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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16-20절
지혜롭고 순결하라
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역이 한시적인 것을 감안하셔서 예수님은 금이나 은, 동을 가지고 가지 말라, 배낭이나 두 벌 옷,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시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한시적인만큼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하기 때문에 무거운 짐은 복음 사역에 짐만 될 뿐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더라도 너희를 대접하는 합당한 자들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이 집중하고,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 먹고 마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가는 곳마다 평안을 빌어주는 것, 그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안하기를 빌어주는 것, 바로 복음을 증거 하는 그 일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물론 평안을 빌어준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이 복된 소식을 누리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안을 빌어줄 때 그 평안을 고스란히 받아 머물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본문은 한편으로는 지금 그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대인, 그것도 한시적으로 갔다가 오게 되는 그 사역 안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내용은 좀 더 장래에 있을 일, 다시 말해 어떤 면에서는 사도행전에서 보게 되는 그런 내용들을 미리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자체에서는 지난 시간까지 본 말씀과 오늘 보게 되는 말씀을 연결해서 연속적인 말씀처럼 보이도록 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어느 정도 차이를 두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까지의 내용을 마가복음에서는 마가복음 6장에서 기록하고 있다면(막6:7-13),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3장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막13:9-13). 누가복음 역시 지난주까지의 말씀은 누가복음 9장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면(눅9:1-6), 오늘 본문의 경우 누가복음 21장에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눅21:12-17).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이 유대인이요, 한시적으로 갔다 오게 되는 그런 사역 안에서만 생각해야 될 본문인가 했을 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를 보면 사도들이 한시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박해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복음에 보면 12사도를 보내신 이후 70인을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9장 마지막 부분이나 지난주까지 봤던 10장의 내용으로 동일하게 보내는 사건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 이하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17-20) 칠입 인의 보고가 이러하다면 아마도 앞서 보낸 사도들의 보고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직까지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경우 앞선 본문과 연관해서도 말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에 있을 일에 대한 내용을 미리 말씀해 주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틀리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하여 미리 말씀을 하시는가? 오늘 본문은 결국 복음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심지어 다음주에 보게 될 가족으로부터도 등을 지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일에 대하여 미리 마음을 붙잡도록 하기 위해서, 달리 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갑작스러운 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기록된 위치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데, 그리스도를 세상이 받지 못하는 만큼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그렇게 따르는 너희를 세상은 결코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을 통해서는 지난 시간까지 본 말씀과 오늘 보게 되는 말씀을 연속적으로 놓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평안을 거부하는 자들이 사도들에 대하여 어떤 반응까지 하게 되느냐 그런 내용을 염두 해 둘 수 있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이해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우선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시면서 천국 복음 전파를 위하여 보내시는 것이 마치 무엇과도 같은가 하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을 누구로 비유하느냐 하면 양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보냈을 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 단순히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을 지금 누구로 비유하느냐 하면 이리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물론 복음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자들 뿐 아니라 조용히 거부하는 사람들 역시 중생하기 이전에는 본성적으로 이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그들 가운데서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자들, 그래서 방금 읽은 말씀처럼 공회에 넘겨주는 자들, 회당에서 채찍질 하는 자들, 총독과 임금 앞에 끌고 가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는 말은 사도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사방팔방으로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계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고, 그렇게 복음을 반대할 때 수많은 난관과 장애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리고 한시적으로 복음 사역에 임하고 있기 때문에 앞서 본 70인의 전도자들의 보고처럼 마치 그들이 사탄을 결박하고 승리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사역이 아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소위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복음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란 믿든지, 아니면 믿지 않든지 두 방향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분명 불신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들만을 위한 죽으심이긴 하지만 누가 선택된 백성인지, 누가 선택받지 못한 백성인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이 앞서 믿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증인으로서 저들 앞에 서게 될 때 그냥 너와 내 삶은 다르다고만 말하면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해 강하게 거부하기도 하고, 도리어 우리의 믿음을 깨뜨리려고 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소위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될 때 그 집 전체가 흔들리는 듯 한 일을 겪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오늘날 이슬람권에서 선교를 하시는 분들이나 그 외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 지역에서는 지금도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하여 생명을 앗아가는 일도 있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혹 가정이나 사회, 그리고 나라에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모든 성도와 관련하여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우리를 반길 수 없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원리와 우리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 즉 오늘 본문에서처럼 사도들을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 하고, 총독과 임금 앞에 서게 하는 일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 그리고 사람의 본성으로 보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 그러면 나도 그 사람을 미워해야지 본성에 맞습니다. 누군가 나를 욕했다? 그러면 더 많은 욕을 해야 속이 풀리는 자들입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세 대를 떼려줘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속이 풀릴 때까지 폭력을 행사해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즘 보면 감정조절장애라고 해서 기분이 나쁜 것을 조절하지 못하고 마치 그것이 폭발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일들이 많다는 소식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 시대만의 문제인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그의 아내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23-24)
