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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산의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일월봉에 이른다. 다시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한 줄기가 뻗어 내려가 천마봉에 이르고, 또 다른 한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내려가 돌고개에 이른다. 그 사이에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일월봉 아래쪽에 팔방동, 내곡동, 돌고개 등이 있고, 이 마을의 중간 지점에 소고동, 화촌동 등이 있다. 이 마을의 서쪽에는 요고천, 동쪽에는 망덕천(새청걸), 그 가운데에 가남천이 각각 청도천으로 흘러 간다. 요고천 건너편에는 호암산의 줄기가 남으로 뻗어 내려와 국골산, 아미산에 이른다. 이 산 아래쪽에 덕법동이 있고, 서쪽으로 열려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팔방저수지의 가운데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은 옛 밀양부(密陽府) 하서면(下西面)의 영역이었고, 서쪽은 옛 청도군(淸道郡) 외서면(外西面)의 영역이었다.
1912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소고동과 밀양부 하서면의 덕법, 팔방, 내곡동 등을 합쳐서 고법리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지금은 소고, 내곡, 팔방, 화촌, 덕법동, 돌고개 등 6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리동은 소고와 덕법으로 나눈다. 동쪽으로는 명방현의 능선을 사이에 두고, 부북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으로는 인산리, 북쪽으로는 요고리, 남쪽으로는 무안면 동산리와 각각 인접해 있다. 유적지로는 덕법동 고분군이 있다.
(1) 소고동(所古洞, 덕문동-德門洞, 소고야-素古野, 소고율-所古栗, 화동-華洞, 명화동-明華洞)
고법리의 본동이다. 이곳은 원래 청도군 외서면의 영역이었다. 이 마을은 일찍부터 더문동(德門洞)으로 부르다가, 다시 소고야로 불리어졌다. 화동이라고 한 것은 華嶽山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1825년경에는 안곡과 합쳐서 화안리로 불리었다. 지금은 바아밤, 밝은밤이(명화동-明華洞), 소고율 등으로 부른다. 이 마을은 한가운데에 있는 길을 중심으로 웃마, 아랫마로 나눈다. 웃마는 임진왜란 후에 청도김씨 일파가 당숲동에서 이 마을에 이거해 왔고, 아래마에는 밀성박씨의 여러 파가 입촌하여 지금까지 각각 세거해 오고 있다. 오늘날은 여러 성씨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재사로는 중추(中樞) 김만전(金萬全)의 묘하재숙소(墓下齋宿所)인 장남재(莊南齋)와 청명재(淸明齋) 박인구(朴仁垢)의 강학소 겸 재사인 추모재(追慕齋), 진사(進士) 박문정의 강학소인 달과정(達科亭) 등이 각각 보존되고 있다.
■ 화짓대껄(화주대지-華柱坮址)
소고동의 마을 앞에 있다. 이곳에는 진사 박문정이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것을 기념하여 화주대를 세웠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선돌바우
소고동의 마을 앞에 있다. 옛날 팔방동에 살았던 박씨 일족 중에 장사가 있어서 하루 만에 새들보를 만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기념으로 선돌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주위에 있는 들을 선돌배기라고 한다.
■ 팽징잇골(평전곡-平田谷)
화동국민학교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혹은 바깥평징이, 배팽징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민가가 여러 집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 가남정들(가남정평-柯楠亭坪)
삼정자들의 아래쪽에 있는 들이며, 가남정숲에 달린 들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고래들(고래평-古來坪)
화동저수지의 아래쪽에 있는 모든 들을 가리킨다. 이곳은 굼논으로서 주로 1모작답이라고 붙여진 지명이다.
■ 메기배미
고래들의 중간 지점에 있는 논이다. 이곳에는 모든 들의 물이 모여 들어서 메기가 많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 그 흔적이 없어졌다.
■ 새들(신평-新坪)
소고동의 마을 앞들이다. 원래는 밭이었는데, 밭을 논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새보
살구정보의 위쪽에 있는 보이다. 새들에 10정보 정도 물을 댄다.
