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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이미지를 읽어내기
성경의 이미지 02.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
https://youtu.be/UqLfrJloM68?feature=shared
성경에는 이미지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이미지들은 어떤 주제를 성경 전체에 걸쳐서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들 이미지 각각을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더 큰 이야기에 연결시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이미지를 읽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성경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대하여 들었을 때, 그때 저는 예루살렘에 가본 적이 없었고 지도나 도표 등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때 성전이 큰 예배당 건물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배당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배당 건물은 큰 길 가에 서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예배가 드려지고 있거나 음악이 공연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의 거대한 복합단지였습니다. 그 복합단지의 한 곳에는 성소가 있었습니다. 성전은 단지 하나의 종교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예루살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아, 여기 성전이 있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자체는 일종의 확장된 성전이었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도시였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전인데 그 주변에 작은 공동체가 있는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대 세계의 사원이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여러분의 신이 어떤 신이든지 여러분은 그 신을 예배하고자 할 것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신은 창조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훼입니다. 따라서 성전은 전체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의 한 부분으로서 신성한 건물이 아닙니다. 성전은 고대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희생제사를 드리고 그 희생제사의 의미는 신에게 대한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에게 무언가를 바칠 때 그것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예배의 자리였고 공동체의 자리였는데 그 의미는, ‘우리는 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백성입니다.’ 하는 뜻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 세계에서 성전의 일반적인 의미였습니다. 확실히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생각은 이스라엘 전통 중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원래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시가 없었고 그들은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주님을 위해 특정한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가 가는 곳마다 그곳을 거룩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나 이 새로운 곳으로 오라고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삶의 핵심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창세기 12장에 이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것은, 피조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그 중심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상은 진정한 인간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임무는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세상의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있는 것을 사용하여 무엇을 하고자 했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으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제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그러면, ‘그걸로 너희는 끝장이다!’라고 말씀하실까요? 노아와 홍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실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게 신실하게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와 실패와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심판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지만 하나님은 그 심판을 통해 그리고 그 심판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고대 근동 세계를 연구한 학자들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가 ‘성전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이 작은방주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작은 선물은 물 위에 떠 있는데 사람들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임무를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탑 이후에 다른 이야기를 만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이 나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야곱이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아 도망갈 때 갑자기 또 다른 성전 형상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야곱의 사다리가 있고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야곱의 꿈의 하나님께서는 이 사닥다리를 보시며 그가 이 땅으로 돌아와서 이곳에서 장차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그에게 약속하십니다.
이 성전의 이미지는 계속하여 앞을 가리킵니다. 창세기를 읽을 때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면 이 때문에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거하실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매우 심각한 역기능적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창세기를 읽으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그들을 구출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들을 시내산으로 데려가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양이 갖추어지고 준비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절정에서 나타난 모습은 실제로 창세기 1장의 시작 부분 바로 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의 절정은 성막의 건축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하나의 작은 모델로서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새로운 창조를 보여줍니다. 성막의 장막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창조입니다.
성막의 기능은 바로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그 모임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백성으로서 모든 일을 감당할 힘을 얻게 됩니다. 물론 그것 역시 이스라엘이 자기 길을 가면서 실수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 자신이 성막에서 그의 백성 가운데 살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주요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들려져서 하나님께로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참 되신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성소, 즉 아직은 성막으로서 이동용 천막인데요, 그 성소가 그들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 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는데 그것은 십계명이 들어 있는 상자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물건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계약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의 첫 부분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 때 누군가는 기발한 꾀를 냈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가져와 전투에 가져가면 승리할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블레셋에게 패하고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의 임재가 어떤 역사를 일으켰는가 하는 점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법궤가 그릇되게 사용되고 오해되고 비록 값싼 속임수로 취급될 때에도 그것은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블레셋 신들과 블레셋 백성들이 그 앞에 절을 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법궤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법궤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궤를 모실 성전인 집을 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 성막이 있었던 것을 대체하여 이제는 영구적인 자리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좋은 일이기도 하고 나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한 곳에 두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전적으로 좋은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윗은 성전을 계획하고 솔로몬이 그것을 건축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성전에 대한 이상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즉 왕은 성전을 건축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오용할 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에 나오는 경고는 아래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성전이 있도다!’ 그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떤 삶을 살든지 간에, 또는 거룩함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든지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주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성전을 부수고 멸망하실 것인지 그리고 바벨론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파멸시키도록 허락하실 것인지에 대해 들려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땅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 포로기는 이스라엘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약 70년 정도였고요, 구약성경 전체 이야기 중에서 그 시대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난해한 점은 ‘이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고 그 언약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직접 만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포로 기간 동안 여러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다시 오셔서 성전을 재건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에스겔서에는 영광스러운 그림이 묘사되는데 그것은 성전이 재건되고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거기 거하시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광야의 성막의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신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 40장은 마침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오랜 세월 동안 즉, 일부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예수 시대까지 아무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하셨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특정한 방식으로 생활하시고 특정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보여주신 사실은, 자신이 육체로 오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마태가 말했듯이 임마누엘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그 장소는 그와 성전이 함께 있을 만큼 충분히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책망하셨는데 그 이유는 유대 민족이 참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는데 한번 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네가 내 왕국 예언에서 선포한 평화의 길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희가 그것을 거부했으니 성전이 헐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너희도 그것과 함께 망할 것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에스겔, 이사야, 말라기의 예언에서와 같이, 예수께서 성전에 오셔서 거기서 사역을 하시고 특히 그의 새로운 성전 운동을 시작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이 주제는 우리가 나중에 다시 다루겠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성전으로 세워집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이 땅에 거하실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습니다: ‘이제 너희가 살아 있는 성전이다. 이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너희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성전으로서 교회라는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단지 잡다한 예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 주제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 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과 지혜가 세상에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함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신 목적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광야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성막에 임재하심으로 행하시던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요한계시록 끝 부분에 나오는 새 창조의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 자신도 계시고 어린양이신 예수님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미래를 가리키는 이정표로서 성전이 하던 역할이 이제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위대한 성경적 주제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주는 방식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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