물론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는 비폭력주의를 외치기도 하고, 도덕적인 면에서 선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말한다면 그들의 모든 선 역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의 한 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그들이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선에 아무런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것이냐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금의 흠, 조금의 점도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을 읽어드리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따라서 인간이란 존재의 타락한 본성을 생각하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실 때는 뱀이나 비둘기라는 동물의 어떤 특성을 밝히지 않더라도 주께서 친히 가르쳐 주고 계신 것처럼 세상의 방식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똑같은 세상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자가 아니란 것을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혹 저들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너희를 잡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마치 죄인처럼 취급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들 앞에서 그것을 되갚는 자로 서 있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지혜롭고 순결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혜를 통하여 악이 아닌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죄의 방향이 아닌 순결함으로 그들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10장 1절에서 그리고 8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원수를 원수로 갚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자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방식은 은혜를 먼저 받은 자들로서 그 은혜를 주는 자로서 지혜와 순결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신 것은 그들이 우쭐대거나 그것 자체를 자랑하는 자로 있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 힘을 삼도록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방식,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사도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언제나 지혜와 순결함, 악이 아닌 선이요 죄가 아닌 거룩의 방식인 것입니다. 당연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고 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봤지만 오늘 본문 앞에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빌었을 때 그것을 받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장’ 저들에게 저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그런 내용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과는 더 이상 관계가 없다는 의미요, 그들이 그 상태로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된다면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쉽다고 말할 정도로 저들의 죄에 대해 핑계할 수 없음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심각한 죄가 없다는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을 무엇에 비유하느냐? 양으로 비유합니다. 그리고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리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이리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리 앞의 양일뿐입니다. 이리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손톱을 세우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이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손톱을 세운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대항하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앞에서 그리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면 세상적인 방식, 혹은 우리 본성에 걸맞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걸 버리셔야 합니다. 제가 서울 지역에서 사역할 때 소위 노방전도를 하시는 한분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분의 행동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노방전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종종 생각이 나곤 합니다. 아마 오후 5시 정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장소가 신도림역입니다. 신도림역은 출퇴근 시간에 많이 붐비는 곳인데, 그곳에서 전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천당 불신지옥” 말도 얼마나 빠르든지 입에서 쉴 세 없이 반복적으로 예수 믿어야 한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많이 붐비다보니 그중에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어떤 분이 시끄럽다고, 다른 곳에 가서 전도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전도하시던 분이 어떻게 반응했느냐? 지금도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음성을 높이면서 저주라고 하기에는 좀 과할 수 있는 표현을 써가면서 덩달아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다할 소리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고, 당시 교회 사역을 하고 있던 저 역시도 참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원수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함에 있어, 아니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 우리가 신자라는 것은 원수를 원수로, 주먹에 대하여 주먹으로, 욕을 욕으로, 짜증을 짜증으로 갚는 자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양이 아니라 이리입니다. 이빨을 드러내고, 손톱을 세우는 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양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들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자처럼 있을 수밖에 없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 앞에 갈 때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느냐? 지혜를 가지고 나가고, 순결을 가지고 나가는 자로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뭐라고 가르치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에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마5:38-42). 여기서 끝인가? 그 이하의 말씀을 보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까지 말씀하셨던 겁니다(마5:43-44). 오늘 본문에서처럼 공회에 넘겨주는 일이 있고, 회당에서 채찍질하는 일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나온다고 해서 칼로 방어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저들 앞에 서야 하는 것은 언제나 지혜요, 순결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 앞에서, 그리고 불신자들 앞에서 가져야 할 삶의 자세인 겁니다.