■ 석질들(석질평-石窒坪)
화동초등학교의 뒷쪽에 있는 들이다. 이곳에 돌이 많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옛날에는 닥밭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수안역(水安驛)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며, 또 역에서 사용하던 샘도 남아 있다. 이 역을 석질역(石窒驛), 또는 수안역(水安驛)으로 불리어 지다가 후에 무안으로 옮겨 갔다고 전한다.
(2) 팔방동(八榜洞, 망덕동-望德洞, 명방동-明坊洞)
소고동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옛 밀양부 하서면의 영역이었다. 이 마을은 화악산의 이명인 둔덕산의 '덕'자를 따서 망덕동(望德洞)이라고 하다가, 뒤에는 명방동(明坊洞)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다시 팔방동(八榜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마을도 소고동과 함께 밀성박씨의 여러 파가 각각 입촌하여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재사로는 송은(松隱) 박익(朴翊) 선생의 묘하 재숙소인 보본재(報本齋)와 모와(慕窩) 박주(朴胄)를 추모하기 위한 모와재(慕窩齋), 그리고 성암(醒庵) 박문하(朴文夏)를 추모하기 위한 모성재(慕醒齋) 등이 각각 보존되고 있다.
■ 발음리(發音里)
팔방동의 마을회관에서 내곡동으로 가는 사이에 있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발음산의 기슭에 있었다. 화악산 형제봉의 아래쪽에 있어서 발음(發音)을 받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에는 여러 집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다.
■ 발음산(發音山)
발음리의 뒷산이다. 화악산 형제봉에서 뻗쳐 내려와 있다.
■ 산넘
팔방동의 동쪽에 있는 산이다.
■ 형제봉(兄弟峰, 일월봉-日月峰)
팔방동의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이 봉은 화악산에서 뻗쳐 내려와 두개의 봉우리가 형제처럼 나란히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월봉(日月峰)이라고 한 것은 해와 달이 뜨는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또 이곳은 부북면과 경계를 이룬다.
■ 굼방웃골
재궁(齋宮) 뒷편 저수지 위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구멍바우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당산등(堂山嶝)
팔방동 화동저수지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에 당산나무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뒷골(道谷)
팔방동 화동저수지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도 마을이 있었는데, 밀성박씨, 창녕성씨, 의흥예씨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20-30년 전에 마을이 없어졌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 방미등(朴墓嶝)
팔방동 재궁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송은(松隱) 박익(朴翊)의 묘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팔방골(八榜谷)
팔방동 동쪽에 있는 산골짜기이다.
■ 팔방재(八榜峴, 明坊峴)
팔방동에서 부북면 대항리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일명 명방현(明坊峴), 빨빵재라고 한다.
■ 진등(長嶝)
팔방동의 제궁 앞에 길게 내려온 산등성이이다. 등이 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한잿골
팔방동 북쪽 박묘등(朴墓嶝)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재궁(齋宮)
송은 박익의 재실이 있는 부근을 가리킨다.
■ 팔방들(八榜坪)
팔방재 아래쪽에 있는 들이다.
■ 약방걸
팔방동 동쪽 재궁 밑에 있는 들이다. 이곳에는 옛날에 약방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재궁들(齋宮坪)
팔방동 상소류지 밑에 있는 들이다.
■ 망덕걸
팔방동의 상소류지에서 내려 오는 하천과 중소류지에서 내려 오는 하천이 마주치는 중간 지점이다. 이곳에는 옛날 망덕동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고, 팔방동에 다 포함되었다. 또 모와재(慕窩齋)가 이곳에 있다.
(3) 내곡동(內谷洞, 德山, 華陽洞里)
소고동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도 옛 밀양부 하서면의 영역이었다. 이 마을은 고법리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안 내(內) 자를 써서 내곡(內谷)이라고 한다. 덕산(德山)이라고 한 것은 화악산의 이명인 둔덕산(屯德山)의 '德' 자를 따서 붙여진 지명이다. 화양동리(華陽洞里)라고 한 것은 이 마을이 화악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1470년경에 광산김씨 일파가 입촌하여 계속 세거해 왔으며, 또 밀양 변씨도 입촌하여 세거해 왔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없고, 여러 성씨가 들어와 함께 살고 있다. 재사로는 죽헌(竹軒) 김문호(金文浩)의 묘하재숙소인 광산김씨의 치산재(雉山齋)와 호군(護軍) 이선지(李先智)의 묘하재숙소인 함평 이씨의 전모재(展慕齋)도 각각 보존되고 있다.
