하여 한때
신라계가 백제에 속했다가 이동한 것임을 알려준다.
대방고지에서 立國한 백제는 종종 마한(馬韓)으로 불렸으며 <모용씨>의 강성 때는 속국으로 있었고
태조왕 때는 고구려의 부용국으로서 馬韓으로 나타났으나 그 후 다시 세력을 얻어 고구려와 낙랑을 두고
다투게 되었을 정도가 된다.
이윽고 광개토왕 당시 백제는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후한서에 한에 78국이 있는데
그 중에 백제가 있다 함은 후한당시 백제의 강대함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임.) 고국원왕을 죽인 원수
로서 고구려의 관심을 끌어 이를 격멸하고 비하시켜 백잔(百殘)이라고 표현하였다.
<단석괴> 때 대방고지가 있는 난하 서쪽지역에 어양선비*요동선비*요서선비의 부락을 이끌고 대선우로
활약하며 후한을 침략했는데 말년에 후한에 밀리어 이동하는 과정에서 천 여家를 복속시켜 진수(秦水)에서
고기를 잡게 해 식량을 조달했던 한인(汗人)과 한국(汗國)은 바로 한인(韓人*한국韓國-초기 진한辰韓지역)
이었다.<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이를 후한서 오환선비열전엔 왜인倭人*왜인국倭人國으로 기록했는데 바로 왜인倭人=한인汗人=한인韓人
=한韓과 접한 왜인倭人=백제 고지인百濟 故地人=백제인百濟人으로 추정하고 싶다.
긴 이야기지만 하도 [앵무새]가 엉뚱한 소리를 하길 래 조금 공을 들여 언급했다.
그러니 이젠 <그것은 이유립이 처음 온조가 있었던 지방을 중국 동해안 - 말하자면 산동반도 - 으로 상정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백제라는 이름이 백가 제해에서 왔다고 믿었던 것이리라.> 라거나 <이유립의 세계관 에서 백제는
한반도 경기 - 충청 - 전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바다 건너에 온조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을 만든 이유야,
나중에 백제가 그곳을 점령할 때 타당한 이유를 주기 위한 복선이었을 것이고...> 라는 등의 잡소리는 걷어치우기
바란다. 이건 뭐! 완전히 [부일사대모화주의자]의 충직한 표상이니 ... 원!!!
[단락 6] 을 보니 불사의 낚시 밥이 또 나온다. 그 놈의 가당치도 않은 회대(淮 岱) 타령...
먼저 이 사람이 언급한 [신라 파소]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앵무새]는 스스로 < 자, 진한이란 본래 단군조선이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신라의 전신으로 등장해버린다.
무슨 연관으로? 물론 그런 거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무척 궁금한 모양인데 그런 궁금증부터 풀어주겠다.
진한계(辰韓系)는 BC 4-3C 경 만주 지역에서는 북부여가 나라를 세우며 대부여를 압박하고
대륙에서는 秦*漢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혼란상이 거듭되니 대륙 북부에 새로운 세력을 형성
하고 있었던 진번계집단과 진조선(辰朝鮮)유민이 탁군(涿郡) 지역으로 몰린 후(탁수계涿水系
언어집단) 다시 움직여 발해만 지역에서 집단 거주한 발해辰國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반도 이동의 주력이었는데 시조인 혁거세-유리니사금 때 나타난 낙랑*동옥저*화려*
불내*맥국은 탁군 사람들의 이동과정에서 얻어진 지명으로 보인다.
▶동천왕이 피신했던 옥저 땅에서 도읍으로 돌아갈 때 따라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신라라고 말했다.
이들 부족이 진조선계인 것은 처음 정착지가 우리말 <신라의 물>이라는 뜻인 요하 지류인
시라무렌강 이라는 점(시라는 환단고기 기록의 부족명인 시라尸羅와 음운상통音韻相通한다)이다.
秦*韓 교체기에 이들은 전란을 피해 반도의 서북변지역으로 집단 이동하여 막조선의 후예인 중부마한
(中部馬韓)의 보호아래 반도진국(半島眞國)과 진한(眞韓)을 형성하며 거주하였고 후에 준왕(準王)이 무너
지고 위만의 세력이 일어서자 남은 진번 세력이 위만과 충돌하면서 일부는 前漢 초에 위만에 흡수되었으나
(위략魏略의 만유지당 중초다 滿誘亡黨 衆稍多의 亡黨을 史記에서 급고연제망명자 及故燕齊亡命者로 표현
한 무리들이다.) 일부는 다시 <고망지인 古之亡人>으로 표현되면서 낙랑 지역으로 돌아가거나(낙랑인樂浪
人은 자신을 진한辰韓의 잔여인殘餘人이라고 한다.) 먼저 이동한 同族을 찾아 반도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辰韓系와 弁韓系를 표방하기 시작함에 이르렀다.