그런데 17절을 다시 보시면 이렇게 사도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낼 때 “사람들을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조심하라는 것이요, 때로는 그런 그들 앞에서 피하기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바울을 보면 그가 회심하고 난 뒤 다메섹에서 전도를 하다가 그곳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광주리를 성벽으로 내려 피하기도 했던 적이 있습니다(행9:25). 그러나 무조건 피하는 게 다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심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행하지 못하는 자로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후 말씀을 보게 되면 그들이 너희를 붙잡을 것이라 말하십니다.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삼가라” 말씀하시는 것은 무조건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역경이 일어나더라도 그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기 되는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는 것 자체가 인간적인 생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그런 역사로서 있게 하기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에 대해 미리 마음을 하나님의 섭리에 맞춰 생각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시는가? 18절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그들이 잡히고, 또 채찍도 맞고, 마치 죄인 취급을 받음으로 인하여 그들을 잡아간 자, 그리고 채찍으로 때린 자, 나아가 죄인 취급을 하는 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니 좀 더 넓게는 이 일을 통해 어디까지 증거가 되게 하시느냐? 이방인들에게까지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 말씀하십니다. 이게 놀라운 겁니다. 잡혀서 맞고,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뭘 드러내고 계시는가 하면 그렇게 하는 자들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인 것입니다. 때문에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에 하나님만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박해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 박해를 피해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하니까? 세상 앞에서 도망한 것이 오히려 더 넓은 지역으로 복음 증거의 기회가 되었다고 말씀해 줍니다(행8:4).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경우 대부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 거기서 복음이 끝났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죽음으로 끝나도록 하지 않으시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알의 밀로서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처럼(요12:24), 사도들에게도 그런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사도들의 죽음의 성격은 분명 다른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그렇게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참된 승리는 어디에 있느냐?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승리를 쥐는 데 있지 않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과 관련하여 말씀드린다면 금, 은, 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우리의 승리는 언제나 지혜와 순결입니다. 악이 아닌 선의 방식이요, 죄가 아닌 거룩의 방식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저들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혹 오른뺨을 때리면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때문에 그렇게 맞고 있다면, 그리고 진실로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자로 있다면 그것이 곧 그들에게, 또한 다른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기회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오늘날 실제로 뺨을 때리는 자는 없을지라도 복음을 거부하되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대하여 비난 일색인 사람으로 인하여 마음이 좋지 못할 때 그때라도 우리는 복을 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서 12절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을 보시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주님께서 사도들을 세워 보내실 때 분명 어려움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지만 그 일은 앞서 본 것처럼 복음의 증거가 되기 위한 역사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를 따라서는 지혜와 순결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면 힘, 칼이면 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사도들 역시 처음에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곳에서 복음을 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이렇게 물었던 자들이었습니다.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의 경우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기도 했습니다(요18:10). 오늘 본문으로 생각하자면 그들은 지혜롭지도, 순결하지도 못한 자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습니다. 칼을 들이대면 칼로,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주로 반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예수님께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사도행전에서의 그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담이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9절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너희는 너희 스스로가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너희 스스로가 하는 일은 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 일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를 주관하기만 한다면 원수를 원수로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라 할지라도 복을 빌어주며, 그들에게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자가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한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만을 따르기도 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잡혔을 때 뿔뿔이 흩어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다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양으로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양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세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스스로 소리를 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인간의 의지란 자기 스스로 결심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를 위해 열심을 내 보겠다.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바쳐 보겠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결심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란 것입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시지만 말씀하신 자가 주지 않고는 결코 가질 수 없고,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사도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는가? 성령이 아니고서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그들을 주관하셔야지 만 증인의 삶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우리 역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누가 우리를 주관하셔야 하느냐?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누구시냐?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 없음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힘이 되는 것, 소위 의식주와 같은 것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그리고 그분이 사용하시는 말씀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칼빈의 경우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보지 말고 하늘의 은혜만 신뢰하라고 명령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다 같은 의미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지혜롭고 순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힘으로 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지혜를 가지고 갈 수 없고, 나 스스로의 순결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천국 복음은 오로지 주께서 주시는 지혜와 순결로서만 보장이 됩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내 것을 끄집어 내지 말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것을 끄집어내면 이미 내가 주님 앞에서 양이 아닌 자로 있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주님 앞에 양이어야 합니다. 양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자, 목자가 있어야만 제대로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자!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염려를 합니까? 왜 우리가 근심을 합니까? 내가 내 스스로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방식은 결코 그렇게 해서 살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리는 주를 의지해야 하고,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증인으로서의 삶, 우리 지혜로,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고전1:21). 달리 말하면 우리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증인으로서의 삶을 조금이나마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제나 기도하는 자로 있어야 함을 아셔야 합니다.
부디 주께서 주시는 지혜와 순결로서 이 세상 앞에 서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것만을 구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사도들을 저들과 이방인들의 증인으로 삼으셨듯이 우리 역시 부족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