■ 골안(곡내-谷內)
내곡저수지 위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또 이곳에 굴바우가 있다.
■ 꽁어등(치등-雉嶝)
내곡동 골안의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산세가 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대밭골
내곡동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대나무가 많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반등(潘嶝)
내곡동의 서남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에 거제 반씨의 묘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뒷들
내곡저수지 아래쪽에 있는 들이다. 마을 뒤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삼정자들(三亭子坪)
내곡동의 아래쪽 가남정들 위에 있는 들이다. 이곳에 정자나무가 세 그루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4) 덕법동(德法洞, 덕늘)
소고동의 서쪽 아미산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도 옛 밀양부 하서면의 영역이었다. 옛 이름은 덕법리였다. 일명 덕늘이라고 한다. 일찌기 안동권씨가 입촌하여 세거해 왔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없고, 300여년 전에 아산장씨 일파가 입촌하여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오늘날은 여러 성씨가 들어와 함께 살고 있다. 재사로는 시암(柴岩) 장형(蔣珩)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한 자암재(紫巖齋)가 보존되고 있다.
■ 국골산
덕법동의 뒷산으로서 요고리 평전동 앞 도랑 건너까지 해당된다. 산세가 9개의 줄기로 내려 왔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덕법동의 동산으로서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다.
■ 바래미산
덕법동 서쪽에 있는 산이다. 인산리와 경계를 이룬다. 이 산과 바래미들, 그리고 지수동 앞까지 고분군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그동안 무분별한 도굴로 인하여 거의 파괴 상태에 있다. 주위에서 수집된 토기조각으로 봐서 구기리, 소태리, 두곡리 등지의 고분군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 덤벽산(麒麟山, 아미산-峨眉山)
덕법리 서북쪽에 있는 산이다. 일명 기린산, 아미산이라고 한다.
■ 바래미들
덕법리 서쪽에 있는 들이다. 바래미산 밑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말등들
덕법동 남쪽에 있는 들이다. 바래미들과 접해 있다.
■ 말등보
덕법교 윗쪽에 있는 보이다. 말등들에 물을 댄다.
■ 새봇들
덕법동 남쪽 말등들의 아래쪽에 있는 들이다.
(5) 화촌동(華村洞, 하촌-下村)
소고동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옛 청도군 외서면의 영역이었으며, 소고동에 예속되었다. 소고동의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하촌 혹은 아랫마라고 했다. 1940년에 덕법동에 예속되었다. 지금은 빛날 화(華) 자를 써서 화촌동(華村洞)이라고 한다.
■ 섶들산
천마봉의 아래쪽 섶들 옆에 있는 산이다.
■ 천마봉(天馬峰)
고법리 남쪽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이곳에 층층암이 있다.
■ 까마귀바우
무안면 동산리에서 고법리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산 밑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 모양이 까마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살구정들(행정평-杏亭坪)
화촌동 뒤쪽에 있는 들이다. 이곳에 살구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살구정보
새보의 아래쪽에 있으며, 살구정들에 물을 댄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섶들
화촌동 동쪽에 있는 들이다. 산 밑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흰죽배미
섶들 안에 있는 논이다. 약 130년(병자년) 전에 흉년이 들어서 흰죽 한 그릇을 주고 논을 얻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경지 정리가 되어 그 흔적이 없어졌다.
■ 오연천(烏淵川)
고법리 마을 입구 까마귀바우의 아래쪽에 있는 河川을 가리킨다.
(6) 돌고개
소고동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고법리에서 요고리 대촌동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옛 청도군 외서면의 영역이었다. 옛날에는 밀양에서 요진재로 해서 청도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 주막집이 여러 집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 석질보(石窒洑)
요고리 평전교 부근에 있으며, 석질들에 15정보 정도 물을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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