▶원래의 진국辰國에서 북진한北辰韓 계열이 남하하여 익산 지방을 지나(준왕의 후예로 기록)
경상도에 최종 정착을 하는 과정에서 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일정 기간이 있었으며 이들이
중국 사기史記에 진국辰國으로 기록되었다. <천관우 3한의 성립과정>
먼저 지나 대륙-발해연안-반도 북부 지역에서 진국(辰國)을 중심으로 정착지를 형성하던 진번한(眞番韓)
유민세력은 위만의 멸망 후 다시 이동해온 이주민을 맞아 세력이 커졌다.
당시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여 청동기 사용이 보편화 된 황해도 이남-충청*전라 지역의 마한계(馬韓系)
세력과의 충돌을 회피해 그보다 낙후되어 일부 세력 집단만이 마한의 영향아래 있던 경상도 방면을 향해
이동을 시작해 BC 2C 중엽 경에는 대전 괴정동 등 馬韓 세력의 영향아래 청동기*紅陶*석관묘*지석묘 등이
기반인 무문토기 인들을 중심으로 한 小國들을 제압하여 주도적인 위치를 이룬 철기지배집단으로 부상하여
세력 확장을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파소의 설화가 등장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면에 숨겨진 주목할 만한
민족 결합을 은유하고 있는 듯 하다.
왜냐하면 경주의 대릉원 무덤떼 중 황남대총의 금관이 스키타이족의 영향이 짙다는 점이다.
(파소 설화가 유입된 이유는 BC 8세기경부터 부족의 원출原出인 시라무렌강으로 임박한 스키타이
계 기마궁사집단과의 결합이 원인일 것이다.)
또한 북부여 동명왕은 계자(鷄子-닭의 알)인데 신라의 김씨도 계림(鷄林)에서 등장하여 공통의
토템(닭)을 갖는다. 이어 [환단고기 상성기전 상]에서도 동명왕(東明王)의 별칭으로 신라(新羅)
라는 표현이 있다.
이로서 신라 김씨-북부여-스키타이(황남대총)이 연결되며 부여 제실-진조선 유민(진한)-눈수-
동옥저(상당한 기록에서 신라계와 밀착된 모습을 보여준다.)-진한 나을촌의 등식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부여 제실의 딸 파소가 처녀 임신을 해서 진한에 도망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거서간이 되어 나라를 세워 진한=사로가 된다.>는 의미와 <파소의 이동로가 그리 된 까닭-도망할
때나 부족이동은 늘 근친부족近親部族의 행적을 쫒는다.>이 명백해 질 것이다.
※ 신라의 六部(六村)가 가진 성수적(聖數的) 의미가 대부여의 육축관명(六畜官名-마가*우가*저가 등)과
상통한다. 육부연맹체를 구성한 핵심부족인 혁거세의 양부는 白馬토템으로 馬加이며 사량부의 알영은
계룡(鷄龍)토템이니 鷄加이다. 최치원의 世家도 아비가 금돼지이니 저가(豬加)이다.
따라서 이유립은 신라의 경우도 대륙에서 발원하여 존재하다가 이동하였으며 결코 원출지(原出地)를
경상도에 비정하고 있지 않았음을 손쉽게 알 수 있다.
이로 볼진대 <환단고기에 대륙 삼국의 증거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믿는 건 난 환단고기를 읽지도 않고 남의
이야기만 듣고 쫓아다니는 바보라고 선전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란 넋두리는 一考의 가치조차 없다.
다음 글을 보면 이놈의 지겨운 회대타령이 계속된다.
아마도 자나 깨나 전리품같은 자랑꺼리로 머리 속에 맴도는 모양이다.
<문자왕 때가 되면 불사의 떡밥 회- 대 지방이 다시 등장한다> 라는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내가 늘 이야기하였듯이 전후 상황이나 주변 정세를 면밀히 검토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설명을 곁들이겠다.
이들 사건의 단초는 남북조시대의 혼란기에서 발생하였으니 시점을 고국양왕 때부터 시작하겠다.
다음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