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역사적 전환점이 된 러일전쟁(1905)을 승리로 이끈 데에는 치밀한 사전 준비가 뒷받침이 되었지만 육군의 노기(乃木希典)장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련.여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러일전쟁의 승전 기반을 굳힌 노기장군의 지략과 희생정신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군에 수적인 면에서 크게 열세였다. 그래서 일본군의 여순 공격은 속전속결 전략으로 수행됐다. 일본군은 노기를 사령관으로 임명, 공략에 나서도록 했으나 5백6문의 화포에 4만명의 병력이 지키는 난공불락의 요새 여순은 요지부동이었다.
10년 전 청군과 싸워 여순을 간단히 점령했던(청일전쟁, 1895) 노기도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노기는 1·2차 공격이 실패하자 돌격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3천명의 결사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이 마저 실패하자 주공을 전환해 여순항이 내려다 보이는 203고지를 공격했다. 12월의 강추위는 매서웠다.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다. 아사자와 환자가 속출했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노기는 뚝심으로 버텼고 8차례의 돌격 끝에 점령에 성공했다. 전투 개시 5개월만의 일이었다.
러시아군이 3만1천명 전사, 일본군은 5만8천명의 전사자, 3만4천명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은 승리였다. 그리고 사령관 노기는 대련전투, 여순전투에서 자신의 두 아들을 전사시켜야했다. 일본군이 쟁취한 최후의 승리는 노기의 희생정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큰 아들을 대련전투에서, 작은 아들을 여순전투에서 잃고도 슬픔을 참아낸 그의 솔선수범하는 희생정신이 여순전투를 일본의 승리로 이끈 것이다. 지휘관으로서 모범을 보인 노기의 희생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노기장군이 일본에 개선했을 때 노기는 환영 인파 속에서 5만8천명의 전사자 부모들의 원성을 직감했다. 그리고 메이지(明治) 천황은 노기에게 백작의 칭호를 부여하면서 노기에게 “장군은 내가 죽기 전에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네!”라고 말했다. 천황은 노기장군의 얼굴에서 유족들에게 사죄할 마음으로 노기가 자결할 결심을 한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노기는 천황의 말을 따르겠다고 약속하고 물러나 낙향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세월이 7년이나 흐른 뒤 이미 당시의 전사자 가족들도 슬픔을 잊었던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서거한 직후, 노기는 그의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7년 전 5천 8백명 전사자 유족에게 마음속으로 한 약속을 지키며 그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의 명령으로 싸우다가 전사한 두 아들의 뒤를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